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 5장 뜻이 같은 자, 같은 길을 간다 (3)
콰르릉!
굉음과 함께 만절곡이 무너지고 있었다·
거대한 전각이 아름드리나무가 무너지는 바위더미에 깔려 짓뭉개졌고 엄청난 먼지가 비산해 시야를 가렸다·
붕괴는 꽤 오랜 시간 지속되었다· 마침내 먼지가 모두 가라앉고 시야가 맑아졌을 때는 더 이상 만절곡은 존재하지 않았다· 엄청난 양의 바위로 이뤄진 커다란 동산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휘유! 대단하군·”
담주인이 그 광경을 보며 휘파람을 불었다·
이를 위해 벽력탄 수십 개와 천금이 소요됐다· 만절곡은 사라졌고 사람들은 이 안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없게 됐다· 그야말로 완벽한 뒤처리였다·
지난 며칠간의 고생이 헛되지 않았다· 담주인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뒤돌아섰다· 이젠 다시 운중천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허공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붉은 옷을 입은 무인이 나타나 그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당주님·”
“무슨 일인가?”
“변수가 발생했습니다·”
“변수?”
담주인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죽어야 할 자가 죽지 않았습니다·”
“그럼?”
“백룡상단의 윤자명이 의식을 회복했다고 합니다·”
“정말인가?”
“방금 확인했습니다· 아직 거동은 힘들지만 생각하고 말하는 데는 아무런 지장도 없다고 합니다·”
담주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수하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의 뒤처리는 완벽한 게 아니었다·
“설마 그가 해약을 찾아낸 것인가?”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다만 매우 특별한 방법이 동원된 것 같습니다·”
“특별한 방법이라····”
“현재 면밀히 관찰하고 있으니 곧 어떻게 해독한 것인지 알아낼 수 있을 겁니다·”
“반드시 방법을 알아내야 한다·”
항상 웃기만 하던 담주인의 얼굴이 처음으로 섬뜩하게 변했다· 일의 특성상 그는 항상 가면을 썼다· 웃음이란 이름의 가면을· 그리고 오늘 처음으로 그의 가면에 균열이 일어났다· 그만큼 수하가 보고한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당기문 당가의 만독각주라더니··· 역시 명문의 저력은 무시할 것이 아니군·”
명문이 수대 수십 대에 걸쳐 쌓아온 지식의 기반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두꺼우면서도 폭이 넓었다· 특히 당가처럼 수백 년을 명문으로 군림해 온 무가의 저력은 실로 놀라울 정도였다·
“그리고····”
“놀랄 게 또 남아 있는가?”
“권마가 모습을 감췄습니다· 명목은 폐관 수련을 한다는 것인데 패권회 어디서에도 그의 모습이 감지되지 않습니다·”
“조천우가?”
뜻밖의 보고에 담주인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쪽은 허 장로가 맡지 않았던가?”
“그 때문에 허 장로님도 꽤 당황하시는 눈치입니다·”
“흐음!”
담주인이 손가락으로 턱을 톡톡 두드렸다· 고민이 있을 때 나타나는 그의 유일한 버릇이다·
한참을 턱을 두드리던 담주인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이쪽에서 그쪽 일까지 신경 쓸 여력은 없어· 허 장로가 알아서 처리하도록 내버려 두도록· 앞으로 적무당은 당기문이 어떻게 윤자명을 해독했는지 알아내는 데 총력을 기울인다·”
“알겠습니다·”
대답과 함께 수하가 담주인의 눈에서 사라졌다·
이제부터 수십 개의 눈이 당기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얻은 정보는 모두 담주인에게 전해질 것이고 다각도로 분석될 것이다·
“큭! 재미없게 됐군·”
☆ ☆ ☆
백룡상단은 아직 상태가 온전치 않은 윤자명을 위해 커다란 마차를 마련했다· 특별 주문한 마차는 침상이 들어갈 정도로 크고 안락했다·
마차 안에는 윤자명 윤서인 남매 그리고 당기문 당미려 숙질이 들어갔다· 아직 윤자명이 완전히 회복된 상태가 아니었기에 운남성 접경까지만 동행하면서 당기문이 상태를 지켜볼 계획이었다·
호위는 올 때와 마찬가지로 철기당과 보표들이 하기로 했다· 임무를 완수했기 때문인지 용무성을 비롯한 철기당 무인들의 표정은 유난히 밝아 보였다·
진무원과 황철 등은 일행의 맨 뒤에 처져 따라갔다· 윤자명은 극구 사양하는 진무원의 품에 거액의 전표를 찔러 넣어줬다· 덕분에 진무원은 뜻하지 않게 부자가 된 상황이었지만 정작 그 자신은 크게 실감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럼 출발하지·”
용무성의 외침에 마차 행렬이 북쪽으로 출발하기 시작했다· 올 때와 달리 한결 가벼워진 분위기에 보표들의 얼굴에도 미소가 감돌았다·
행렬이 출발하자 황철은 곽문정과 딱 붙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에게 자신의 심득을 나눠 주기 위해서였다· 같은 삼원심법을 익혔기에 곽문정은 황철의 가르침을 빠르게 흡수했다·
진무원이 주위를 돌아봤다· 당장 눈에 띄지는 않지만 보표들 가운데 청인이 능청스러운 표정으로 섞여 있을 것이다· 굳이 그를 찾을 필요는 없었다· 때가 되면 알아서 그가 나타날 것이다·
‘이제 운중천으로 갈 일만 남은 것인가?’
