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밤이 끝나고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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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테일리가 눈을 뜬 곳은 덱스관의 의무실이었다.
거의 하루가 넘게 잠들어 있었던 테일리다. 안 그래도 무리했던 몸이, 아예 굳을 대로 굳어서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허억…!”
불현듯 테일리는 여기저기 쑤셔오는 몸을 일으켰다. 완전히 의식을 잃기 직전에 보았던 광경이 아직도 뇌리에 강하게 남아있다.
엘테 상회를 전부 뚫고 넘어가서, 에드한테까지 도달해서 결국 그를 꺾었다. 그리고 마지막에 나타난 루시한테 완전히 제압당하기 직전에, 아일라가 나타나서 그를 끌어안았다.
아일라의 얼굴을 보자마자 밀려오는 안도감에, 완전히 정신을 잃어버린 것이다.
“…”
그렇게 잠시 몸을 가누자, 자기 무릎 언저리에서 침대에 고개를 묻은 채 잠들어 있는 아일라가 눈에 들어왔다.
여기저기 생채기가 난 모습이지만, 크게 다친 곳은 없어보였다. 그제야 테일리는 안도의 숨을 내쉬면서, 다시 침대의 등받이에 몸을 기댈 수 있었다.
덱스관의 시설은 다소 낙후되어 있지만, 그래도 구조 자체는 깔끔하다.
쌔근쌔근대며 숨을 내쉬고 있는 아일라의 너머로 보이는 거대한 창문.
보고만 있어도 시원스럽게 통풍이 잘 될 것 같은 그 거대한 창문 옆에선 순백색 커튼이 흩날리고 있었다.
오전의 한산한 바람이 들어오는 따사한 광경에 테일리는 조금이나마 마음이 누그러지는 기분이 들었다.
“다행이다….”
그런 독백을 하며, 얼굴을 한 번 쓸어내렸다.
간밤에 정말 많은 일이 있었지만, 어쨌든 아일라는 무사할 수 있었다.
일단 그 사실을 확인했으니, 나머지는 천천히 생각하면 될 일이었다.
“오, 일어났냐. 테일리.”
그래서, 간밤에 일어났던 그 난동은 대체 뭐였단 말인가.
테일리가 그런 생각을 막 하려던 참에, 그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이 있었다.
테일리의 병상 옆, 환자 보호용 가림막 앞에 앉아서 과도를 든 소년이 하나 있었다.
어깨 언저리까지 내려오는 산발 머리와 듬직한 체구가 인상적인 그 소년은… 테일리와도 면식이 있는 사이였다.
“직스…?”
“기다려봐, 테일리. 지금 내가 엘카에게 배워온 특제 고급 기술 ‘토끼 모양 사과’를 보여줄테니까.”
그렇게 말하며 과도를 들고 있는 직스는, 마치 예술작품을 구사하고 있는 조각가처럼 턱을 훑으며 사과를 응시하고 있었다.
“구상 단계에서부터 막히긴 처음이네. 섬세한 칼질 자체는 자신있지만, 껍질의 일부를 남겨 토끼처럼 보이게 하는 미적 감각은… 과연, 감탄할만한 아이디어였지. 너도 보면 깜짝 놀랄거다.”
“…”
“일단 세로로 4등분 하는 게 기본인가… 껍질을 남긴 채 4등분 하는 건 그렇다 쳐도, 껍질 자체를 남겨가며 깎아서 그게 토끼의 귀처럼 보이게 만드는 작업은… 확실히 범상치 않은 미적 감각을 요구하는 작업이다… 꽤나 어려운 싸움이 되겠군….”
식은 땀을 삐질 흘리며 과도로 사과를 이리저리 두들기고 있는 모습엔 진지함마저 뿜어져나온다.
테일리는 그 광경을 보고 있다가 어이 없어서 이야기 했다.
“직스…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야…?”
“보다시피 병문안 중이었지. 엘카가 말하기를, 병문안 사과는 토끼 모양이 최고라면서 비법을 전수해줬는데, 안타깝게도 그 요령이 생각나질 않아서 고뇌하는 중이었고.”
“…”
“칼질 자체는 자신있는데, 아무렇지도 않게 토끼 모양을 구현해내는 그 일련의 예술적인 움직임은 차마 따라하기 힘들구나. 야만적인 세상에서 오래 산 영향일까…”
“아니, 내 말은… 네가 왜 여기서 병 간호를 하고 있냐고…”
테일리는 어이 없다는 표정을 최대한 지워보려 했지만, 차마 그 혼이 나간 얼굴을 어떻게 갈무리 할 수가 없었다.
“음? 1학년 때부터 제법 잘 알고 지낸 사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면, 역시 여자가 아니면 병 간호를 받는 맛이 안 난다는 거냐…? 테일리 네가 그런 야성적인 가치관의 소유자인 줄은 몰랐는데.”
“그게 아니라…”
“하긴, 수컷은 기본적으로 아지트에서 암컷의 보살핌을 받으며 사는 경우가 많지. 가치관 이전에 종의 본능에 관한 문제인가… 그렇다면 내가 여기에 나타난 건 확실히 생각이 짧은 행동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게 아니라, 너 분명 엘테 상회에선 나를 막아섰잖아.”
테일리가 그리 이야기 하면서 말을 끊자, 신중한 얼굴로 사과에 과도를 가져다 대던 직스는 그제서야 이해했다는 얼굴을 했다.
“아, 그런 문제였나. 그거라면 별로 신경 쓸 필요가 없는데.”
“…뭐?”
“아니, 내가 신경 안쓴다고 해서 네가 신경이 안 쓰이는 그런 문제는 아니겠지. 그래도 말이다, 사람마다 다 사정이 있는 법 아니겠냐.”
직스는 떨리는 손으로 섬세하게 사과를 4등분 내면서 이야기 했다.
“그 상황에서는 에드 선배님 쪽에 가담할 수 밖에 없었거든. 먼저 받은 선약이 있고, 그 사람은 그 사람대로 사정이 있었던 듯 하니까.”
