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 8장 지옥을 거닐어보지 않은 자, 지옥을 논하지 말라 (2)
살아남은 자들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전장을 바라보았다·
방금 전까지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던 전장은 참혹 그 자체였다· 수많은 이가 죽거나 다쳤고 바닥에는 누군가의 시신이 쓰레기처럼 굴러다니고 있다·
패권회의 무인들이나 철기당 백룡상단의 보표들 모두 악에 받친 상태였다· 특히 패권회의 무인들에 의해 동료를 잃은 백룡상단 무인들의 분노는 무서웠다·
패권회 한 명에 보표 서넛이 달라붙었다· 한 명이 악착같이 상대의 몸을 붙잡고 늘어지면 다른 이들이 적의 몸에 검을 찔러 넣었다· 그 과정에서 태반이 죽거나 다쳤지만 망설이는 이는 한 명도 없었다·
물러설 곳이 없는 자들의 분노는 무서웠고 그 선두에는 철기당의 무인들이 있었다· 용무성의 상처에 분노한 철기당 무인들 역시 악착같이 패권회 무인들에게 달려들었다·
그렇게 치열한 전투는 근 반 시진을 이어지다가 끝이 났다·
“흐흑!”
“흐어엉!”
겨우 살아남은 보표들의 울음소리가 곳곳에서 울려 퍼졌다· 생존한 보표의 수는 겨우 다섯 명에 불과했고 그마저도 온몸에 많은 상처를 입고 있었다·
“허어! 이럴 수가····”
공진성이 허망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보표들은 모두 그의 수하들이고 최소 수년 이상을 동고동락한 사이다· 집안에 형제는 몇 명인지 숟가락은 몇 개 있는지까지 모두 알고 있을 정도이다·
그런 이들의 죽음 앞에 공진성을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철기당의 무인들 역시 상태가 그리 좋은 것은 아니었다· 사망자는 나오지 않았지만 다들 크고 작은 상처를 입은 채 바닥에 널브러져 헐떡이고 있었다·
그래도 그들은 살아남았다· 그들을 습격한 패권회의 무인들은 모조리 죽임을 당했다·
채약란이 바위에 등을 기댄 채 한쪽에 무릎을 꿇고 있는 황철을 바라보았다· 황철의 왜소한 어깨는 잔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황철의 앞에는 서창회 오금호 손무형의 시신이 널브러져 있다· 그들은 끝까지 단 한 명도 물러서지 않았고 결국 모두 장렬한 최후를 맞이했다·
그들은 끝까지 황철을 원망하지 않았다· 그렇게 그들은 마음 편히 갔을지 모르지만 살아남은 황철의 가슴에는 커다란 멍이 들고 말았다·
“서 대협 오 대협 손 대협·”
황철은 떨리는 손으로 그들의 부릅뜬 눈을 감겨주었다·
젊은 시절 그의 우상이던 사람들이다· 그런 우상을 자신의 손으로 베었다· 성취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대신 그의 가슴을 지배하는 것은 깊이를 짐작할 수 없는 슬픔뿐이었다·
황철의 모습을 보며 하진월이 중얼거렸다·
“그는 스스로의 추억을 베어버렸구나·”
하진월은 감히 청춘의 한때를 가득 채우고 있던 추억을 베어버린 황철의 상실감을 짐작조차 할 수 없기에 안타까운 표정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하진월이 문득 하늘을 바라봤다· 다른 사람들에겐 티내지 않았지만 기실 이곳에서 가장 긴장한 사람은 그였다·
칼을 휘두른 것은 철기당과 백룡상회의 보표들일지 모르지만 그들을 움직인 이는 바로 그 자신이었다· 수많은 이가 그의 지시에 의해 목숨을 잃거나 구함을 받았다· 결국 이 수라장은 그가 만들어낸 것이나 다름없었다·
강호에 다시 나서기로 했을 때부터 각오한 바였다· 하지만 솔직히 이렇게 빨리 이런 일을 경험하게 될 줄은 몰랐다·
‘나 역시 그 녀석의 운명에 휩쓸린 것인가? 너무 빠르군·’
그는 책사였다·
책사는 누구나 자신의 손으로 천하의 패자를 만들길 꿈꾼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진무원은 책사들이 꿈꾸는 가장 이상적인 존재였다·
하진월의 핏속에 잠재하고 있던 야망이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 ☆ ☆
진무원이 돌아온 것은 해가 지기 직전이었다·
그의 옷은 마치 걸레처럼 다 해져 있었고 얼굴에는 피로한 기색이 역력했다·
“공자님·”
그를 제일 먼저 맞이한 사람은 역시나 황철이었다· 그 뒤를 곽문정과 하진월 등이 따랐다·
“황숙 무사하셨군요·”
“저야 괜찮지만 너무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황철의 말에 진무원이 주위를 둘러봤다· 그런 그의 눈에 암담함이 떠올랐다·
아직도 수습하지 못한 시신들이 바닥에 널려 있다· 시신에서 흘러나온 혈향이 코끝을 비수처럼 후벼왔다·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한 자들의 원념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진무원은 잠시 눈을 감았다· 하진월이 그런 진무원의 표정 변화를 유심히 바라봤다· 그리고 진무원이 다시 눈을 떴을 때 입을 열었다·
“일단 모이자· 이왕지사 일이 벌어졌으니 이젠 수습을 논의해야지·”
“수습할 수 있겠습니까?”
