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131화
258화· 전 차원의 포식자(21)
싸우는 이들은 전부 수시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빗발치는 날카로운 빛 때문이었다· 보호막으로도, 무기로도 쳐낼 수 없는 빛은 초인들조차 그 궤적을 읽기 어려울 만큼 빠르다· 심지어 지상에서 싸우는 이들 대부분은 시뻘건 바닷물에 허우적대느라 피하는 것도 거의 불가능했다·
그저 눈을 부릅뜨고 빌 뿐이었다· 빛이 한 번은 더 자신을 비껴가기를, 그래서 잠시라도 더 세상을 위해 싸울 수 있기를, 비록 무의미한 저항이라 할지라도·
그러던 중 싸우는 이들은 유난히도 찬란한 한 줄기 빛에 시선을 빼앗기고 있었다· 켈리악이 쏜 빛이 아니었다·
저건, 유성인가····
피와 죽음이 난무하는 가운데 한 줄기 빛이 유성처럼 아름다운 꼬리를 남기며 지상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격전지 방향이었다·
왠지 소원을 빌어야 할 것 같았다· 유성과 소원, 그런 미신에라도 기대고 싶을 만큼 끔찍한 절망이 계속되고 있었으니까·
하늘을 올려보던 연합원들이 저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한 찰나, 지상에 가까워진 빛은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막내!?”
“진 형제···!?”
중앙 전장을 지키던 이들도, 진을 지키며 유산을 찾던 창성들도 놀라고 있었다· 그들 모두 시간이 멈춘 걸 모르고 있으니 말이다·
추하아악-!
브라다만테의 칼날에서 빠져나온 거대한 광파가 창성들을 덮치려던 붉은 파도를 베어냈다· 진은 파도가 허물어진 자리에 착지하며 고개를 들었다·
어떻게 된 게냐, 시론과 반은 그렇게 묻지 않았다· 그저 진의 왼팔과 기력이 회복된 사실을 읽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르갈과 엔야는 반의 등에 업혀 있었다· 오르갈은 여전히 의식이 흐려졌다 돌아오기를 반복했고, 엔야는 발레리아에 대해 물으려다 이를 악물었다·
“이쪽이 맞았습니다, 아버지· 안배의 입구는 삼천 걸음쯤 앞, 붉은 바다에 가려져 있습니다·”
진이 시론에게 브라다만테를 내밀었다· 검을 바꾸자는 의미였다·
“넌 아직 가주가 아니다, 막내· 그러니 반드시 다시 가져오도록·”
“물론입니다·”
두 사람의 검이 바뀌었다·
진의 손아귀에 감긴 바리사다는 두어 차례 묵직하게 진동했다· 테마르가 그리웠다는 듯이, 진을 인정한다는 듯이·
이내 진은 정수리로 떨어진 빛을 피하며 반에게도 시그문드를 내밀었다·
“왠지 유산에서는 필요치 않을 것 같습니다, 형제· 엄호해 주십시오, 혼자 속도를 높이겠습니다·”
이제 뭉쳐서 움직일 이유가 없었다· 어차피 켈리악이 가장 죽이고 싶은 건 자신이니, 차라리 혼자 움직이며 그의 공격을 유도하는 게 아군을 살리기에도 더 나은 수였다·
“그래, 맡아둘 테니 다시 가지러 와야 한다· 가라!”
켈리악의 욕망을 짓밟으며, 진은 힘껏 도약해서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몇 갈래 빛줄기가 뺨과 허벅지를 위협적으로 스쳤다·
“···시간? 설마 방금 너를 위해 세상이 멈췄던 것이냐?”
켈리악의 목소리, 그 안에 맺힌 악의가 진의 등을 찔렀다· 그는 눈이 가려진 와중에도 단번에 시간이 멈췄었다는 사실을 알아보았다· 그게 아니라면 진은 살아 있을 수 없었다·
“기가 막히는군· 회색부엉이의 수장에게 이만한 힘이 있었다는 말인가·”
지금껏 잘도 숨겼군, 반군이 그토록 무너질 때도 한 번도 보여준 적 없건만· 실린이 놓칠 만했겠어·
켈리악은 뒷말을 삼키며 고개를 저었다· 안일했던 지난 순간들이, 유일신이 되기 직전인 자신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
농락을 당하는 기분이었다·
헬루람은 이번에도 이렇게 될 미래를 알고 있었다는 듯 자신의 눈을 가렸고, 반군의 수장은 마신석과 킨젤로의 권능 없이 잠시나마 시간을 멈췄다·
그 덕에 이미 백번은 죽어 없어졌어야 할 진은 불사신처럼 다시 일어나서 솔더렛의 유산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세상을 통째로 부숴주마· 너를 위해 움직이고 희생하는 그 무엇도 남지 않을 때까지·”
머릿속에서 모난 쇳덩이들이 마찰하는 듯 이명이 일었다· 귀에서 흐른 핏물에 목과 어깨가 뜨거워졌다· 진은 아랑곳하지 않고 빛을 피하고 해일에 균열을 일으키며 앞으로 나아갔다·
“소가주를 지켜라!”