– ‘세상에 사연 없는 사람이 어딨냐. 나도 사연이 있어.’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캠프에서, 테일리를 짓밟은 채 노곤한 얼굴로 에드가 뱉은 말이었다.
아일라를 잡아들여서, 사악한 얼굴로 테일리를 맞이할 거란 상상과는 다르게.. 생각보다도 훨씬 더 진중하고 고뇌에 찬 모습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아일라의 목숨이 경각에 달한 상황이었어. 사람의 목숨을 쥐고 흔드는 건 절대로 정당화 할 수 없어.”
“아일라의 목숨은 단 한 번도 저울 위에 올라온 적이 없어, 테일리.”
“뭐라고…?”
“애초에 아일라도 에드 선배님의 말에 넘어간 입장이긴 하지만… 적어도 아일라의 목숨을 담보잡을 의도는 없었던 것 같거든.”
그 증거라 할만한 것을 대보라.
그리 이야기 하려다가도 말문이 막히고 만다.
마지막의 마지막, 무차별적으로 날려대는 테일리의 검격을, 에드가 굳이 안전거리를 유지하지 않고 뛰어들어와 막아낸 이유.
목재 쉼터에 잠들어 있을 아일라를 지켜내기 위해서, 에드 또한 목숨을 걸었던 것이다.
그 결과로 에드는 테일리의 검에 베이고 큰 상처를 입고 말았다.
그 상황에, 테일리는 숨을 머금고 만다. 자기의 빈 손을 들어올려서 바라본다.
그 손으로, 아일라를 베어버릴 뻔 했다. 그 무거운 진실이 어깨를 한 차례 짓누르기 시작한다.
애초에 엘테 상회에서의 상황도 마찬가지다.
자기 힘을 제어할 수 없었던 클레비어스를 제외하면, 그 누구도 테일리를 상대로 살기를 뿜어내질 않았다.
엘비라는 물론이고, 직스 또한 테일리를 제압하려는 의도로 싸웠을 뿐이지 진심으로 검을 맞대진 않은 것이 확연하게 티가 났다.
예니카에 이르러서는 언제든지 테일리를 보내버릴 수 있는 상황에서도 끝까지 그의 부활을 지켜보았다.
심지어 페트리시아나는, 무너지는 엘테 상회 건물의 인부를 구하러 다니느라 테일리 앞에 나타나지도 못했다.
작정하고 한 번에 덤벼들었다면 테일리는 찍 소리도 내지 못했을 상대들. 그런 자들이 천천히 테일리의 진입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사실이 내심 각인되었다.
아일라 트리스의 안전.
그 가장 중요한 대전제가 확보되자, 테일리의 머리에도 이성의 물결이 천천히 밀려들어오는 것만 같았다.
“크아아악!”
직스가 갑자기 칼에라도 찔린 것 같은 비명을 내질렀다.
테일리가 화들짝 놀라서 바라보니, 신중하게 깎던 사과 껍질이 삐끗 엇나가 버렸다.
“젠장… 좌우 대칭이 안 맞잖아… 거기다 토끼의 머리 부분 굴곡이 약간 비틀렸다. 이건… 실패작이네…”
“왜 그렇게 토끼 사과에 집착하는 거야…”
“그냥, 엘카의 섬세한 과도 솜씨에 감명 받았을 뿐이야. 이건 다음을 기약해야겠어.”
그리 말하고, 직스는 그냥 사과의 껍질을 쭉쭉 깎아내기 시작했다.
“어쨌든 하루를 꽉 채워서 누워 있었으니 몸도 여기저기 굳어있겠지. 곧 개학식 일정이 시작된다. 어지간하면 다 참석해야하는 커다란 행사니까, 몇 시간 좀 누워서 쉬다가 대충 얼굴만 비추고 와.”
“잠깐만, 난 아직 들어야 할 이야기가 너무 많아.”
“그래, 나도 이해한다. 그래서 내가 여기까지 와있는 거잖아. 일의 전말이고 뭐고, 원하는만큼 이야기 해줄테니까 몸부터 회복해.”
테일리와 에드.
온탕과 냉탕처럼 대립되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직스는 퍽 착잡한 기분이 들었다.
“아일라한테 묘한 이야기를 들었거든. 내 이야기랑, 아일라의 이야기를 일단 들어봐.”
지금은 테일리의 무릎에 고개를 묻은 채 쌔근 쌔근 잠들어 있는 아일라.
그런 아일라의 얼굴을 보며, 테일리는 직스의 말에 어리둥절한듯 고개를 꺾었다.
*너무나도 긴 밤이었다. 이 밤이 끝나면 엘테 상회를 중심으로한 권력 구도는 완전히 뒤바뀔 거라 생각했다.
듄 그렉스의 생각이 그랬다.
개학 날 아침의 해가 밝으면, 엘테 상회 실베니아 지부의 새로운 회주 대리의 자리에는 듄 그렉스가 앉아 있을 것이다.
에드 로스테일러와의 관계성을 미끼로 올덱의 차기 회주 슬로그가 페르시카 황녀의 환심을 살 것이고.
로르텔이라는 경쟁자를 없앤 그는 새로운 엘테 상회의 지배자로서 군림할 것이다.
그 아래에서 최고의 실권자로서 엘테 상회의 금권을 쥐락펴락할 수 있게 된다.
황실의 호송대가 그 죄인을 잡아가는 역할을 할 것이고, 레이첼 부교장의 입김을 받은 학사는 침묵할 것이며, 엘테 상회의 직원들도 로르텔에게 가담하지 않을 것이다.
너무나도 완벽한 흐름이었고, 변수랄 것도 거의 없었다.
확실하게 로르텔을 꽉 쥐고 있다가, 황실 호송대에 넘기기만 하면 모든 계획이 마무리 되는 것이다.
