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 6장 은혜는 잊어도 원한은 절대 잊지 않는다 (2)
아침 해가 뜨자 백룡상단은 짐을 정리해 길을 떠났다· 그때까지도 진무원은 도착하지 않았지만 걱정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진무원 정도의 무력을 갖고 있는 사람을 걱정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었다· 그들은 진무원이 잘 따라올 수 있도록 바닥이나 나무에 표식을 남겼다·
용무성이 생각에 잠겨 있는 종리무환을 바라봤다· 어제부터 종리무환의 표정이 어두워 보였다·
“무슨 걱정이라도 있는 게냐?”
“아 아닙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우거지상이야? 임무도 모두 무사히 끝냈는데·”
“그게····”
“말해봐·”
용무성의 채근에 종리무환이 하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진 소협 때문입니다·”
“또 왜?”
“정확히는 진 소협의 손님으로 합류한 하 대협 때문입니다·”
“그에게 무슨 문제라도 있나?”
“정말 대단한 사람입니다· 저는 천하에서 저렇게 아는 것이 많은 사람은 처음 봤습니다·”
“너보다 더?”
“솔직히 제가 어찌해 볼 대상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 정도야?”
용무성이 눈을 크게 치떴다·
종리무환을 누구보다 잘 안다고 자부하는 용무성이다· 무공은 조금 뒤떨어질지 모르지만 심계나 지식의 방대함에 있어서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 때문에 종리무환의 자존심은 누구보다 강했다·
진무원을 쉽게 인정하지 못하는 것만 봐도 그의 자존심이 얼마나 강한지 알 수 있었다· 그만큼 타인을 쉽게 인정하지 못하는 면도 있었다·
그런 그가 처음으로 자신의 부족함을 말하고 있다· 그것도 가장 자신 있는 학식으로 말이다· 용무성에겐 일대 사건이었다·
용무성의 시선이 상단 제일 뒤쪽에서 따라오고 있는 커다란 수레로 향했다· 하진월은 수레에 앉아 바둑을 두고 있었다· 상대는 바로 그 자신이었다· 일인이역 자신을 상대로 바둑을 두고 있는 것이다·
“네가 인정하는 천재라 이거냐?”
“천재라는 말로도 부족할 것 같습니다· 저렇게 다양한 방면에 걸쳐 깊은 지식을 가진 사람은 처음 봤습니다·”
처음엔 자신과 비슷한 사람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호감이 갔고 술자리를 함께했다· 하지만 대화를 하면 할수록 하진월의 방대한 지식에 기가 질렸고 종국에는 자괴감마저 느껴야 했다·
“흐음!”
종리무환의 설명에 용무성이 하진월을 바라봤다·
‘또 천재라는 족속인가?’
진무원이라는 인물이 하진월이라는 천재를 끌어들였다· 진무원이 범상치 않은 존재이듯 하진월 역시 평범한 인물이 아니었다·
두 사람의 만남이 어떤 상승작용을 일으킬지는 미지수다· 하지만 그 여파가 결코 만만치 않을 거란 느낌이 들었다·
용무성이 종리무환의 어깨를 두들기며 말했다·
“너무 신경 쓰지 말거라· 너 역시 천재다· 나에겐 네가 최고의 책사다· 굳이 저자와 너를 비교해 스스로를 갉아먹을 필요 없다·”
“형님?”
“너무 그들을 의식할 필요 없다· 그들에겐 그들의 길이 있고 우리에겐 우리의 길이 있으니까· 우리는 묵묵히 우리가 선택한 길만 가면 된다·”
“예·”
대답하는 종리무환의 음성에는 왠지 힘이 빠져 있었다·
‘이것도 녀석이 넘어야 할 벽·’
그렇게 생각하며 용무성은 앞을 바라보았다·
과정이야 어떻든 간에 그들은 임무를 완수했다· 난주에 도착하기만 하면 백룡상단으로부터 거액의 보상금을 받을 것이다· 그 돈이면 그들이 그토록 원하던 일을 시작할 수 있었다·
‘조금만 기다리십시오· 내가 곧 갈 테니까·’
용무성이 주먹을 꽉 쥐었다· 그런 그의 눈에는 은은한 살기가 흐르고 있었다·
용무성의 격앙된 감정을 느꼈는지 그의 주위로 철기당의 무인들이 모여들었다·
오랜 시간 함께해 온 그들이다· 서로의 표정만 봐도 생각을 알 수 있을 정도의 강한 유대감으로 이어져 있었다·
단순히 한자리에 모이는 것에 불과했지만 그것만으로도 용무성과 종리무환은 금세 평정심을 되찾았다·
그런 철기당의 모습에 공진성이 감탄했다·
‘저들은 정말 친형제나 다름없구나· 강호에 저렇듯 강한 결속력으로 뭉친 문파가 또 있을까?’
