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 2장 시간이 흘러도 희석되지 않는 기억이 있다 (1)
“성도구나·”
당기문이 감개무량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봤다·
익숙한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화려한 번화가와 수많은 상점 그리고 오가는 많은 사람들· 이제껏 그들이 보아온 그 어떤 곳보다 화려하면서 사람 냄새가 물씬 풍기는 곳· 바로 성도였다· 서부고원을 떠난 지 거의 열흘 만에 당가의 터전인 성도에 도착한 것이다·
당기문과 당미려 숙질에게는 무려 두 달여 만의 귀환이었다· 그동안 많은 일이 있었다· 그들과 함께 운남성으로 파견되었던 당가의 젊은 무인들은 모두 목숨을 잃고 그들만이 겨우 살아남았다·
그들이 치욕을 무릅쓰고 살아남은 것은 당문에 그들의 죽음을 알려야 할 의무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야만 당문이 미리 대비를 할 수 있었다·
당기문이 진무원에게 말했다·
“아직 시간에 여유가 좀 있으니 당가타에서 이틀만 쉬어가세나· 가주를 만나 뵙고 그간의 사정을 말씀드려야겠네·”
“그렇게 하십시오·”
진무원은 흔쾌히 수락했다·
운중천에 도착하기까지는 아직 시간적인 여유가 있었다· 그리고 모두 연이은 강행군 때문에 지쳐 있는 상황이다· 어차피 휴식을 해야 한다면 당기문의 본가인 당가에서 쉬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진월이 진무원의 어깨를 두들겼다·
“잘 생각했다· 이번 기회에 당문과 같은 명문을 견식하는 것도 네 행보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당가타는 외인은 함부로 들어갈 수 없는 곳이다· 비단 당문뿐 아니라 대부분의 강호 명문이 그런 폐쇄성을 갖고 있었다· 그들이 외부에 공개하는 공간은 전체 중 극히 일부분에 불과했다·
문파의 비전이라는 것은 대저 무공으로만 전해지는 것은 아니다· 문파의 분위기 연무장 생활 습관 연무 과정 등 모든 것이 문파의 비전이 될 수 있다·
강호의 명문들은 비전의 유출을 꺼려 외인의 출입을 엄중히 차단한다· 비전은 곧 문파의 명맥이나 마찬가지이기에 그들의 폐쇄성은 상상을 초월했다·
천하의 북천문조차 백 년을 겨우 넘기고 세상에서 사라졌다· 당가타에 들어갈 수 있다면 당문이 수백 년 동안이나 이어져 내려온 비결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진월은 그것만으로도 당가타에 머무는 시간을 충분히 보상받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진무원의 성장은 곧 자신의 성장이나 마찬가지였다·
진무원의 시선이 청인을 향했다· 의견을 묻는 것이다·
“나는 당가타에 들어가지 않을 거야· 너무 오랫동안 연락을 하지 못했어· 성도지부에 들러 그간 있던 일을 보고하고 지시를 기다려야 해· 혹여 떠날 때가 되면 나를 기다리지 말고 먼저 출발해· 어디에 있든 내가 알아서 찾아갈 테니까·”
“알겠습니다·”
진무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진월과 달리 청인은 완전히 그의 사람이 아니었다· 흑월이라는 단체에 소속되어 있는 이상 자신이 그의 행보에 이래라저래라 할 수 없었다·
청인이 먼저 자리를 떴다· 진무원은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당기문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오랜만에 성도에 들어오자 기분이 좋은지 당미려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어 있다·
당기문이 그에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좋으냐?”