“바멀 연합, 살아 있는 자는 모두 진 형제를 엄호하라!”
쿠그그그극···! 스아아악!
전장이 흔들리고, 붉은 바다는 더욱 사나워지고 있었다· 켈리악의 등 뒤에서 빛나는 태양은 한층 더 지상에 가까이 붙어 사방으로 폭발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건, 전장에만 벌어지는 현상이 아니었다·
세계·
33차원 전역에 지진과 폭풍이 번지고 있었다· 시뻘건 물은 이제 세상의 모든 강과 바다를 대체했고, 태양은 어느 하늘에나 종양처럼 떠 있었다·
세상 어디에서든 진동을 느낀 이들은 병든 나무처럼 쓰러졌고, 칼날보다 예리한 바람이 그 몸을 찢었다· 시체는 태양에 지져져서 검은 얼룩이 되었다가 사라졌다·
“이 땅이, 이 세계가, 너희들의 고향이 죽어가는 게 느껴지는가? 느껴질 것이다· 모두 느끼고 있을 것이다· 이것이 진 룬칸델을 사랑한 대가다· 자꾸 무엇을 지키라는 것이냐? 너희가 감히 나로부터 이 땅의 모래 한 알이라도 지켜낼 수 있을 것 같던가?”
검의 도시 칼론에도, 마법의 도시 드락카에도, 수도가 사라진 제국에도, 비궁에도, 티칸에도, 그 모든 권력의 손길이 닿은 적 없는 작고 무해한 땅들에도·
모조리 재앙이 퍼지고 있었다· 켈리악의 증오는, 채 1분이 지나기도 전에 이 세계 전체 생명의 7할을 말살했다·
10분, 아니· 5분만 더 지나도 세상에 숨을 쉬는 생명은 단 하나도 남지 않을 것 같았다·
밟을 땅이, 적실 물이, 바라볼 하늘조차 없는 세상에서 생명은 살 수 없다· 설령 모든 생명이 다 시론만큼 강하다고 할지라도 그건 결코 변치 않는다·
켈리악의 말처럼 모두가 그 사실을 느끼고 있었다· 온몸이 불타고 찢기고 잠기는 고통 속에서도 낙인처럼 선명했다·
어디에도 재생의 빛은 남지 않았다· 지하세계를 빛내던 금빛도, 성국에 남아 있던 금빛 영혼들도 붉은 바다에 흡수되어 사라지고 있었다·
“그래도 우린 할 수 있는 일을 할 뿐이다·”
진은 달리기를 멈추지 않으며 말했다· 헬루람이 남긴 어둠은 아직 켈리악의 눈과 감각을 차단하고 있었다· 진은 빛에 찔리고 바다에 빠져 몇 번이나 목숨을 잃을 뻔했으나, 그때마다 누군가 그를 도와주었다·
시론과 반처럼 무의 극지를 밟은 이들만이 돕는 게 아니다· 초인이어야 진을 도울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진이 달릴 때 옆에 있는 사람이라면, 손을 뻗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할 수 있었다·
진을 위해 대신 빛을 맞고, 대신 물에 빠진다· 이를테면, 대신 죽는다· 희생한다·
세상이 멸망하고 있으니, 역설적으로 희생은 그리 대단한 결심이 필요한 일이 아니게 되었다· 어차피 아무도 죽음을 거스를 수 없다면, 누군가를 위해 손을 뻗는 건 희생이 아니라 존엄성을 지키는 일에 더 가까울 것이다·
하물며 그 누군가가 희망이라면·
세상을 이 지경으로 만든 자를 벌할 수 있는 단 하나의 가능성이라면, 얼마든지·
“너도 눈이 보이지 않으니 나를, 우리를 막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있을 뿐이지 않나, 켈리악 지플· 네 눈에는 우리가 우스워 보이겠지? 그 또한 마찬가지다· 너는 온 세상을 부수고 있으면서도, 끝내 나 한 사람을 죽이지 못하고 있군·”
일순 켈리악은 말문이 막혔다·
세상을 모조리 파괴하는데도 한 사람만은 죽이지 못하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진이 그만큼 강하기 때문은 아니다· 시론과 반조차 재앙을 거스르지 못하고 있으니까·
그렇다면 아직 유일신이 되지 못해서인가? 그렇기에 아직은, 변치 않는 것을 변하게 만들 힘이 부족한 것인가?