저항의 틈 조차 없이 일사천리로 진행된 계획이었다. 개학식 날 아침이 되면, 듄 그렉스는 회주 대리의 집무실에, 그 주인된 자격으로 앉아있어야 했다.
“듄 그렉스.”
그러나, 그는 으리으리한 황족 숙소에 간이로 마련된 취조실에 묶인 채 앉아있었다.
“엘테 상회 건물에 대한 기본적인 조사도 마무리 되었어요. 당신이 주도로 설립했던 별장의 지하에 있던 돈도 확인이 끝났고요.”
“페니아 황녀님…!”
아침부터 쭉 묶여있었던 상황.
식사조차도 제공되지 않은 채 무기력하게 제압당해 있어야만 했던 듄 그렉스는… 취조실로 들어온 페니아 황녀를 보자마자 언성을 높였다.
“어째서, 어째서 제가…!”
“네놈! 어느 안전이라고 소리를 드높이느냐…!”
페니아 황녀를 따라 들어온 호위대 몇이 그를 상대로 호통을 쳤다.
“클로엘 제국의 제 3황녀, 페니아님의 앞이다…!”
페니아 황녀는 황권에 거의 뜻이 없다. 실베니아에 온 뒤로 거의 그런 모습만 보이고 살지 않았던가.
듄의 시야에 잡힌 정보와는 다르게, 페니아는 페르시카의 호송대를 완전히 제압해서 제 밑으로 들여버린 것이다.
페니아 황녀는 슬쩍 손을 들어서 호위를 제지했다. 호위병은 고개를 푹 숙인 채 뒷걸음질 쳐서 물러섰다.
그대로 그녀는 듄의 반대편에 앉은 채,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요. 저도 로르텔 케헬른과는 그렇게 사이가 좋진 않아요.”
페니아와 로르텔은 물과 기름 같은 사이다.
알 사람은 아는 사실이다.
“그래도, 로르텔의 별장 지하에서 발견된 금화들의 출처가 불법적이라는 증거가 명확하지 않아요.”
“그럴 리가 없습니다…! 페니아 황녀님! 그 증거로 삼을 서류들이 상회 건물에 잔뜩 있을겁니다! 비록 지금은 상회 건물이 무너져내렸지만…”
듄은 분명 이런 상황도 상정하고 있었다.
“장부 담당 포엘, 아니면 수석 비서 리엔나에게 증언을 요청하십시오! 둘이 로르텔 회주 대리의 횡령 증거가 될만한 자료를 확보해두었을 겁니다…!”
“듄. 방금 말했잖아요. 기본적인 조사는 전부 끝이 났다고요.”
방금 전부터 듄을 대하는 페니아 황녀의 태도가 눈에 띄게 차갑다.
아랫 사람을 대할 때 언제나 이해심을 가지고 찬찬히 모두의 말을 경청한다는… 그녀에 대한 세간의 평가와는 완전히 반대되는 모습이다.
그제서야 듄은 눈치 챈다. 페니아 황녀는 애초에 듄을 믿지 않는 상태에서 이 취조실에 들어왔다.
“그런 증거 같은 건 없었어요.”
“뭐…라고요…?”
분명 전부 준비해두었다.
믿을만한 핵심 인력들을 동원해서 자료의 확보를 확실하게 지시해두었다. 몇 년을 준비한 계획인데, 그 정도는 기본 중의 기본이었다.
그 자료들이 소실되었을 리가 없다. 듄은 그렇게 확신하고 있었다.
“오히려, 평상시에 상회 자금을 야금야금 횡령했던 건 당신이더군요. 듄.”
“…예?”
“장부 자료를 전수조사 할 필요조차도 없었습니다. 조금 뒤져보니 금방 나오더군요.”
페니아 황녀는 고귀한 클로엘 황실의 혈통으로서, 언제나 충성심 어린 신하들 사이에서 자라온 군주다.
공금을 횡령하고, 고용주를 속이는… 그런 비양심적인 행위는 아래 사람으로서의 도리가 아니다. 그런 철저한 충성심 아래에서라야 성립되는게 황실 권력이다.
다소 간의 횡령은 일처리 실력에 따라 눈감아주기도 하는, 그런 상인들의 사회와는 문화부터가 아예 다르다.
페니아 황녀의 눈에, 이미 듄은 천하의 못되먹은 횡령범이 되어있는 것이다. 누구보다도 사람을 쉬이 통찰해내는 그 눈동자에 듄의 적나라한 속내는 확실하게 보였다.
페니아 황녀는 절대로 듄을 신뢰하지 않는다. 그 사실만이 가감없이 듄의 뇌리에 스며들었다.
“정황상, 로르텔의 별장 건설을 주도한 당신의 자금일 가능성이 커보이는군요. 액수도 이래저래 합쳐보면 어느정도 맞아 떨어지고요.”
“…페니아 황녀님!”
“간절하게 부른다고 해서 당신의 혐의가 사라지는 건 아니에요, 듄.”
페니아 황녀의 눈에는 자애의 감정이 사라져 있었다. 그녀의 자애로움이 향하는 곳은 선량하고 성실한 백성들이지, 남의 뒤를 치는 배신자가 아니다.
“이럴 리가 없습니다…! 이건, 이건 함정입니다…!”
듄은 다급한 목소리로 페니아 황녀에게 호소했다.
“이건… 그렇습니다, 일시적으로 저를 무력화 시키기 위한 로르텔 케헬른의 술수입니다…! 제가… 제가 증명해보이겠습니다! 지금 당장 상회 인부 쪽이랑 연락할 수 있게만 해주시면…”
“듄.”
차갑게 내리깔린 목소리로 듄을 부르지만, 듄은 여전히 묶인 손을 꽉꽉 잡아당기며 소리쳤다.
“맨입으로 도와달라 말은 안하겠습니다…! 만약 황권 경쟁에 뜻이 있으시다고 하면, 저는 페르시카 황녀와의 접점이 있습니다. 정말입니다. 증명할 수 있습니다!”
궁지에 몰린 자는 살아남기 위해서 모든 발악을 하는 법이다.
