139화 : 5장 때로는 자존심이 전부일 수도 있다 (1)
흔히들 장강을 중원의 젖줄이라고 부른다· 중원을 가로지르며 도도히 흐르는 이 거대한 강은 생명의 원천이며 문명의 발원지기도 했다· 때로는 홍수를 일으켜 하류의 모든 것을 휩쓸어 버리기도 하지만 수많은 사람이 장강에 의지해 살아가고 있다·
특히 중원을 동서로 가로지르기에 많은 문물이 장강을 통해 오갔고 그만큼 많은 사람이 수로를 이용해 이동했다· 거대한 운마도강선과 미곡선 여객선이 장강을 이용해 엄청난 양의 물자와 사람을 수송했다·
진무원 일행은 장강 위를 운행하는 거대한 운마도강선에 몸을 실었다· 장강 본류를 운행하기 때문에 운마도강선은 진무원이 이제껏 타본 그 어떤 배보다 크고 웅장했다· 또 그만큼 많은 사람을 태우고 있었다·
운마도강선은 장강을 따라 호북성의 성도인 무한까지 운행했다· 무한에서 운중천이 있는 한천까지는 불과 반나절 거리이다· 그러니까 운마도강선만 타고 있으면 운중천의 앞마당까지 힘들이지 않고 도착할 수 있는 것이다·
진무원의 눈빛이 일렁였다·
장강이라는 말만 들었지 일개 강이 이렇게 거대할 줄은 정말 몰랐다· 모르고 배를 탔다면 바다로 알았을지도 모르겠다·
하진월이 그런 진무원을 보며 피식 웃었다·
“놀랐느냐?”
“예·”
진무원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하진월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왜 놀랍지 않겠느냐? 장강을 사이에 두고 중원이 강남과 강북으로 나뉘고 문화와 삶의 방식 말투조차 확연하게 달라진다· 장강은 단순한 강이 아니다· 오죽하면 장강을 지배하는 자가 중원을 지배한다는 말이 있겠느냐? 운중천이 장강의 지척에 자리를 잡은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야·”
운중천이 지척에 있는 호북성 무한은 중원의 모든 문물이 교차하는 곳이다· 문물의 발달이 여타 성도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대단했기에 이곳에 사는 사람들의 자부심도 남달랐다·
운중천은 그런 사람들의 의식에도 남다른 곳으로 각인되어 있었다· 무한과 지척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다른 문파들과 다르다는 차별 점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결국 운중천이 무한 지척에 자리를 잡은 이면에는 고도의 계산과 정치적인 이해득실이 깔려 있는 셈이지·”
“그렇군요·”
“이제부터 정신 바짝 차려야 할 게다· 이대로 장강을 타고 호북성으로 들어가면 모든 것이 운중천을 중심으로 돌아가게 될 거야· 지나가는 사람 상점의 상인 거리에서 빌어먹는 걸인들까지 운중천의 눈과 귀가 될 테니까· 꼬투리를 잡히지 않으려면 사소한 행동 하나까지도 조심해야 할 것이다·”
하진월의 음성에서 긴장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만사가 태평한 하진월이 이 정도까지 긴장하는 모습은 처음 봤기에 생소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가 느끼는 감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호북성은 적진이나 마찬가지다· 단 한 번의 판단 실수가 치명적인 결과로 이어질 수 있을 정도로 위험한 곳이다· 이제부터는 아무리 조심해도 결코 과하지 않았다·
‘운중천·’
그 이름이 거대한 중압감으로 가슴을 짓눌러 왔다· 하지만 진무원은 이내 상념을 날려 버렸다· 어차피 지금부터는 걱정한다고 해결되는 일이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평상심과 부동심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냉철하게 판단할 수 있게 차가운 이성을 유지하는 것이 관건이었다·
그런 진무원을 보면서 하진월이 미소를 지었다· 그의 예상대로이다· 진무원도 다른 이들처럼 부담감을 느끼고 중압감에 힘들어도 한다· 하지만 그는 다른 그 어떤 이보다 평정심을 회복하는 게 빨랐다·
그것은 굉장히 큰 장점이었다· 하진월은 오히려 진무원의 무력보다 평정심을 더 크게 생각했다·
그그극!
