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4화· 용들의 거점 ‘소금 호수’ (1)
“우마왕····”
천혜류가 눈앞에 나타난 괴물을 바라봤다·
오염된 쇼거스나 바르어비스가 나타났을 때보다 오히려 표정이 더욱 어두웠다·
그야 그럴 수밖에·
적어도 49층에서 우마왕은 자연재해나 다름없는 절대자·
아무리 거점의 이점이 있다고 한들 자신의 수준으로는 결코 막을 수 없는 파도였으니까·
“천··· 천· 아 모르겠고· 네놈 따위랑은 할 이야기가 없으니 나를 상대하려거든 그 잘난 무진룡이라도 데리고 와라· 같은 지렁이라도 조금 더 굵직한 놈이 나와야 상대해줄 맛이 나지 않겠느냐?”
우마왕이 손가락을 까딱였다·
대놓고 긍지 높은 무진룡을 까내리는 도발에 분노가 공포를 극복했다·
“건방진···!”
천혜류의 아가리가 쫙하고 벌어졌다·
손에 쥔 여의주에서 대량의 기운이 흘러나왔다·
하얀 물결이 빨려들어간 건 입의 중심부·
[천혜류가 성명절기 ‘소금의 성’을 발동합니다!]
하얀 결정들이 뾰족한 삼각형의 형태를 만들었다·
동시에·
엄청난 속도로 결정들이 새로운 형태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마치 거대한 성을 눕혀놓은 듯한 모습·
화려하고 세세하게 조형된 소금의 성이 완전히 그 모습을 갖췄다·
“감히 무진룡께 그런 무례를 보이다니· 그 건방진 주둥이부터 갈기갈기 찢어발겨주마·”
성 자체를 통째로 날려버리는 브레스가 순식간에 앞으로 쇄도했다·
콰콰콰콰콰콰!
하얀 폭발이 시야를 물들였다·
주위의 일대가 좌우로 격하게 흔들렸다·
퍼퍼퍼펑!
콰아앙!
폭발이 폭발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토록 끈질기게 재생하던 쇼거스들은 물론 자신의 용아병들까지 휘말리게 만든 엄청난 위력이었다·
“허억· 허억····”
천혜류가 격한 숨을 내뱉었다·
너무나 막대한 기를 소모했기에 추락하지 않은 것이 고작이었다·
손에 쥔 여의주 역시 그 빛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그런데·
저벅·
수없이 뿌려진 결정 사이에서 묵직한 발걸음 소리가 울려퍼졌다·
“그래도 애송이 지렁이치곤 제법이었어· 약간은 따끔하긴 했거든·”
우마왕이 만면에 미소를 가득 머금은 채 천천히 거리를 좁혔다·
여기저기 긁힌 상처들이 있긴 했으나 피를 조금 흘리게 만든 게 고작·
치명상과는 거리가 멀어도 너무나 멀었다·
피할 수 없다·
도망치거나 대응하는 것 역시 무리였다·
그저 다가오는 우마왕을 보며 숨을 헐떡이는 것만이 천혜류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50m·
40m·
그리고 20m·
투콰아앙!
그 자리에서 사라진 우마왕이 그대로 천혜류의 목을 강타했다·
“크아아아!”
가가가가각··· 콰와아아앙!
거대한 몸체가 소금 호수를 가로질러 한참이나 날아갔다·
중간중간에 있던 바위와 나무들이 모조리 뽑혀나갔다·
피범벅이 된 천혜류의 온 몸이 가늘게 떨렸다·
일격에 승부가 나버린 것이다·
“쳇· 이 녀석도 가짜였나· 하여간 그 원숭이 놈이 아니면 영 재미가 없다니까· 부디 무진룡도 이름값 정도는 했으면 좋겠는데 말이지·”
우마왕이 천혜류의 앞에 섰다·
이번에는 심장을 박살내서 완전히 숨통을 끊어버릴 생각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퍼어엉!
우마왕의 옆구리를 뜨거운 무언가가 강타했다·
“큭!”