도태되고 싶어 도태되는 자는 세상에 없다. 자신이 끝났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전에는 가진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위기를 탈출하려 한다.
“저를 이용하셔야 합니다, 페니아 황녀님! 제가 페르시카 황녀님과 연결되어 있는 접점을 역이용해서 이중첩자로 쓰신다면, 상대는 아무런 의심조차 못할 겁니다! 제게 빚을 지워놓으시고, 목줄을 채워서 이용하십시오!”
“…”
“나쁘지 않은 제안일겁니다! 저라는 확실한 체스말을 이용하셔야 합니다! 이건… 페니아 황녀님께 있어서도 기회입니다!”
이대로 가면 황실로 호송되어버리는 것은 듄 자신이다. 그 사실을 확실히 알고 있기에, 듄은 여기서 승부를 보아야만 했다.
“저는 제 값어치를 잘 압니다, 페니아 황녀님. 이대로 절 버리신다면, 페르시카 황녀는 꼬리를 자르고 아무것도 모른 체 하면 끝날 일입니다. 저 같은 변방 상인 하나가 엮인 꼬리를 자르는 건 일도 아닐겁니다.”
“…”
“하지만 페니아 황녀님이 공론화 한다면 이야기가 다릅니다! 부디 저를 잘 이용하십시오! 저는, 이용하기에 따라서 페르시카 황녀에게 치명상을 입힐 수도 있는 최고의 무기입니다!”
궁지에 몰려서 찾아낸 마지막 활로.
뒤로 묶인 손을 꽉 잡아 당기며, 어떻게든 의자에서 몸을 앞으로 내밀며 듄이 열변했다.
황권 경쟁에 제대로 엮이기 시작한 페니아 황녀라면 구미가 당길 조건이라는 것. 상인된 자의 입장에서는 충분히 타당한 제안으로 보였다.
그러나, 그것은 상인된 자의 입장에서 하는 이야기일 뿐이다.
“듄 그렉스. 잘 들어요.”
그러나, 페니아 황녀는 듄 그렉스나 로르텔 케헬른과는 사는 세계부터가 완전히 다르다.
페니아 황녀는 천천히 듄의 귓가에 다가가 속삭이듯 이야기했다.
“배신을 전제로 움직이는 자를 기용하는 인간은 없어요.”
배신으로 권좌에 오르려는 자, 배신으로 바닥에 쳐박히리라.
자기 사람 하나 만들지 못하고, 세상사 모든 것을 거래 관계와 이해 관계로 극복해내려 하는 상인이라는 족속들.
페니아 황녀는, 그런 자들을 끔찍하게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차가운 페니아 황녀의 표정에 듄은 그만 숨을 헛삼키고 말았다.
“황실로 호송하세요.”
짧은 전언을 남기고, 페니아 황녀는 자리에서 일어선 채 취조실을 나갔다.
그 단호한 태도에… 듄의 얼굴에 조금씩 절망감이 밀려올라오기 시작했다.
*반파된 엘테 상회 건물에도 멀쩡한 부분은 남아있었다.
귀중품을 보관하는 창고는 애초에 골조부터가 튼튼하게 되어 있어서 붕괴의 여파로부터 안전했고, 주로 테일리의 검격이 닿지 않은 서편 쪽은 멀쩡한 방이 많았다.
임시로 마련한 회주 대리실의 위치가 바로 그곳에 있었다. 귀중품 보관 창고 바로 위에 있는 빈 사무실이었다.
인부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며 건설자재들을 나르는 현장. 그 곳을 지나쳐서 서편 쪽으로 들어가 외곽 계단을 쭉 오르다보면, 3층 끄트머리에서 복도를 한 번 꺾어 들어가면 나오는 방이었다.
이전 회주 대리실에 비하면 규모가 많이 단출해졌지만, 그래도 있을 건 다 있는 모습이다.
“그 오밤 중에 트릭스관까지 뛰어가서 레이첼 부교장이랑 협상을 걸고 왔다고?”
“어쨌든 학사 생활동 안에 있었던 일로 시비를 걸면 상황이 더 복잡해지니까요. 레이첼이 듄과의 접점을 유지하고, 그를 새로운 회주 대리로 밀 생각을 유지하고 있었다면… 일이 더 복잡해졌을 거에요.”
캠프 쪽에 있는 별장도 정리 작업에 들어갔고, 어느정도 휴식을 마친 에드도 체력이 돌아온 듯 했다.
반지의 반동도 조금씩 약화되어가기 시작해서 마력 사용에 큰 무리가 따르지 않는 것 같았고, 검에 베인 상처도 당장에 응급 처치는 끝난 모습.
그래도 에드는 몸을 가누는게 조금은 불편한지, 거동이 썩 자유로워 보이진 않았다. 로르텔은 그런 모습이 퍽 마음에 걸려서 한숨을 푹푹 쉬어대곤 했다.
“그 꽉 막힌 부교장을 잘도 설득했네. 듣자하니, 최근엔 오벨 교장과 신경전을 하느라 정신도 없다던데.”
“협상 자리에서까지 심술을 부려댈 정도로 꽉 막힌 사람은 아니던데요, 뭘.”
“내가 듣기로 듄은 일부 학용품 독점을 포기하거나 통관비 증가 따위를 약정했다고 하던데… 그런 약속들에도 불구하고 그 할멈이 네 쪽으로 붙은 건 참 신기한 일이네.”
에드는 팔에 감고 있던 붕대를 풀어서, 새 붕대로 다시 감고 있었다.
“뭘 약속했길래 그 약삭 빠른 할멈이 네 쪽으로 다시 붙은 거냐? 그것도 단 하룻밤만에.”
“뭐, 듄이 약속했던 건 저도 기본적으로 다 약속 했죠. 거기다가 추가로 좋은 물건을 얹어 주기로 약속했거든요.”
“좋은 물건?”
