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 5장 그해, 겨울······ (3)
은한설은 눈을 감고 운공에 몰두했다· 그런 그녀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촉촉하게 배어 있었다·
그동안 그녀는 내력을 회복하기 위해 꾸준히 노력해 봤다· 그런 노력이 성과가 있었는지 이제까지 꼼짝도 하지 않던 내공이 조금씩 움직이는 기미가 보였다·
이 순간을 놓치면 또 언제 내력을 회복할지 알 수 없었다· 그 때문에 그녀는 혼신의 힘을 기울여 내공 심법을 운용했다·
덜덜!
운공이 최고조에 달했는지 그녀의 몸이 절로 떨렸다·
극심한 통증에 절로 입이 벌어지려 했다· 하지만 그녀는 애써 이를 악물고 참았다· 여기서 입을 벌리거나 소리를 지르면 그동안의 적공이 물거품으로 돌아간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얼마나 더 오래 걸릴지 기약조차 할 수 없었다·
‘견뎌내야 해· 내공을 조금이라도 회복해야만 극독을 몰아낼 수 있고 극독을 몰아내야만 예전의 무위를 되찾는다·’
지금 그녀는 완벽한 무방비 상태였다· 만일 누군가 살짝 건드리기만 하더라도 심맥이 상해 피를 토하고 죽을 수도 있었다· 원래라면 이렇게 무방비로 운공을 하지 않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지금 이 순간 그녀가 믿는 것은 이형유리진뿐이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나지막한 소리와 함께 그녀의 거처 방문이 열렸다·
‘누가?’
진무원은 아니었다·
그라고 보기엔 발소리가 육중하고 보폭도 컸다· 그리고 한두 명이 아니었다·
“없는데요?”
“없어? 분명 여기 있다면서?”
“그런 줄 알았는데····”
사내들의 목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순간 은한설의 미간에 깊은 골이 파였다·
‘그놈들·’
얼마 전에 보았던 운중천의 무인들 장패산과 그 부하들의 목소리였다·
‘앙갚음을 하러 온 것인가?’
은한설은 단숨에 그들의 목적을 알아차렸다·
원래 별 볼 일 없는 존재일수록 쓸데없는 자존심이 강하다· 은한설은 충분한 경고했다고 생각했지만 아무래도 그들은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았나 보다·
은한설의 눈에 잠시 살기가 감돌았다 사라졌다· 단지 살기를 머금은 것만으로 심맥이 흔들렸기 때문이다·
‘완벽한 무방비 상태 믿을 것은 이형유리진뿐·’
은한설이 애써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려 노력했다·
“쌍년이 도대체 어디로 간 거야?”
빈방을 뒤지던 장패산이 분통을 터뜨렸다·
은한설의 짐작대로 장패산은 그날의 치욕을 잊지 않고 있었다· 자기 키의 반밖에 안 되는 꼬마 계집 하나 때문에 부하들 앞에서 망신을 당한 것을 어찌 잊을까?
첫 만남에서 기선을 제압당한 후 장패산은 곰곰이 생각했다· 그 결과 은한설이 정상이 아니란 판단을 내렸다· 정말 그녀가 정상이었다면 그 상황에서 그렇게 밍숭하게 물러나지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년이 허세를 부린 것이 분명해·’
생각할수록 그녀가 정상이 아니란 정황이 여러 가지 떠올랐다· 그러자 두려움도 함께 생겨났다· 정상이 아닌 상태에서 그리 당했는데 그녀가 나중에 회복을 하면 얼마나 무섭겠는가?
일단 그렇게 생각이 정리되자 도저히 그냥 있을 수가 없었다·
장패산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분명 여기 어딘가에 있을 거야! 샅샅이 뒤져서 그년을 찾아내!”
“옛!”
