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 2장 시간이 흘러도 희석되지 않는 기억이 있다 (3)
그곳은 오래된 폐허였다· 주춧돌만 간신히 그 형체를 유지하고 있을 뿐 그 외 모든 것은 세월의 흐름을 이기지 못하고 원형을 잃었다· 어깨 높이까지 자란 풀과 두껍게 쌓인 먼지만이 세월의 무상함을 말해주고 있었다·
폐허 사이에 자란 풀숲을 걷는 조그만 소녀가 있었다· 이제 겨우 열대여섯 살 정도로 보이는 외모에 신비한 기품을 간직한 소녀는 바로 은한설이었다·
폐허를 바라보는 은한설의 눈빛은 무감각하기 이를 데 없었다· 어떤 감정의 편린도 내비치지 않는 그녀의 얼굴은 마치 생명이 없는 인형 같았다·
바람이 불어와 그녀의 검푸른 머리칼을 부드럽게 쓸어 넘기고 있다· 그녀는 한참 동안이나 제자리에 서서 바람을 느꼈다·
그때 그녀의 등 뒤로 검은 인형이 나타났다·
“소주·”
사령이었다·
은한설이 뒤돌아봤다·
“사령·”
“주군께서 찾으십니다·”
“사부님이?”
은한설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지난 칠 년 동안 그녀가 사부 소금향을 본 것은 몇 번 되지 않는다· 그나마 그것도 폐관 수련 초기 때의 이야기였다· 수련이 어느 정도 고비를 넘어가면서부터는 단 한 번도 소금향을 본 적이 없었다·
“안내해 줘·”
“저를 따라오십시오·”
사령이 앞장섰다· 은한설이 고개를 끄덕이며 사령의 뒤를 따랐다·
침묵이 흘렀다· 예전부터 은한설은 말이 없는 편이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과묵하지는 않았다·
말수가 더욱 줄어들고 감정의 기복이 없어졌다· 결코 정상적인 모습은 아니었다·
‘소주·’
처음으로 사령의 눈에 안타까운 빛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하지만 무어라 말하지는 않았다· 그의 역할은 은한설을 보좌하며 명령을 수행하는 것이지 조언을 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사령이 안내한 곳은 폐허에서 멀리 떨어진 큰 장원이었다·
호숫가에 위치한 장원은 무척이나 수려했다· 높은 담장과 그보다 더 높은 고루전각 그 사이로 내리쬐는 따사로운 햇살은 그림 속의 풍경을 연상케 했다·
바깥에서 보는 것처럼 장원 안쪽은 조용하기 그지없었다· 두 사람은 장원의 문을 열고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향림정(香林亭)·
장원 가장 안쪽에 위치한 정자이다· 향림정에서는 그림 같은 호수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향림정에 그녀가 앉아 있다·
호수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흩날리는 흑청색의 머리카락과 대비되는 눈처럼 새하얀 피부 붉디붉은 입술과 은백색의 눈동자는 그녀의 나이를 가늠할 수 없게 만들었다·
“사부님·”
“한설·”
그녀의 이름은 소금향· 은한설의 사부였다·
소금향이 자리에서 일어나 은한설을 맞았다·
“이리 오거라·”
은한설이 향림정 위로 올라서자 소금향이 은한설의 조그만 몸을 꼭 껴안아주었다·
“그동안 고생이 많았구나·”
“사부님·”
“빙정은광대법(氷晶銀光大法)을 통과한 것을 축하한다·”
“모두 사부님 덕분이에요·”
은한설이 소금향의 품에서 떨어져 그녀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은한설이 지난 칠 년 동안 하나도 변하지 않았듯이 소금향 역시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마치 시간의 흐름이 그녀들에게서만 비껴나간 듯했다·
“자리에 앉거라·”
“예·”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고 앉았다·
은한설의 모습을 찬찬히 뜯어보던 소금향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제자의 성취가 자신의 예상을 웃도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제 백야선자라는 별호는 너에게 물려줘야 할 것 같구나·”
“아니에요 사부님· 저는 아직 많이 부족해요·”
“처음부터 별호에 어울리는 사람은 없다· 너는 이미 백야선자라는 별호를 쓸 자격을 갖췄다·”
소금향은 천천히 기억을 더듬었다·
수십 년 어쩌면 그보다 더 전에 소금향 역시 사부에게서 백야선자라는 별호를 물려받았다· 밀야에서는 백야선자라 불리지만 적에게는 백야마녀라고 불렸다· 그만큼 많은 이의 피를 손에 묻혀야 했다·
그 긴 시간 동안 무거운 멍에를 짊어지고 살아왔다· 그리고 이제는 그 무거운 짐을 제자에게 물려줄 시기가 되었다·
“이제부터는 네가 당대의 백야선자다·”
“사부님?”