“실베니아 학사만 사이에 껴서 횡재한 게 되었죠. 뭐, 저도 살아야 하니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에드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로르텔을 쳐다보자, 로르텔은 빙그레 웃으면서 이야기했다.
“어찌됐든 실베니아의 심장이었던 물건이니까. 제 위치로 돌아가면 모양새도 좋잖아요.”
“…’현자의 봉서’를 돌려주기로 약정했구나.”
“거부하긴 힘든 제안이었겠죠. 제 입장에서도 이 악물고 건넨 제안이기도 하고.”
로르텔은 간이로 마련된 집무용 책상에 앉아서 빙그레 웃었다.
“원래는 로스테일러 가문에 되팔 견적과 시기를 재고 있었던 물건이지만, 정작 그 매각처가 망해버렸으니 차라리 다른 씀씀이가 생긴 것에 감사해야죠.”
“이러니 저러니 해도 학사 쪽에선 쾌재를 불렀겠군.”
“원래 가운데 끼어서 중재하는 인간이 제일 돈을 만지는 법이에요. 그러니 싸움이 있는 곳엔 언제나 상인이 있는거죠.”
애초에 학사 쪽에선 현자의 봉서를 경제적 자산이라기보단, 상징적 보물로 여기고 접근했겠지.
대현자 실베니아가 남겨둔 성위 마법 해설서. 그것만으로도 실베니아의 이름을 달고 있는 이 아카데미에선 다시 돌려받고 싶어서 발을 동동 굴렀을 것이다.
“어쨌든, 오후에 대대적인 개학식 행사가 예정되어 있는데 이런 아침부터 상회 쪽에 오실 줄은 몰랐네요. 일정은 괜찮으세요?”
“너희들 2학년이랑 다르게 3학년은 그렇게 빡빡하게 굴진 않거든. 그래도 얼굴은 비추러 가야겠지만, 이따가 예니카랑 느지막하게 가기로 했다.”
예니카의 이름이 언급되자 로르텔은 입술을 비죽 내밀고 만다.
어쨌든 예니카는 에드와 같은 3학년 동급생이라는 절대적인 이점을 손에 쥐고 있는 것이다. 뭐든 간에 학사 행사가 있으면 동행할 수 있는 입장이니, 한 학년 아래인 로르텔과는 그 거리감부터가 차원이 다르다.
로르텔은 가늘게 뜬 눈으로 에드를 쳐다보지만, 에드는 팔에 붕대를 감아서 압박하는 데에 집중하고 있을 뿐이다.
끝끝내 두번 째 키스 상대가 누구냐고 계속 추궁해도, 에드는 그게 예니카라는 사실을 털어놓지 않았다. 가감없이 이야기 해줄 거란 생각은 안했지만, 역시나 남한테는 이야기 하지 않을 심산인 듯 하다.
그 미묘한 연애적 거리감의 차이를 어떻게 파고 들어야 할 것인가.
어쨌든 그 키스 상대의 정체를 로르텔에게 밝히지 않은 시점에서, 그가 로르텔을 상대로도 묘한 연애적 기류를 느끼고 있다는 사실 만큼은 도출해낼 수 있다.
사람의 태도를 보고 속내를 읽어낸다. 그것만큼은 누구보다도 자신 있는 로르텔이기에 알 수 있다.
에드는 주변에 꼬여든 여성들을 진지하게 대하지만, 그렇다고 연인으로서 곁에 두고자 하는 것은 별개다.
좋은 친구와 연인 사이의 거리감 차이를 능숙하게 재는 스타일이 아닌 것이다.
그런 성향은, 잘 휘어잡으면 정신을 차려보니 자신의 연인이 되어 있었다…라는 기적적인 관계 형성을 가능하게 만들 수도 있다.
로르텔에게 있어선 호재인 셈이다.
다만, 문제가 있다.
사실 파악이야 끝났지만, 여기서 어떻게 파고들래? 라고 묻는다면… 로르텔은 로르텔대로 또 도출해낼만한 답이 없다.
참으로 절망적이게도, 연애 관계에서의 줄다리기 따위는 해본 적이 없다. 이런 낭만어린 청춘을 구가해본 경험도 없다.
위조 금화는 한 눈에 구분해낼 줄 알아도, 사랑에 빠진 사람 마음의 깊고 얕음은 쉽게 분간해내기가 힘들다.
그래도 일단은 밀 타이밍이 아니라, 당기는 타이밍이다. 그 사실만큼은 알 수 있다.
에드는 혼신을 당해서 로르텔을 구해주었다. 저 쪽에서 한 번 당겨줬으니, 이번엔 이 쪽에서 능숙하게 한 번 당겨줘볼까.
요염한 미소를 지으며 구애의 말이라도 한 마디 던지면 저 쪽에서도 흡족한 기분이 되지 않을까. 그런 속물같은 마음으로 뭐라 말을 꺼내보려 하는 순간.
“그러니, 시간도 남겠다 네 얼굴을 확인하러 왔다.”
오히려 에드 쪽에서 훅 당기는 감각에, 손이 빨려들어가 버리는 느낌이 들었다.
“…네?”
“엘테 상회 인부들도 대부분 듄의 계획에 한 번 가담했던 놈들이지 않냐. 사실 상인 집단이라는 게 다 그런 식이라 할지라도, 그 인부들을 다시 휘어잡으려거든 쉽진 않을테지.”
“글쎄요. 저한테 그 정도는 식은 죽 먹기에요.”
“실력적인 문제가 아니라, 마음에 관한 문제다.”
에드는 심드렁하게 아무것도 아닌 듯이 이야기 하지만, 실상은 꽤나 로르텔을 배려해주고 있었다.
“하하호호 웃고 떠들면서 널 따랐던 인부들 대부분이 한 번 듄에게 넘어갔었다는 건, 썩 유쾌한 기분은 아닐테지.”
“에이, 에드 선배님. 누누이 말하지만 그런 거에 일일이 마음 상하면 상인으로 못 먹고 살아요.”
“말은 그렇게 하겠지.”
