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135화
259화· 세상의 진실, 너의 진실, 나의 진실(4)
로사는 증오와 투지, 그리고 당혹에 젖어 떨리는 진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그 속에, 자신의 지난날들이 흐르고 있었다·
13차원, 로사가 있던 세계로 마신대의 토벌군이 도달한 건 20년 전이었다· 마신대는 그때 이미 백여 개의 차원을 정복한 상태였고, 13차원의 룬칸델에겐 그들을 막을 힘이 없었다·
켈리악이 직접 나서지도 않았건만 하루를 버티지 못했다· 급히 복귀한 시론도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로사는 그때 목숨을 구걸했다·
지플은 로사가 룬칸델의 남은 일원을 직접 처형하라며 능욕했고, 그녀는 그 일을 받아들였다·
마신대는 그녀의 충성을 믿지 않았다· 그러나 켈리악은 수많은 차원 중 처음으로 항복한 룬칸델에게 묘한 흥미를 보였다·
‘켈리악은 나를 믿지 않았어·’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스그극! 진은 이미 그녀의 심장에서 검을 뽑고 로사의 손아귀에서 구슬을 챙겨 발레리아에게 향하고 있었다· 쓰러진 로사의 눈엔 그 뒷모습이 느린 영상처럼 보였다·
시간이 흐르지 않는 듯했다·
‘그러나 내가 재밌었나 보더군· 그는 내게 실린 지플이라는 이름을 주고, 맹약을 없애주었다·’
원한다면 언제든 배신해라, 어차피 너는 나를 거스를 수 없다·
그때부터 켈리악은 로사를 그렇게 여겼다· 애초에 로사뿐만이 아니라 켈리악은 마신대의 모든 인간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로사는 그의 명령에 따라 전 차원을 돌며 정복전쟁에서 공을 올렸다· 마신대에서 그녀보다 룬칸델을 더 많이 죽인 사람은 한 손에 꼽을 지경이었다·
그 과정에 창성에 다다랐고, 순혈 지플만이 배울 수 있는 비전 마법들을 익혔다· 전쟁터에서 물러나 반군 추적에 집중할 무렵부터는, 마신대 내에 그녀가 룬칸델 출신이라는 걸 아는 사람도 얼마 남지 않았다· 13차원의 로사 룬칸델은 공식적으로 사망 처리가 되었으니까·
실린으로서 회색부엉이의 발레리아 히스터를 삼십 명쯤 죽였을 때부터, 마신대원들은 로사를 전설적인 존재로 경외했다· 차원 통로 임무를 수백 번이나 성공한 건 그녀가 유일하니 말이다·
‘나는 늘 갈망하고 있었다· 어느 한 세계라도, 마신대를 이길 수 있는 룬칸델이 존재하기를· 룬칸델이 아니라면 반군 중 누구라도 켈리악을 죽일 힘을 가지고 있기를·’
자신조차 막지 못하는 룬칸델은 어차피 마신대를 넘볼 수 없고, 자신조차 이길 수 없는 반군은 어차피 켈리악을 죽일 수 없다·
그렇기에 모든 전쟁과 싸움을 더 악독하게 몰아붙였다· 함께 출전한 마신대원들마저 혀를 내두를 정도로 잔인하게 짓밟았다·
그게 로사가 희망을 찾는 방식이었다·
그리고 지금 이곳, 모든 것이 시작된 677차원에서 마침내 발견한 것이다· 진의 검에 심장이 꿰뚫린 건 그녀에겐 구원이나 다름이 없었다· 목숨 따윈 아무래도 좋았다· 룬칸델이 다시 번영할 수만 있다면·
이내 로사는 점점 흐려지는 진의 뒷모습을 보며, 마지막 남은 힘을 짜내 입을 열었다·
“영원하라, 룬칸델···!”