“부디 그 별호를 소중히 여기거라·”
은한설이 눈을 감았다·
이제 은한설이라는 개인은 존재하지 않았다· 밀야의 사대마장 중 한 명인 백야선자만이 있을 뿐이다· 그것이 그녀의 운명이었다·
소금향이 문득 물었다·
“아직도 나를 원망하느냐?”
“제자가 어찌 사부님을····”
소금향이 품에 손을 넣었다· 다시 모습을 드러낸 그녀의 손에는 어린아이 손바닥만 한 조그만 륜 두 개가 들려 있었다·
월광륜(月光輪)·
백야선자를 상징하는 독문무기다·
소금향이 은한설에게 월광륜을 넘겨주었다·
“이젠 네 것이다·”
“····”
은한설의 표정에 처음으로 균열이 일어났다· 그녀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월광륜을 받아 들었다·
칭칭!
새로운 주인을 인식한 것인지 월광륜이 청명한 울음을 토해냈다·
은한설은 청량한 기운이 자신의 몸속으로 파고드는 것을 느꼈다· 월광륜에서 시작된 기운은 그녀의 몸을 크게 휘돌았다·
소금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부하지 말고 은혼심결을 운용하거라· 월광륜이 너를 주인으로 인식하는 과정이니까·”
월광륜은 천고의 마병(魔兵)이다· 은혼심결을 대성하지 못하거나 허락을 받지 못한 자는 월광륜의 마기에 잠식당해 미쳐 버리고 만다·
은한설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은혼심결을 운용했다· 은혼심결과 월광륜의 마기가 그녀의 몸 안에서 어우러지기 시작했다·
마치 수은이 혈관을 흐르는 듯 전신이 쾌척해지면서 그녀의 몸에서 은광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이로써 너와 월광륜은 서로 떨어질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소금향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월광륜이 주인을 인식하는 동조의 과정이 끝나가고 있다· 이제 은한설은 마병 월광륜의 진정한 주인이 되었다·
은한설이 눈을 뜨자 은백색의 광망이 흘러나오다가 사라졌다· 소금향은 은한설이 정신을 수습하기를 기다렸다가 입을 열었다·
“나는 이제 밀야로 돌아갈 것이다·”
“사부님·”
“대회합령이 소집됐다·”
은한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대회합령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는 그녀도 잘 알고 있다· 밀야의 운명을 건 큰 결정이 있을 때만 소집되는 것이 대회합령이다·
“대회합령이 소집된 이상 중원으로 진출하는 것은 시간문제· 곧 난세가 열릴 것이다·”
소금향의 눈에 기이한 열기가 일렁이고 있었다·
그녀는 밀야의 중원 진출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단지 시기와 방식의 문제만 남았을 뿐이다·
“결정이 나기까지 아마 두세 달 정도가 걸릴 것이다· 그때까지 네가 무엇을 하든 자유다· 그 시간을 충분히 즐기거라· 그 이후부터 사적인 네 시간은 존재하지 않을 테니까·”
“사부님·”
“네 사부로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베푸는 배려이다· 거절하지 말거라·”
“알겠어요·”
은한설이 고개를 숙였다· 소금향은 그런 은한설의 모습을 잠시 말없이 지켜보았다·
자신의 시간이 멈춘 것처럼 은한설의 시간 역시 멈춰 있었다· 아마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그녀는 변하지 않을 것이다·
“한설아·”
“예?”
“나를 원망하느냐?”