“…”
그렇게, 에드는 확실하게 로르텔을 부정해버렸다.
금화에 미친 악마. 엘테 상회의 탐욕꾼, 로르텔 케헬른.
세간에 도는 그 소문이 뭐 어땠냐는 듯, 로르텔의 본질을 보고서 이야기 한다.
“군중 속의 고독이 제일 싫다며.”
로르텔이 직접 털어놓았던 이야기다.
“그걸 알고도 모른 체 하는 건, 솔직히 쉽지는 않은 일이지.”
“…”
“요컨대, 네 걱정 되서 네 얼굴 한 번 확인하러 왔다고. 그게 다야.”
분명, 간밤의 엘테 상회 탈환전에서 에드 로스테일러는 로르텔을 힘껏 당겨줬다.
인간 관계란 밀고 당기기란 것이 아니었단 말인가.
한 번 밀쳐냈으면 당기고, 한 번 당겼으면 밀쳐내고. 그런 암묵 속의 리듬감이 깨져버린 듯한 느낌에, 로르텔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아, 아니… 에드 선배님.”
“뭐냐?”
“이번엔 제가 당길 타이밍이 잖아요..?”
“뭐?”
“아니, 그 뭐라고 해야할까… 계속 그렇게 당겨대면, 이 쪽은 좀 뭐라고 반응해야할지 애매하달까… 그렇다고 계속 밀쳐낼 수는 없는 노릇이라고 해야할까…”
“뭔 소리가 하고 싶은 거냐.”
로르텔은 입술을 매만지면서 머뭇거리다가, 이윽고 확실하게 이야기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부끄러운데요…”
“…”
“…”
“…”
네가 부끄러움이란 감정을 가지고 있긴 했던 것이냐.
에드가 눈빛으로 그렇게 물었다.
사실 에드도 어느 정도는 느끼고 있었던 것이지만, 로르텔은 요염하고 능글맞은 얼굴을 하고 돌아다니는 주제에… 또 방어력은 약하다.
통한의 벽처럼 느껴지는 고압적인 태도도, 의외로 적극적인 구애나 감정 표현 몇 번에 쭈뼛거리곤 하니… 그 갭은 당황스러울 지경이다. 주로 그 대상은 에드 밖에 없지만.
사람 입술에 갑자기 입을 맞출 때는 언제고, 몇 마디 호의에 자기 손가락을 메만지고 자빠졌냐.
그리 어이없이 이야기해도 어쩔 수 없다. 그냥 이 여자가 그런 여자인 것이다.
“어, 어쨌든 말이에요… 고맙다는 인사는 꼭 하고 싶었어요.”
로르텔은 괜시리 책상을 꾹꾹 누르면서 이야기 했다.
“감사해요, 선배님. 선배님 덕에 전 살아남았네요. 전적으로 선배님 덕이에요.”
“… 남은 일들은 잘 처리 했고?”
“네. 이야기 했듯이요. 다만 찜찜한 부분은 좀 남아있네요.”
로르텔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이야기 했다.
“이번 계획을 주도한 듄 입장에서는 거의 몇 년에 걸쳐서 철저하게 준비한 거거든요. 횡령액을 꾸준하게 모은 것도 그렇고, 별장 밑을 직접 설계한 것도 그렇고요.”
“그렇지. 널 속이는 일이니까, 용의주도하게 움직였겠지.”
“그런 것 치고는 허무하게 듄 쪽으로 혐의가 넘어갔어요. 저는 저를 범인으로 지목하기 위해서 장부도 다 조작해 뒀을거라 생각했거든요.”
로르텔은 사건을 치른 다음 날이 되자마자 엘테 상회의 주도권을 다시 쥐게 되었다. 정말로 순식간에 복권한 것이다.
“장부의 진위를 놓고 공방을 펼칠 것까지 상정하고 있었는데, 이리 시원스럽게 상황이 해결되니까 오히려 찜찜한 걸요.”
“뭐, 그거에 대해선 내가 할 말이 있지. 사실 이 말도 전해두려고 온 거야.”
에드가 그렇게 이야기하자, 문득 덜컹 대며 집무실 문이 열렸다.
지금 시각에 집무실에 함부로 들어올만한 사람은 없었다. 상회 전체가 로르텔의 눈치를 보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특히, 듄의 계획에 적극 가담한 인부들은 아예 호흡조차도 못하고 있는 분위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무실의 문을 딩당하게 열고 들어온 것은… 애초에 상회 직원이 아니었다.
“…. 나 왔어.”
뭔가 심술이 가득 난 표정이다.
연분홍빛 머리칼을 예쁘게 땋아내려서 늘어뜨리고 있는 소녀는, 3학년 제일가는 정령사다.
“…예니카 선배님?”
로르텔의 얼굴을 보자마자 저 쪽도 볼을 부풀려 보인다. 하여튼, 예니카에게 있어서 일련의 엘테 상회 탈환전은 연적을 도와주는 계획이었던 셈이다.
그렇게 툴툴거리면서도, 예니카는 에드가 부탁한대로 사람 한 명을 끌고 왔다.
“으… 으으…”
예니카와 나란히 들어온 소녀는… 로르텔의 수석 비서인 리엔나였다.
단아한 붉은 머리칼을 정리하고선, 쭈뼛거리는 모습으로 예니카 뒤에 따라붙은 상태였다.
“…”
예니카를 보고 의아해하던 표정이, 이번엔 삽시간에 어두워졌다. 로르텔 케헬른에게 있어서 리엔나 비서는 배신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황실 조사 참석하느라 늦었어. 중요 참고인이었거든.”
“그렇구나. 고맙다, 예니카.”
“아니야, 에드. 다만…”
예니카는 로르텔 쪽을 은근하게 바라보고 이야기했다.
“에드한테 너무 이런저런 폐를 많이 끼치는 것 같네, 로르텔은.”
로르텔은 그런 예니카의 표정을 보고서 일단 웃어보였다. 뭐라 대처하기 애매하면 일단 웃고보는 습관이 있었다.
