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124화
258화· 전 차원의 포식자(14)
이 끔찍한 전장에서 조금이나마 안전한 구역·
그건 본래 라프라로사의 보호막 안이다· 그러나 보호막은 사라졌고 화염옥의 열기가 전장 전역을 뒤덮고 있는 지금, 전장은 그저 빠져나갈 길 없는 지옥일 뿐이다·
초 단위로 사람이 한 무더기씩 녹아내렸다· 초인, 혹은 그에 준하는 자들만이 겨우 보호막을 펼쳐 열기를 감당하며 움직일 수 있었다·
일곱 번째 창이 라프라로사로 날아들었다·
크그극-!
창은 라프라로사의 하부를 아슬아슬하게 스치며 그 뒤편 하늘을 뒤덮은 헬루람의 어둠 어딘가로 사라졌다·
라프라로사는 갈수록 수월하게 화염옥이 토하는 창을 피하고 있었다·
그 창은 여전히 적중하면 라프라로사조차 단번에 침몰시킬 위력을 지녔으나, 처음처럼 날카롭지 않다·
그만큼 켈리악의 감각이 무뎌지고 있다는 뜻이었다· 창성과 불멸자들의 공세 때문에 라프라로사에 집중하지 못하는 것이다·
목은 이미 수십 번은 베였고, 심장은 그보다 더 많이 터졌다· 인간이 아니라 고깃덩이를 마구잡이로 뭉친 듯한 모습이 될 지경까지 공격을 허용한 것도 최소 십수 번·
그럼에도 켈리악은 끊임없이 재생을 넘은 부활을 보여주고 있으나, 근본적으로 그는 인간이었다·
피로가 누적되면 감각이 떨어지고 생명력은 유한한, 인간·
불멸처럼 보이나 그도 결국 회복 불가능한 선까지 타격을 받으면 죽음에 다다를 수밖에 없었다· 창성과 태양신들의 감각으로도 그 선이 어디인지 알 수가 없을 뿐·
“다들 더 집요하게 붙으시오! 론도와 놈들만 견제하면, 라프라로사가 창에 맞을 일은 없소!”
단테였다· 그는 초인 중 켈리악이 지치고 있다는 걸 가장 먼저 인지해서 론도를 견제하고 있었다·
다섯의 창성, 성수단, 그리고 일곱의 신· 론도는 난전 속에서 한 번도 중심을 잃은 적 없는 이들만을 추려 라프라로사를 압박하는 중이었다·
“창성은 무라칸 하나뿐, 게다가 놈들은 더 이상 함포를 쓸 수 없다· 한 번만 라프라로사를 묶으면 끝이다!”
론도가 쉰 목소리로 소리쳤다· 연일 잠시도 쉬지 않고 이어진 싸움에 걸인처럼 산발을 하고 야윈 얼굴이었다·
청화의 마안, 론도와 마신대의 창성들이 일으킨 푸른 화염이 연합의 초인들을 저지하고 있었다·
창성과 신, 그리고 초인·
그들 사이엔 큰 격차가 존재할 수밖에 없다· 켈리악의 병기가 되는 삶을 택했더라도, 마신대는 결국 제힘으로 창성에 닿은 이들이었다· 마치 지토에게 세뇌된 파엘리토처럼·
사실상 무라칸 혼자 적 창성과 신들이 펼친 벽을 허물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길을 열어도 초인들의 진입이 늦는 게 문제였다·
‘결국, 누군가는 희생을 감행해야 하는 것인가·’
한 명씩 죽음을 각오하고 다른 동료들을 받쳐주어야 적들에게 제대로 접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좋은 수는 아니었다· 설령 초인 한 사람을 희생시켜 접근에 성공한다고 해도, 적들은 그리 어렵지 않게 다시 거리를 벌릴 수 있을 것이다·
‘내가 희생한다고 가정해도, 근접해서 싸울 수 있는 시간은 아마 3분 내외· 그사이 적 창성을 하나만 죽일 수 있다면 나쁘지 않으나, 희박하다····’
시론과 반, 그리고 켈리악의 무력과 비교하면 작아 보일 뿐, 창성은 창성이었다· 론도까지 총 여섯, 3분 안에 그중 하나를 죽이는 건 명백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 반대라면 모를까·
심지어 그렇게라도 기회를 잡고자 초인을 희생시키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성공 가능성이 극히 낮은 무리한 도박수에 매번 한 사람을 포기해야 하는 셈·
그럼에도 할 수밖에 없다· 론도의 포위망에 라프라로사가 한 번이라도 걸려 주춤하는 순간, 켈리악의 창이 꽂힐 테니까·
“···이번에 무라칸 님이 길을 열면, 내가 어떻게든 놈들을 붙잡아보겠소·”
“그럴 생각이면, 차라리 내가 먼저 희생하지·”
“투벤 경·”
“나보다는 젊은 자네가 조금이라도 더 싸우는 게 낫지 않겠나?”
