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 4장 원한은 잊는 것이 아니라 가슴에 담아놓는 것이다 (4)
명류산의 전신에 은침이 빼곡히 꽂혀 있다· 그가 혼절하자 당기문이 은침을 이용한 대법을 펼친 것이다·
당기문은 조심스럽게 명류산의 몸에 꽂아놓은 은침들을 회수하기 시작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명류산의 백회혈에 꽂혀 있는 은침을 회수했다·
그러자 명류산의 눈가가 파르르 떨리더니 번쩍 눈을 떴다·
명류산은 잠시 영문을 알지 못해 눈만 끔뻑거렸다· 그러다가 통증이 사라지고 숨을 쉴 만하자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당기문에게 달려들었다·
“이 미친 인간아!”
“그래 어떤가?”
“어때? 이 미친····”
명류산은 금방이라도 주먹을 날릴 듯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의 볼 살은 훌쭉 들어가 있고 눈빛은 퀭하게 죽어 있다· 그 잠깐 사이 명류산은 지옥을 노닐다 온 것 같았다·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견디기 힘든 그런 고통이었다·
“오늘은 처음이니 소량의 독만 사용했네· 앞으로 독의 양을 조금씩 늘릴 걸세·”
“안 해! 나 그딴 독 복용 안 해!”
명류산이 치를 떨었다· 정말 지옥 문턱에 발을 들인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확실히 알게 되었다· 아무리 무공이 강해진다고 하더라도 두 번 다시 그런 경험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 순간 당기문이 미소를 지었고 명류산은 불길한 기운을 느꼈다·
“자네가 복용한 그 독은 말일세 일단 한번 복용하면 계속 복용해야 한다네·”
“무슨?”
“다음 복용한 독이 첫 번째 독을 억누르고 그다음 복용한 독이 두 번째 독을 억누르네”
“말도 안 되는····”
“걱정하지 말게· 내 이미 만반의 준비를 해놓았다네· 자네가 독을 복용하는 것을 중단하는 사태는 절대 일어나지 않을 걸세·”
“그 그럼 언제까지···?”
“당연히 독으로 내력을 완성할 때까지지·”
“아 악마! 이놈도 악마고 저놈도 악마고 다 악마야!”
밤하늘에 명류산의 절규가 울려 퍼졌다·
☆ ☆ ☆
귀주성 북단에는 일반인의 출입이 엄금된 금지가 존재했다·
백요산(百妖山)·
천하에서 손꼽히는 청부자객들의 단체인 묵령문(墨靈門)이 자리를 잡고 있는 곳이다·
백 년 전 백요산에 자리를 잡은 묵령문은 청부 살인을 통해 세를 확장해 왔다· 묵령문의 자객 수나 문주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었다·
중요한 것은 묵령문에 의뢰를 넣으면 반드시 살행을 완수한다는 것이고 수많은 이가 묵령문의 자객들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는 것이다·
보다 못한 귀주성의 정도 문파 몇몇이 묵령문을 토벌하려 했지만 험준한 백요산의 산세를 이용한 자객들의 반격에 오히려 막대한 피해만 입은 채 지리멸렬하고 말았다·
그렇게 묵령문은 지난 백 년 동안 굳건한 아성을 구축한 채 수많은 살행을 해왔다· 최소한 귀주성에서만큼은 그 누구도 감히 묵령문에 도전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풍화교(風華橋)·
백요산 깊은 계곡 사이에 위치한 나무다리다· 바람이라도 불면 위태하게 흔들리는 풍화교야말로 묵령문의 상징이었다· 허락 없인 누구도 이곳을 지나갈 수 없었다· 오로지 천금을 들고 온 의뢰자만이 지나갈 수 있는 곳이 바로 풍화교였다·
콰우우!
