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138화
259화· 세상의 진실, 너의 진실, 나의 진실(7)
* * *
“허억!”
발레리아가 눈을 떴다·
‘꿈··· 꿈인가?’
그녀는 자신이 의식을 잃은 순간을 떠올렸다· 싸우다가 켈리악의 욕망이 보여주는 환상에 취했고, 그 속에서 그녀는 고통스럽지 않은 미래를 마주했다· 회색부엉이 용병단이 죽지 않고, 사람들이 죽지 않는 세계에서, 그녀는 행복을 느꼈다·
꿈이라면 언제까지 깨고 싶지 않았다· 도저히 꿈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생생하고, 지독한 현실은 순식간에 멀어져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갑자기 고통스러운 일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진의 죽음을 깨달은 날, 솔더렛이 시간을 돌린 날, 그 후 하염없이 사막처럼 새하얀 차원 통로를 헤매던 날들이·
꿈이 아니었다·
[발레리아!?]
르엣이었다· 그녀를 비롯해 발레리아의 시신을 확인한 이들 모두가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 있었다·
“르엣 님····”
[당신은 분명 죽었는데, 대체 어떻게· 아니, 이유가 무엇이든 다행입니다· 라니! 어서 라니를 불러요· 발레리아를 다시 싸울 수 있을 만큼 치료해야 조작에 조금이라도 대응할 수 있으니···!]
발레리아는 밀려드는 기억을 더듬으며 르엣을 바라보았다·
“죽은 게 아니라, 시간이 멈춘 것이었어요····”
[네?]
“미래의··· 아니, 어쩌면 과거의 나라고도 할 수 있는 사람이 이 세상에 관여한 순간, 제 시간이 잠깐 멈췄던 겁니다·”
자신에게 벌어진 일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솔더렛이 시간을 되돌렸다는 점에서는 미래의 자신이고, 그녀가 시간을 돌리기 전부터 마신대의 기록을 보았다는 점에서는 과거의 자신이었다·
혼란스럽지만, 발레리아는 그녀가 진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말을 떠올렸다· 현재와 과거와 미래는, 어딘가 이어져 있어·
무엇이 우리를 잇고 있을까·
사람을 지키고 싶다는 마음, 세상을 잃을 수 없다는 마음· 왠지, 그것일 것 같았다· 그것밖에 없을 것 같았다·
상처가 아프다·
찢기고 찔린 몸 곳곳에서 고통이 느껴지고 있었다· 손톱이 하나만 빠져도 죽을 듯이 아픈데, 여기서 싸우는 사람들은 그와 비교할 수 없는 고통을 너무 오랜 시간 겪고 있었다·
깨진 함교 유리 사이로 재 냄새가 풍겨왔다· 폭음, 그리고 사람들의 비명과 괴성과 알 수 없는 끔찍한 소리들이 들려왔다·
“진이 떠나고 시간이 얼마나 지났죠?”
[대략 10분 정도가 지났습니다·]
겨우 10분·
그사이에도 수많은 사람이 죽었다· 시론과 반도 이제는 아예 반격을 시도하지 못했고, 초인들은 대부분 붉은 바다에 잠겨 사라지고 말았다·
그나마 헤도가 창성에 도달하며 무라칸과 함께 마신대의 창성들을 꺾었으나, 이제 사람의 전투는 큰 의미를 갖기 어려웠다·
진이 유산으로 들어선 직후, 마신석이 복원되었으니까·
[그마저도 가주와 투신께서 조작에 저항한 덕에 버틴 겁니다· 두 분은··· 이제 조작에 침식되고 있어요· 발레리아, 당신이 조작된 기록을 찾아줘야 합니다·]
무라칸은 진을 잊어가고 있었다·
헤도는 산드라를 잊었고, 베라딘과 단테는 서로가 누구인지를 잊었다· 탈라리스는 시리스를 잊었고, 루시는 헤일린을 잊었다·
지금 전장에 ‘진 룬칸델’이라는 인물을 기억하는 사람은, 남은 인원 중 1할 정도밖에 되지 않을 지경이었다·
마신석에 역사가 조작되는 와중, 그저 맹목적으로 싸울 뿐이었다· 기억이 흐려지는 와중에도 싸워야 한다는 일념만이 남아서, 마치 심연 군단처럼 앞으로 검을 휘두르는 게 전부였다·
그 검은 때때로 켈리악이 아니라 서로를 향한다·
아니, 자주 서로를 향하고 있었다· 애초에 마신석이 도착하기 전에도 창성이 아니고는 켈리악을 공격하는 건 불가능했다·
진이 누구인지를 잊고, 자신이 누구인지를 잊고, 무엇과 싸우고 있었는지를 잊고·
전장만 그런 게 아니었다·
온 세상이 그렇게 조작되고 있었다· 677차원이라는, 모든 차원의 시작점 전체가 시뻘건 바닷물에 잠기며 조작되고, 부서지고 있었다·
차라리 전장이 나았다· 아직 쓰러지지 않은 사람들 덕에, 이곳은 그래도 르엣처럼 의식을 유지 중인 사람이 있었다· 전장 바깥엔 그런 사람이 아무도 남지 않았다·
“이제 진이··· 올 거예요, 르엣 님·”
[···소가주께서!?]
