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 2장 목숨, 그 이상의 가치 (3)
콰앙!
굉음과 함께 백가장원의 가장 큰 전각인 청명전(靑明殿)이 폭삭 무너지며 엄청난 양의 먼지를 피워 올렸다·
“아아!”
간발의 차이로 청인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청명전 안에는 그가 빠져나온 비밀 통로가 존재했다· 청명전이 무너졌다는 것은 지하의 공간이 완전히 붕괴되었다는 말이나 마찬가지였다·
아직도 그의 눈에는 공포의 빛이 그대로 담겨 있었다· 빠져나오는 것이 조금만 늦었어도 청명전의 잔해에 그대로 짓눌려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그는 어떻게 되었을까?”
청인이 진무원을 떠올렸다·
흑익신창과 진무원의 싸움은 단순한 무인들의 대결이 아니었다·
밀야와 북천문이라는 잊힌 전설이 다시 부활했다· 그들이 일으킨 격류에 수많은 이가 휩쓸릴 것이 분명했다· 좋든 싫든 그 역시 진무원과 관계됨으로써 격류에 휩쓸리게 됐다·
청인의 어깨가 가늘게 떨렸다·
“이전까지 흑월이 수집한 정보는 이제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됐다· 모든 정보는 이제 원점에서 다시 재검토되어야 한다·
가슴에 거대한 바윗덩이를 올려놓은 것처럼 무거웠다· 그 홀로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가혹한 시련이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무너진 청명전의 잔해가 들썩이기 시작했다· 청인이 긴장하며 양손에 공력을 끌어올렸다·
그 순간 잔해 속에서 손 하나가 불쑥 튀어나왔다· 뒤를 이어 회색 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살아 있었구나·”
그의 모습을 확인하는 순간 청인은 그만 제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청명전의 잔해를 뚫고 나타난 이가 바로 진무원이었기 때문이다·
진무원의 모습은 처참하기 이를 데 없었다· 채 딱지가 만들어지지 않은 채 입을 벌린 상처 위에는 회색빛 먼지가 가득했고 적갈색 무복은 마치 걸레처럼 해져 있었다·
“크윽!”
진무원이 나직한 신음성을 흘리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런 그의 옆구리에는 동전 크기만 한 구멍이 뻥 뚫려 있었다· 구멍을 중심으로 나선형으로 상처가 찢겨 있어 더욱 처참하게 보였다·
급히 혈도를 눌러 지혈을 했지만 피는 쉽게 멈추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본 청인은 급히 진무원을 향해 다가갔다·
“이봐 괜찮아?”
“전혀·”
진무원은 고개를 저으며 품에서 목함을 꺼냈다· 목함을 꺼내는 손이 덜덜 떨리고 있다· 그만큼 그의 몸 상태는 최악이었다·
홍은신단(紅銀神丹)·
당기문이 그에게 준 선물이다·
진무원은 급히 홍은신단을 복용한 후 운기를 하기 시작했다· 청인은 그런 진무원의 모습을 복잡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이 남자가 북천문의 후인이라니····’
이전까지만 해도 그는 그냥 강한 무인 중 한 명이었다· 그가 아무리 강하다고 하더라도 천하의 정세에 끼치는 영향은 극히 미미했다· 하지만 북천문의 후인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아직도 강호에는 북천문을 그리워하는 이가 많이 남아 있었다· 그들이 진무원을 중심으로 뭉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몰랐다·
‘아니 그전에 운중천에 의해 제거될 거야·’
진무원은 운중천에 큰 부담이었다· 그가 살아 있는 것을 결코 탐탁지 않게 여길 것이 분명했다·
청인의 머리가 팽팽 돌아갔다· 그는 진무원이라는 존재가 현 강호에 미칠 영향과 미래를 예측하느라 눈이 빠질 지경이었다·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 청인은 결론을 내렸다·
‘앞으로 어떻게 되든 간에 우선은 이 남자가 북천문의 마지막 후인이란 사실을 은폐해야 해·’
그렇지 않아도 밀야의 등장 때문에 혼란해질 터이다· 불안감이 들불처럼 번질 텐데 거기에 진무원이라는 기름까지 뿌릴 수는 없었다·
‘이자의 과거를 새로 만들어내야 한다· 언제까지 운중천을 속일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당분간은 그들의 눈을 가려야 한다·’
흑월이 총력을 기울인다면 진무원의 과거를 재창조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흑월은 분명 그럴 만한 능력이 있었으니까· 문제는 흑월주가 자신의 의견을 받아 들이냐 하는 것이다·
‘아니야 그는 분명 받아들일 거야· 그 역시 이 이상의 혼란이 오는 것은 원치 않을 테니까·’
청인의 마음이 급해졌다·
그가 복잡한 시선으로 진무원을 바라봤다·
진무원이 몰고 온 바람이 세상을 어떻게 변하게 만들지 두렵기까지 했다·
‘북쪽에서 온 검객··· 북검(北劍)이여 과연 당신은 난세의 재앙이 될 것인가 아니면 세상을 비추는 한줄기 등불이 될 것인가?’