장패산의 부하들이 방 안을 뒤졌다·
은한설의 얼굴에 점점 더 식은 땀방울이 맺혔다· 장패산의 부하들이 그녀가 진법을 펼친 곳을 향해 점점 더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펼친 이형유리진은 단순한 환영진이었다· 실체를 감출 수는 있어도 방호를 위한 그 어떤 능력도 없었다· 만일 누군가 손으로 한번 훑기라도 하면 단숨에 진법이 들통 나고 말 것이다·
움직일 수도 없고 운공을 중단할 수도 없었다·
‘모험을 해야 하는가?’
그녀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점점 더 장패산 등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제 결정을 내려야 했다· 지금 강제로 운공을 중단한다면 진원지기가 크게 상해 언제 회복할지 기약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결국 은한설이 운공을 중단하려 할 때였다·
“남의 거처에서 뭐 하는 짓이오?”
갑자기 진무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처를 뒤지던 장패산과 삼조원들이 흠칫하며 뒤돌아보자 입구에 서 있는 진무원의 모습이 보였다·
장패산이 뭐라 하기도 전에 진무원이 뚜벅뚜벅 걸어와 앞을 막아섰다·
“언제부터 운중천이 이렇게 후안무치한 집단이 되었소? 남의 거처에 멋대로 들어오다니·”
“어차피 이제는 사용하지 않는 곳이지 않느냐?”
“사용하지 않으면 마음대로 들어와도 된다는 법이 있소? 당신들의 거처를 내줬고 봄에 중요한 손님들이 온다고 해서 화천각도 내줬소· 그런데 이번에는 내가 사용하던 거처까지 내줘야 하오?”
진무원의 날 선 목소리에 장패산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살심이 끓어오르는 듯 그의 불끈 쥔 두 주먹이 바르르 떨리고 있었다·
“네놈이 정녕 죽고 싶은 모양이구나·”
“그 말밖에 아는 말이 없는 모양이구려·”
“크윽! 이놈이 진짜····”
장패산의 두 눈이 살기로 물들어가는 모습을 보면서도 진무원은 담담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장패산은 금세라도 진무원을 향해 주먹을 휘두를 듯했다· 하지만 진무원은 알고 있었다· 장패산이 절대 그러지 못할 거라는 사실을·
비록 서로 소 닭 보듯 지냈지만 그래도 이 년이란 시간을 함께했다· 장패산이란 인간의 본성과 성격에 대해서 파악하기에는 모자람이 없는 시간이었다·
강자에겐 더할 수 없이 약하고 약자에겐 더없이 강하다· 자신의 안위에 더할 수 없이 예민하고 절대로 위험한 도박은 하지 않는다·
북천사주가 진무원과 연관이 있다고 생각하는 이상 그는 절대로 경거망동하지 못한다·
진무원의 생각처럼 장패산은 노려보기만 할 뿐 폭력을 휘두르거나 검을 빼 들지 못했다·
“네놈 한 번만 제대로 걸려봐라· 그때는 절대로 그냥 두지 않을 테니·”
장패산이 몸을 휙 돌려 밖으로 나가자 부하들이 그 뒤를 따랐다·
혼자 남은 진무원이 잠시 멈춰 서서 방구석을 바라보았다· 정확히 은한설이 은신해 있는 그곳이었다·
‘그곳에 있었군·’
문득 진무원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세상이 바뀌었다· 아니 그가 세상을 보는 시야가 바뀌었다·
세상의 흐름이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기의 흐름이라고 해야 하나? 이전에는 보지 못한 것들이 보이고 있었다· 극도로 선명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대략적이나마 그 흐름을 느끼고 볼 수 있었다·
진무원은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가고 한참이 지난 후 이형유리진이 일렁이더니 사라지고 은한설의 모습이 나타났다·
은한설은 한결 편안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진무원이 나타나서 시간을 끌어준 덕분에 무사히 운공을 마칠 수 있었다·
‘겨우 한고비를 넘겼다·’
단전에서 한 가닥 내공이 희미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겨우 한 모금 정도의 공력에 불과하지만 은한설에겐 생명을 연장시켜 줄 생명수나 마찬가지였다·
은한설이 의뭉스러운 시선으로 진무원이 나간 입구를 바라보았다·
☆ ☆ ☆
진무원이 창고 안을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좀 아껴야겠군·”
꽤나 넉넉하게 준비했다고 생각했는데 벌써 준비한 식량의 반이 줄었다· 생각지 못한 식객이 하나 더 늘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아껴 먹는다면 어찌어찌 이번 겨울은 날 것 같았다·
“황숙은 잘 지내겠지?”
