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139화
259화· 세상의 진실, 너의 진실, 나의 진실(8)
하늘을 짓밟고 있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비대한 태양을 등진 채, 켈리악은 씨익 미소를 지었다·
이 싸움은 재미있다·
쉽게 꺾여야 할 이들은 놀랍도록 오래 버티고, 끝이 날 듯하면 무언가 새로운 상황이 시작되고, 강해지고, 버티고·
[글쎄, 오해하고 있군· 난 그저 즐거울 뿐이다, 진 룬칸델··· 내 승리 뒤에 남는 건 어차피 지루하고 공허한 무언가밖에 없을 테지· 또다시 너 같은 자가 나타날 수 있을까? 전 차원이 내 입맛대로 조작되다가, 나 또한 창조주들이 그랬듯이 나나 너 같은 오류를 마주하게 될까? 그날은 요원하기만 하니, 지금은 충분히 기념할 순간이 아니겠나·]
바리사다가 하얗게 타오르고 있었다· 지팡이로 변한 켈리악의 마신석도 금빛으로 찬란하게 일렁였다·
‘나는, 사람으로 남을 수 있다····’
빛의 힘·
그 정체를 알기 전, 진은 유산을 취하면 자신이 사람이 아닌 무언가가 될 수 있다는 직감을 받았었다·
솔더렛이 남긴 빛의 힘이 켈리악의 말처럼 ‘아주 작은 권한’이 아니었다면 분명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진이 얻은 힘은 유한하다· 한정적인 시간 동안만 그가 빛을 다룰 수 있게 해주었다· 그렇기에 온전한 태양신의 힘과 마신석에 대항할 수 있더라도, 진에겐 이미 부서진 세계를 되돌릴 힘이 없었다·
남은 사람들이 있다·
뒷일까지 생각하며 싸울 상대가 아니었다· 벤다, 진은 무인으로서 본질을 잊지 않았다· 적을 벤다는 일념으로, 진은 앞으로 나아갔다·
번쩍이는 칼날이 켈리악의 시야에 잔상을 일으켰다·
인간이 아니라 신의 눈으로도 읽을 수 없는 속도, 빛이 번쩍일 때마다 켈리악의 몸 어딘가가 베였다·
통찰과 예지력, 그리고 조작과 왜곡이 없다면 대응이 불가했을 것이다·
[한데, 우스운 일이다· 솔더렛은 자신이 빛이었다는 걸 너무 뒤늦게 깨달았어· 처음부터 알았다면, 직접 나와 싸우는 게 나았을 것이다·]
“이 세상엔, 희생하지 않고는 할 수 없는 일이 많다· 무엇이든 짓밟기만 해서 욕망을 채워온 네놈이 이해할 수 있는 일은 아니지·”
키이익!
바리사다와 마신석이 뒤엉키며 마찰했다· 그들의 뒤로는, 붉은 바다가 해일을 일으키며 다시 사람들을 집어삼키려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많은 빛이, 온 전장에 일섬을 남기며 해일을 찢어발겼다·
켈리악이 역사를 조작하려 하면 진은 그의 머리로 검을 찔렀고, 공간을 왜곡하려 하면 그곳에 한 갈래의 빛을 고정시켜두었다·
마신석의 힘도, 킨젤로의 권능도 그 빛을 뚫을 수는 없었다· 빛을 두 손에 쥐고 마음대로 바꾸는 건 불가능하듯이·
지금 그 일을 할 수 있는 건 오로지 진뿐이다·
‘놈의 힘이 조금씩 마모되고 있다·’
미세하다·