그때 누군가 진무원의 옆으로 다가왔다· 그는 용무성이었다·
“어이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는 겐가?”
“그냥 이것저것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생각이 많은가 보군· 흐흐!”
기분이 좋은 듯 용무성의 얼굴에 특유의 미소가 떠올라 있다·
“무슨 일이십니까?”
“자네도 소문 들었나?”
“소문?”
“운중천에서 젊은 무인들을 끌어 모은다는 소문 말이야·”
“들었습니다·”
“역시 들었군·”
용무성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사라졌다·
“그래서 자네는 어떻게 할 생각인가?”
“일단은 운중천에 가볼 생각입니다·”
“왜 자네도 그 조직에 관심이 있는 건가?”
진무원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용무성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왜?”
“알아볼 일이 있습니다· 운중천이 사람을 모집하는 것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그렇군·”
“그건 왜 물어보십니까?”
“사실 나도 운중천으로 가볼 생각이거든·”
“철기당도 이번에 만든다는 조직에 관심이 있는 겁니까?”
“구미가 당기는 것은 사실이지만 들고 싶은 생각은 없어· 나도 개인적인 이유 때문에 가려는 거야·”
“백룡상단은 어찌하구요?”
“무슨 일이 있어도 난주까지는 호위해야지· 그런 후에 바로 운중천으로 향할 생각이라네·”
용무성의 표정은 무척이나 심각했다· 무슨 사정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물어보지는 않았다·
“그럼 운중천에서 또 만나게 되겠군요·”
“아마도·”
용무성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종리무환과 채약란 등이 그를 보고 있었다·
운중천으로 향하는 것은 비단 그의 뜻만은 아니었다· 철기당 모두의 뜻이었다·
“어쨌거나 자네 숙부는 걱정하지 말라구· 내가 무사히 난주에 모실 테니까·”
“감사합니다·”
“그럼 나는 선두로 가보겠네·”
용무성이 말을 몰아 선두로 갔다· 진무원은 잠시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눈을 감았다·
그는 순식간에 심상의 세계로 함몰되어 갔다· 황철에게도 깨달음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듯 그에게도 그만의 시간이 필요했다·
남군위와 금단엽· 두 사람과의 싸움은 그에게 승리의 영광을 안겨주었지만 반대로 부족한 부분을 절감하게 만들었다·
특히 금단엽과의 싸움이 그랬다· 금단엽의 음공은 진무원에게 큰 과제를 안겨주었다·
불특정 다수를 살상하는 광범위한 위력도 놀라웠지만 더 대단한 것은 음파를 단 한 명에게 집중시킬 때였다·
금단엽의 천붕멸절음은 진무원에게 큰 내상을 안겨주었다· 만일 그의 성취가 조금만 더 높았다면 승패를 자신할 수 없었다·
‘단순한 검술로는 천붕멸절음을 상대할 수 없다· 그렇다고 그때처럼 검명(劍鳴)으로 또다시 음파를 방해할 수 있다는 보장도 없다· 어떻게 해야 효율적으로 음공을 상대할 수 있을까?’
진무원은 금단엽과 상대하던 순간을 떠올렸다·
그때는 장소가 지하 공동이었다· 반사되고 증폭되는 음향의 특성 때문에 상대하는 것이 더 힘들었다·
‘지하 공동은 금단엽에게 유리하고 나에겐 극단적으로 불리한 공간· 그는 음파의 위력을 극대화시켰고 반대로 나는 기동력을 빼앗겨서 고전을 면치 못했다· 결국 그와 같은 상대와 싸울 때는 지리적으로 유리한 곳을 선점하는 것이 중요하겠구나·’
그것은 사실 매우 조그만 깨달음이었다· 하지만 배움에 목마른 진무원에겐 큰 깨달음이기도 했다·
본래 큰 변화는 조그만 깨달음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하 공동에서 기동력을 살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또 나에게 집중되는 음파를 해소시키려면?’
진무원의 상념은 끝없이 이어졌고 상상의 나래는 무한의 날개를 활짝 펼쳤다·
그의 머릿속에서는 금단엽과의 싸움이 되풀이되고 있었다· 그 속에서 진무원은 끝없이 상황을 수정하고 있었다· 상황이 바뀔 때마다 진무원이 싸우는 방식 또한 달라졌다·
진무원은 그렇게 끊임없이 자신을 변화시켰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갑자기 마차의 행렬이 멈춰 서자 진무원은 눈을 떴다·
“무슨 일입니까?”
“저 앞에 누군가 길을 막고 있는 모양입니다·”
보표의 대답에 진무원이 말을 몰아서 앞으로 나갔다· 그 뒤를 황철과 곽문정이 따랐다·
행렬 앞쪽으로 다가가자 커다란 수레가 길 앞을 막고 있는 것이 보였다· 수레를 끌고 있는 것은 소였다· 그것도 보통 소의 배는 될 법한 무식할 정도로 거대한 누런 소·
누런 소가 끄는 수레 위에 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수레 위에는 거하게 술상이 차려져 있었다· 남자는 이미 한잔했는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상의를 거의 다 풀어헤친 채 연신 부채질을 하고 있었다· 그가 진무원을 발견하고는 손을 흔들었다·
“어이!”
그는 하진월이었다·
진무원은 그의 시선을 외면했다·
“누구에요?
옆에 있던 곽문정이 호기심 어린 얼굴로 물어왔지만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왠지 부끄러웠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