고요와 적막만이 감돌던 풍화교에 한바탕 혈풍이 몰아치고 있다· 평소 풍화교를 지키던 수십 명의 자객이 한 남자를 향해 일제히 공격하고 있었다·
자객들의 합공을 받는 남자의 행색은 기괴하기 짝이 없었다· 등에는 커다란 봉(棒)과 곤(棍)을 교차로 메고 있고 허리에는 무식해 보이는 낭아도와 월곡도(月曲刀)를 차고 있다· 뒤춤에는 둥글게 말린 채찍이 보이고 종아리에는 용도를 짐작할 수 없는 기형 병기가 매어져 있다·
칠 척의 거구에 수많은 무기를 고슴도치처럼 달고 있는 남자는 자객들의 합공을 상대로 막강한 무력을 자랑했다· 천하에 수많은 무인이 존재하지만 이토록 기괴한 행색의 무인은 단 한 명밖에 없었다·
광투귀(狂鬪鬼) 현공휘·
칠소천의 일원이자 천하에서 가장 다양한 무기를 다를 줄 아는 극강의 무인이다·
현공휘의 사문을 아는 자는 거의 없었다· 아울러 신분 내력 또한 알려진 것이 없었다·
모든 것이 비밀에 가려진 남자가 바로 현공휘였다· 하지만 그의 막강한 무력과 불같은 성격만큼은 천하인이 모두 알고 있을 정도로 유명했다·
오죽하면 그의 별호가 광투귀일까·
싸움에 미친 귀신 그래서 모두가 꺼리는 무인이 바로 현공휘였다·
현공휘는 등 뒤에서 커다란 곤을 꺼내 들었다· 어른 허벅지보다도 굵은 곤의 표면에는 쇠 가시가 잔뜩 돋아나 있다·
“크흐흐!”
현공휘는 광소를 흘리며 곤을 휘둘렀다·
퍼억!
그의 곤에 격타당한 자객의 머리가 수박처럼 깨져 나가며 허공에 뇌수와 붉은 핏물이 흩날렸다·
현공휘는 마치 폭풍 같았다· 그가 휘두르는 곤에 자객들이 피떡이 되어 사방으로 튕겨 나갔다·
살아남은 자객들이 이를 악물고 암기를 날리자 현공휘는 곤 대신 채찍을 꺼내 들었다·
휘류류!
현공휘 앞에 채찍이 현란하게 움직이며 거대한 벽을 만들었다· 자객들이 날린 암기는 채찍의 벽을 통과하지 못하고 모조리 붙잡히고 말았다·
현공휘가 채찍을 크게 휘둘렀다· 그러자 암기들이 다시 자객들에게 되돌아갔다·
퍼버버벅!
몇 배의 힘으로 돌아온 암기에 자객들의 몸이 고슴도치가 되어 무너져 내렸다· 그렇게 순식간에 수십 명의 자객이 고혼이 되어 계곡으로 추락했다·
비명도 그 어떤 소리도 없었다· 자객들은 죽는 그 순간까지도 신음성 하나 내지 않았다·
현공휘는 풍화교를 건넜다· 피에 절은 발자국이 그의 뒤를 조용히 따랐다· 풍화교를 건너는 현공휘의 눈이 살기로 번들거렸다·
현공휘가 풍화교를 건너자 범상치 않은 기도를 풍기는 남자가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 무복을 입은 사내· 보이는 것이라곤 복면 사이로 드러난 두 눈뿐이다· 사내의 눈에서는 칼날 같은 살기가 줄기줄기 뻗어 나오고 있었다·
그가 현공휘를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웬 놈이냐? 감히 묵령문의 영역에서 난동을 피우다니 후환이 두렵거든 스스로 정체를 밝히거라·”
“내 이름은 현공휘야·”
“현공휘? 설마 광투귀라는 그 애송이냐?”
“그 애송이가 나야·”
현공휘가 씨익 웃었다·
복면 안에 숨겨진 남자의 얼굴에 당혹스러운 빛이 떠올랐다·
애송이라 폄하했지만 현공휘는 그렇게 녹록한 상대가 아니었다· 무엇보다 상대는 강호의 최고 기재인 칠소천의 일원이다· 칠소천의 무력이 강호의 여느 초절정고수들에게 뒤지지 않는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당신이 왜 이곳에?”
“당신들이 불렀잖아·”
“우리가?”
남자의 얼굴에 의혹의 빛이 떠올랐다·
그는 묵령문의 문주인 임한궁이었다· 묵령문의 모든 청부는 그가 받고 행할 것을 결정한다· 당연히 묵령문의 모든 행사에 대해 모를 수가 없었다· 묵령문에서 현공휘를 불렀다면 당연히 그도 알아야 했다·
임한궁의 의혹을 풀어주기라도 하듯 현공휘가 말을 이었다·
“제영산!”
“제영산?”
임한궁이 잠시 그 이름을 음미하다가 흠칫했다· 며칠 전 들어온 의뢰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금 천 냥짜리 의뢰였지·’
의뢰자는 확실한 처리를 원했고 묵령문에서는 자객 일곱 명을 파견해 제영산의 숨통을 끊었다· 제영산 자체가 천애고아였기에 후환은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현공휘가 허리에 차고 있던 낭아도의 손잡이를 잡았다·
“영산은 내 친구였다· 이제 내가 왜 너희를 찾아왔는지 알겠지?”
“그런?”