그때 배가 중간 기착지에 도착했는지 접안하는 것이 느껴졌다· 선착장에 선수가 닿으면서 둔중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배가 정박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많은 이가 내렸다· 그리고 내린 사람만큼 또 많은 사람이 배에 올라탔다·
진무원과 하진월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배에 새로이 올라탄 사람 중에 그들이 아는 이들도 섞여 있었기 때문이다·
‘좌문호 흑백쌍웅·’
그들은 먼젓번 선착장에서 내렸다· 그 후 모습이 보이지 않기에 아주 떠난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들의 뒤를 각종 병장기로 중무장한 정체불명의 무인이 따르고 있다·
진무원의 시선을 느꼈는지 좌문호가 고개를 들어 바라봤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순간 중무장한 자의 눈동자에 이채가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그는 잠시 동안 진무원을 바라보다가 좌문호를 따라 배 위로 올라왔다·
각종 병기로 중무장한 자는 바로 현공휘였다· 현공휘 특유의 존재감에 배에 있던 사람들이 분분히 길을 비켜줬다·
좌문호의 앞으로 길이 열리고 그 끝에 남수련과 당미려가 있다· 좌문호가 미소를 지으며 그녀들에게 다가갔다·
“남 소저 우리 또 만났구려·”
“그러네요 좌 소협·”
“이거 보통 인연이 아닌 것 같소만·”
“우연이 겹치는 법도 있죠·”
“글쎄····”
좌문호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말끝을 흐렸다· 그의 시선이 남수련의 곁에 있는 당미려에게 향했다·
“우리 저번에도 본 적이 있는 것 같습니다· 전 삼환검문의 좌문호라고 합니다·”
좌문호의 소개에 당미려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상대가 이렇게 정중하게 나오는데 인사를 안 할 수도 없었다·
그녀가 포권을 취했다·
“당문의 당미려라고 해요 좌 소협·”
“사천일화?”
좌문호의 얼굴에 언뜻 놀람의 빛이 떠올랐다·
‘어쩐지 범상치 않은 기품을 지녔다 했더니 당문의 꽃이었군·’
당미려라면 창룡회에 들어올 자격이 충분했다·
“저번에는 몰라 봬서 죄송했소이다 당 소저·”
“아니에요·”
“저에게 먼젓번의 무례를 사죄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겠소이까?”
“저한테 사죄하실 게 없어요· 그럴 만한 일도 없었으니까요·”
담담한 거절이다· 그에 좌문호의 눈에 언뜻 노기가 떠올랐다·
‘이년이나 저년이나 사람 무시하는 것은 똑같구나·’
그렇다고 표를 낼 수도 없었다·
어쨌거나 두 사람 모두 강호의 명문을 배경으로 두고 있다· 자칫 그들과 마찰을 일으켰다가는 무산파와 당문을 적으로 돌릴 수도 있었다·
“그럼 혹시 이 배에 다른 당문분도 타고 계시오?”
“숙부님이 타고 계세요·”
“숙부?”
“당 기 자 문 자를 쓰십니다·”
“만독각주?”
좌문호는 이전과는 비할 수 없을 정도로 경악했다·
당문의 만독각주가 지니는 중량감과 위치는 그야말로 엄청난 것이다· 설마하니 남수련 주위에 이런 어마어마한 이들이 포진하고 있을 줄은 미처 예상치 못했다·
“당 대협께서는 어디에 계시오?”
“선실에 계세요·”
“안내해 주시겠소?”
“지금 당장은 하시는 일이 있어서 누구도 방해 말라고 하셨어요· 나오시면 좌 소협께서 찾아오셨다고 전해드릴게요·”
“알겠소·”
당미려의 대답에 좌문호는 한발 물러섰다· 저자세로 돌아선 것이다· 흑백쌍웅은 그런 좌문호를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봤다·
‘사천성에 처박혀 나오지도 않는 당문이 뭐가 두렵다고 저러는 것이지?’
그들은 천하에 대한 영향력으로 따지자면 창룡회가 뒤질 것이 전혀 없다고 생각했다· 당문이 은둔한 거인이라면 창룡회는 뜨는 태양이었다· 하등 밀릴 것도 위축될 이유도 없었다·
그때였다· 이제껏 뒤쪽에 말없이 서 있던 현공휘가 어슬렁거리며 앞으로 나왔다·
그의 눈은 마치 먹이를 노리는 맹수처럼 살기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발산되는 그의 살기에 남수련과 당미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가 남수련의 전신을 한 번 훑어보더니 입을 열었다·
“어이 계집·”
“····”
예상하지 못한 현공휘의 거친 말투에 모두가 말을 잃었다· 심지어는 좌문호와 흑백쌍웅 형제까지도·
남수련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지금 저보고 한 말인가요?”
“그래 너를 보고 한 말이다· 너도 칠소천의 일원이라며?”
“현 공자?”
당황한 좌문호가 현공휘를 불렀다· 그러나 현공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난 현공휘라고 한다· 내 이름 정도는 들어봤겠지?”