“감사해요, 예니카 선배님. 친히 배신자를 처단하라고 잡아다 주신 건가요?”
“넌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뭐어, 그럴만한 상황이긴 했지.”
예니카는 리엔나 비서를 집무실 안까지 데려다 준 후, 지팡이를 챙겨들고 이야기했다.
“그럼 난 상회 입구로 나가볼게. 듣자하니, 상황이 상황인지라 내부 관계자가 아니면 오래 체류할 수가 없다고 하거든. 에드는 내부 관계자로 등록되어 있는데, 나는 등록이 안되어 있나봐~.”
“어머, 예니카 선배님. 선배님을 등록하는 걸 잊어버리다니, 이건 제 불찰이네요… 정말 죄송해요. 다음에 올 때는 꼭 관계자로 등록되어 있을 수 있도록 조치 취해둘게요.”
그렇게 웃으며 말하지만, 다음에 와도 예니카는 외부인 취급일 것이란 걸 둘 다 잘 알고 있었다.
“뭐어, 이러니 저러니 해도 도와 주신 건 감사하고요.”
그런, 은근한 진심이 섞여 있는 인사도 덧붙이는 것은 잊지 않았다.
연적인 것과는 별개로, 예니카 또한 이번 엘테 상회 탈환전에서 에드에게 가담해준 인력인 것이다.
예니카는 뭐라 말을 하려다가, 복잡한 표정을 짓고는 툴툴대며 집무실을 나갔다. 그 감사 인사 자체는 진심이라는 사실을 느낀 것일까.
“…그래서, 한 번 쯤은 생각해보진 않았냐?”
“뭘요?”
“내가 엘테 상회 문제에 이렇게 깊게 가담할 수 있었던 이유 말이야.”
에드는 덜덜 떨고 있는 리엔나 비서에게 눈빛을 보냈다. 앉으라는 이야기였다.
붕대를 감던 손으로 옆에 있던 차를 리엔나 비서에게 건네주고서는, 가만히 이야기 했다.
“듄 쪽에도 첩자가 붙어있었던 것 뿐이지.”
“…뭐라고요?”
에드도 덩달아 차를 들어올려서 한 모금 들이키고는 이야기했다.
“내가 상회 내부에서 널 어떻게 옭아매고 있는지 알고 있거나, 상회 건물의 깊숙한 내부 구조까지 전부 간파하고 있었던 것도 좀 묘한 일이지. 나는 엘테 상회 건물에서 기껏해봐야 네 집무실 정도만 들락거려 봤잖아.”
“확실히, 그건 그렇네요….”
“뿐만 아니라, 상회 건물이 그 난리가 났을 때, 남들 다 대피하는 동안 상회 건물 내부를 돌아다니면서 듄이 준비해뒀던 조작 장부 자료를 싹 긁어모아준 사람이 있었거든. 그게 누구일 것 같냐?”
듄이 준비해뒀던 조작 장부들.
그 말에, 로르텔의 눈가가 잠깐 흔들렸다.
듄의 계획이 허술했던 것이 아니다.
듄은 확실하게 로르텔을 횡령범으로 몰고 갈 수 있는 자료들을 모아두고 있었다. 그러나, 그 자료들을 모두 수습해서 태워버린 자가 있었던 것이다.
모두가 혼비백산이 되서 상회 건물에서 도망치기 바쁜 순간.
──희한하게도, 상회 건물에서 바로 탈출하지 않고 내부를 뛰어다니던 자가 한 명 있었다.
“…”
“애초에, 제일 먼저 나한테 계약 제안을 하러 온 사람이 리엔나 비서야.”
아일라와 에드가 테라스 카페에서 나란히 이야기 하고 있을 때, 문득 찾아왔던 그 리엔나 비서.
언제나처럼 쭈뼛거리면서 다가와 했던 말.
– ‘엘테 상회 측에서 제안할 것이 있어서 왔어요.’
듄이 주도하고, 상회 인부들 대다수가 가담해서 로르텔을 끌어내리려 하는 그 때.
소심하고 말 수 적은 소녀의 눈에는, 굳건하게 상회를 이끌고 있는 로르텔을 잡아내리려는 그들의 모습이… 괴물처럼 보였던 것일까.
– ‘로르텔 회주 대리를 구해주세요.’
아일라가 내 계획에 가담한 결정적인 계기가 되기도 했던, 그녀의 호소는… 처음부터 일관적이었다.
듄의 지시를 듣는 수석 비서로서 움직이고 있었지만, 그녀는 끝끝내 그 의도를 들키지 않은 채로 끝까지 로르텔의 편을 든 것이다.
소심하고, 겁이 많아, 예니카를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공포에 떨며 도망갈 정도로 한심한 인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철하고자 하는 정의는 살아있었다.
“얜 네 사람이다.”
에드가 차를 머금으며 간단하게 이야기했다.
말 수도 적은데다 덜렁거려서 비서로서는 많이 모자란 소녀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마지막의 마지막에까지 그녀는 로르텔을 위해 움직였다.
로르텔이 눈을 부릅뜨고선 리엔나 쪽을 쳐다봤다.
딱히 잘못한 것도 없건만, 리엔나는 화들짝 놀라서 어깨를 떨었다.
“애초에 로르텔, 호의관계 같은 걸 따지지 않더라도, 난 듄이 아니라 네 편에 붙었을거다.”
“…”
“지난 겨울에 나랑 했던 약속 잊었냐? 네가 제안해놓고 네가 잊어버리면 어떡하냐.”
에드는 한 쪽 팔을 감던 붕대를 꽉 조여서 매듭지었다. 제대로 깔끔하게 압박이 되어 흡족한 상태였다. 그리고는 자리에서 휙 일어서서 로르텔 쪽을 보고 이야기 했다.
펄펄 쏟아지던 눈도 어느덧 멎어들어서, 고요만 남아있는 숲 속.