“수습할 수 없는 일은 없다· 해결하려는 의지와 능력이 없을 뿐이지·”
하진월의 단호한 대답에 진무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살아남은 자들이 진무원과 하진월을 중심으로 모였다· 진무원과 하진월을 바라보는 그들의 얼굴에는 피로한 빛이 가득했다·
하진월이 진무원을 바라봤다·
“그도 오라고 하지?”
“그?”
“흑월·”
하진월의 대답에 진무원이 반대쪽 어둠 너머를 바라봤다·
“나오십시오·”
“····”
“거기 있는 것 다 압니다·”
“제길!”
잠시 후 욕설과 함께 누군가 이쪽으로 걸어왔다·
낯선 중년인이다· 그의 얼굴은 보기 싫게 일그러져 있었다·
“도대체 내 은신술을 어떻게 파악한 거냐?”
“그냥 압니다·”
“떠그럴!”
욕설을 내뱉으며 털썩 주저앉는 중년인은 바로 청인이었다·
청인까지 모이자 하진월이 입을 열었다·
“아시다시피 우리는 지금 심각한 위협에 처해 있습니다·”
“패권회도 물리쳤는데 위협에서 벗어난 것이 아닙니까?”
반문을 한 이는 철기당의 공손창이었다·
그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하진월의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가 동의를 구하는 눈빛으로 종리무환을 바라봤다· 그가 아는 사람 중에 가장 똑똑한 이가 종리무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종리무환의 표정 역시 하진월만큼이나 심각했다·
하진월이 진무원을 바라봤다·
“조천우는?”
“이후 그의 이름을 듣는 일은 없을 겁니다·”
“역시!”
하진월의 눈빛이 깊어졌다·
조천우가 사라지고 진무원이 나타났다· 이 자리에 있는 사람 중 그것이 뜻하는 바를 모르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하지만 본인의 입으로 듣는 것은 또 다른 충격이었다·
‘조천우가 쓰러지다니····’
‘그 거목이····’
철기당의 당주인 용무성조차도 가볍게 빈사상태에 빠뜨린 조천우다· 마치 거대한 벽처럼 모두에게 절망만을 안겨주던 그가 그렇게 죽었다는 사실이 쉽게 믿기지 않았다·
‘그는 단순히 강호의 신성(新星) 정도가 아니라 이미 절대의 반열에 들어섰구나·’
새로운 전설의 탄생을 직접 목도하고 있다 생각하니 온몸에 전율이 다 일었다·
청인은 그런 중인들의 반응을 십분 이해한다는 표정을 지었다· 자신 역시 조천우가 쓰러지는 광경을 보고 충격을 받았으니까· 아직도 그때의 여운이 진하게 남아 그의 가슴을 지배하고 있었다·
하진월이 한참 동안이나 진무원을 바라봤다· 마치 사람의 속을 꿰뚫어 보는 듯한 현기 어린 시선이었다·
마침내 하진월이 입을 열었다·
“북천문 육대문주 진무원 맞나?”
“····”
순간 장내가 정적에 휩싸였다·
모두가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특히 철기당 무인들의 놀람은 다른 사람들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진무원의 신분이 평범하진 않을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설마 북천문의 당대 문주일 줄은 정말 예상치 못했다·
“으음!”