“그리고 그는, 아무것도 잊지 않았습니다·”
그 순간, 진이 사라졌던 붉은 바다 한가운데에서 한 줄기 새하얀 섬광이 하늘로 치솟았다·
빛이었다·
켈리악의 온몸을 밝히고 있는 금빛 태양기와는 전혀 다른, 물처럼 투명하고 깨끗한 빛기둥이 하늘을 가르고 있었다·
[음···?]
켈리악의 시선이 그 기둥에 닿고 있었다·
그는 솔더렛이 유산에 남긴 ‘초월적인 힘’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게 정확히 무엇인지는 알지 못했다·
어차피 마신석은 복원이 끝났고 온전한 태양신 킨젤로의 힘마저 손아귀에 넣었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 더는 자신을 거스를 게 없다는 의미다·
‘진 룬칸델····’
힘을 숨기고 있던 말루기아도, 헬루람도, 지긋지긋하게도 버티는 중인 바멀 연합도, 이제 모조리 붉은 바다에 가라앉을 일만 남았었다·
켈리악은 종내엔 677차원을 흔적도 없이 파괴하기로 결정한 상태였다· 그리고 모든 차원을 하나로 통일하면, 그는 마침내 자신이 원하던 바를 이루게 된다·
변치 않는 것을 변하게 만드는 힘을 얻었다는 증거가 된다·
그런데 어째서, 빛이 신경 쓰이는 것인가· 지금 자신이 얻은 절대적인 힘이란, 이런 느낌조차 받을 수 없는 영역이 분명하건만·
[지워져라·]
켈리악이 지팡이로 변한 마신석으로 빛기둥을 향해 허공을 그었다· 수만 걸음에 달하는 공간이 종이처럼 주욱 찢어졌으나, 빛은 끊어지지 않았다·
불쾌하다·
그리고, 불안하다· 한 번 더 강력한 의지로 빛을 지우려 했으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빛에 집중하느라 시론과 반을 압박하던 조작이 잠시 풀리고 말았다·
“아··· 자네 아들이 돌아온 모양이군·”
“그대의 형제이기도 하지·”
두 사람이 멍한 의식을 붙잡으며 입을 연 순간, 켈리악은 그들의 머리 위로 태양의 창을 떨궜다· 이제 그들을 아쉽게 여길 필요도 없었다·
키익!
태양의 창이 무언가에 가로막히고 있었다· 당연히, 켈리악은 두 사람이 또 기적처럼 검을 들어 창을 쳐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니었다· 두 거인은 지금까지 이미 충분히 많은 기적을 만들어왔다· 더는 켈리악의 공격을 쳐낼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심지어 그들은 태양기로 빚은 창이 자신들의 머리 위로 떨어진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창을 막은 건, 빛이었다·
벼락이 친 듯 일순 번쩍임이 일었고, 태양의 창은 그 순간 수십 갈래로 베여서 흩어지고 말았다·
켈리악은 반사적으로 마신석을 휘둘렀다· 창을 막는다면, 더 많은 조작을 행하면 그만이었다· 그들이 있는 공간을 왜곡하고, 그들의 의식을 완전히 뭉개면 된다·
세상을 멸망시키고 있는 재앙이 잠시 멈췄다· 켈리악은 이참에 두 사람을 진의 눈앞에서 없애버리고자 권능을 집중시켰다·
그러나 이번에도 마신석의 힘은 어딘가에 가로막힌 듯, 시론과 반에게 나아가지 못했다· 그들의 근처만을 뒤틀며 일렁일 뿐, 닿지는 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 광경을 목도한 순간, 켈리악은 불현듯 십여 분 전을 떠올렸다·
정말로, 죽일 수 있나? 유일신이 되더라도 진 룬칸델을, 정녕 멸할 수 있기는 한 건가?
