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 1장 누구나 정상을 꿈꾸게 마련이다 (3)
진무원 일행은 고원지대를 근 열흘 만에 빠져나올 수 있었다· 짐승들이나 다니는 소로를 통해 이동하다 보니 그들의 옷은 온통 가시덤불에 해지고 더러워져 있었다· 하지만 누구 한 사람 힘들다 불평하지 않았다·
열흘이란 시간을 하진월과 함께하면서 진무원의 눈빛은 더욱 깊어졌다· 하진월이란 훌륭한 스승의 지식을 습득한 결과이다· 그래 봤자 하진월이 가진 지식의 일부분에 불과했지만 그래도 진무원의 사고의 폭은 예전에 비할 수 없이 넓어졌다·
당기문 숙질과 청인은 진무원의 변화를 지켜본 증인이다· 그리고 알게 모르게 그들 역시 하진월의 사상과 가르침에 조금씩 영향을 받았다·
“허허! 드디어 빠져나왔구나·”
당기문이 눈앞에 펼쳐진 거대한 평야를 보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보이는 것은 온통 지평선뿐이다· 양자강 민강 순강 가름강 등 큰 강들이 운반한 퇴적물들이 쌓인 적색의 토양은 곡식이 자라기 위한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적색분지라고도 불리는 사천성 최대의 곡창지대이다· 이곳에서 나는 엄청난 양의 곡식이 사천성 사람들의 배를 불리고 자립의 원천이 되었다· 당문 역시 적색분지에 엄청난 크기의 토지를 가나지고 있었고 그 덕분에 외풍에 상관없이 가문을 존속시켜 갈 수 있었다·
진무원이 물었다·
“이곳이 어디쯤인지 알 수 있습니까?”
“나도 자세히는 모르네· 단파나 강정 외곽 어디쯤이라고 짐작되네만 자세한 것은 사람들을 만나봐야 알겠지·”
단파나 강정은 사천성의 서부 끝자락에 자리한 조그만 현이다· 사천성의 중심지인 성도(成都)와는 상당한 거리가 있었다·
당기문의 입가에 미소가 어려 있다·
지긋지긋한 서부고원을 빠져나온 것만으로도 무척이나 홀가분한 기분이다· 말이 좋아 열흘이지 제대로 씻을 수도 쉴 수도 없는 곳에서 주구장창 노숙만 하다 보니 온몸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따뜻한 음식과 수욕이 절로 그리웠다· 당기문뿐 아니라 모두가 똑같은 생각이었다·
“일단은 민가를 먼저 찾읍시다· 음식도 배터지게 먹고 푹신한 침상에서 하루 정도 잤으면 원이 없겠습니다·”
청인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행의 발걸음이 절로 빨라졌다· 결국 그들은 해가 지기 직전 조그만 마을을 발견할 수 있었다·
광활한 평야 한가운데 형성된 마을이다· 조그마한 마을의 모습은 마치 바다 한가운데 고립되어 있는 섬처럼 쓸쓸해 보였다·
과연 이런 조그만 마을에 그들이 머물 만한 숙소가 있을까 의구심이 들었지만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다른 곳을 찾기에는 시간이 너무 늦었으니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이곳에서 하룻밤을 머물러야 했다·
일행의 짐작처럼 마을에는 객잔이 존재하지 않았다· 워낙 고립된 곳이다 보니 찾아오는 이가 거의 없어 굳이 객잔을 만들 이유가 없는 것이다·
객잔을 찾지 못한 청인이 지나가는 마을 사람을 붙잡고 물었다·
“이 마을에 혹시 하룻밤 머물 만한 곳이 있겠습니까?”
청인에게 붙잡힌 마을 청년이 의심이 섞인 시선으로 일행을 훑어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낯선 이방인에 대한 경계의 빛이 역력했다·
그에 당기문이 나섰다·
“난 당문의 사람일세· 사정이 있어 이곳에서 하룻밤 머물게 되었으니 부디 잘 만한 곳이 있으면 알려주게· 사례는 후하게 하겠네·”
“당문이라 하셨습니까?”
“그렇다네·”
청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비록 이곳이 사천성에서도 오지에 속하지만 당문을 모를 수는 없었다· 당문의 영향력은 사천성 곳곳에 안 미치는 곳이 없었다· 같이 사천성을 근거지로 하고 있는 구대문파의 일원인 청성파나 아미파 정도가 아니고서는 그 누구도 당문이라는 이름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청년의 눈빛이 대번에 유순하게 변했다· 진위는 둘째 치고 일단 당문이라는 이름에 압도당하고 만 것이다·
“저희 마을에 묵을 만한 곳이라고 해봐야 촌장님 댁이 전부입니다요·”
“촌장 댁으로 안내해 주겠는가?”