모두의 심정을 대변하듯 누군가의 입술을 비집고 억눌린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진무원이 물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처음엔 긴가민가하며 의심만 했다· 어쨌거나 북천문은 십 년 전에 완전히 멸문한 것으로 알려졌고 마지막 후인 역시 죽었다고 소문이 났으니까·”
소문은 선입견을 만든다· 중도적인 입장에서 냉철한 사고를 할 수 없게 만드는 것이다·
하진월 역시 처음엔 그랬다· 하지만 소문과 분리시켜서 냉철하게 사고하다 보니 진무원의 신분을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었다·
“문제는 나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 역시 그렇게 생각하게 될 거란 사실이지· 아직은 정보가 부족해 판단을 보류하고 있지만 이곳에서 조천우를 쓰러뜨렸다는 소문을 듣게 되면 누구나 나처럼 생각하게 될 게야·”
하진월의 설명이 이어질수록 황철의 표정이 심각하게 변했다·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한 까닭이다·
진무원 개인의 무력은 다른 절대고수들에게 뒤질 바가 아니었지만 세력이 부족했다·
운중천이라는 초거대 단체가 중원을 장악한 지금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아무리 진무원이 강하다고 하더라도 물량 공세를 펼치는 운중천을 당해낼 수 없다는 뜻이다·
진무원이 북천문의 당대 문주라는 사실이 알려지면 운중천은 반드시 그를 제거하기 위해 움직일 것이다·
문제는 진무원이 혼자라는 것이다·
한 손이 열 손을 당해낼 수 없듯이 운중천이 물량 공세를 펼치면 제아무리 진무원이라도 당해낼 수 없을 것이 분명했다·
문득 하진월의 시선이 황철을 향했다· 그의 입가에 떠올라 있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보는 순간 황철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그가 입을 열었다·
“무원이 황숙이라 부르니 저도 그렇게 부르죠 황숙·”
“마 말씀하십시오·”
“우리 솔직히 까놓고 이야기합시다·”
“무슨?”
“아직도 연락하는 사람들 많이 있죠?”
“무슨 말씀이십니까?”
“북천문·”
“····”
순간 황철의 눈동자가 흔들렸고 하진월은 그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역시 그렇군요· 아무리 계산해 봐도 숫자가 맞지 않더군요·”
사람들 대부분은 북천문의 무인들이 북천사주에 의해 사등분되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하진월의 계산에 의하면 오히려 낭인으로 남은 사람이 더 많았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있는 법· 비록 운중천과 북천사주에 의해 강제 해산되었지만 모두가 그들을 따르는 것은 아닐 터· 그런 이들끼리 서로 연락을 주고받지 않을까 짐작했는데 역시 제 생각이 맞나 보군요·”
하진월의 논리정연한 말에 황철은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에 진무원이 물었다·
“정말입니까?”
“휴! 몇몇 사람하고는 아직까지 연락을 하고 있습니다· 공자님께는 미리 말씀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황철의 말에 진무원의 표정이 한결 밝아졌다·
“그들은 북천문을 잊지 않았군요·”
“누구라도 북천문을 잊을 수 없을 겁니다 공자님· 나중에 시간이 되면 그들을 한자리에 불러 모으겠습니다· 그들도 공자님을 보시면 좋아할 겁니다·”
“아 그 일은 나중에 하십시오· 아직은 그들이 필요 없으니까· 일단 확인한 걸로 족합니다· 일단 한 가지는 해결됐고 다음은 당신·”
하진월의 시선이 청인을 향했다· 그의 시선을 받은 청인이 움찔했다·
“나?”
“그래 당신·”
“왜?”
“흑월 좀 움직여 줘야겠어·”
“내가 왜?”
“공동운명체가 됐으니까· 이제 와 흑월 혼자만 발을 빼는 것도 모양새가 좋지 않잖아?”
청인의 얼굴이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하진월은 자신이 할 말만 계속했다·
“아직은 이놈이 전면에 나설 때가 아냐· 천하를 움직이려면 더 힘을 키워야 해· 그러니까 그때까지 당신이 도와줘야겠어·”
“그러는 당신은 무슨 자격으로 그런 말을 하는 거지? 합류한 지 며칠 되지도 않은 주제에·”
청인의 음성에 날이 섰다· 하지만 하진월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그의 시선이 진무원을 향했다·
“그가 나를 믿으니까· 그렇지 않나?”
자신만만한 그의 대답에 진무원이 인상을 썼다· 하지만 그의 답은 하진월의 기대를 배신하지 않았다·
진무원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상한 말이지만 진무원은 하진월을 믿었다· 이성이나 머리로 판단한 것이 아니다· 그의 가슴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청인의 표정이 더욱 일그러졌다·
“그래서 어떡하겠다는 거야? 이 녀석이 조천우를 죽인 사실이 곧 천하에 널리 알려질 텐데·”
“혼수모어·”
청인이 고개를 갸웃했다·
삼십육계 중 하나인 혼수모어(混水摸魚) 물을 혼탁하게 해서 고기를 잡는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 경우 어떻게 적용된다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진월이 미소를 지었다·
“정보의 과잉은 판단의 혼란을 가져오는 법이지·”
“그러니까 어떻게?”
“마침 우리에겐 좋은 핑계가 있지 않은가?”
“아 그러니까 속 시원히 말하라니까·”
“밀야!”
“밀야?”
“그래 밀야· 패권회와 밀야의 충돌· 어때? 제법 그림이 나오지 않아?”
“아!”
사람들이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내뱉었다·
진무원이 물었다·
“가능하겠습니까? 상대는 운중천입니다· 그들은 결코 쉽게 믿지 않을 겁니다·”
“가능하냐고? 나 하진월이야·”
그의 광오한 음성이 바람에 흩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