불과 십여 분 전이었다· 그때 켈리악은 스스로의 의문에 답을 내리지 못했고, 불길한 직감은 현실처럼 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마신석과 태양신의 힘보다··· 진 룬칸델이 유산에서 얻은 힘이 우월하다는 말인가?’
그럴 리가 없다· 켈리악은 다시 빛기둥을 살폈다·
‘사라졌어?’
하지만 기둥은 거짓말처럼 사라졌고, 켈리악은 마치 인간처럼 심장이 뛰는 걸 느끼며 사방에 보호막을 둘렀다·
“켈리악 지플·”
또 한 번 빛이 번쩍였다·
진은 이미 켈리악의 바로 앞에 서 있었다· 켈리악의 눈에 그는 한 덩이의 둥근 빛처럼 보였다· 그는 형태와 관계없이 그 빛이 진 룬칸델임을 알아보았다·
그러나 그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의 눈에는 그저 그들이 알던, 방금까지 잊고 있던 진 룬칸델로 보였다· 상처투성이인 몸으로 검을 놓지 않고 있는, 진이었다· 익히 알던 모습 그대로였다·
[하?]
목이 베였다·
진이 눈앞에 나타난 순간 켈리악은 무언가 날카로운 게 제 목을 벤 사실을 알았다· 조작을 일으켜 없던 일로 만들었으나 자신이 베인 순간을 전혀 인지하지 못한 건, 충격이었다·
그는 자신이 유일신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아니, 확신했다· 이제 세상엔 자신이 ‘알 수 없는’ 일이 벌어져서는 안 되는 것이다· 다만 켈리악은 뒤늦게 진의 힘이 무엇인지를 파악하고 있었다·
[빛? 빛이··· 킨젤로보다도 먼저였다고? 솔더렛이 그 힘을 네게 남겼단 말이냐?]
이번엔 왼팔이 떨어졌다· 진은 켈리악이 조작을 시도하기 전에 그가 오른손에 쥔 마신석을 베었고, 다시 목을 베었다·
하지만 켈리악은 멀쩡한 모습으로 진의 뒤에 서 있었다· 마신석도 베인 적이 없는 듯 멀쩡한 모습이었다·
[황당하군· 모든 것의 시작은 결국 빛이라는, 세상의 진실을 발레리아 히스터만이 알고 있었다니·]
진은 개의치 않았다· 그가 얻은 권능이 거대하다는 건, 이미 유산에 들어서기 전부터 알고 있었다·
내가 얻은 빛은 그보다 더 우월하다, 그렇게 생각하지도 않았다· 확신할 수 있는 건, 그보다 옳다는 것일 뿐·
[흐음··· 하지만 솔더렛이 네게 남긴 건 그저 빛에 대한 아주 작은 권한일 뿐이로군· 그것만으로도 나와 싸울 수 있는 정도는 된다는 말인가, 여러모로 흥미롭구나· 그 또한 내가 취해주마· 차라리 다른 차원으로 도망치지 그랬나· 그만한 힘이 있다면, 내게서 꽤 오랜 시간을 벗어날 수 있었을 텐데· 이미 멸망한 것이나 다름없는 이 세계에 미련이 남은 것이냐? 실로 인간답군·]
진이 켈리악에게 접근한 시점부터 조작과 욕망에 잠긴 사람들이 하나둘씩 깨어나고 있었다· 켈리악은 전처럼 쉽게 그들을 다시 잠식할 수 없었다·
이내 진은 켈리악에게 검을 겨누며 이렇게 뒷말을 이었다· 그의 눈에 단지 둥근 빛이 조금 흔들리는 모습으로만 보였지만 말이다·
“그래, 켈리악 지플· 그렇게 계속··· 나를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는 세상에 두려운 것이 하나도 남지 않았다고 계속 확신해라· 내가 네놈을 더 쉽게 벨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