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 4장 늙은 용은 추락하고, 젊은 용들은 비상을 꿈꾼다 (3)
진무원은 대진객잔을 빠져나와 홀로 거리를 걸었다·
옥계에 사는 사람들은 아직도 그날의 충격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거리엔 사람의 모습이 거의 보이지 않아서 마치 버려진 도시 같았다·
거리 곳곳엔 아직도 그날의 흔적이 강하게 남아 있었다· 벽엔 무기가 부딪친 흠집이 선명했고 바닥엔 아직 지워지지 않은 핏자국이 참혹하던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간혹 거리를 지나다니는 사람들도 진무원이 설화를 들고 있는 모습을 보곤 저 멀리 돌아가곤 했다· 그만큼 옥계 사람들에게 무인은 공포의 대상이었다·
진무원은 발길이 닿는 대로 걸음을 옮겼다· 당기문이 윤자명을 치료할 방법을 알아낼 때까지는 그가 특별히 할 일이 없었다·
황철은 오랜만에 만난 곽문정에게 자신이 얻은 깨달음을 조금이라도 전해주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때로는 타인을 가르치면서 새로운 깨달음을 얻기도 하는지라 진무원은 될 수 있으면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지 않으려 했다·
정처 없이 걸음을 옮기던 진무원이 문득 뺨에서 느껴지는 찬바람에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꽤 넓은 호수가 눈에 들어왔다· 자신도 모르게 옥계 근처의 호수에 도착한 것이다·
“응?”
그런데 그의 시야에 무척이나 이색적인 광경이 들어왔다·
호수 위에 조그만 배들이 몇 척 떠 있었다· 조그만 배들은 그나마 그중 가장 큰 배 위에 있는 남자가 깃발로 무어라 지시할 때마다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저 사람은?”
깃발을 들고 있는 남자는 그도 익히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삼뇌수사 하진월· 그가 배 위에서 고래고래 소리치고 있었다· 진무원의 얼굴에 절로 미소가 걸렸다· 왜 그런지 몰랐다· 그냥 하진월을 보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난 것이다·
진무원은 호숫가에 서서 하진월이 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하진월은 배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무언가를 시험해 보는 듯했는데 결과물이 그리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그가 갑자기 들고 있던 깃발을 던지고는 갑판에 주저앉아 한참 동안이나 수면을 노려보았다· 그 모습이 보통 심각한 것이 아니었기에 뱃사공들은 물론이고 진무원도 숨을 죽인 채 지켜보았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으아아! 제기랄! 정말 모르겠다!”
갑자기 그가 큰 소리와 함께 그대로 벌렁 누웠다· 대자로 누워 하늘을 한참이나 올려보던 그의 얼굴에 갑자기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엉?”
“여전하시군요·”
“네놈 아직도 옥계를 떠나지 않았냐?”
하진월의 얼굴에 드리운 그림자의 주인은 진무원이었다·
하진월이 냉큼 몸을 일으켜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그러자 진무원도 그의 맞은편에 털썩 주저앉았다·
하진월이 팔짱을 낀 채 진무원을 노려봤다· 진무원은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하진월의 눈빛에서 악의가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네놈 때문에 말이 많은 건 알고 있겠지?”
“그렇습니까?”
“북검이라며? 아주 광오한 별호야·”
“저도 모르게 그렇게 불리더군요·”
“원래 소문의 주인공만 자신의 이야기를 모르는 법이지·”
하진월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진무원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은 처음에 만났을 때보다 많이 누그러져 있었다·
하진월이 문득 뱃사공을 향해 소리쳤다·
“아까 준비했던 술상을 가져오게! 목이 텁텁하구먼!”
“예!”
뱃사공의 대답이 들려왔다·
“술상도 준비해 놨습니까?”
“흥! 뱃놀이를 하려면 당연히 준비해야 하는 거 아냐?”
“딱히 뱃놀이를 하는 거 같지는 않습니다만·”
“봤냐?”
“예·”
진무원의 대답에 하진월이 피식 웃으며 손가락으로 수면을 가리켰다· 그의 손가락을 따라 수면을 보던 진무원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수의 물고기가 수면 아래 득실거리고 있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어망에 갇힌 것처럼 물고기들은 한 자리에 갇혀 퍼덕이고 있었다·
“진··· 법입니까?”