그의 탄식이 바람에 흩어져 갔다·
☆ ☆ ☆
운남에서 바람이 불어왔다· 바람결에 실려 온 소문들은 실로 믿을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밀야의 재등장·
십 년 전 북천문에 잠시 나타났던 것을 마지막으로 완전히 종적을 감춘 밀야가 다시 세상에 나타난 것이다·
밀야와 패권회의 싸움에 수많은 백성이 죽거나 다쳤고 그 때문에 옥계는 죽음의 도시가 되었다는 것이 소문의 요체였다·
출처가 불분명한 소문은 마치 들불처럼 중원 전역으로 번져 나갔고 사람들은 공포에 떨어야 했다· 수십 년의 세월이 지나면서 희석되었다고 생각한 공포는 다시금 생생하게 되살아났고 운중천에는 비상이 걸렸다·
그 와중에 믿을 수 없는 소문이 하나가 더 퍼져 나갔다·
북쪽에서 온 젊은 검객에 관한 소문이 바로 그것이었다·
그가 처음 나타난 곳은 감숙과 사천의 접경 지역인 공동파의 영역이었다· 그곳에서 그는 공동파의 일대제자 다수와 시비가 붙어 이겼고 대제자인 무진마저도 제압했다고 한다·
그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신비한 검공(劍功)을 사용했는데 젊은 무인 중에는 적수를 거의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대단하다고 했다·
당가의 무인들을 구하기 위해 적귀병단과 싸운 일이나 옥계에서의 활약은 그야말로 눈부신 것이어서 과연 젊은 무인 중 그와 비견될 자가 있을까 하는 이야기까지 나돌았다·
진무원이라는 이름 석 자와 북쪽에서 왔다는 것 외에는 모든 것이 신비에 가려진 젊은 무인·
사람들은 그리 가리켜 북검(北劍)이라 불렀다·
당금 강호의 최고 기재라는 칠소천에 비견될 만한 젊은 무인· 어떤 이들은 북검이 그들을 훨씬 능가할 거라고 호들갑을 떨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그 정도까지는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칠소천은 단순히 무공만 강한 젊은 기재들이 아니었다· 그들에게는 엄청난 배경과 정치적인 후광이 존재했다· 단순히 무공만 강한 것을 가지고 그들과 비교하는 것은 무리라는 의견이 대다수를 이뤘다·
하지만 북검의 무공이 근래 등장한 젊은 무인 중 수위를 다툴 정도로 대단하다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이 인정했다·
밀야의 재등장과 때를 맞춰 강호에 나타난 북검은 여러모로 사람들의 호기심을 끌기에 충분했고 강호 호사가들의 입에 북검이란 별호가 언급되기 시작했다·
진무원에 대해 소문을 낸 자는 바로 청인이었다· 그가 흑월의 힘을 이용해 중원 전역에 진무원의 소문을 퍼뜨린 것이다· 그 때문에 요 며칠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렇게 진무원은 강호의 역사 전면에 등장했다· 하지만 정작 진무원은 자신에 대한 소문이 그렇게 퍼져 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에게 지금 중요한 일은 소문 따위가 아니라 황철을 구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간단하게 몸 상태를 점검했다·
당기문의 홍은신단 덕분에 내상은 거의 완치된 상태였다· 오히려 홍은신단의 도움을 받아 내공의 상승을 이뤘고 어지간한 독물에는 중독되지 않을 만큼 내성도 갖게 됐다· 이제는 외상도 거의 아물어서 움직이는 데 지장도 없을 것 같았다·
그때 곽문정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의 손에는 넝마가 되다시피 한 적갈색 무복이 들려 있었다·
“형 다 기웠어요·”
그가 자랑스럽게 적갈색 무복을 펼쳐 보였다· 그러자 수많은 바느질 자국이 보인다·
진무원의 무복이었다· 수많은 격전을 치르면서 해지고 찢어진 무복을 곽문정이 밤새 기운 것이다· 비록 솜씨가 엉망이라서 거칠기 짝이 없었지만 그 마음만큼은 진무원을 감동시키기 충분했다·
진무원은 망설임 없이 곽문정이 내민 무복을 입었다· 멀쩡한 부분보다 바느질한 부분이 더 많은 것이 족히 백 군데는 기운 것 같았다·
“백결무복이 따로 없구나· 고맙다·”
“헤헤!”