황철을 생각하면 항상 마음 한쪽이 아려왔다· 자신만 아니라면 더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다· 아비 진관호가 베푼 은혜는 지금까지 그의 헌신으로 충분히 보상했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황철은 아직도 모자라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진무원은 쌀과 양고기 몇 가지 채소를 가지고 창고를 나왔다· 높다랗게 쌓인 눈 위에 그가 걸어온 발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 진무원은 다시 그 길을 걸어 만영탑으로 향했다·
문득 고개를 돌려보니 화천각이 보였다· 뚝딱거리는 소리가 나는 것이 장패산이 부하들을 닦달해서 수리를 하는 모양이다·
날이 풀리고 누가 올지 모르지만 저렇듯 난리를 치는 걸로 봐서는 꽤나 고위급의 인사가 오는 모양이다·
만영탑으로 돌아온 진무원은 곧 음식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밥을 짓고 양고기와 채소를 잘게 썰어 솥에 넣었다· 몇 가지 양념과 함께 다시 물을 부어 펄펄 끓였다· 화과를 만드는 것이다·
혼자 생활한 지 꽤 되다 보니 진무원의 솜씨는 무척 능숙했다· 불 조절을 하며 진무원은 음식이 다 되기를 기다렸다· 밥과 화과가 익는 냄새가 만영탑 안에 가득 퍼졌다· 제법 맛있는 냄새에 진무원이 미소를 지었다·
진무원은 임시로 만든 나무 탁자 위에 밥상을 차렸다· 비록 밥 한 그릇에 화과 한 솥에 불과했지만 진무원에게는 이 세상 최고의 진미였다·
“어디····”
수저를 들던 진무원이 문득 고개를 들어 입구를 바라봤다· 그곳에 은한설이 서 있었다·
진무원이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에 보네?”
은한설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창백하던 얼굴에 혈색이 도는 게 처음 봤을 때보다 상태가 한결 좋아 보였다·
“무슨 일이야?”
“고맙다고 인사하러 왔어·”
“인사?”
“덕분에 위기를 넘겼거든·”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네?”
“정말 몰라?”
진무원이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자 은한설이 진무원의 눈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녀를 바라보는 진무원의 눈은 마치 바다처럼 고요해서 전혀 속내를 읽을 수가 없었다·
문득 진무원이 물었다·
“식사는?”
“····”
“안 했으면 이리 와서 앉아· 밥은 넉넉하니까·”
은한설이 미간을 찌푸리며 거절하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뱃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은한설의 얼굴이 잠시 붉게 물들었으나 이내 아무렇지도 않은 듯 식탁 앞으로 걸어와 진무원 맞은편에 앉았다· 진무원이 미소를 지으며 밥그릇과 젓가락을 내밀었다·
“배고파서 이러는 거 아냐· 당신이 혼자 먹는 게 쓸쓸해 보여서 같이 먹어주는 거야·”
“후후! 고마워·”
진무원이 그릇 가득 화과를 퍼주고는 밥을 먹기 시작했다·
은한설이 젓가락을 들고 진무원이 만든 화과를 맛보더니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겉으로는 투박하게 보여 기대도 안 했는데 생각 외로 맛있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내력을 회복하기 위해 제대로 식사를 하지 못한 탓도 있었지만 진무원의 음식 솜씨는 꽤나 좋았다·
따스한 국물이 들어가자 얼어 있던 몸이 확 녹는 기분이다· 순식간에 화과 한 그릇을 뚝딱 비웠다·
“먹을 만하지?”