“저를 따라오시지요·”
청년이 앞장서서 걸음을 옮겼다·
진무원은 청년을 따르면서 마을의 전경을 살폈다·
오지에 있는 마을치고는 집들의 상태도 좋았고 규모도 꽤 커 보였다· 간혹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의 옷차림도 무척 깔끔한 것이 농사를 통해 꽤 많은 수익을 올리는 듯했다·
청년은 마을에서 가장 큰 저택의 정문을 두들기며 소리쳤다·
“촌장님 저 도춘입니다!”
잠시 후 오십 대 후반으로 보이는 중늙은이가 문을 열며 고개를 내밀었다·
“자네가 이 시간에 웬일인가?”
“당문에서 오신 손님들인데 하룻밤 머물 곳이 필요하답니다·”
“당문?”
촌장이 그제야 당기문 등에게 시선을 던졌다·
“정말 당문에서 오신 분들 맞습니까?”
“맞소· 사정이 있어 하룻밤 머물고자 하니 허락해 주시구려·”
당기문의 대답에도 촌장은 의심의 눈초리를 풀지 않고 위아래로 훑어봤다· 그러다가 진무원의 허리에 걸려 있는 검을 보고는 약간은 겁을 집어먹은 표정을 지었다·
“집이 초라한데 괜찮으시겠습니까?”
“며칠이나 한 데에서 잤소이다· 그저 하룻밤 따뜻한 곳에서 쉴 수 있으면 족하오·”
“정 그렇다면 저희 집에서 하루 머무십시오·”
“고맙소·”
결국 촌장이 일행을 집 안으로 들였다·
마을 대부분의 집이 나무로 만든 목조주택인데 반해 촌장의 집은 돌로 지어져 있었다· 촌장 일가가 머무는 본채와 손님이 머물 수 있는 별채가 마당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고 있어 마음 편히 쉴 수 있을 것 같았다·
촌장은 일행을 별채로 안내했다·
“이곳에서 주무십시오· 식사는 안사람을 시켜 갖다 드리겠습니다·”
“고맙소· 이 은혜 잊지 않겠소·”
당기문의 인사에 촌장이 고개를 숙이더니 총총걸음으로 본채로 사라졌다·
“으갸갸! 이게 얼마 만에 누워보는 침상이냐·”
청인이 제일 먼저 침상 위에 누우며 기지개를 켰다· 그 모습에 모두가 미소를 지었다·
“저는 먼저 씻을게요·”
당미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래도 여인의 몸으로 오랫동안 제대로 씻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린 모양이다·
하진월이 평상에 누우며 중얼거렸다·
“세상과 동떨어져 사는 사람들일수록 경계심이 강한 법이지만 이곳은 유독 텃새가 심한 것 같군·”
“원래 이런 마을일수록 한 혈족으로 이뤄진 경우가 많다네· 그들은 다른 성씨를 쓰는 사람들이 마을로 들어오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지·”
당기문이 하진월의 곁에 앉았다·
“아직까지도 혈족으로 이뤄진 마을이 많은 모양입니다·”
“자네도 알겠지만 사천성이라는 곳 자체가 태생적으로 그럴 수밖에 없는 구조라네· 다른 성과 달리 높은 산들로 둘러싸인 분지 지형 외부로 나갈 수 있는 관로는 몇 군데 되지 않고 그마저도 목숨을 걸어야 할 정도로 험하기 이를 데 없지·”
지형적인 폐쇄성은 외부와의 교류를 힘들게 했고 그 결과 사천성만의 독자적인 문화나 전통이 만들어졌다· 특히 그들은 같은 피를 가진 혈족을 중요시했다·
당문 역시 당 씨 성을 쓰는 혈족들로 이뤄진 것도 그와 같은 이유에서이다· 그들은 험한 세상에서 믿을 수 있는 이는 오직 같은 피를 나눈 가족뿐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했다·
당기문의 설명은 그 후로도 한참을 이어졌다· 아무래도 당문의 안마당이라 할 수 있는 사천성에 들어오니 기분이 한껏 들뜬 모양이다· 하진월은 그의 옆에서 보조를 맞추며 경청했다·
그렇게 두 사람이 대화를 하고 있을 때 갑자기 촌장 일가가 머무는 본채에서 한바탕 소란이 일어났다·
“아 이놈아! 네가 뭐라고 그곳에 간단 말이야? 그냥 이곳에 있으면 먹고사는 데 아무런 걱정이 없는데!”