진무원의 목소리가 절로 떨려 나왔다·
그도 진법을 어느 정도는 펼칠 줄 안다· 원리도 어느 정도 꿰뚫고 있고 시간만 충분히 주어진다면 꽤 수준 높은 진법도 펼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그조차 조각배 몇 대를 이용해 수면 아래의 물고기를 가둘 수 있을 정도의 광대하면서도 정묘한 진법을 펼칠 수 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흥! 쓸데없는 잡기지·”
하진월이 코웃음을 치며 다른 배들을 향해 손을 휘저었다· 신호를 받은 배들이 제 위치를 벗어나 호숫가로 향했다· 그러자 한곳에 뭉쳐 있던 물고기들이 물보라를 일으키며 사방으로 흩어져 순식간에 종적을 감췄다·
‘이 정도 진법이 쓸데없는 잡기라니·’
이쯤 되니 어지간한 진무원도 하진월에게는 질릴 정도였다·
그때 뱃사공이 술상을 두 사람 사이에 내려놨다· 하진월은 술잔에 술을 가득 따라 진무원에게 건네준 후 자신의 잔에도 술을 가득 따랐다·
“마셔라·”
진무원은 거부하지 않고 술잔을 들이켰다· 독한 화주였다· 식도가 화끈한 것이 단숨에 취기가 올라올 정도였다· 하진월 정도의 남자가 왜 이런 싸구려 독주를 마시는지 알 수 없었다·
진무원은 하진월의 술잔에 술을 가득 따른 후 자신의 잔에도 가득 채웠다·
“흐흐! 앞에 앉은 게 사내새끼라서 그렇지 나쁘지 않아· 뭐 어여쁜 계집이었으면 더 좋았겠지만·”
“저도 그렇습니다·”
“흐흐!”
두 사람은 그렇게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했고 금방 술 한 병이 동이 났다· 그러자 뱃사공이 잽싸게 술 한 병을 더 내왔다·
두 사람의 얼굴은 취기로 금세 붉게 달아올랐다·
“곧 중원으로 가겠구나?”
“그럴 생각입니다·”
“흠!”
하진월이 진무원을 빤히 바라보았다· 괜히 얼굴이 간지러웠지만 진무원은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거참 재밌단 말이야·”
“뭐가 말입니까?”
“네놈 말이야· 어디서 너 같은 놈이 갑자기 툭 튀어나왔을까?”
무려 밀야와 패권회의 싸움이었다· 평범한 무인들은 개입할 엄두는커녕 도주하기도 바쁜 그런 엄청난 싸움이었다· 그런데 진무원은 단순히 개입한 것이 아니라 양측의 싸움을 홀로 종식시켜 버렸다· 그야말로 엄청나다는 표현밖에 사용할 수 없는 무력이었다·
하진월은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지식을 떠올렸지만 기존의 문파에서 진무원과 같은 자가 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진무원 정도의 재능을 가지고 있다면 어린 시절부터 소문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당금 강호 최고의 기재들이라는 칠소천도 어린 시절부터 두각을 나타내지 않았던가? 그렇게 본다면 진무원은 확실히 별종이었고 흥미가 일 수밖에 없는 존재였다·
문득 하진월이 물었다·
“네놈 천하를 꿈꾸느냐?”
“천하?”
진무원은 답하지 못했다· 아니 할 수가 없었다·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명제였기 때문이다·
진무원은 한참 동안이나 침묵을 지켰고 하진월은 그런 진무원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마침내 진무원이 입을 열었다·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히 알고 있습니다·”
“그게 무엇이냐?”
“제 목소리를 배반하지 않겠다는 것만은 확실합니다·”
“네 목소리?”
“제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 가슴의 울림대로 살아갈 겁니다·”
“몽상가구나·”
“그럴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그렇게 살고 싶습니다·”
“가슴의 울림대로 살아간다?”