무의식적으로 뿜어내는 내기로 인해 어지간한 공격에는 간지럽지조차 않았다·
허나 지금 가해진 공격은 그런 것과는 무언가 궤가 달랐다·
“고귀한 종족을 보고 지렁이라고 하다니· 아무래도 그 근본없는 사고방식부터 손봐줘야겠구나·”
천혜류의 뒤편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말랑흑두루미와·
“용들에게 손대는 건 저희를 공격하는 것과 같은 일· 소중한 인연을 지키기 위해서 전장에 가세하도록 하겠습니다!”
진혁에게 받은 쪽지를 국어책 읽듯 읽고 있는 테레사였다·
극비의 임무를 맡고 화과산에서 빠져나온 둘은 곧장 다른 루트를 통해 이곳까지 왔다·
압도적으로 불리한 전황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 중 하나·
중립을 지키고 있는 강력한 세력과의 동맹을 꿰하기 위해서다·
‘역시 진혁 씨는 굉장해·’
테레사가 작은 주먹을 꼭 쥐었다·
처음 타락한 자들의 회랑에서 만났을 때부터· 49층에 이른 지금 이 순간까지·
그야말로 수없이 많은 난관들에 부딪쳤었다·
당연히 불가능할 거라 여겼던 끔찍한 지옥들 앞에서 절망하고 좌절했지만 진혁은 단 한 번도 실패하지 않고 해법을 찾아냈다·
그렇기에·
믿고 따를 것이다·
자신이 알고 있는 가장 든든하고 소중한 이와 함께라면 두려울 게 없었으니까·
테레사와 말랑흑두루미가 전투 자세를 취했다·
“····”
옆구리를 만지작 거리던 우마왕의 동공이 가늘어졌다·
고통으로 인한 분노 때문이 아니다·
흥미로움·
용보다 더 생소하면서 자극적인 힘을 구사하는 존재에 대한 호기심이 피어오른 것이지·
피식·
우마왕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걸렸다·
“재미있군· 신성 계열 능력을 사용하는 건가? 저 지렁이도 용족이지만 조금 특이한 능력을 구사하는 것 같군·”
“더 이상 다가오지 마세요· 그렇지 않으면····”
“그렇지 않으면 뭐? 그 검으로 날 베기라도 하겠단 말이냐?”
조소를 터뜨린 우마왕이 살짝 자세를 낮췄다·
발이 지면을 파고든다·
콰아앙!
엄청난 무게와 기가 뒤섞이며 용수철처럼 압축된 몸이 튕겨나갔다·
테레사가 반사적으로 방패를 들어올렸다·
왼쪽 머리 위·
파카앙!
거대한 뿔이 방패의 모서리에 튕겨나갔다·
테레사의 몸을 그대로 꿰뚫어버리려던 우마왕이 기습의 기회를 놓쳤다·
“저녁은 질긴 소고기로 하도록 하지·”
[말랑흑두루미가 ‘기상개변’을 발동합니다!]
번쩍!
점멸하는 빛과 함께 하늘에서 낙뢰들이 쏟아졌다·
우마왕이 양팔을 교차한 채 떨어지는 낙뢰들을 온몸으로 받아냈다·
그리고 그 틈에·
[테레사가 ‘신성가호’ – ‘빛의 심판’을 발동합니다!]
방패와 검에 눈부신 신성력이 깃들며 한 줄기의 빛이 우마왕의 심장을 노렸다·
푹!
검끝이 피부를 헤집고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우마왕이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
하지만·
고작 몇 센티 미터·
전력을 다한 일격이 허용한 건 그게 전부였다·
“조금 다른가 싶었는데···· 네놈들도 속이 비었긴 마찬가지였군· 이 정도로는 어림도 없다·”
우마왕의 얼굴에서 실망스럽다는 기색이 흘러나왔다·
동시에·
손의 모양이 조금씩 변했다·
일렁이는 붉은 화염으로 뒤덮인 손·
선명한 근육을 따라 아름다운 열화(熱華)가 흐드러졌다·
[부분 현신 ‘우룡광격’이 발동됩니다!]