남수련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같이 칠소천에 있는 인물로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이름이다· 아마 칠소천에 있는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현공휘의 눈이 광포한 살기로 번들거렸다·
“예전부터 궁금했지· 과연 칠소천으로 불리는 자들이 나와 같은 반열에 설 자격이 있는지·”
“광오하군요·”
“그럴 만한 자격이 충분히 되니까· 그런데 너도 그럴 만한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군·”
“····”
남수련의 눈에 은은한 노기가 떠올랐다· 제아무리 침착한 남수련도 현공휘의 노골적인 도발은 참기 힘들었다·
“예의를 지켜주셨으면 좋겠네요 현 공자·”
“난 존중해 줄 만한 상대에게만 예의를 지켜· 대접받고 싶은가? 그렇다면 스스로를 증명해 봐·”
“현 공자!”
“왜 두렵나?”
남수련이 화를 내려 할 때 불쑥 끼어드는 목소리가 있었다·
“두렵긴 개뿔!”
뜻밖의 목소리에 현공휘가 미간을 찌푸리며 옆을 돌아봤다· 그러자 현공휘보다 더 건들거리는 자세로 서 있는 남자가 보인다· 명류산이었다·
얼굴 가득 시퍼런 멍을 달고 있는 명류산은 눈에 불을 켜고 현공휘를 노려보고 있었다·
“넌 뭐냐?”
“그러는 넌 뭔데?”
명류산의 말투는 현공휘의 불량스러움에 결코 뒤지지 않았다· 그에 현공휘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광투귀라는 별호를 얻은 이후로 누구도 그에게 이렇게 함부로 말한 자가 없었다·
현공휘는 찬찬히 명류산의 전신을 훑어보았다·
엉성한 자세와 보잘것없는 내공· 한마디로 삼류에도 속하지 못하는 무인이었다·
현공휘의 살기 어린 눈빛에 명류산은 움찔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물러설 생각은 없었다· 남수련이 지켜보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씨발! 사내새끼가 쪽팔리게 물러설 수는 없잖아?’
요즘 진무원에게 매일 죽도록 얻어터지고 당기문의 독약을 물처럼 마시다 보니 독기가 한참 오를 대로 오른 명류산이다· 그래서 현공휘의 살기 어린 시선도 견딜 수가 있었다·
“그러니까 넌 뭐냐고? 뭔데 아무 데서나 눈깔에 힘주고 지랄이야?”
“지랄?”
“그래 지랄!”
순간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명류산의 몸이 뒤로 날려갔다· 현공휘가 그의 배에 일격을 날린 것이다· 명류산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난간에 부딪친 후 기절했다·
“명 소협!”
남수련이 급히 명류산을 불렀지만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순간 남수련의 얼굴에 분노의 빛이 떠올랐다·
“현 공자 무공이 약한 자를 상대로 살수를 쓰다니 제정신이 아니군요·”
“흥! 주제도 모르고 날뛰는 자에게 따끔하게 교훈을 내린 것뿐이다·”
“그럼 저도 현 공자에게 교훈을 내려야겠군요·”
“큭!”
순간 현공휘의 코끝에 주름이 잡히며 입꼬리가 치켜 올라갔다· 그가 원하는 대답이었기 때문이다·
“좋다 계집· 나를 따라와라·”
현공휘가 강가로 몸을 날려 순식간에 숲 속으로 사라졌다· 그 뒤를 남수련이 따랐다·
“쯧!”
좌문호가 혀를 찼다·
그의 예상과는 너무나 다른 전개가 펼쳐지고 있었다·
“통제 불가라더니 과연 그렇군·”
그렇다고 이대로 현공휘를 방치할 수도 없었다· 어떻게든 일을 잘 수습해서 운중천으로 데려가야 했다·
좌문호가 흑백쌍웅과 함께 현공휘의 뒤를 따랐다·
그들이 모두 떠난 후 진무원은 혼절한 명류산에게 다가갔다· 당미려가 어느새 명류산의 맥을 짚고 있었다· 명류산의 안색은 파리했지만 다행히 숨은 붙어 있었다·
하진월이 그런 명류산을 보며 혀를 찼다·
“그놈 참 오지랖도 넓다· 똥오줌도 못 가리는 것이 온갖 참견을 다 하고 다니니 험한 꼴을 당할 수밖에·”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의 얼굴에도 은은한 분노의 빛이 떠올라 있었다· 현공휘의 잔혹한 손속이 그를 분노하게 만든 것이다·
그가 진무원을 바라보았다·
“이놈은 몸뚱이가 제법 튼튼하니 무사할 게다·”
“다행이군요·”
“그건 그렇고 그냥 여기 있을 게냐? 따라간 놈들 꼬라지를 보아하니 가만있을 것 같지 않은데·”
“가봐야지요·”
진무원이 미소를 지으며 운마도강선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런 그의 눈엔 은은한 분노의 빛이 떠올라 있었다·
당미려가 진무원의 뒷모습을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