“여기 있어봐야 농사밖에 지을 게 없잖아요? 두고 보세요! 나는 반드시 운중천의 무인이 될 거예요!”
“못 간다! 절대 못 가! 거긴 네가 비벼볼 만한 곳이 아니다·”
“에이! 진짜····”
갑자기 청년 한 명이 본채를 박차고 뛰쳐나왔다· 그는 진무원과 하진월 등을 힐끔 바라보더니 정문 밖으로 뛰어나갔다·
청년이 나가고 난 직후 촌장이 뛰어나왔다· 그는 청년의 뒤를 따라갈 생각을 하지 못하고 한숨만 내쉬었다·
“휴!”
당기문이 그런 촌장을 불러서 물었다·
“왜 그러시오? 아들이 속을 썩이기라도 하는 것이요?”
“말도 마십시오· 며칠 전부터 운중천에 가겠다고 저 난리입니다·”
“운중천?”
“그 척마댄가 뭔가 모집한다는 소문을 들은 모양입니다·”
촌장의 힘없는 대답에 하진월과 당기문이 절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단숨에 이해가 되었기 때문이다·
하진월이 물었다·
“아드님이 무공은 좀 익혔습니까?”
“성도에 있는 무관에서 한 삼 년 익혔습니다· 자신이 무슨 대단한 기재라고 저리 운중천으로 가려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촌장의 한숨이 깊어졌다·
그의 설명에 의하면 지금 중원 전역에는 운중천으로 가려는 젊은이들로 인해 몸살을 앓고 있다고 한다· 풍운의 꿈을 가진 이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척마대에 들길 원하는 것이다·
촌장의 아들인 명류산도 그중 한 명이었다· 성도의 무관에서 수련을 하고 온 이후 그는 좁은 시골 마을 생활에 적응을 하지 못한 채 방황하고 있었다·
명류산은 스스로를 굉장한 기재라고 생각했다· 운중천이 있는 곳에만 가면 웅지를 떨칠 수 있을 거라 자신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아들 때문에 촌장의 한숨은 깊어만 갔다· 당기문도 덩달아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이렇게 되는군·”
청운의 꿈을 안고 운중천으로 들어가려는 젊은 무인이 어디 명류산 한 명뿐일까? 아마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젊은 무인이 운중천을 향하고 있을 것이다·
그들 중 몇 명이나 운중천에 입성할 수 있을까?
‘설령 운 좋게 운중천에 들어간다 하더라도 대부분은 소모품으로 쓰이다 버려질 것이다·’
당기문은 강호의 생리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든든한 배경이나 후광이 없는 일반 무사가 운중천과 같은 거대세(巨大勢)에 들어가는 것도 거의 불가능했지만 설령 운 좋게 입성하더라도 그들이 높은 자리에 올라가는 것은 더더욱 요원한 일이었다·
운중천의 요직은 이미 강호 명문의 제자들이나 뛰어난 기재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한번 하급무사는 영원히 하급무사로 머물 수밖에 없는 구조로 신분 상승의 통로는 철저하게 막혀 있었다·
운중천은 명류산처럼 단순히 무관에서 몇 년 무공을 익혀서 도전해 볼 만큼 만만한 곳이 아니었다·
“부디 아드님을 잘 설득하길 바라겠소이다· 운중천은 결코 녹록한 곳이 아니라오·”
“그걸 제가 왜 모르겠습니까? 문제는 저 녀석이 제 말을 안 듣는다는 것이지요· 저 녀석에게 저는 그저 고리타분한 시골 노인네에 불과할 뿐이랍니다· 휴!”
촌장이 다시금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얼굴은 좀 전보다 족히 십 년은 더 늙어 보였다· 촌장의 그런 모습에 당기문이 덩달아 한숨을 내쉬었다·
‘이곳 말고도 또 얼마나 많은 곳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을는지· 운중천에서 흘러나온 소문 하나가 그야말로 중원을 뒤흔들고 있구나·’
촌장이 힘없이 어깨를 늘어뜨린 채 본채로 돌아갔다· 당기문은 그에게 어떤 위로의 말도 할 수가 없었다·
하진월이 고개를 저었다·
“이런 오지까지 저런 현상이 일어날 정도면 지금쯤 천하는 요동치고 있겠구나· 밀야와 같은 외부의 위협은 운중천에게는 절호의 호재· 아마 아홉 하늘이라는 자들은 쾌재를 부르고 있을 게야·”
진무원은 깊이 가라앉은 눈빛으로 촌장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시대를 움직이는 바람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불어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