단테가 대답하려는 순간, 별안간 베라딘이 하늘을 가리키며 소리를 질렀다·
“함선의 동력이 돌아오고 있다!”
그 말에 모두가 일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직 부유 중인 모든 선체에 하나둘씩, 불빛이 들어차고 있었다· 켈리악의 영향력에 기능을 잃은 함선들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우우우웅···!
함대의 동력이 하늘을 진동시키고 있었다· 바멀 연합의 함대만 동력을 되찾은 건 아니다· 마신대의 백색함대 또한 불빛을 밝히는 모습·
그러나 함대전이 재개된다면, 승기는 연합에게 있다· 이미 함대의 성능 차는 켈리악이 오기 전부터 증명된 바, 마신대가 연합보다 앞서는 건 오로지 규모뿐이었다·
그러나 규모의 우위마저 이제는 의미가 없었다· 켈리악이 난사한 마법과 격전지에서 퍼진 충격파에 더 심대한 타격을 받은 건, 백색함대였으니까·
당연히 지금 함대 동력이 돌아온 건, 그만큼 켈리악이 더 지쳤다는 뜻이다· 덕분에 초인들은 서로를 희생시키며 적들과 싸울 필요가 없게 되었다·
“검황선, 돌격하라!”
단테의 검황선, 그리고 베라딘의 티칸 9함대, 그리고 킨젤로의 함대까지·
동력을 되찾은 함대는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적들을 향해 쇄도하고 있었다· 단숨에 백여 갈래의 주포가 론도 무리를 덮쳤고, 백색함대는 그보다 반응이 늦는 모습이었다·
‘하필 지금···!’
한 번만 더 라프라로사를 압박하면 화염옥의 창을 꽂을 수 있을 것 같았건만, 하필· 론도는 이를 악물며 몰려드는 금빛 광파를 노려보았다·
“막아라!”
론도 무리는 보호막을 형성하며 전열을 가다듬어야만 했다· 보호막을 두들기는 연합 함대의 주포는 예상보다 더 묵직했다·
“크하하하, 드디어 이 몸, 아이나스가 활약할 때인가! 부바르여, 그르닐을 놈들의 머리통에 쑤셔 넣자고!”
“흐흐, 갑시다, 가요!”
킨젤로의 함대를 실제로 지휘하는 건 물론 비슈켈이다· 아이나스와 부바르는 그저 호탕하게 소리치는 것일 뿐·
다만 그들의 목소리가 들린 순간 초인들은 왜인지 피식 웃음이 나왔다· 닷새가 다 되도록 전쟁을 치른 내내, 지금처럼 희망이 가까이 다가온 건 처음이었다·
[백색함대 견제는 내가 맡는다!]
[그래, 무불멸이 네가 해라· 난 이번에야말로 놈들 목을 물어뜯을 것이니·]
황금함대의 포격은 론도 무리의 보호막을 뚫지 못했다· 그러나 포격이 끝난 직후, 함선 그르닐이 직접 보호막을 들이받은 순간 그들은 주춤하며 시선을 정면에 고정했다·
보호막에 균열이 생긴 것이다· 다시 마력을 채워 넣을 새도 없이, 그 사이로 초인들의 칼날이 파고드는 모습이 이어졌다·
“창성··· 강해· 하지만··· 나도, 강해·”
가장 먼저 보호막을 뚫고 들어온 건 비앙카였다· 그녀는 창성과 신들의 압박 속에서도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을 유지하며 대검을 휘둘렀다·
혼자였다면 얼마 못 버티고 온몸이 찢어졌을 테지만, 뒤이어 베락트와 바드레이가 그녀를 받쳤고, 제피린이 본모습으로 변하며 숨결을 토했다·
론도 무리는 거리를 벌리고자 감각을 일으켰다· 그러나 주변을 모조리 살펴도, 사각이었다· 어느새 황금함대는 그들의 후방에도 자리를 잡고 있었고, 양 측면으로는 무라칸과 초인들이 달려들고 있었다·
“2함대와 3함대는 성수단 봉인에만 집중하라, 우리가 놈들을 찢어버릴 것이다!”
