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화 : 4장 원한은 잊는 것이 아니라 가슴에 담아놓는 것이다 (1)
“이건 뭐냐?”
하진월이 심드렁한 얼굴로 진무원의 발치에 널브러져 있는 명류산을 바라봤다·
“어제 그 도둑입니다·”
“그건 나도 알고 있다· 내 말은 왜 이 물건이 내 눈앞에 있냐는 것이다·”
하진월이 발로 명류산의 몸을 툭툭 걷어찼다· 당기문이 그런 하진월을 말렸다·
“아우 일단 이야기나 들어보세·”
“말해봐라· 이 물건을 가져온 이유가 뭐냐?”
하진월이 가장 경멸하는 부류가 노력 없이 결과물만 얻으려고 하는 자들이다· 명류산처럼 사지육신 멀쩡한 자가 일해서 돈 벌 생각을 하지 않고 도둑질을 했다는 사실 자체가 혐오스러운 것이다·
진무원은 간밤에 있었던 일에 대해 설명했다· 그제야 하진월의 표정이 조금 풀렸다·
“흠! 그러니까 우리가 하루 신세졌던 촌장 댁 아들이 이 녀석이란 말이구나·”
“예·”
“거 웃기는 인연이구만· 하여간 이 물건은 문제 생기지 않게 네가 알아서 처리하거라·”
“알겠습니다·”
진무원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제야 지켜만 보고 있던 당기문이 명류산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그는 혼절한 명류산의 몸 구석구석을 살펴보았다·
“아주 제대로 다져놓았구나·”
“그 정도가 아니고서는 기가 꺾이지 않을 것 같더군요·”
“그래도 근성은 있는 모양이구나· 생각보다 근골도 좋고·”
당기문의 얼굴에 감탄의 빛이 떠올랐다·
허름한 옷에 가려져 잘 몰랐는데 명류산의 육체는 놀라울 정도로 잘 발달해 있었다· 특히 오밀조밀하게 발달된 근육은 마치 늑대를 방불케 할 정도로 폭발적인 탄력을 머금고 있었다·
사천의 서부고원을 터전으로 살아왔기에 남들보다 뛰어난 육체능력이 필요했고 그 결과 근력이나 지구력이 발달한 것 같았다·
당기문이 허리를 펴며 일어났다·
“아무튼 요상한 물건이구나· 네가 알아서 처리하려무나·”
“치료해 주지 않는 겁니까?”
“치료는 개뿔· 이 정도 멍 따윈 침만 발라도 나을 게다·”
당기문이 고개를 저으며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진무원이 한숨을 내쉬었다· 착각일지 모르지만 당기문의 말투가 하진월과 닮아가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가 혼절해 있는 명류산을 내려다보았다·
“언제까지 그렇게 누워 있을 작정입니까?”
순간 축 늘어져 있던 명류산의 몸이 움찔했다·
“이미 깬 것 다 알고 있습니다· 일어나십시오·”
“····”
“아직 매가 모자랍니까?”
그제야 명류산이 비척비척 몸을 일으켰다· 당기문이 상처를 살필 때부터 깨어 있었던 것이다·
진무원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 속엔 공포와 분노의 빛이 어우러져 있었다·
“나 날 어떻게 할 셈이냐?”
“운중천에 가고 싶다고 했죠?”
“그런데?”
“그럼 저희와 같이 가시죠·”
“내가 왜?”
“여비 있습니까?”
“····”
“우리와 같이 가면 최소한 먹고 자는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겁니다·”
명류산의 얼굴에 갈등의 빛이 떠올랐다·
비록 사고방식이 편협하긴 하지만 그도 눈치가 있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진무원 일행은 범상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런 이들과 동행할 수 있다면 운중천에 한결 쉽게 입성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더구나 그의 주머니에는 이제 땡전 한 푼 없었다· 구걸하다시피 운중천에 가기보단 이들을 따라가는 것이 훨씬 더 편할 것 같았다·
“조 좋다·”
결국 유혹을 이기지 못한 명류산은 자신도 모르게 대답하고 말았다· 그 모습에 진무원이 미소를 지었다· 진무원의 미소를 보는 순간 명류산은 왠지 불길한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진무원의 입에서 나온 말이 그의 생각을 막았다·
“우리 밥이나 먹으러 가죠·”
“밥?”
“배고프지 않습니까?”
그 말을 듣자 갑자기 뱃속에서 격렬한 신호음이 울려 퍼졌다· 명류산의 얼굴이 자신도 모르게 붉어졌다·
진무원이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앞장섰다· 잠시 망설이던 명류산이 그의 뒤를 후다닥 따랐다·
객잔의 일 층 식당 안에는 이미 하진월과 당기문 등이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하진월이 명류산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결국 그 물건도 가져갈 생각이냐?”