현공휘가 가공할 살기를 흘리며 임한궁에게 다가왔다·
‘제길 천애고아인 줄 알았는데 설마 저 싸움에 미친 귀신과 친우였다니·’
한번 결정하면 결코 철회하지 않고 폭급하기로는 천하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하는 남자가 바로 현공휘다· 그런 현공휘의 성향을 잘 알고 있기에 임한궁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이 어떤 말을 하더라도 현공휘는 절대 들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현공휘가 흘리는 살기가 그 사실을 증명해 주고 있다·
‘젠장! 제영산에 대해 더 조사했어야 하는데·’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후회를 하는 대신 수습해야 했다·
스슥!
그가 손을 들자 등 뒤로 수십 명의 자객이 나타났다· 묵령문의 특급 자객들이다·
현공휘의 명성이 버거웠지만 그렇다고 물러설 수도 없었다· 강호는 비정해서 비겁자나 패배자에게 그 어떤 동정도 보내지 않는다·
“놈을 제거하거라·”
그의 명령이 떨어지자 자객들이 일제히 현공휘를 향해 달려들었다·
쐐애액!
자객의 손에 들린 기형 단검이 허공을 갈랐다·
순간 현공휘의 몸이 일렁이는가 싶더니 반투명한 막이 나타났다·
“호신강기?”
임한궁의 얼굴에 믿을 수 없다는 빛이 떠올랐다· 현공휘의 나이 이제 겨우 이십 대 후반이다· 그 나이에 호신강기를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사기나 마찬가지다·
카캉!
자객들의 단검이 호신강기에 막혀 힘없이 튕겨 나갔다· 그 자리를 현공휘의 낭아도가 훑고 지나갔다·
후두둑!
허공에 핏줄기가 흩날렸다·
순식간에 서너 명의 자객이 고꾸라졌다· 그 위를 다른 자객들이 내달렸다·
쉬가각!
암기를 날리고 검기를 흩뿌렸다· 공기가 발기발기 찢어지면서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자객들의 총공세에도 현공휘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살육을 자행했다·
그는 호신강기로 전신을 보호하고 곤과 봉 낭아도와 채찍을 번갈아가며 사용해 살육을 벌였다· 바닥에 피가 흥건히 고이고 조각난 시신의 육편이 굴러다녔다·
순식간에 자객 중 절반이 현공휘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
“놈!”
보다 못한 임한궁이 그들의 싸움에 끼어들었다· 더 이상 자객들을 잃었다간 묵령문의 존속 자체가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임한궁이 독문절기인 대교십자검(大巧十字劍)을 펼치며 공격해 들어갔다· 허공에 그의 검영(劍影)이 가득 찼다·
수십 줄기의 검기가 현공휘를 향해 비처럼 쏟아졌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자객들이 쇄도했다· 임한궁은 이 한 수로 현공휘에게 치명상을 입힐 수 있을 거라고 자신했다·
그만큼 완벽한 공격이었다· 현공휘가 피할 공간은 어디에도 없어 보였다·
그 순간 현공휘가 가지고 있던 모든 무기가 폭발이라도 하듯 사방으로 튕겨 나갔다·
곤과 봉 낭아도와 월곡도가 공기를 가르고 검은 채찍이 독이 오른 독사의 머리처럼 고개를 쳐들었다·
콰아앙!
굉음이 백요산 정상에 울려 퍼졌다·
주르륵!
피투성이가 된 현공휘가 풍화교를 건넜다· 여기저기 깨지고 베여 피가 흐르고 있었지만 현공휘의 두 눈만큼은 여전히 살기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풍화교 건너편에 있는 묵령문이 불타오르고 있다· 자객들을 모조리 죽인 것으로도 분이 안 풀린 현공휘가 불을 지른 것이다·
묵령문의 모든 것이 재가 되어 사라지고 있었지만 현공휘는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연신 콧김을 뿜어내고 있었다·
문득 그가 걸음을 멈췄다·
그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세 남자 때문이다· 현공휘의 눈빛이 험악해졌다·
“네놈들은 누구냐?”
여차하면 공격할 기세에 선두에 서 있는 남자가 급히 입을 열었다· 백 년 전통의 살문인 묵령문이 어떻게 멸문하는지 똑똑히 지켜봤기에 그의 마음은 급하기만 했다·
“전 좌문호라고 합니다· 현 공자를 뵙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좌문호?”
현공휘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분명 한 번 들어본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비응검객?”
“예 그게 접니다·”
“그래서 무슨 일이지?”
“날개를 얻고 싶지 않습니까?”
좌문호의 말에 현공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