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5화· 용들의 거점 ‘소금 호수’ (2)
유적에 들어온 지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플래시 이터들과 육종 설인들로부터 빠져나간 것까지는 좋았는데 그 뒤로는 더 현실감 없는 광경이 이어졌다·
50층에 들어온 것이 아닌 50층의 마력이 주입된 것만으로도 ‘산맥의 뿌리’는 이질적인 것 그 이상의 장소로 변해 있었기 때문이다·
쿠웅! 쿠웅! 쿠웅!
수십 미터에 이르는 머리가 다섯개 달린 기괴한 생명체가 지나갔다·
우적우적·
핏물이 줄줄 흐른다·
잡아먹고 있는 건 육종 설인들·
여기저기 잘려나가고 으깨진 육편들이 목구멍 속으로 꿀떡꿀떡 넘어갔다·
“으웩·”
엘리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
진혁 역시 불쾌하다는 얼굴로 지나가는 거대한 생명체를 바라봤다·
일명 ‘어글리 히드라’란 이름을 지어줬던 놈이다·
50층에서는 미확인 몬스터나 비공식 몬스터들이 대거 출현하기에 자신만의 기준으로 이름과 레벨을 짓곤 했는데·
진혁은 특히 ‘별(星)’로서 그 고저를 표현하기를 선호했다·
예를 들어 ‘육종설인’이 1성에 해당하고 ‘플래시 이터’가 3성에 해당한다면····
이 녀석은 5성짜리 몬스터다·
실제로 50층에 가져다 놔도 무리 없이 자신만의 영역을 구축할 수 있는 힘과 능력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반드시 피해야 할 정도로 강한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보이는 족족 해치워야 할 필요도 없어·’
이 유적은 몬스터들의 섬멸이 목표가 아니다·
지금쯤이면 테레사와 말랑흑두루미가 진족을 합류시키기 위해서 작전을 시작했을 터·
중요한 건 모든 계획들이 완벽하게 맞물리는 타이밍을 만드는 것이다·
“다들 이걸 바르세요·”
어글리 히드라가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진 걸 확인한 진혁이 아공간에서 짙은 노랑빛이 나는 액체를 꺼냈다·
“이게 뭐죠?”
서리혼령이 신기하다는 듯 액체를 만지작거렸다·
달달한 향이 나는 꿀 같으면서도 점성이 없이 매끄럽다·
“아래층으로 내려갈 수 있는 비장의 카드라고 생각해주세요·”
오면서 틈틈이 재료들을 모아서 만들긴 했는데 아무래도 여러 여건상 완벽하게 완성하진 못 했다·
그래도 그 간극을 메워줄 수 있는 걸 추가했으니 충분히 상대를 속여넘길 수 있으리라·
천도복숭아 과즙·
화과산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만들어둔 보람을 톡톡히 느껴볼 시간이다·
모두가 수분 크림이라도 바르듯 얼굴과 팔 다리에 꼼꼼하게 액체를 발랐다·
“호록·”
달콤한 향을 참지 못한 엘리스가 몇 모금만인가 마시는 걸 목격했지만 그냥 모른 척 해줬다·
원래 재료가 뭔지도 모르고 핥짝이는 걸 보니 나중에 요리 과정이라도 공개해주고 싶네·
모르긴 몰라도 입에 게거품을 문 채 기절해버릴 게 틀림없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후욱하고·
지면으로부터 불쾌한 숨결이 솟구쳤다·
푸슈슈슉! 푸슉!
“뭔가 오고 있어요!”
서리혼령이 소리쳤다·
“쳇·”
“···!?”
아델과 엘리스도 자세를 잡았다·
그 말대로 지면이 격하게 진동하고 있었다·
무엇인지 파악하기도 전에 의문의 생명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크오오오오!”
수천개의 이빨을 가진 거대한 지렁이가 튀어나왔다·
꿈틀거리는 몸통·
흙더미를 파헤치며 고속으로 이동한 듯 온몸이 먼지 투성이었다·
“빌어먹을· 어떻게 된 곳이 안심하고 있을 데가 단 하나도 없냐·”
욕지거리를 내뱉은 아델이 검을 휘둘렀다·
촤아악!
적의 힘을 가늠하기 위한 가벼운 검격·
서걱!
결과는 다소 충격적이었다·
압도적인 포스를 내보이며 등장했던 것과 달리 부드러운 검에 몸통이 완전히 절단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뭐야 끝?”