“재밌을 것 같아서요·”
“흠!”
하진월이 여전히 인상을 풀지 않고 명류산을 바라봤다· 그에 명류산이 바싹 긴장했다· 본능적으로 하진월이 보통 인간이 아니란 사실을 느꼈기 때문이다·
“흠!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하진월이 이내 명류산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그의 시선이 닿은 곳에서 당미려와 남수련이 걸어오고 있었다· 어제보다 부쩍 친해진 모습이다·
“아!”
남수련을 보는 순간 명류산의 눈이 몽롱하게 풀렸다· 그런 명류산의 모습을 본 하진월이 코웃음을 쳤다·
당미려와 남수련이 인사를 해왔다·
“다들 편하게 주무셨어요?”
“안녕하세요·”
그녀들의 인사에 당기문과 하진월이 고개를 끄덕였다·
당미려와 남수련의 시선이 진무원의 곁에 멍하니 서 있는 명류산을 향했다· 그에 하진월이 대답했다·
“저놈이 주워온 물건이다· 운중천까지 가지고 갈 모양이구나·”
“아!”
두 여인이 명류산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바 반갑습니다!”
그녀들의 시선에 명류산이 큰 소리로 대답했다· 그 때문에 식당 안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들에게 집중됐다·
당기문이 그런 명류산에게 말했다·
“그렇게 서 있지 말고 자리에 앉거라·”
“예 옙!”
명류산이 대답과 함께 재빨리 자리에 앉았다· 진무원도 그 옆자리에 앉았다· 때를 맞춰 점소이가 하진월 등이 주문한 음식을 내왔다·
푸짐한 음식을 보자 허기가 더 졌다· 잠시 주위의 눈치를 보던 명류산은 눈을 딱 감고 허겁지겁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허! 그놈 뱃속에 거지가 든 모양이구나·”
하진월의 이죽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이미 음식에 눈이 먼 명류산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그는 본능에 따라 음식을 탐했다·
잠시 그를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던 사람들도 이내 조용히 젓가락질을 하기 시작했다·
남수련은 호북성 무한에서 무산파의 제자 몇 명을 만나기로 했다고 한다· 그들 역시 남수련처럼 경험을 쌓기 위해 나온 일대제자들이었다· 당미려는 남수련과 그곳까지 동행하길 원하는 눈치였다·
이제까지 자신의 의견 한번 주장한 적이 없던 당미려가 이렇게 나오자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뜻하지 않게 두 명의 동행이 더 생기게 됐다·
일행은 객잔을 나와 근처의 마시장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일행이 타고 갈 말과 황아가 끌 수레를 샀다· 적잖은 돈이 소요됐지만 품속에 거금이 있었기에 문제될 것이 없었다·
모두가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단 한 명만은 예외였다·
“쳇! 잘났구만 잘났어·”
입술을 잔뜩 내민 채 이죽거리는 이는 바로 명류산이었다· 모두가 말을 타고 가고 있었지만 그는 홀로 걷고 있었다·
하진월이 그런 명류산을 보며 혀를 찼다·
“도적놈이 말은 무슨 네놈한텐 말이 아까워·”
“거 도적놈이라고 부르지 마십쇼· 어쩌다 실수 한번 한 거 가지고····”
“원래 그렇게 시작하는 거야· 도적이 강도가 되고 강도가 살인마가 되는 거지· 그나마 무공이 변변치 않아서 다행이지 안 그랬으면 큰 사고를 쳤을 놈이야 너는·”
“아 젠장! 도대체 언제까지 우려먹····”
하진월의 비아냥거림에 울컥 화를 내려던 명류산은 그의 곁에서 말을 몰고 있는 진무원을 보곤 입을 꾹 다물었다·
진무원을 보는 것만으로도 살이 떨렸다· 몸이 아직도 간밤의 공포를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명류산을 보며 하진월이 미소를 지었다· 명류산에게는 그 모습이 꼭 비웃음처럼 느껴졌다·
‘떠그럴! 두고 봐라· 지금은 그곳에서 내려다보고 있지만 언젠가는 내 앞에 무릎을 꿇고 빌게 해줄 테니까·’
그는 이를 빠득빠득 갈았다· 하지만 그의 노기는 말을 타고 가고 있는 남수련의 뒷모습을 보는 순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는 헤벌쭉 풀어진 표정으로 남수련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하진월이 그런 명류산을 보며 혀를 찼다·
“쯧쯧! 도적놈이 눈만 높아서는····”
“흥!”