눈앞을 따라 이어지는 붉은 선·
그리고 그 궤적에 맞춰서·
우마왕의 손이 움직였다·
느리다·
빠른 건 절대 아닌데·
그 선과 궤적의 유려함에 홀려 시선을 뗄 수가 없다·
테레사가 본능적으로 방패를 들어올렸다·
그 어느 때보다 무겁게 천근처럼 느껴지는 방패가 가까스로 가슴이 있는 위치까지 도착했다·
바로 그 순간·
콰드드드드드득!!!
방패가 험악하게 찌그러졌다·
막았음에도 그 충격파가 갑주를 뚫고 몸속까지 파고들었다·
“커억····”
테레사가 붉은 피를 토해냈다·
그나마 방어를 해서 망정이지·
만약 직격을 당했다면 아예 몸이 관통당했을 것이다·
“아이고· 안주인!”
말랑흑두루미가 그 모습을 보며 식은 땀을 뻘뻘 흘렸다·
만에 하나 테레사를 다치게 했다간 뼈와 살을 분리해서 용가리 치킨을 만들어버리겠다고 한 진혁의 경고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괜찮아요·”
테레사가 비틀거리며 다시 자세를 잡았다·
우그러진 방패 대신 양손으로 검을 잡으면서 흩어지는 마력을 재차 끌어모았다·
“이 자는 제가 맡을 테니 원래 계획대로 저 용을 피신시키세요·”
“하 하지만· 괜찮겠나? 상처가 제법 깊어 보이는데?”
“혼자서 충분합니다· 제 걱정은 하지 말고 주어진 임무만 신경써주세요· 그게 모두를 위한 유일한 길이니까요·”
“···후우· 어쩔 수 없지· 무리하지 말고 있어다오· 금방 돌아오겠다·”
말랑흑두루미가 쓰러져 있는 천혜류에게 몸을 돌렸다·
“다 죽어가는 것들끼리 누가 누굴 걱정해준다는 건지·”
우마왕이 한 마리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이번에는 양손에 붉은 열화가 일어났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아뇨· 방금 전 걸로 당신의 힘에 대한 가늠은 끝났습니다·”
“뭐···라고?”
꿈틀·
우마왕의 이마에 험악한 힘줄이 솟구쳤다·
“그 다 쓰러져가는 몸으로 나를 막을 수 있다는 소리더냐? 게다가 내 힘에 대한 가늠이 끝났다니· 아직 나는 본 실력의 일부도 보이지 않았다·”
“그건····”
우우우웅!
테레사의 금빛 머리카락 위로 새하얀 왕관이 모습을 드러냈다·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신성의 왕관’을 착용했습니다!]
7개의 왕관 중 하나이자·
신성력의 끝을 이루게 해주는 성유물이 주인의 부름에 응답했다·
거의 동시라고 해도 좋을 찰나·
[고유성창 ‘세라핌’이 발동됩니다!]
테레사의 등 뒤로 새하얀 날개가 펼쳐졌다·
우우우웅!
하늘에서 쏟아지는 별빛·
티끌 한 점 없이 순수하고 아름다운 오로라가 온 하늘을 물들였다·
[특수 스킬 ‘로드 오브 헤븐(Lord of Heaven)’이 발동됩니다!]
뿔나팔 소리와 함께·
깊고 맑은 음성이 쩌렁쩌렁 울려퍼졌다·
그것은 테레사의 입에서 나오는 것 같기도 했고· 또 다른 누군가가 내는 음성 같기도 했다·
-보라· 이것이 새로운 왕관의 주인이 새로운 선악(善惡)의 기준을 정하는 때이니·
언령을 통해 발동되는 신성 마법·
테레사의 동공이 서서히 금빛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오거라· 한 명도 빠짐없이 부름에 응답할지어다· 그리하여 모든 천사들은 십계(十誡)의 신성한 맹약을 이행하길 명하노라·
그러자·
흐릿한 외형이 천천히 그 모습을 보였다·
신성력으로 구현된 대천사들의 분신체들이었다·
하얀 갑주와 무구로 무장한 분신체들이 각기 다른 방향에서 기다란 검과 창을 뽑았다·
두 개의 검이 남과 북에서 우마왕을 가리켰다·
촤르르륵!