로사가 죽은 그 시점에, 진도 시간이 멈춘 것 같은 감각을 느끼고 있었다·
손에 쥔 기억 구슬 때문이었다· 현실 감각은 순식간에 흐려지고, 발레리아의 지난 기억들이 물처럼 진을 감싸기 시작했다·
[이해할 수 없군·]
솔더렛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자신이 천 년 전 진을 선택한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진을 선택하기 위해서는, 애초에 천 년 후 그가 존재할 수 있다는 걸 알아야 했다·
[나는 천 년 전에도 오직 테마르만이 희망이라고 생각했다· 분명히 그랬지· 그래서 테마르를 위해 모든 걸 준비했어· 로키아와 함께 이 공간을 만들었고, 그만이 입장할 수 있도록 조치를 해두었다· 그를 부활시킬 수 있다고 믿었으니까· 지플의 조작에 잃어버린 나와 테마르의 기억을 무덤들에 봉인한 것도 그 이유였어·]
오직 진 룬칸델만이 마신대가 모르는 룬칸델이다· 그러므로, 그만이 유일한 희망이다·
솔더렛이 그 사실을 알게 된 건, 검마전쟁으로부터 천 년이 지나 나를 만난 시점이었다·
다중세계를 가장 먼저 인지한 건 나였으니까·
1808년 어느 날, 나는 우연히 발견한 한 전승지에서 다중세계의 기록을 발견했다· 역사 조작으로 인해 탄생한 수많은 차원, 마신대, 그들의 수장인 켈리악 지플까지 모든 게 서술된 기록이었다·
솔더렛은 어느 세계에서나 늘 테마르를 위해 권능을 사용했으나, 그가 지플을 꺾은 역사는 찾을 수 없었다·
그 모든 기록은 마치 이미 한 번 벌어졌던 일인 듯 상세했다· 나는 그 기록을 보다가, 확신했었다·
종말이 다가오고 있다고· 세상은 33차원의 켈리악 지플에 의해 반드시 끝장이 난다고·
“나도 이해할 수 없어요, 솔더렛· 애초에 이곳은 분명 당신과 로키아가 만든 아공간이죠· 그런데 히스터의 전승지가 존재하다니·”
내가 다중세계의 기록을 본 전승지가 바로 여기였다·
우리가 지금 진을 위해 준비하고 있는 아공간, 분명 솔더렛과 로키아가 만든 이곳· 이곳에 히스터의 전승지가 있던 것이다· 아공간을 만든 솔더렛과 로키아조차도 알지 못하는·
[그런데 내가 왜 진을 골랐을까· 그게 이 모든 일과 관련이 없을 것 같지는 않군·]
“···3년 전 진을 처음 만났을 때, 나는 평소와 달리 그에게 손을 내밀었죠· 지플로부터 도망치느라 내 한 몸 건사할 여유도 없는 내가, 왜 진에게 손을 내밀었는지 지금도 그 이유를 알 수 없어요· 그냥 그를 본 순간, 왠지 그래야 할 것 같다는 강렬한 충동이 일었을 뿐·”
3년 전 진은 내 제자가 되어 삶의 새 의미를 찾았고, 나의 연인이 되었고, 솔더렛의 계약자가 되었다·
그리고 지금 나는 죽은 진을 그리워하며, 솔더렛과 이 어둑한 공간에서 그를 위한 미래를 설계하고 있다· 진은 우리가 다중세계의 기록을 살피느라 자리를 비운 사이에 허무한 죽음을 맞이했다·
이 모든 일이 정말 우연일까?
사실 나는 이미 모든 일을 한 번 겪었고, 끝내 지플을 막지 못해 기록을 남긴 건 아닐까?
혹은 다중세계의 시간은 다르게 흐르니 어느 차원의 발레리아 히스터가 이곳에 전승지를 만든 것일지도 모른다· 회색부엉이라는 이름의 반군으로 활동하는 어느 발레리아 히스터가·
머리가 복잡하다· 솔더렛의 말대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사건의 시작점이 어디인지도 알 수 없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역설이 가득했다·
어쨌거나 중요한 건 하나였다·
나와 솔더렛에게 부여된 유일한 사명은 지플을 막는 일이라는 것· 그리고 우리는, 그걸 위한 패로 죽은 진을 선택했다·
오직 그만이 마신대가 모르는 룬칸델이고, 천 년 전 솔더렛이 선택한 인물이고, 내가 먼저 손을 뻗은 유일한 인물이었으니까·
무엇보다도·
내가 진을 만나지 못했다면 나는 솔더렛의 아공간에 존재하는 전승지를 볼 일이 없었을 것이다·
내가 진을 만나지 못했다면 솔더렛은 다중세계의 진실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진을 만나지 못했다면, 나 또한 진실을 알지 못한 채 지플에 저항하다 언젠가 죽음을 맞이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진을 선택했다· 진이 아니라면 애초에 시작조차 될 수 없는 고민이 너무 많았으니까· 하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나는 아마 진을 골랐을 것이다· 천 년 전 솔더렛이 아무 근거도 없이 진을 고른 것처럼·