아델이 피분수를 내뿜으며 떨어지는 살덩이를 바라봤다·
“···아니· 이제 시작이야·”
진혁만이 이런 상황이 펼쳐진 진짜 의도를 눈치챘다·
‘자갈을 먹는 지렁이’·
덩치와 속도에 어울리지 않게 놈은 오롯이 흙과 자갈만을 먹어치운다·
육식성도 아닐뿐더러 길들이기도 쉬운 먹이사슬의 최하위에 위치하는 몬스터란 소리다·
하지만 딱 하나·
놈이 위협이 될 수 있는 포인트가 있는데·
바로·
땅굴을 통해 안전한 길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부분이었다·
바로 지금처럼 말이다·
후두둑·
떨어지는 피와 먼지 속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정말이지 너라는 인간은 언제나 우리의 허를 찌르는군· 여기는 또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절망의 왕관을 소지했던 원주인·
페르무트였다·
그 뒤에는 십이지의 고위 장로들과····
심지어 ‘왕’에 해당하는 기척도 느껴졌다·
콰콰콰쾅!
콰아아앙!
“크아아악!”
“막아라· 다가오지 못하게 막아!”
그나마 다행인 건 자갈을 먹는 지렁이가 오면서 플래시 이터들의 심기를 건드렸다는 것이다·
땅굴의 후방에 위치한 십이지 소속 전사들로부터 꽤나 요란한 비명소리와 전투소리가 뒤섞였다·
하기야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겠지·
플래시 이터들의 허기가 얼마나 지독한지는 직접 경험해봐야만 알 수 있었으니까·
두 번째로· 가장 성가신 아카샤가 함께 오지 않은 것도 희망적인 점 중 하나였다·
하지만·
‘벌써 따라잡히다니·’
진혁이 혀로 입술을 적셨다·
희망적인 경우의 수만 떠올리며 희희낙락하기엔 상황이 그리 좋지 않다·
언젠가는 이 유적에 온 게 들통날 거라고 생각했으나 이 정도로 빠르게 올 거라곤 예상하지 못 했기 때문·
심지어 놈들은 이 넓은 곳에서 정확하게 자신들이 있는 위치를 찾아냈다·
우연이라고?
그럴 리가·
[‘절망의 왕관’으로부터 흘러나오는 마력이 한층 더 짙어집니다·]
예상보다 왕관을 소유했을 때의 반대급부가 크다·
특히나 이런 위험한 유적이라면 더욱더 그 리스크를 무시할 순 없을 터·
잘못하다간 뒤로 갈수록 완전히 판이 깨질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을 맞이할 수 있다·
***
같은 시각·
소금 호수 초입에서는 격렬한 전투를 중지를 알리는 쉼표가 찍혔다·
“····”
우마왕이 자신의 오른팔을 멍하니 바라봤다·
까맣게 타들어간 팔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이 상처·
이 통증·
자신이 이 정도까지 몰렸던 게 대체 언제였던가?
아주 먼 옛날 제천대성과의 전투를 했을 때였나?
아니면·
그보다 더 옛날 아직 하늘이 얼마나 높은지 모르던 어린 시절· 50층으로 넘어가 태고의 존재들과 싸웠을 때였던가?
확실한 건· 무뎌진 기억 속에서나 경험했던 일이라는 점이다·
“크르르····”
“키에에·”
신성력의 파도에 휘말린 쇼거스들이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태고의 마력이 흐르는 놈들조차도 세라핌 상태에서 전투를 하는 테레사에겐 버거웠다·
그 결과가 이거다·
반쯤 욱여넣다시피 소금 호수의 입구 부분에 들어왔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길잡이인 천혜류를 놓쳤다·
뿐만 아니라 충분히 시간을 끈 테레사 역시 일정 시점을 기점으로 전장에서 이탈해버렸다·
첫 번째 전투에서 완벽하게 패배해버린 것이다
“이거 꽤나 진귀한 장면이로군· 위대한 우마왕이 먹잇감을 놓치는 걸 보게 될 줄이야·”
바르어비스가 주억이며 다가왔다·
우마왕이 실패한 게 오히려 기쁘다는 듯 입가에 묘한 미소를 머금은 건 덤이었다·
“예상보다 더 까다로웠을 뿐이다· 다음에 만나면 놓칠 일은 없어·”
“하하하! 아무렴 그러시겠지· 다음이라는 게 있다면 말이야·”
“그건 무슨 뜻이지?”
“이번엔 우리 쪽에서 움직이겠다· 너는 빠져라·”
“뭐라고?”
바르어비스의 말에 우마왕의 동공에 불꽃이 타올랐다·
하지만 바르어비스는 눈썹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기껏 판을 깔아 줬는데 말아먹었으면서 뻔뻔하게 두 번째 기회가 있을 거라 생각한 거였나?”