검끝에서 나온 황금색 쇠사슬이 우마왕의 팔과 다리를 휘감았다·
“크으읍· 무슨··· 더러운 잡술을····”
우마왕이 몸을 마구 비틀었다·
그러나 단단하게 구속된 쇠사슬들은 우마왕의 괴력에도 끊어지지 않았다·
봉인과 섬멸을 한꺼번에 완성시키는 능력·
동료들을 위해서·
소중한 사람을 위해서·
누구도 아닌· 그와 함께 탑의 정상에 도달하기 위해서·
지금 이 자리에 섰다·
테레사의 눈이 완전히 금빛으로 물들었다·
허공에서 울려퍼지는 목소리와 테레사의 목소리가 합쳐졌다·
“이런 것 쯤은··· 지금 당장이라도····”
우마왕의 근육이 더욱더 팽창했다·
이제는 전신의 모습이 완전히 붉은 빛을 띠며 발화하고 있었다·
테레사가 조용히 영창의 마지막 부분을 읊조렸다·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뿔나팔을 든 천사들의 노래에 우마왕의 바닥에 황금색 마법진이 나타났다·
머리 위 역시도 같은 종류의 마법진이 나타났다·
창을 든 두 명의 대천사가 하늘과 땅을 향해 창을 던졌다·
-땅에서도 이루어지리라·
그렇게·
콰콰콰콰콰콰콰!
하늘과 땅에서 이어진 거대한 빛의 기둥 역시 하나의 점에서 합쳐졌다·
***
“보면 볼수록 엄청나군·”
말랑흑두루미가 뒤편에서 느껴지는 엄청난 신성력의 파동을 보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이미 소금호수에서 꽤나 떨어져 있는 상태였지만 전신에 전해지는 저릿저릿한 감각은 마치 바로 옆에 있는 것만 같이 느껴졌다·
하지만·
저런 엄청난 폭풍 속에서도 우마왕의 기운은 사라지지 않았다·
견뎌낸 것이다·
저 심판과 같은 권능을·
물론 상당히 큰 충격을 입었는지 그 기운이 처음보다 눈에 띄게 줄어 있었다·
“괴물들끼리의 전투라··· 곁에 있었다가는 뼈도 못 추렸겠어·”
그런 감상을 늘어놓고 있던 바로 그때였다·
“그대는····”
가까스로 회복한 천혜류가 자신을 나르는 말랑흑두루미를 바라봤다·
믿기지 않았지만 틀림없다·
푸른 빛의 아름다운 비늘과 뿔을 가진·
사신수 중 하나인 ‘청룡’·
꽤 오랫동안 사라져 있던 동방의 환수를 여기서 보게 될 줄이야·
“말을 많이 하지 말거라· 아직 완전히 회복되려면 무리해서는 안 되니까·”
말랑흑두루미의 말에 천혜류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다 무언가 생각났는지 한 가지를 물었다·
“···어째서 우리를 돕기로 한 거지? 그대는····”
“과거는 상관없다· 내 주인이 그대들과 동맹을 맺기를 원했고· 나는 그대로 따를 뿐이니까·”
“가면 후회하게 될 텐데?”
“그것 또한 내가 감내해야 할 업이겠지· 내 몸 하나쯤은 알아서 할 테니 신경쓰지 말고 네가 살아남는 것에만 신경쓰거라·”
“그런··· 건가· 알겠다· 왕에게 안내하도록 하지·”
후욱하고·
천혜류가 호흡을 불어넣었다·
그러자·
하늘 위로 소금 결정으로 이루어진 하얀색 길이 만들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