진무원의 말은 하진월의 가슴에도 묘한 울림을 전해주고 있었다·
‘자신의 목소리를 배신하지 않는단 말이지? 내 목소리는? 나의 바람은 무엇이지?’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졌다·
진무원의 대답은 그에게 생각지도 못한 질문을 던졌다· 하진월은 답을 구하기 위해 눈을 감았다·
진무원은 그 모습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 하진월이 눈을 떴다· 진무원은 순간 하진월의 눈에 어려 있던 안개가 걷힌 듯한 느낌을 받았다·
하진월의 입가에 웃음이 어렸다·
“네놈 반드시 운중천으로 가거라·”
“운중천?”
“그곳에서 아주 재밌는 일이 벌어질 게다·”
“딱히 가고 싶지는 않습니다만·”
“아니 반드시 가야 해·”
“왜입니까?”
“흐흐! 왜냐면 내가 갈 테니까· 길을 안내해 줄 길동무가 필요해·”
“그런····”
진무원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반대로 하진월은 진무원이 반드시 자신의 말을 들어줄 거라고 확신하고 있는 표정이었다·
“반드시 운중천에 가야 할 이유라도 있습니까?”
“빚을 청산하기 위해 만나야 할 계집이 있거든·”
“계집?”
“그렇게만 알고 있거라· 만나면 너한테도 소개시켜 줄 테니까 궁금해도 참아·”
진무원이 눈살을 찌푸렸다·
‘운중천 운중천이란 말이지·’
이제껏 황철을 구하는 것에만 집중하느라 운중천에 관해서는 미처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북천문을 멸망하게 한 주역들이 모여 있는 곳이다· 세칭 아홉 하늘이라는 초고수들이 지배하는 곳· 강호의 축소판이고 젊은 무인들이 들어가길 꿈꾸는 곳이 바로 운중천이다·
‘좋든 싫든 나는 밀야와 깊이 얽혀 있다· 아무래도 밀야에 대한 정보를 얻으려면 운중천에 들러야 할 것 같구나·’
“휴!”
진무원이 한숨을 내쉬자 하진월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씨익 웃었다·
“흐흐! 잘 생각했다·”
“언제쯤 출발하실 생각입니까?”
“네놈이 출발할 때·”
“시간이 조금 걸릴 수도 있습니다·”
“상관없어· 보다시피 소일거리는 많으니까·”
“알겠습니다· 제가 출발할 때 따로 연락 드리겠습니다·”
“연락할 거 없어· 네놈이 출발할 때 내가 알아서 나타날 테니까·”
“그리고····”
“뭐?”
“그 호칭 어떻게 안 되겠습니까? 좋은 이름 놔두고····”
“난 네놈이 좋아· 아직까지 네놈은 나에게 딱 그 정도 수준이니까· 네놈이 조금 더 이름을 날리게 되면 그때 가서 새로운 호칭을 생각해 보지·”
“휴!”
진무원이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상하게 하진월의 말투가 거슬리거나 밉지 않았다· 그것도 재주라면 재주일 터다·
진무원은 남은 술을 입에 털어 넣었다· 하진월도 미소를 지으며 술잔을 비웠다· 그렇게 마지막 술 한 방울까지 동이 나자 진무원이 몸을 일으켰다·
“그만 가보겠습니다· 아무래도 일행이 걱정할 거 같군요·”
“흐흐! 네놈 정도의 무력을 가진 놈을 누가 걱정하겠느냐?”
“····”
“뭐 그래도 시간이 늦었으니 어서 가보거라· 배웅은 하지 않겠다·”
“그럼·”
진무원이 포권을 취한 후 호숫가를 향해 몸을 날렸다· 그런데도 하진월이 타고 있는 배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진무원의 모습이 금세 시야에서 사라졌다·
하진월이 갑판에 드러누워 하늘을 올려다봤다· 어느새 어둠이 내린 하늘에는 수많은 별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놈이 나타나면서 천기가 변하고 있어·”
그의 망막엔 별의 바다가 가득 담겨져 있었다·
별들은 나름의 질서를 가지고 정해진 궤도로 움직이고 있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그런 질서가 깨지고 별들의 궤도가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
등장만으로 천기마저 변하게 하는 자는 그리 많지 않았다·
“시대를 움직이는 영웅 아니면 역천을 꿈꾸는 야심가· 과연 어떤 길을 걸을지····”
그가 미소를 지었다·
진무원을 만나고 나서 한결 개운해진 기분이다·
“하하!”
그의 웃음이 호수 위에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