그러나 바리사다로 켈리악을 벨 때마다, 진은 그의 힘이 미세하게나마 약해지는 걸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물론 켈리악은 그때마다 스스로를 조작해 피해를 없던 일로 만들었으나, 그건 결코 영원한 굴레가 아니었다·
[사람처럼 싸우는 것에 집착하는구나· 빛덩이 같은 형태를 하고서는·]
분명 빛으로 보이건만, 켈리악은 자꾸 검이 몸으로 들어온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는 오히려 너무 많은 권능을 얻은 탓에 진의 본질을 바라보지 못하고 있었다· 몸을 움직이면 지치고, 피를 흘리면 둔해지는, 사람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전혀 보지 못했다·
그게 지금 진이 켈리악을 몰아붙일 수 있는 이유였다·
전장의 상황을 읽고 그에 맞춰 빛을 보내는 건 어디까지나 창성의 감각이지, 켈리악처럼 신의 권능에 기댄 행위가 아니었다·
진은 턱까지 차오르는 가쁜 호흡을 숨기고 있었다·
숨겨야 한다· 그를 벨 때까지는 지친 기색을 드러내지 않아야 했다·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사람들이 깨어나고 있으니까·
켈리악의 욕망에 조작된 사람들이 정신을 차리고, 미쳐서 서로에게 검을 겨누던 이들이 상대의 상처를 살피고 있었다·
그들은 죽은 동료를 보며 슬픔을 느끼고, 어쩔 수 없을 만큼 파괴된 세상을 느끼며 괴로워한다·
그에 비하면 빛의 힘을 빌려 싸우는 건, 분명 쉬운 일이었다·
태양에서 창들이 떨어지면 쳐내고, 공간 폭발이 일어나면 피하고, 켈리악이 직접 휘두르는 지팡이는 흘리고·
있는 힘껏 검을 내리쳤다·
하늘부터 지상까지, 바리사다를 타고 뻗은 한 줄기 빛이 길고 거대한 궤적을 남겼다· 파각, 마신석에서 작은 파열음이 들려왔다·
지팡이 끝부분이 벌어지며 그 속에서 피처럼 시뻘건 액체가 쏟아졌다· 켈리악의 몸도 양단되었고, 재생은 느려졌다·
그래도 눈 한 번 깜빡일 정도일 만큼 빠르지만 분명히 더뎌졌다· 대신 켈리악은 재생과 동시에 진이라는 빛덩이의 중심으로 손을 찔러넣었다·
광심장이 부서지며 가슴 한가운데가 관통되었다·
하지만 일순 전장 전역에 퍼진 빛이 그 속으로 모여들어 가슴의 구멍을 채웠고, 진은 그중 남은 빛을 이용해 새로운 검을 펼치고 있었다·
룬칸델 마검 오의
태양 가르기
과거 테마르가 솔더렛을 베고자 만든 검·
그때는 테마르는 물론이고 솔더렛 본인도 자신을 알지 못했다· 그렇기에 막연히 솔더렛이 지플에 의해 태양신으로 회귀될 때를 대비해 고안한 그 검은, 지금 켈리악의 태양을 노리고 있었다·
바리사다가 남긴 거대한 궤적이 회전하기 시작했다·
한 바퀴를 돌아 생긴 새하얀 원은, 단번에 태양을 집어삼키며 하늘을 온통 눈부신 빛으로 물들였다·
[하!]
전 차원을 돌아 마침내 거머쥔 킨젤로의 권능이었다· 그러나 켈리악은 권능을 다시 일으켜도 태양이 빛을 뚫고 나타나지 못하는 걸 확인하고 말았다·
겨우 이 정도 빛조차 극복할 수 없는 힘이었다는 말인가?