“그게····”
미소를 지으며 대답하려던 당미려의 얼굴이 갑자기 어둡게 변했다· 같이 돌아오지 못한 젊은 무인들에게 생각이 미친 것이다·
그들 모두 사적으로는 그녀와 혈연으로 이어진 친척들이다· 그들의 시신도 수습하지 못하고 무사히 돌아왔다는 사실에 그녀는 강한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당기문이 그녀의 마음을 짐작했는지 어깨를 두들기며 말했다·
“괜찮다· 그들의 죽음은 결코 네 잘못이 아니다· 칼날 위를 살아가는 인생 언제 죽음이 찾아와도 이상하지 않지· 그것이 강호를 살아가는 자들의 운명이다·”
“그래도····”
“절대 죄책감을 갖지 말거라· 너를 위해서라도·”
“예·”
당미려가 조용히 대답했다·
하진월이 당미려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려서부터 칼날 위에 목숨을 걸고 살아온 진무원에게는 그리 대수롭지 않은 일일 수도 있겠지만 당가라는 안전한 틀 안에서만 살아온 당미려에게는 큰 충격이었을 것이다·
누가 위로해 준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오직 스스로의 힘으로 극복해야 할 일이었다·
‘이 일로 인한 심리적인 부담을 극복한다면 그녀 역시 당당한 강호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각자의 상념 속에서 네 사람은 당가타로 향했다· 반 시진 정도를 걷자 저 멀리 야트막한 언덕이 보였다· 바로 당가타였다·
당가타는 겉으로 보기엔 여느 평범한 마을과 다름없었다· 마을을 둘러싼 담장도 울타리도 존재하지 않았다· 누구라도 쉽게 들어왔다 나갈 수 있을 것 같은 자유로운 분위기가 느껴졌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겉으로 보이는 모습일 뿐이다· 막상 당가타로 들어서자 수많은 이의 시선이 느껴졌다· 당가타에서 살아가는 수많은 무인이 낯선 이들의 등장에 경계의 빛을 드러낸 것이다·
언뜻 평범해 보이지만 기실 그들은 모두 암기술의 고수였다· 적의를 드러낸 그 순간 그들의 옷 속에 감춰져 있던 수많은 암기가 비가 되어 진무원 등을 향해 쏟아질 것이다·
‘이곳은 천혜의 요새나 다름없구나·’
이곳엔 돌로 된 담장은 없었지만 대신 인의 장벽이 존재했다· 그 두꺼움과 든든함은 돌로 된 담장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이제까지 문파나 가문은 커다란 담장이나 틀 안에 있어야 한다는 진무원의 고정관념을 깨는 순간이었다· 그것은 또 하나의 깨달음으로 다가왔다·
처음엔 진무원 등을 향해 경계의 시선을 보이던 이들이 뒤늦게 당기문과 당미려를 발견하고는 의심의 눈초리를 거뒀다· 그들이 당기문과 당미려를 향해 우르르 달려왔다·
“무사하셨군요!”
“각주님!”
그들이 앞을 다퉈 두 사람의 안부를 물었다·
당기문과 당미려는 미소를 지으며 그들과 인사를 나눈 후 물었다·
“가주님은 어디 계시는가?”
“아마 지금쯤이면 공방에 계실 겁니다·”
“알겠네· 일단 각주님을 뵈어야겠네· 궁금한 것이 많겠지만 자네들과는 그 후에 이야기하지·”
“알겠습니다· 무사히 돌아오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같이 오신 분들은 내 친히 모셔온 귀빈들이니 삼양각(三陽閣)에 숙소를 마련해 드리게·”
“그렇게 하겠습니다·”
“음!”
당기문이 진무원과 하진월에게 말했다·
“이들이 안내하는 대로 가서 쉬고 계시게· 일단 가주님께 인사를 드리고 저녁에 찾아가겠네·”
“알겠습니다·”
“그럼····”
당기문이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당미려가 진무원과 하진월에게 고개를 숙여 보인 후 당기문의 뒤를 따랐다·
하진월이 미소를 지었다·
“그럼 어디 당가타에서 편히 쉬어볼까?”
삼양각은 거창한 이름과 달리 당가타의 다른 저택들처럼 평범하기 그지없었다· 단지 다른 집들과 달리 키 높이의 담장이 있어 외부의 시선에서 비교적 자유롭다는 장점이 있을 뿐이다·
하진월이 삼양각 한쪽에 황아를 풀어놓은 후 진무원에게 말했다·
“나는 수욕을 좀 해야겠다· 네놈은 어찌할 테냐?”