그 눈밭의 한가운데에서, 모닥불을 사이에 두고 로르텔이 에드에게 했던 말이었다.
세상 모든 자들을 적으로 돌리게 될지라도, 선배님만은 제 편이 되어주세요.
“네가 이미 다 쌓아둔 복선이야, 로르텔.”
제 사람 없는 곳에서 고독을 느끼며 살았다곤 하지만, 결국 로르텔은 스스로 전부 극복해 보인 것이다.
이 긴 밤동안 일어난 엘테 상회 탈환전도, 뭐가 어떻게 흘러가든 결국엔 로르텔의 승리로 끝났을 것이다.
그 사실을, 로르텔에게 각인 시켜주고 싶었을 뿐이었다.
에드는 그대로 손을 털며 다가가서 눈을 떨고 있는 로르텔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두어번 턱턱 두들겨 주었다.
– ‘감사해요, 선배님. 선배님 덕에 전 살아남았네요. 전적으로 선배님 덕이에요.’
그 말이, 어째선지 에드에게는 아니꼬왔던 모양인지.
“네가 살아남은 건, 네가 쌓아온 공덕이 있었기 때문이다.”
“…”
“네 공을, 굳이 나한테로 돌리진 마라.”
그렇게 이야기 한채로, 에드는 로르텔의 어깨를 한 번쓸어 준 뒤 몸을 돌렸다.
“그럼 난 3학년 개학식 행사 가야하니까 채비하러 가야겠다. 밖에서 예니카가 기다리고 있을테고… 이만 먼저 자리 뜰테니까, 나머지 알아서 잘 수습해라.”
“…네.”
“개학식 행사에는 올 거지?”
“기본적인 일 마무리 되고요.”
“그래.”
– 쿵
그리 이야기 하고서는, 에드는 집무실 문을 열고 나갔다.
“….으읏, 읏…”
소심한 리엔나 비서와 단둘이 남은 로르텔은, 잠시 정적 속에서 고개를 숙였다.
양손을 슬쩍 들어보니, 빈손이다.
빈손으로 와서 빈손으로 가는 세상이다. 필시 죽는 그 날에도 빈손으로 죽을 것이라 확신하고 살았다.
비가 내리는 올덱의 거리가 떠오른다.
우중충한 골목에는 토사물이나 음식물 쓰레기가 가득하다.
그곳에서 멍하니 하늘을 보고 서있던 적갈색 머리칼의 앳된 소녀는, 한창을 쓰레기통을 뒤지다가 먹다 남은 빵을 발견한다.
양손에 빵을 집어들고는, 곰팡이 핀 부분을 떼어낸 뒤 입에 우걱우걱 우겨넣는다.
왜 사는지 의미조차 찾을 수 없이 방황했던 삶. 그 곳에서 올려다본 우중충한 하늘이 아직도 뇌리에 남아있다.
상한 빵을 입에 다 욱여넣고 나면, 여전히 빈손에는 빵 부스러기만 좀 남아있을 뿐이다.
그 뒤로 몇년이 흘렀을까.
평생토록 빈 손으로 살아가리라 생각했던 마음이 무색하게, 어느 샌가 손에 쥔게 너무 많다.
“…”
로르텔은 잠시 책상에 걸터 앉아 있다가, 더욱 깊게 고개를 숙였다. 양손으로 잠시간 얼굴을 쓸어내리다, 이윽고 희미하게 흐느끼는 소리가 흘러나오고 만다.
“에, 에에….”
소파에 앉아 있던 리엔나 비서는 어쩔 줄도 모르고, 그렇게 쭈뼛거리고만 있었다.
얼마나 높이 올라왔는지는, 올라가는 동안에는 모른다. 뒤를 돌아 풍경을 봐야 그제서야 실감이 난다.
제 손에 뭐가 있는지도, 꽉 쥔 주먹을 펴봐야 아는 법이다.
십 몇년의 세월 끝에, 그 간단한 사실을 겨우 깨우친 소녀가… 소리 없이 흐느껴 우는 동안.
리엔나 비서는 당황스러운 듯 사시나무처럼 몸을 떨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벨 브로크를 잡을만한 스펙은 된 것 같다. 생각보다 테일리는 더 강해졌다.
그 사실 만큼은 희망적인 상황이다. 그러나 아직은 해야할 일이 좀 더 남았다.
벨 브로크의 부활을 대비해서, 피해를 최소화 하려거든 최대한 많은 세력을 결집시켜야 한다.
성당기사단, 황실 수호대, 실베니아의 인재들, 엘테 상회 용병대, 제국의 여러 유력 가문들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이 모든 시나리오의 마무리를 장식할 벨 브로크를 피해 없이 제압 할 수 있도록, 모든 수단을 동원해야만 한다.
막바지에 이르기 전까지는 절대로 방심을 풀어선 안된다.
그런 생각을 가다듬으며, 엘테 상회 건물을 나왔다.
그러고보면… 타냐가 실베니아로 돌아온다는 소식을 들었다. 처리해야할 일이 너무 많아서, 방학이 끝나기 일보 직전까지 일처리를 한 모양이다.
일단 만나러 가 볼 필요가 있겠지 싶다. 아직 로스테일러 가문에 대해 결론 나지 않은 부분도 너무 많다. 그보다도, 일단은 개학식에 참가하는 게 먼저겠지만.
상회 건물을 나오자, 길 건너편 가로수에 기대서 얼굴을 부풀리고 있는 예니카가 보였다. 척 봐도 부- 부- 거리고 있는 것이, 앙증맞게 화를 내고 있는 모습이다.
일단은 예니카의 기분을 풀어주는 게 먼저일까. 늘 그랬듯, 생각보다 어이없이 풀릴 것 같은 예감이 들지만… 일단은 날 위해 노력해준 예니카에게 한 수 져줘야 할 타이밍인 것이다.
나는 양 팔을 들고 항복 자세를 하며, 예니카 쪽을 향해 나아갔다.
하늘이 높고 푸른 것이, 썩 날씨가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