마신석이 완전히 복구되고, 태양신의 부활도 완벽하게 끝나면 그때는 진 룬칸델을 죽일 수 있는 것인가?
정말로, 죽일 수 있나? 유일신이 되더라도 진 룬칸델을, 정녕 멸할 수 있기는 한 건가?
처음으로 의문이 들었다·
온전한 마신석과 킨젤로의 힘을 전부 획득하면, 불가능한 일은 없어야 한다· 켈리악이 그간 쌓아온 지식과 경험에 의하면 분명히 그래야 했다·
그런데 왜, 대답을 할 수 없는 것인가· 그렇다고 말하면, 왜 거짓말일 것 같은가·
“그것이야말로 우스운 일인 것이다, 켈리악 지플· 유일신이니 뭐니 하는 개소리를 아무리 떠들어대도,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아무리 많이 죽여도, 결국 우리가 살아가야 할 땅까지 죄다 부숴버려도· 너는 내가 저기 들어가는 걸 막지 못해····”
그게 네 한계다·
진은 그렇게 뒷말을 이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삼천 걸음을 거의 다 달렸다· 이제 남은 건 오십여 걸음, 그리고 유산을 뒤덮고 있는 붉은 바다·
사실상 바다만 가르면 끝이었다·
그러나 지금껏 진은 자신을 덮치려는 파도는 피했고, 해일은 검을 휘둘러 그 속에 틈을 만들어서 지나왔다·
진에게 바다를 가를 힘은 없었다· 이 붉고 깊은 바다를 끝까지 베어서 그 속에 파묻힌 유산에 닿을 힘은, 없었다· 지금 그에게 남은 기력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때쯤 켈리악은 헬루람의 어둠이 이제 곧 끝나리라는 걸 직감하고 있었다·
‘곧 감각이 돌아올 것이다· 어차피 솔더렛의 유산은 바닷속에 묻혀 있으니, 눈이 뜨이는 즉시 단번에 진 룬칸델을 죽인다···! 반드시 그리해야만 한다!’
마치 인간일 때처럼 심장이 펄떡펄떡 뛰고 있었다· 숨이 막힐 정도로 초조했다· 행여라도 진이 유산으로 들어선다면, 고통스러울 것 같았다· 이 세계를 끝장내도 그 무력감은 영원히 잊히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진은 그냥 뒤를 돌아본 게 아니었다· 결국 여기까지인가, 그런 좌절감에 뒤를 돌아본 것도 아니었다·
진은 확신하고 있었다·
‘분명 누구든 온다· 누구든, 바다를 열어주러 온다··· 반드시·’
그가 누구인지 보려고 돌아본 것이다·
그리고 잠시 후, 진은 저 멀리 붉은 바다 아래에서부터, 용오름처럼 시커먼 무언가가 솟구치는 모습을 바라볼 수 있었다·
“너구나, 그래· 너일 것 같았다· 너이길 바랐다·”
무라칸·
붉은 바다에 가라앉아 환상에 잠식되어 있던, 진 룬칸델의 수호룡· 그가 진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꼬마!]
“무라칸, 여기를 갈라!”
다른 모든 이들이 그러했듯이 이유를 묻지 않았다· 무라칸은 곧장 두 날개를 휘두르며 숨결을 토했다· 사람들이 자신을 지킨 걸 알기에, 어떻게든 자신을 감싼 걸 알기에, 지난 삼천 년 중 그 어느 때보다도 절실하게 영기를 쏟아냈다·
그 숨결은 붉은 바다 한가운데에 거대한 구멍을 뚫어냈다·
그 속엔 한밤처럼 어두운 결계가 일렁이고 있었다· 솔더렛의 마지막 안배로 들어서는 입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