진무원이라는 걸출한 신흥 강자에 밀려 윤자명을 구하는 데는 그리 큰 역할을 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공진성이 철기당을 굳게 신뢰하는 데는 저렇게 강력한 유대감과 결속력의 영향이 컸다·
‘당장은 소수에 불과하고 강호에 큰 영향력도 없지만 저런 자들이 강호의 한 축을 차지하게 되는 법· 지금부터라도 인연의 끈을 탄탄하게 유지해야 한다·’
오랫동안 백룡상단에 몸담다 보니 공진성도 어느새 상인이 다 되었다· 하지만 그런 자신의 변화가 나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공진성이 윤자명이 타고 있는 마차를 바라보았다· 윤자명은 이제 상태가 많이 좋아졌다·
‘노마님이 이 사실을 알면 얼마나 좋아하실까?’
백룡상단에서 기다릴 노태태를 생각하니 절로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그러나 그의 미소는 오래가지 않았다· 선두에 있던 철기당 무인들이 갑자기 멈춰 서면서 일행 전체가 멈춰 섰기 때문이다·
“왜 그러는가?”
공진성이 용무성의 곁으로 말을 몰았다· 하지만 용무성은 대답 없이 전방만 노려보았다· 공진성이 용무성이 바라보는 곳으로 시선을 던졌다·
“음!”
순간 그의 표정도 용무성처럼 딱딱하게 굳었다·
전방에 커다란 강이 가로지르며 그들의 행로를 막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신경을 건드린 것은 강이 아니라 그 앞쪽에 있는 커다란 바위였다· 정확히는 바위 위에 앉아 있는 거대한 체구의 남자 때문이었다·
마치 거대한 석상처럼 바위 위에 앉아 있는 남자의 몸에서는 그야말로 가공할 패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공진성의 입에서 절로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남자의 정체를 알아본 까닭이다·
‘조천우·’
남자는 패권회의 지배자이자 북천사주의 일원인 권마 조천우였다· 그가 그들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그 존재감만으로도 철기당을 비롯한 백룡상단의 행렬은 감히 앞으로 나갈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조천우를 바라보는 용무성의 표정은 무겁기 그지없었다· 일대를 지배하고 있는 조천우의 기세에 억눌린 탓이다·
의문이 들었다·
‘조천우가 왜 이곳에?’
패권회와 협상이 틀어졌지만 어떤 감정의 편린도 남기지 않았다· 즉 후환을 남기지 않았다는 뜻이다· 하지만 조천우의 살벌한 기세로 봐서 결코 좋은 뜻을 가지고 길을 막은 것이 아닌 듯싶었다·
언제까지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었다· 용무성이 앞으로 나섰다· 그가 포권을 취하며 입을 열었다·
“조 대협 말학후배 용무성이라고 합니다·”
“····”
용무성의 말에도 조천우는 입을 열지 않고 오히려 서늘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와 눈빛을 마주하는 순간 용무성은 안구가 깨어지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그러나 용무성은 이를 악물고 조천우의 눈빛을 피하지 않았다· 그에 조천우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그가 입을 열었다·
“진무원이라는 자는 어디에 있느냐?”
“진무원?”
용무성이 자신도 모르게 이를 악물었다·
‘옥계의 참사 때문인가?’
패권회가 관련된 일이었다· 그 때문에 운중천에서 강력한 경고를 받고 봉문을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서 어느 정도 안심하고 있었는데 설마 조천우가 직접 나설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종리무환과 채약란의 표정도 그만큼 심각하게 변했다· 그들도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은 것이다·
“그는 지금 이곳에 없습니다·”
“흥! 거짓말을 하려는가? 분명 백룡상단과 함께 움직인다는 정보를 입수했거늘·”
“분명 그는 저희와 함께 움직였습니다· 하나 어젯밤에 저희를 떠나 이곳에 없습니다·”
용무성이 설명을 했지만 조천우는 믿지 않는 눈치였다· 그의 눈에서 광망이 폭사되어 나오기 시작했다·
조천우가 거대한 몸을 일으키자 산악 같은 기세가 일어났다· 무인들이 타고 있던 말들이 놀라 투레질을 하거나 날뛰면서 일대 소란이 일어났다·
“끝까지 거짓말을 하려는가? 감히 이 조천우에게?”