또다시 두 사람의 언쟁이 시작되려 하고 있다·
등 뒤에서 들려오는 두 사람의 목소리에 진무원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반면 두 여인은 재밌다는 듯 키득거리며 웃고 있다·
명류산은 하진월과 투탁거리면서도 용케도 뒤처지지 않고 잘 따라오고 있었다·
당기문이 그런 명류산의 모습에 눈을 빛냈다·
‘저것 봐라?’
육체적인 능력이 타인보다 월등한 것은 알고 있었지만 체력마저 저렇게 좋을 줄은 몰랐다· 거의 말에 버금가는 주력과 체력의 소유자라니·
‘정말 놀랄 노 자구나· 무원은 이런 사실을 미리 안 건가? 이거 재밌겠는데?’
갑자기 명류산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다· 그의 눈빛이 위험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객잔을 떠난 지 반나절 만에 진무원은 강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름 모를 강은 너비가 족히 수백 장이나 되었다· 말을 데리고 강을 건너가려면 필히 운마도강선을 타야 했다·
다행히 강가에는 운마도강선이 들어오는 선착장이 있었다· 진무원 일행뿐 아니라 많은 이가 선착장에서 운마도강선이 들어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선표를 끊고 기다린 지 얼마 되지 않아 선착장으로 운마도강선이 들어왔다· 진무원 일행은 말과 황아를 끌고 운마도강선에 올라탔다·
운마도강선의 갑판은 강을 건너려는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진무원 일행은 갑판 한쪽에 자리를 잡은 채 운마도강선이 뜨기만을 기다렸다·
그때였다·
“거 올라갑시다! 자리 좀 비켜주쇼!”
입구 쪽에서 갑자기 큰 목소리와 함께 소란이 일어났다· 갑판 입구 쪽에 있던 사람들이 분분히 자리를 비켜주는 모습이 보였다·
소란과 함께 등장한 이는 세 명의 남자였다· 그중 한 명은 남수련도 아는 자였다·
‘저 사람은?’
그녀의 미간에 절로 골이 파였다·
육 척 장신에 선이 굵은 얼굴 푸른 장삼을 입고 세 개의 둥근 고리가 달린 패검을 허리에 찬 남자는 바로 비응검객 좌문호였다·
좌문호의 좌우에는 칠 척은 족히 넘을 듯한 거한 두 명이 있었는데 얼굴이 틀로 찍어낸 듯 똑같았다· 단지 다른 것이 있다면 한 사람이 다갈색 피부를 가지고 있는 것에 반해 다른 한 명은 분을 바른 듯 하얗다는 것이다·
‘쌍둥이?’
칠 척이 넘는 어마어마한 거구에 돌덩이를 박아놓은 듯한 근육 그리고 똑같은 얼굴을 가진 쌍둥이·
‘흑백쌍웅(黑白雙熊) 관 씨 형제인가?’
다갈색 피부를 가진 자가 형인 관산웅이고 하얀 피부의 거한이 동생인 관산철이다·
특별한 외공을 익혀 피부가 철갑처럼 단단한데다가 타고난 신력이 대단해서 섬서성의 젊은 무인들 사이에서는 꽤나 유명했다·
‘저들이 좌 공자가 포섭한 무인들인가 보구나·’
좌문호와 함께 움직이는 것으로 봐서 그들 역시 창룡회에 포섭된 것으로 봐야 했다·
흑백쌍웅 형제의 거구와 박력에 질린 사람들이 분분히 자리를 비켜줬고 금세 그들 주위로 횅한 공터가 만들어졌다·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던 좌문호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그의 망막에 반대편 갑판에 앉아 있는 남수련의 모습이 맺혀 있다·
좌문호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남수련을 향해 다가왔다·
“남 소저 여기서 또 만나다니 정말 반갑소·”
“좌 공자·”
모른 척할 수도 없기에 남수련이 자리에서 일어나 마주 포권을 취했다·
좌문호가 옆에 있는 흑백쌍웅을 가리켰다·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흑백쌍웅 형제라오· 남 소저를 대신해 본 회에 가입하기로 하셨다오·”
“관산웅이오·”
“관산철이오·”
흑백쌍웅 형제가 거만한 표정으로 자신들을 소개했다· 남수련을 내려다보는 그들의 얼굴에는 좌문호와 비슷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마치 자신의 결정을 비웃는 듯한 그들의 미소에 남수련은 마음이 상했지만 내색하지 않고 인사했다·
“무산파의 남수련이에요·”
“이야기는 많이 들었수다· 칠소천 중 한 명이시라고?”
“칠소천? 거 무지 거창하구만·”
관산철의 이죽거림에 주위의 공기가 차갑게 가라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