태고의 존재들이 49층에 본격적으로 개입하게 됨에 따라 우마왕 역시 자신의 격을 격상시킬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단순히 지금 있는 층계를 넘어서 50층 전체를 아우를 수 있는 초월자가 될 수 있다는 소리다·
당연히 바르어비스로서는 강력한 라이벌이 등장하는 걸 경계하는 수밖에·
노스이디크의 총애를 받는 건 자신들만으로도 충분했다·
무엇보다·
단서들을 전부 놓쳐버린 우마왕과 달리 이쪽에겐 믿는 구석이 있었다·
“바르어비스 님· 찾았습니다·”
그림자 속에서 키득거리는 음성이 들렸다·
우마왕이 전투에 신경 쓰는 동안 말랑흑두루미와 천혜류의 뒤를 쫓던 쇼거스였다·
일반적으로 지성이 거의 없는 살육병기들과 다르게 특별히 아끼던 혼을 주입해 각성시킨 상위 개체였다·
좋아·
드디어 꽁꽁 숨어 있던 ‘무진룡’의 위치를 특정할 수 있게 됐다·
고인물 코퍼레이션의 핵심 멤버들도 잡고· 거기에 용들까지 무릎 꿇릴 수 있다면····
“크하하하!”
바르어비스가 광소를 터뜨렸다·
모든 게 원하던 가장 이상적인 형태로 흘러가는 게 느껴졌다·
***
같은 시각·
소금 호수의 가장 안쪽·
새하얀 결정들로 뒤덮인 나무들이 자라고 있는 거대한 대자연이 펼쳐졌다·
“와아····”
적들을 따돌리고 뒤늦게 합류한 테레사가 감탄사를 내뱉었다·
조금 전의 호수도 아름다웠지만 지금 있는 장소는 그와는 차원이 다른 신비로움을 간직하고 있었다·
전투로 인한 피로가 완전히 사라져버릴 만큼 말이다·
그리고 그 중앙엔·
다수의 인간들이 모여 있었다·
물론 이들은 인간이 아니다·
겉모습만 인간의 외형을 하고 있을 뿐· 전원이 폴리모프를 한 진족의 구성원들이었다·
“오셨습니까·”
검은 머리카락을 가진 남자가 테레사를 향해 가볍게 목례를 했다·
모습은 많이 달라지긴 했으나 흘러나오는 마력은 꽤나 익숙했다·
“상처가 심하진 않았나 보네요· 다행이에요·”
천혜류·
우마왕에게 당했던 용이었다·
“덕분에 목숨을 건졌습니다· 자 이쪽으로 오시죠· 저희 왕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네·”
테레사가 마른침을 삼키며 걸음을 옮겼다·
이곳에 온 목적은 무진룡을 설득하는 것·
진혁으로부터 여러 가지로 협상 카드를 받아 오긴 했지만 긴장이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인파를 헤치며 조금 안쪽으로 들어가자 화려한 보석으로 꾸며진 옥좌가 나타났다·
“그대가 고인물 코퍼레이션에 속한 인간인가?”
조각처럼 생긴 미남자가 입을 열었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저 자가 무진룡이라는 걸·
“네· 세력을 대표해서 온 테레사라고 해요·”
“그대들에 대해서는 몇 번인가 들어봤지· 여러 의미에서 유명하더군·”
무진룡이 여전히 차가운 표정으로 일관하며 테레사를 대했다·
분명 천혜류를 구해주면서 호감 스택을 쌓았을 텐데·
반응이 너무 냉랭하다·
아무리 다른 세력들을 배척하기로 유명한 진족이라는 걸 고려해도 말이다·
뭔가 이유가 있을 터·
“저희가 불편하게 해 드린 점이라도 있는 건가요?”
테레사가 정공법을 택했다·
“말랑흑두루미라고 했던가? 그래· 그런 되도 않는 이름으로 불리는 용과 함께 온 걸로 알고 있다만· 그 용이 너희 세력에 속한 것이 맞느냐?”
그러고 보니·
먼저 갔던 애가 보이지 않는다·
천혜류를 부축해서 함께 날아갔던 걸 마지막으로 헤어졌는데
“맞···아요· 저희 동료에요·”
테레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싸아아아아····
분위기가 급속도로 얼어붙었다·
주위에서 지켜보고 있던 용들의 눈빛 역시 완전히 달라졌다·
무언가 잘못되었다·
움찔하고·
테레사가 자신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무진룡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런 그 녀석이 미처 말을 하지 않았나 보구나· 놈이 우리 일족으로부터 추방당한 배신자라는 걸?”
예상치 못한 변수가 발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