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6화· 고인물의 인맥관리법 (2)
“키에에에!”
“케에에에!”
유령들이 거침없이 내달렸다·
탄환에 혼을 깃들일 수 있는 스피릿 계열의 능력· 평범한 물리력으로는 방어 자체가 안 된다·
물론·
상대하는 등반자들 역시 평범함 과는 거리가 너무도 먼 괴물들이었다·
[단 베르문이 성유물 ‘칼날 방패’를 해방합니다!]
관념마저 막을 수 있는 방패가 탄환을 받아냈다·
콰콰콰콰쾅!
녹색 화염이 하늘 위로 피어올랐다·
“묵직하군·”
단 베르문의 손에 칼날의 파편을 닮은 방패가 쥐어져 있었다·
서쪽의 방벽이라 불리는 남자·
2·5m에 이르는 신장에 거대한 망치와 공성 해머는 보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위압감을 뿜어냈다·
툭·
그 어깨 위에 작은 소녀가 사뿐 걸터앉았다·
단 베르문과는 대조적으로 가녀린 체구에 신장은 150cm를 간신히 넘었다·
“후후· 총잡이에 결계쟁이에 얼음마녀까지· 진짜 어떻게 손을 잡은 건지 신기할 지경이네· 너희 전부 누구랑 함께 하는 거 질색하는 스타일 아니었니?”
아마라 릴스베인·
‘블러드 매지션’이라는 이명을 가진· 피를 다루는 혈계 마법에 능통한 대마도사다·
고대 진조들과 같은 시간대를 살아가며 무수히 많은 실전경험을 쌓아왔고· 50층에서도 3개월 이상을 버틴 강자이기도 했다·
콰아앙!
[‘원념을 속삭이는 탄환’이 작렬합니다!]
말을 채 끝마치기도 전에 아마라의 고개가 크게 돌아갔다·
시간 차이로 쏜 마지막 탄환이 미간 한복판에 꽂힌 것이다·
머리가 통째로 뜯겨나갈 만큼 커다란 굉음이 울려퍼졌다·
“레이디가 말하는데···· 손버릇이 고약한 남자네·”
뒤로 꺾였던 고개가 천천히 원래대로 돌아왔다·
핏방울들이 거대한 구멍을 빠르게 채워나가는 건 상당히 그로테스크해 보였다·
“피에 찌든 늙은 흡혈귀를 잘못 말한 거 아닌가?”
사멸자가 차갑게 응수했다·
“늙은 흡혈귀라··· 정말이지· 매너라곤 찾아볼 수가 없구나· 저 녀석은 내가 처리할 거니까 아무도 손대지 마·”
아마라의 동공이 핏빛으로 변했다·
머리카락 역시 피보다 더욱 붉게 물들어 있었다·
“역린을 제대로 건드렸군·”
“마음대로 하세요· 어차피 비원만 이룰 수 있으면 누가 누굴 죽이든 아무래도 좋으니까·”
도발이 이어지며 부족했던 살의가 채워졌다·
희미했던 명분은 뚜렷해졌고·
어느새 서로를 반드시 처리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죽여!”
하사신이 고함을 질렀다·
쾅!
콰콰쾅!
순식간에 여러 개의 그림자가 교차했다·
[고유능력 ‘부서지는 하늘’이 발동됩니다!]
단 베르문의 망치가 허공을 강타했다·
그러자·
꾸구구국··· 쿠콰콰콰콰콰콰콰!
미궁의 한쪽 전체가 우그러지며 뒤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압축’과 ‘넉백’ 거기에 ‘스턴’까지·
각종 사기적인 효과가 중첩된 광역기가 펼쳐지려고 하는 것이다·
[‘고대 결계’ – ‘사상 반전’이 발동됩니다!]
벨토르가 양손을 마주쳤다·
화려한 문자들로 가득찬 마법진이 하나로 모이자 방금 전 단 베르문이 사용한 고유능력의 효과가 적들 한복판에 떨어졌다·
쿠쿠쿠쿠쿠쿠!
적진이 짓눌린다·
그런데 바로 그때·
퍼어엉!
반전 결계로 가해지던 능력이 송두리째 사라져버렸다·
“꺼어억! 으웩· 맛없어·”
앙상하게 뼈만 남은 남자가 긴 용트림을 내뱉었다·
“하나같이 괴물들만 모였군·”
“그건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벨토르가 고개를 가로젓기 무섭게 단 베르문의 목소리가 바로 등 뒤에서 울려퍼졌다·
거대한 체구에 어울리지 않는 속도·
깃털처럼 가볍게 움직인 철갑기사가 칼날 방패를 휘둘렀다·
“이번에는 결계가 통하지 않을 거다·”
이 방패에 부여된 권능은 모든 종류의 주술과 결계에 강한 저항력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당연히 전투계열이 아닌 벨토르로서는 코앞에 닥친 저 무지막지한 공격이 몇 배는 더 위협적으로 느껴질 것이다·
[절대온도 ‘혼령결빙’이 발동됩니다!’]
순간·
유럽 전체의 평균 기온이 1도 가량 떨어졌다·
하사신의 결계로 암스테르담 일대를 단절시켜두긴 했으나 서리혼령의 냉기는 그 모든 것을 뒤덮고 있었다·
“크으윽!”
단 베르문의 칼날방패가 벨토르의 바로 앞에서 멈췄다·
“피하세요!”