조천우의 등 뒤로 백여 명의 무인이 나타났다· 운중천의 감시를 피해 대동한 패권회의 최정예 무인들이었다· 무인들의 전신에서는 살기가 스멀스멀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들은 옥계에서 전멸한 설풍대 등의 조직과 오랫동안 교류해 온 사이였다· 그들은 동료들의 죽음에 분노하고 있었다·
“제가 어떻게 해야 믿으시겠습니까? 원하신다면 마차 안을 보여드릴 수도 있습니다· 샅샅이 수색해 보십시오·”
“이미 대책을 세워놓은 모양이군· 그런다고 내가 믿을 줄 아나?”
조천우는 용무성의 이야기를 아예 듣지 않았다· 그는 용무성이 수작을 부리고 있다고 생각했다·
조천우가 부하들을 바라봤다·
“놈들을 모조리 죽이도록· 그래도 놈이 나타나지 않는지 두고 보겠다·”
“존명!”
패권회의 무인들이 철기당과 백룡상단의 무인들을 향해 다가왔다· 그들은 살기를 숨기지 않았다·
종리무환이 용무성에게 속삭였다·
“우리가 어떤 말을 하던 저들은 결코 믿지 않을 겁니다·”
“그렇겠지·”
용무성이 이빨을 뿌득 갈았다·
그는 피할 수만 있다면 피해가고 싶었다· 아무런 대가 없는 위험을 감당하는 것은 그의 성격에 맞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조천우가 대놓고 노리는 이상 위험을 피해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때 이제껏 지켜보기만 하던 공진성이 앞으로 나섰다· 그가 조천우에게 정중하게 포권을 취했다·
“조 대협 소생 백룡상단의 호상단주인 공진성이라고 합니다· 무슨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진정하시고 대화를 하시면 안 되겠습니까?”
“백룡상단? 그 보잘것없는 이름으로 나를 겁박하겠다는 건가?”
조천우가 기세를 끌어올렸다· 그러자 공진성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상대의 기세만으로 내상을 입은 것이다·
조천우는 이미 말이 통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길(吉)과 흉(凶)은 동전의 양면 같다더니 둘이 항상 같이 오는구나· 이 공진성 오늘 목숨을 걸어야겠구나·’
그가 뒤쪽에 있는 마차를 바라봤다· 창문을 열고 이쪽을 바라보는 윤자명과 윤서인이 보인다· 그들을 위해서라도 물러설 수가 없었다·
공진성이 힘껏 외쳤다·
“모두 무기를 꺼내라! 백룡상단이 그렇게 녹록한 곳이 아니란 사실을 저들에게 보여줘라!”
백룡상단의 보표들이 분분히 무기를 꺼내 들었다· 보표들도 돌아가는 분위기를 읽고 있었다·
“썩을! 어째 잘 풀린다 했더니·”
“젠장할!”
옆에 있는 동료들의 마른침 삼키는 소리가 들린다· 이전과는 차원이 다른 위기감이 그들을 엄습하고 있었다·
쉬익!
패권회의 무인들이 달려들었다· 그들의 양 주먹에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빌어먹을! 권기를 발산할 수 있는 절정의 고수가 백 명이라니 더럽게 걸렸군·’
언제나 낙천적인 용무성이었지만 오늘만큼은 그럴 수가 없었다·
‘젠장! 이럴 때 그 녀석은 어디 간 거야?’
그는 자리에 없는 진무원을 처음으로 원망했다·
그 순간 패권회의 무인들이 덮쳐왔다·
조천우가 용무성을 보며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어디 오랜만에 한번 놀아볼까?”
“젠장! 지랄 맞구나·”
하진월이 투덜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저 앞쪽에서 무인들이 뒤엉켜 싸우는 모습이 보인다·
철기당의 무인들이 선전하고 있었지만 전체적인 전황은 압도적으로 불리했다· 일반 보표들로 패권회의 무인들을 막는다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었다·
“허 하필 그가 자리를 비우고 없을 때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당기문의 목소리가 절로 떨려 나왔다·
북천사주의 일원인 조천우가 나섰다· 그는 초절정을 오래전에 넘어선 고수 중의 고수였다· 그의 손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대로는 씨몰살을 당하겠군· 하필 내가 합류하자마자 이런 일이 일어나다니 운도 지지리 없지· 아니 내 운이 아니라 놈의 악운 때문인가? 일단은 놈이 올 때까지 버텨봐야겠구나·”
하진월의 말에 당기문의 눈이 빛났다·
“버텨? 방법이 있겠는가?”
“이제부터 만들어봐야지요·”
하진월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