어이가 없었다·
킨젤로의 힘은 그야말로 온전하다· 마신석 없이 그것만으로도 세상을 창조할 수 있고, 파괴할 수도 있다·
그에 반해 진이 얻은 빛은, 한 줌·
한 줌이라고 불러야 적당할 것이다· 그토록 작은 힘이, 태양을 완전히 가리고 있었다·
때문에 점점 더 탐이 난다·
하지만 빛을 어찌 빼앗을 수 있을까, 켈리악은 싸우는 내내 그런 의문을 품고 있었다· 마신석에도 조작되지 않고, 두 손으로도 움켜쥘 수 없는 빛을, 대체 어떻게 빼앗아야 하나·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유일신이 되자마자 인간일 때보다도 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많아지는군····’
불쾌하다·
심지어 태양은 단지 빛에 파묻힌 게 아니라, 그 속에서 무언가에 의해 끊임없이 갈라지고 있었다·
켈리악은 그것도 빛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검이었다· 진 룬칸델이라는 무인이 가진 의지였다· 켈리악은 여전히 그 사실을 알 수 없었다·
그저 진이 이제껏 세상에 없던 우월한 힘을 얻어 싸우고 있다는 생각이었다·
참고 있던 가쁜 숨이 어쩔 수 없이 입 밖으로 토해지고, 검을 쥔 손아귀가 덜덜 떨리고, 두 다리는 언제든 쓰러질 것 같은·
한 인간의 모습을 켈리악은 전혀 바라보지 못하고 있었다· 알 수만 있다면, 벌레를 짓밟는 것보다 쉽게 죽일 수 있는 그 나약한 실체를·
[기분이 어떠냐? 진 룬칸델· 나는 솔직히, 이쯤 되니 즐거운 마음보다 황당한 기분이 더 크게 다가오기도 하는군· 이런 힘이 있는 줄 알았다면, 킨젤로 따위에 집착할 이유가 없었겠어·]
“내게 질 것 같다는 말을 길게도 떠벌리는구나·”
[하하, 그렇게 들리던가· 뭐, 반은 맞는 말이라고 해두지·]
이길 수 없을 것 같다·
켈리악은 자신을 의심하고 있었다· 처음엔 대등하게 싸울 수 있는 게 신기할 뿐이었으나, 이제는 분명히 빛의 힘이 더 우월하게 느껴졌다·
초가 지날 때마다 자신의 내면에 생기는 변화가 우스울 지경이었다·
잠시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도 수십 번은 몸이 잘렸다· 빛에 가려진 태양은 이제 진에게 창은커녕 작은 열기조차 떨구지 못했고, 적들은 죽음을 벗어나고 있었다·
더는 죽는 사람이 없다·
바다에 빠져 허우적대는 사람도 없고, 조작과 왜곡에 시달리는 사람도 없었다· 라프라로사에선 아예 신관들이 직접 내려와 부상자를 살폈고 황금함대는 전장을 돌며 쓰러진 이들을 수습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유일신이 아닌, 인간을 상대로 싸우고 있던 듯이 행동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거북해 마신석을 휘두르면, 여지없이 빛이 자신을 가로막았다·
짜증이 난다·
다만 켈리악은 한 가지 영역에서만큼은 자신이 진을 압도하고 있다는 사실에 위안을 받았다·
세계를 파괴하는 것·
[나는 꽤 수월하게 상대하고 있으나, 전장 바깥은 전혀 신경 쓰지 못하는군·]
진의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그 말처럼 진은 온 세상에 범람한 붉은 바다 전체를 막지는 못하고 있었다· 빛은 어디에나 존재하나, 그 빛을 진이 전부 통제할 수 있는 건 아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 세계를 다 부수기만 하면 결국 네놈의 승리라는 것이냐?”
[그건 이미 성립된 이야기지· 보아하니 네게는 이 땅을 재건할 힘이 없다· 내 태양을 묶어두고 있으나, 킨젤로의 권능을 본질적으로 소멸시킨 것도 아니지· 그리고 네게는··· 시간이 많이 남지 않았어· 빛을 다룰 수 있는 시간이·]
켈리악은 진이 가진 빛의 최대 약점을 파악했다· 진은 대답하지 않고 그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실제로 진은 켈리악을 벨수록 자신으로부터 빛이 빠져나가는 걸 인지하고 있었다·
[영원하진 않으나 짧고, 무엇보다도 강렬하다· 네게 더할 나위 없이 어울리기는 해· 특별한 인간의 삶을 보는 것 같지· 유한과 무한, 그 둘 중 무엇이 더 가치가 있는지는 이미 증명이 된 셈이다· 이 상태로는 너를 이길 수 없어··· 그렇다면, 나도 똑같이 유한해지마·]
켈리악의 몸에서 태양기가 사라지고 있었다·
버린 것이다· 그는 마침내 얻은 태양신 킨젤로의 힘을, 자신으로부터 빠져나가도록 만들고 있었다·
잠시 후 그는 다시 평범한 인간과도 같은 모습이 되어 진을 바라보았다·
빛덩이가 아니라, 상처 입은 인간이 자신에게 맞서 겨우 서 있는 모습을 바라볼 수 있었다·
“아··· 그래, 이제야 네가 얼마나 약했는지가 다시 보이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