황철이 선물한 옷이란 것을 알고 밤새 꿰매고 기운 곽문정의 마음이 고마웠다·
비록 며칠 지나지 않았지만 곽문정은 눈에 띄게 성장한 모습이었다· 우선 눈빛이 예전보다 깊어졌고 표정에도 신중함이 엿보이고 있었다·
밀야와 패권회의 전투는 어린 곽문정에게도 큰 충격을 주었고 스스로를 돌아보는 시간이 되었다· 진무원이 요상에 신경 쓰는 동안 곽문정도 무공 수련에 열중했다·
그에겐 이전에 없던 절실함이 생겼다· 절실한 만큼 무공에 파고들었고 단 며칠간의 수련에도 성취가 눈에 띄게 높아졌다·
진무원은 그런 곽문정의 변화를 기껍게 받아들였다· 무슨 일이든 마지막이라는 절박한 심정으로 달려드는 사람한테는 당할 장사가 없었다·
진무원은 설화를 허리에 찬 후 밖으로 나왔다· 곽문정이 그 뒤를 따랐다·
마당에는 낯선 노인이 빗자루로 마당을 쓸고 있었다· 진무원이 갑자기 그에게 인사를 했다·
“고맙습니다·”
“어 엉? 자네 나를 아는가?”
진무원이 대답 대신 미소를 짓자 노인의 얼굴이 팍 일그러졌다·
“미치겠네· 어떻게 알아본 거야? 내 역용술이 그렇게 허접하진 않을 텐데·”
뒤통수를 박박 긁는 노인은 바로 청인이었다·
진무원의 옆에서는 곽문정이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또다시 바뀐 청인의 얼굴이 도통 적응이 안 되는 것이다· 그는 진무원이 어떻게 그렇게 청인을 쉽게 알아본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곽문정만큼이나 청인 역시 당혹스럽긴 마찬가지였다· 자신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든 간에 진무원은 너무나 쉽게 알아보았다· 그 때문에 다른 이들에게 시험해 봤지만 아무도 알아보지 못했다· 그만큼 그의 역용술은 완벽했다· 단지 진무원이 비정상일 뿐이다·
그들이 있는 곳은 처음 옥계에 들어온 날부터 머물던 대진객잔이었다· 그날의 사건으로 옥계의 많은 건물이 부서지거나 불탔지만 대진객잔은 다행히도 화를 피해갔다·
그때 왁자지껄한 소리와 함께 일단의 무리가 대진객잔으로 들어섰다· 연이어 다섯 대의 마차와 말을 탄 무인 수십여 명이 들어왔다·
그들의 모습을 확인하는 순간 진무원과 곽문정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그들의 모습이 낯익었기 때문이다·
무리 중 한 명이 진무원과 곽문정을 발견하고 다가왔다·
“여 자네도 여기에 머물고 있었나? 이거 무지 반갑구만· 흐흐!”
“용 당주님·”
넉살좋게 웃음을 흘리는 이는 바로 철기당주 용무성이었다· 그와 함께 온 이들은 바로 철기당과 백룡상단의 무인들이었다·
종리무환과 철기당의 무인들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진무원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의 곁에는 백룡상단의 공진성과 윤서인이 있었다·
진무원이 그들을 향해 말없이 포권을 취해 보이자 그들도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포권을 취했다·
“자네 여기 머물고 있었던 건가? 그렇지 않아도 이곳에 오는 동안 자네 명성을 들었네·”
“명성?”
“모르고 있었는가? 강호에 신성이 나타났다고 난리도 아니네· 자네의 별호가 무언지 아는가? 북검(北劍)이야 북검·”
용무성의 이야기를 듣는 순간 떠오르는 것이 있어 진무원은 청인을 바라봤다· 그러자 청인이 마당을 쓰는 시늉을 하며 진무원의 시선을 외면했다·
“무슨 낙엽이 이리 많이 떨어진다냐? 쓸어도 쓸어도 끝이 없네· 크흠!”
그 능청스러운 모습에 곽문정이 남몰래 킥킥 웃었다·
“어쨌거나 이리 다시 만나게 되니 반갑구만·”
“패권회에서 원하던 정보는 얻었습니까?”
“말도 말게· 패권회가 난리가 나는 바람에 거의 쫓겨나다시피 했다네·”
진무원의 물음에 용무성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무슨 일 있었습니까?”
“패권회와 의견 조율이 거의 끝났는데 갑자기 운중천의 무인들이 들이닥치더군· 운중천에서는 이번 옥계에서 일어난 참사의 원인 중 상당 부분이 패권회에 있다고 보는 것 같더군· 패권회는 당분간 외부의 일에 신경 쓰기 힘들게야·”
그렇지 않아도 옥계의 참사 때문에 세간의 시선이 곱지 않은 패권회였다· 패권회에 불리한 증거들이 속속 발견되고 있는데 책임자인 엽평이 죽으면서 해명을 해야 할 사람이 사라진 것이다·
그 때문에 패권회와 운중천에서 파견된 무인들 사이엔 험악한 기운이 감돈다고 했다·
“물론 그 때문에 양측이 갈라지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당분간 감정의 골이 크게 벌어져 간극을 메우기가 쉽지 않을 게야· 아주 골 때리게 됐지·”
진무원의 표정이 굳었다·
금단엽이 뿌렸다는 씨앗은 어쩌면 벌써 개화한 것인지도 몰랐다· 세상은 점점 더 혼란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밀야를 세상으로 끌어내기 위한 난세 그것이 당신의 목숨보다 소중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