“제자가 어찌····”
“괜찮다· 나 역시 처음엔 그랬으니까· 감정은 점차 마모되고 어느 순간부터는 스스로가 정말 정상적인 인간인지 의심하게 되지·”
은한설이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소금향의 말처럼 언제부턴가 자신이 정말 정상적인 인간인지 의심하는 일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절대 의심하지 말거라· 인간의 감정을 느낄 수 없다고 인간이 아닌 것은 아니니까·”
“알고 있어요 사부님·”
“그래 너는 똑똑한 아이니까 분명 잘해낼 것이다·”
소금향이 은한설의 어깨를 두들겨 주었다·
은한설의 시선이 빛이 쏟아지는 호수로 향했다· 그녀의 망막 가득 찬란한 빛이 부서지고 있었다·
☆ ☆ ☆
진무원이 옷을 벗었다· 그러자 상처 가득한 몸이 드러났다· 중원에 나온 지 불과 몇 달 되지 않았지만 그의 몸은 크고 작은 상처들로 가득했다·
별것 아닌 상처도 있었지만 진짜로 목숨이 위험한 상처도 다수 존재했다· 진무원은 손가락으로 상처를 어루만지다가 눈앞에 있는 옷을 향해 손을 뻗었다·
적갈색의 새 무복이다· 기존에 그가 입던 옷은 다 해지고 찢어져 더 이상 옷이라 부를 수 없었다· 그래서 진무원은 하는 수 없이 새로운 무복을 맞춰야 했다·
북천문의 상징인 적갈색은 그대로이다· 황철에게 받은 무복과 최대한 비슷하게 만든 것이라 그런지 익숙했다· 무복은 진무원에게 딱 맞았다·
몇 번 손발을 움직여 보던 진무원이 이번에는 적갈색의 피풍의를 들었다· 겉으로는 보기엔 평범한 피풍의 같았지만 교룡과 불곰 가죽을 특별하게 처리해 만들어 피풍(避風) 피화(避火) 피수(避水)의 효능을 갖고 있다·
피풍의 안쪽에는 일상에 필요한 물건들을 집어넣을 수 있는 수납공간이 여러 개 마련되어 있었다· 하루 이틀 정도의 여정은 피풍의에 수납한 짐만 가지고도 충분히 버틸 수 있었다·
진무원이 걸친 옷과 피풍의는 당문의 작품이다· 자신의 부탁을 들어준 진무원에게 당관호가 주는 선물이었다· 진무원은 그의 선물을 굳이 거절하지 않았다·
진무원은 피풍의 안쪽 수납공간에 간단한 물건들을 집어넣은 후 허리에 설화를 찼다· 많은 물건이 들어갔지만 전혀 표가 나지 않고 움직이는 데도 지장이 없었다·
만반의 준비를 갖춘 진무원이 밖으로 나왔다· 밖에는 이미 하진월과 당기문 당미려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진월과 당기문은 원래 그와 동행하기로 한 사람이기에 놀랄 것이 없었지만 당미려의 동행은 뜻밖이었다· 당관호는 그녀가 당문에 남기를 원했지만 당미려는 스승이자 숙부인 당기문의 수발을 들어야 한다며 고집을 부렸다·
결국 당미려의 고집을 이기지 못한 당관호는 그녀의 강호행을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진무원이 나오자 당기문이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준비는 모두 끝났는가?”
“보다시피 따로 준비할 것도 없습니다·”
“선물이 마음에 드는가 보군·”
“이렇게 귀한 것을 받아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하하! 그 옷과 피풍의가 기물이긴 하지만 당문에서는 딱히 귀한 것도 아니니 신경 쓰지 말게·”
“그래요· 마치 처음부터 진 소협의 것이던 것처럼 딱 맞는 것이 보기 좋네요·”
당기문의 근처에 있던 당미려가 기다렸다는 듯이 한마디를 더했다· 그녀를 바라보는 진무원의 눈가에 그늘이 내려앉았다·
바보가 아닌 이상 당미려가 자신에게 어떤 마음을 갖고 있다는 것을 모를 수가 없다·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그녀의 시선은 진무원을 향해 있었다·
분명 당미려는 아름다우면서도 현명한 여인이다· 충분히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 여인이다· 하지만 진무원의 가슴에는 당미려를 받아들일 공간이 존재하지 않았다·
아무리 오랜 시간이 흘러도 희석되지 않는 기억 속에 그녀가 살고 있었다·
진무원의 시선이 북쪽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