그로부터 2년이 지났다·
무슨 수를 써도 진을 되살릴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진의 시신 일부는 찾았으나, 그것만으로는 그를 살릴 수 없었다· 사망 후 너무 많은 시간이 흘러 어렵게 구한 누메루스의 눈물조차 효과가 없었다·
1810년 8월 2일, 오후 7시 22분·
마신대의 침공이 시작되었다· 나와 솔더렛은 순식간에 지옥도가 된 인세를 떠나 아공간으로 대피했다·
룬칸델과 킨젤로는 끝까지 우리 말을 믿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이 믿었다고 한들, 무슨 의미가 있었을까· 그들은 마신대가 아니라 이 세계의 지플이 부리는 역사 조작조차 감당하지 못하고 있는데· 시론 룬칸델은 마성화에 빠졌고, 오르갈 레밀리아스는 태양기를 얻지 못해 제 몸조차 가누지 못했다·
[우리가 확인한 기록대로, 마신대는 정확히 그 시간에 이 땅을 공격하기 시작했어· 어차피 이대로는 지플을 막을 수 없다· 여기도 곧 발각되겠지·]
그렇게 되면 모든 게 끝이었다· 여긴 마신대에게 정복되지 않은 마지막 세계니까·
이 이후의 일은 어디에도 적혀 있지 않다· 설령 지금 당장 진을 살려낼 수 있다고 해도, 그에게 마신대를 막을 힘이 있을까?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우리에게 남은 수가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시간을 되돌려야 해요, 솔더렛·”
[···그래, 그것뿐이로군·]
시간을 되돌린다·
그건 진을 살리기 위해 우리가 선택한 방법이었다· 정확히는 우리가 아니라, 내가·
솔더렛은 소멸을 대가로 시간을 되돌릴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 사실을 깨달은 시점부터 진이 아니라, 테마르를 부활시킬 수단으로 여기고 있었다·
테마르가 죽은 천 년 전으로 시간을 되돌려서, 애초에 지플이 역사를 조작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야말로 다중세계를 없앨 근본적인 해결책이라는 이유였다·
하지만 천 년이나 되돌리기엔 그가 가진 권능이 충분치 않다· 솔더렛의 말에 의하면 현재로서는 30년 정도가 한계였다· 때문에 솔더렛은 그 기간을 늘릴 방법을 궁리하고 있었으나, 마신대는 예정된 시간을 어기지 않았다·
하필 30년, 그 숫자조차 진을 가리키고 있었다· 살아 있다면, 지금 진은 서른 살이다·
[부디 여기뿐만이 아니라 모든 차원의 시간이 30년 전으로 돌아가면 좋겠군· 그래야 마신대가 곧장 이 세계를 다시 침범할 수 없을 테니· 발레리아, 누군가는 이 일을 기억해야 해····]
그가 시간을 되돌릴 권능을 일으키는 동안, 나는 마력으로 봉인한 진의 상반신을 찾았다·
그리고 시간에 쓸려 지워질지, 아니면 그대로 전해질지 모르는 기록을 그 몸에 새기기 시작했다·
너는 다시 태어날 거야·
그때 우리를 잊지 마· 이 모든 걸 잊지 마·
[발레리아, 30년 전으로 돌아가면 나는 소멸해서 존재하지 않아· 모든 게 달라지겠지··· 너와 내가 만나는 건 물론, 나와 진이 계약을 맺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 될 거다·]
솔더렛이 시간을 돌리면 그 어느 기록에도 찾을 수 없던, 완전히 새로운 역사가 시작될 것이다·
[우린 진에게 모든 걸 거는 셈이야· 그에게 너무 큰 짐을 떠넘기는 것이지····]
무엇도 확신할 수 없다·
우리 세계만 시간이 되돌아가는 것인지, 마신대를 꺾고 세상을 제자리로 돌려놓을 수 있는지, 진은 내가 남긴 기록을 확인할 수 있는지, 우리는 다시 만날 수 있는지·
아무것도 알 수 없으나 우리는 진을 선택했다·
어쩌면 이건, 순전히 우리 욕심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종말이라고 한들, 그냥 흐르는 대로 두는 것이 옳을지도 모른다·
[뒤를 부탁한다, 발레리아· 그리고··· 진·]
이내 솔더렛의 몸이 환하게 빛났고, 나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나는 아무것도 없는, 끝없이 펼쳐진 새하얀 공간을 마주할 수 있었다·
그건, 차원 통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