“이엘로들도 기능을 되찾았다, 9함대가 베일 경을 지원하겠다!”
어느 쪽도 쉽게 뚫을 수 없다· 포위된 론도 무리는, 순식간에 멀어진 라프라로사를 보며 탄식을 삼켜야만 했다·
하필 화염옥에서 여덟 번째 창이 빠져나오는 시점이었다· 갑자기 황금함대의 동력이 돌아오지 않았다면, 론도는 높은 확률로 라프라로사를 묶어둘 수 있었을 터·
이제는 반대로, 론도 측이 목숨을 걸어야 했다· 포위망을 뚫고 라프라로사로 빠르게 접근하려면 누군가를 희생시킬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나마 잃어도 괜찮은 전력인 성수단은 벌써 연합의 봉인에 구속되는 중이고, 신들은 명왕족에게 붙잡혀 힘을 쓰지 못하고 있었다·
‘켈리악 경이 직접 오셨건만, 우리가··· 질 수도 있단 말인가?’
론도는 덜컥 심장이 내려앉는 느낌에 소스라쳤다·
불현듯 무언가 단단히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켈리악이 오기 전에도 어쩔 수 없이 염두에도 없던 공멸을 택했건만, 이제는 자칫하면 정말로 패배할 위기였다·
받아들일 수 없다·
그러나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다· 전투 내내 바멀 연합을 괴롭힌 절망은, 이제 론도의 내면으로 엄습하고 있었다·
“미도르! 자네가 먼저 길을 열도록 하라· 켈리악 경께서 새 창을 내보내는 속도가 더뎌졌어· 우리가 해내지 못하면, 켈리악 경이 위험····”
550차원의 미도르 엘너,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론도를 돌아보았다·
“켈리악 경이 위험해진다고?”
그 말에 론도는 일순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켈리악이 위험에 빠진다· 마신대에서 켈리악을 아는 이는, 특히 한 번이라도 그를 직접 만나본 이들은 그 누구도 감히 상상조차 해보지 못한 일이었다·
“우린 무엇을 위해 켈리악 경에게 충성을 바치고 있소? 론도 경· 우리 수장은 내가 목숨보다 소중히 여기던 뮤론 형님을 벌레 밟듯 죽였고, 내 진짜 아버지였던 550차원의 켈리악 지플을 흡수했소· 수장께 차원을 지배할 것을 허락받은 나는, 그 고통을 견디다가 창성이 되었지·”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가!”
“우리의 수장께선 여기 온 내내 부하들을 무차별하게 학살했고, 그건 우리가 그다지 필요치 않기에 내린 판단일 것이오· 33차원의 켈리악 지플이 상징하는 건 말 그대로 전 차원을 지배하는 절대적인 힘이잖소· 그 어떤 신조차 범접할 수 없는, 진정한 불멸이잖소·”
“미도르!”
“하지만 지금 수장께선 신이 아니라 마치 그저 우리보다 더 강했을 뿐인 사람처럼, 위기에 몰렸군· 내가 수장께 복종을 맹세한 건, 결국 무슨 짓을 해도 그 절대적인 존재를 거스를 수 없다는 판단이었소· 하지만 수장이 결국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위기를 넘길 수 없는 인물이라면··· 나는 희생하지 않겠소·”
이내 미도르는 론도를 향해 코웃음을 치며 이렇게 뒷말을 이었다·
“우리 도움이 필요한 존재였다면 나는 처음부터 수장에게 복종하지 않았을 것이오· 론도 경, 모르겠소? 우리 수장은, 이미 자신이 절대적 존재가 아님을 만천하에 드러내고 있는 것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