“응·”
자신도 모르게 대답한 은한설이 뭐가 그리 마음에 안 드는지 볼을 부풀렸다· 그 모습에 진무원이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으며 화과를 다시 퍼주었다·
한동안 말없이 음식을 먹던 은한설이 고개를 들어 진무원을 바라봤다· 진무원의 그릇도 거의 비어가고 있었다·
은한설이 잠시 그 모습을 지켜보다 입을 열었다·
“그런데 안 물어봐?”
“뭘?”
“나에 대해서?”
“그냥 안 물어보려고·”
“왜?”
“글쎄··· 그러는 게 좋을 거 같아서· 왠지 알게 되면 이렇게 편하게 마주 앉아 있지 못할 것 같거든·”
“바보 같아·”
“그런 이야기 많이 들어·”
“쳇!”
진무원의 대답에 은한설이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진무원은 신경 쓰지 않고 식사를 계속했다· 은한설도 다시 말없이 식사에 열중했다·
잠시 후 두 사람의 식사가 모두 끝났다· 진무원은 말없이 일어나 그릇을 치우고는 주전자를 화로에 올렸다·
“또 뭐 하려고?”
“밥을 먹었으니 차도 한잔 해야지·”
“난 벽라춘·”
“사치야 사치·”
“쳇!”
은한설이 입술을 삐죽거렸다·
벽라춘은 태호 동정산에서 나는 최고급 명차로 일반인은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할 만큼 가격이 엄청 비쌌다· 명성에 비해 생산량도 극히 적어서 주로 고관대작이나 황족 정도가 되어야만 겨우 벽라춘을 마실 수 있었다·
진무원이 내놓은 것은 황철이 구해온 이름 없는 차였다· 향과 맛이 그리 고급스럽진 않았지만 나름의 풍미가 있어서 진무원에게는 유일한 사치품이라고 할 수 있었다·
물이 끓기를 기다리고 다시 적당한 온도로 식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찻잎을 넣고 또 기다렸다·
은한설은 그런 진무원의 느긋한 모습이 너무나 신기하게 보였다· 그녀가 있던 곳에서는 진무원 같은 성격을 가진 사람이 거의 없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진무원이 다 우린 차를 질그릇에 담아 은한설에게 내놨다· 그 투박한 모습에 은한설이 다시 미간을 찌푸렸지만 생각보다 향긋한 냄새에 자신도 모르게 손을 가져갔다·
손을 통해 느껴지는 따스한 온기에 절로 미소가 감돌았다· 그녀는 질그릇을 들고 잠시 향기를 즐기다 입으로 가져갔다·
차를 마시는 순간 그녀는 또 한 번 놀랐다·
‘맛있잖아·’
그녀의 예상보다 훌륭한 맛이었다· 그 말은 곧 진무원이 차를 제대로 우릴 줄 안다는 것이다·
“어때?”
“괘 괜찮네·”
“그치? 이래 봬도 열 살 때부터 차를 즐겼거든·”
다도를 따로 배운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유일한 취미였기에 은한설에게 실력을 인정받은 것이 진무원은 무척이나 기뻤다· 그런 진무원의 모습에 은한설이 피식 웃었다·
이상한 사람이다· 보통 가문이 이렇듯 철저하게 몰락하면 눈에 독기가 가득하거나 자포자기하는 것이 대부분인데 진무원에게서는 그런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정말 자신의 본모습을 철저히 감추는 것이라면 그만큼 무서운 사람이란 뜻이겠고 그게 아니라면 대책 없는 낙천주의자라는 뜻이겠지·’
어느 쪽이든 지켜볼 만한 가치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그녀는 아직 이곳을 떠날 몸 상태가 아니었다· 최소 몇 달 이상은 신경 써서 정양해야 했다· 북천문은 그녀가 은신해서 회복하기에 최적의 장소였다·
은한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려고?”
“잘 마셨어·”
“종종 놀러 와· 혼자 밥 먹으면 맛없잖아·”
“그런 일은 없을 거야·”
은한설이 냉랭한 표정을 지으며 밖으로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