“저는 잠시 쉬고 있겠습니다·”
“그러려무나·”
하진월은 대답과 함께 후원으로 갔다·
혼자 남은 진무원은 설화를 껴안은 채 자리에 앉았다·
피곤했다· 육체의 피로가 아닌 정신의 피로였다· 그만큼 신경 쓸 것이 많은 여정이었다· 거기엔 하진월의 가르침도 한몫을 했다· 한꺼번에 너무 많은 지식을 받아들이다 보니 뇌의 한계가 극에 달한 것이다·
진무원은 눈을 감았다·
그의 호흡이 고르게 변했고 어느 순간부터 품에 안은 설화가 은은한 묵빛을 발산하기 시작했다·
소녀의 부족은 오랫동안 신성한 산에서 살아왔다·
할머니의 할머니 그 할머니의 할머니도 모두 신성한 산에서 살다 갔다· 중원인들은 검현산이라고 부르지만 소녀의 부족은 신성한 산이라고 불렀다·
신성한 산은 부족에게 먹을 것 살아갈 곳을 제공해 주는 모태였다· 소녀의 부족은 매년 신성한 산에게 감사의 뜻으로 제(祭)를 지냈다·
제를 주관하는 자는 신성한 산의 선택을 받은 무녀였다· 소녀는 당대의 선택받은 무녀였다·
무녀가 된 자는 혼인을 할 수도 없고 이성을 만나서도 안 됐다·
한참 꿈이 가득한 나이의 소녀에게는 가혹한 일이었다· 하지만 소녀는 그런 자신의 운명을 가혹하다 생각하지 않고 순순히 받아들였다·
신성한 산의 선택을 받은 소녀는 착실히 무녀가 될 준비를 했다· 자연과 소통하는 법을 배우고 다친 사람들을 낫게 할 수 있는 치료법을 익혔다·
그렇게 소녀는 무녀로 착실히 성장해 갔다·
그녀의 나이 열다섯 살이 되었을 때 갑자기 하늘에서 별이 떨어졌다· 별은 마을 북쪽에 큰 구덩이를 만들었는데 그 안에서 별의 잔해가 발견됐다·
전대의 무녀는 별의 잔해를 신성한 돌이라 부르며 마을의 사당으로 모셔왔다· 부족 사람들은 신성한 돌에 제를 지내며 극진히 모셨다·
그리고 삼 년 후 전대의 무녀가 세상을 떠났다·
소녀는 그녀를 대신해 무녀가 되었다· 이제 제를 지내는 것은 오롯이 그녀의 몫이 되었다·
새벽에 일어나 정안수를 올리고 부족의 안위를 위해 기도했다· 육식은 철저하게 금하고 금욕적인 생활을 이어갔다· 그녀의 기도가 통했는지 모르지만 다행히도 부족은 점차 번창해 갔다·
부족의 번창은 소녀에게 번뇌를 가져왔다· 부족 사람들이 차츰 외부의 삶에 눈길을 주기 시작한 것이다· 외부와의 교류를 통해 번창하길 원하는 사람들이 나타났고 시간이 갈수록 그들의 목소리는 커져갔다·
결국 그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족장은 외부와의 교류를 선택했다· 부족 사람들은 산에서 얻은 물건을 가지고 외부의 사람들과 물물교환을 시작했다·
산에 들어오는 사람이 많아졌다· 부족 사람들은 점차 편리한 삶에 물들어갔다· 외부 사람들이 원하는 물건을 얻기 위해 산을 헤치고 수많은 동물을 사냥했다·
신성한 산은 비명을 질렀다· 무녀에게 고통을 호소했다· 무녀는 부족장에게 외부와의 교류를 줄이길 원했지만 그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사건은 무녀가 스물다섯 살이 되던 날 일어났다·
마을에 누군가 들어왔다·
그는 곰보다 흉포하고 호랑이보다 강했다· 그는 마을에 난입하자마자 닥치는 대로 살육을 자행했다·
부족의 전사들이 그의 손에 죽어갔다· 수많은 이의 비명이 신성한 산에 울려 퍼졌다· 그 처참함에 무녀는 절규했다·
그는 악마였다·
남자들 대부분이 그의 손에 죽임을 당했고 여자들은 제를 지내는 큰 동굴로 모조리 몰아넣었다·
무녀는 그를 막아섰다·
비록 부족의 전사들처럼 강하지는 않았지만 그녀에게는 단호한 의지와 신성한 산의 가호가 있었다·
그녀는 그를 막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그녀의 노력은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그녀는 사지가 부러진 채 죽어가는 여자들의 모습을 무기력하게 지켜봐야 했다·
그는 여자들의 몸에 십자 모양의 상처를 내서 피를 흘리게 했다· 백여 명의 여자가 흘린 피의 웅덩이에서 그 기운을 흡수했다·
그가 무녀를 보며 웃었다· 하얀 이빨을 드러낸 채 웃는 악마의 모습에 무녀는 자신의 무기력함을 저주했다·
‘용서하지 않을 거야·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야· 용서할 수 없어·’
무녀는 원념을 불태웠다·
그녀가 사랑한 모든 것이 무너지고 있었다·
악마의 유린 속에 그녀의 세상이 그녀가 사랑한 사람들이 사라지고 있었다·
신성한 산에게 기도했다·
자신의 한 몸 어찌 되어도 좋으니 복수를 하게 해달라고·
그녀가 흘린 피눈물은 제단에 있는 검은 돌에 스며들었다·
진무원이 눈을 떴다· 그의 뺨을 따라 어느새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단지 꿈이라고 치부하기엔 너무나 생생했다·
어찌나 긴장했는지 꽉 쥔 주먹이 경직되어 잘 펴지지도 않고 전신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다·
진무원이 설화를 바라봤다·
“너냐?”
설화는 대답하지 않았다·
진무원이 한숨을 내쉬며 꿈에서 본 자의 얼굴을 떠올리려 했다· 하지만 마치 안개에 가려진 것처럼 그의 얼굴은 명확히 떠오르지 않았다·
“십자혈마공·”
설화를 잡은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