서리혼령의 말에 벨토르가 빠르게 공간을 뛰어넘어 거리를 벌렸다·
하나같이 최고위에 해당하는 고유능력과 스킬들의 향연·
허를 찌르고 카운터를 날리는 살초들의 공방전은 단 한 순간도 눈을 떼기 힘든 장관이었다·
진혁이 아공간에 보관해둔 민트 초코송이와 제로 콜라를 꺼내 우적이며 전투에 심취했다·
“뭔가 방법이 있는 거겠지? 그러니까· 이런 판을 벌린 것 아닌가?”
사멸자가 애써 분노를 억누르며 물었다·
다른 사람이었으면 저 총구에서 진즉에 불이 뿜어졌을 것이다·
당연히 방향은 진혁의 심장이 있는 곳이었을 테고·
진혁이 황급히 먹던 것을 뒤로 던졌다·
현장감을 극대화하기 위해 구비 해둔 돌비 스피커의 전원도 슬며시 껐다·
“크흠! 하하· 아무렴 아무 계획도 없이 여러분을 부려만 먹으려고 했겠습니까?”
타이머를 슬쩍 본 진혁이 마른침을 삼켰다·
지금쯤이면 충분히 다 하고도 남았다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더 이 미궁의 완성도가 뛰어난 모양이다·
그래도 머지 않았겠지·
오랜 직감이 몇 분 안에 끝난다고 말해주고 있었다·
‘어차피 이런 대치 구도가 금방 끝날 것 같지도 않고·’
등반자들의 전투능력은 호각·
완벽하게 상대방을 압도하기엔 다들 조금씩 몸을 사리고 있었다· 고유성창을 함부로 썼다가 실패하기라도 한다면 목숨이 날아가버릴 수도 있었기에·
오히려 바라던 바다·
꿀렁!꿀렁!
저 빌어먹을 여자가 선을 넘기 전까진·
[아마라 릴스베인이 고유능력 ‘블러드 메모리얼’을 발동합니다!]
데카서스의 초대 가주가 사용하던 혈계 마법에 아마라의 능력이 결합된 고유능력이다·
다른 능력들도 성가셨지만 저건 특히나 더 골치 아팠다·
완전히 술식이 완성될 경우· 아마라가 사냥했던 고대의 진조들이 모조리 부활해버리기 때문이다·
“···!?”
“지원을 더 불러올 셈인가·”
지금도 아슬아슬한 균형인데 고대의 진조들이 개입하는 건 곤란하다·
이곳에 있는 자들은 모두가 고대 진조들과 싸워본 적이 있던 터라 그게 얼마나 위험할지 온몸으로 알고 있었다·
막아야 한다·
하지만·
우우웅!
완성되어가는 혈계 마법은 벨토르의 고대 결계로도 부술 수 없었다·
평범한 마법이나 술식과는 완전히 궤를 달리하는 종류였기 때문·
데카서스의 피가 섞인 혈계 마법은 오직 그와 관련된 자들만이 파훼할 수 있는 가능성이 부여됐다·
그렇다면····
‘이건 가능하면 피하고 싶었는데·’
진혁이 ‘세계의 기억’에서 책 한 권을 뽑아들었다·
나중에 조금 혼날 수도 있고· 싫은 소리도 들을 수 있겠지만·
지금 당장은 어쩔 수 없다·
우선·
[‘빙하조형’ – ‘블랙 아이스’가 발동됩니다!]
서릿발로 시야와 마력을 좀 가려두고·
쏴아아·
차가운 강풍이 시야를 감쌌다·
‘좋아·’
이제 진짜를 꺼낸다·
[‘엔터렌스 투더 발할라’가 발동됩니다!]
이 상황을 넘어서기 위해서 불러와야 하는 건 단 한 명 뿐이었다·
***
질투와 시기·
그로 인해 파생된 증오의 고리는 시련의 탑에서도 꽤나 굵직한 메인이벤트를 만들어냈다·
아타락시아의 가주를 몰아내고 뱀파이어들이 본격적으로 탑에 등장하게 되는·
그리고·
엘리스를 ‘타락한 자들의 회랑’에 유배시켰던 원흉 중 하나·
아뮬람 드 데카서스·
전대 데카서스의 가주가 모습을 드러냈다·
움찔하고·
진혁을 처음 본 아뮬람이 몸을 떨었다·
압도적으로 개박살이 났던 게 바로 조금 전처럼 느껴진 탓이다·
“걱정마· 내 능력으로 다시 살려낸 거니까· 뭐 가주 급 중에선 네가 유일하게 다시 돌아온 거지만·”
“그런가· 결국 전부 다 죽은 건가·”
아뮬람이 허무한 듯 중얼거렸다·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처음부터 선택을 잘못하지 말 걸’··· 이라는 생각이 잠시 스쳤다·
하지만 잠시뿐이었다·
이미 물은 엎질러졌고· 돌이킬 수 없게 됐다·
이제와서 후회한다고 한들 달라질 건 아무것도 없으리라·
“내 일족도 배신의 대가를 치렀겠군· 한 명도 남김없이 말이야·”
“아니·”
진혁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구슬 한 개를 던졌다·
우우웅!
그곳엔 오필리아를 비롯한 데카서스 가의 혈족들이 삶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네 아이들은 엘리스를 따르고 있어· 함께 탑을 오르며 자신들의 세력을 일궈나가고 있지·”
“···용서했다는 말인가? 그 일을 겪고도?”
아뮬람이 깜짝 놀라 되물었다·
“뭐 그 녀석 말로는 과거의 복수는 이미 끝났고· 앞으로는 일족의 번영과 자신들의 긍지를 지키는 것에 모든 걸 바치고 싶다고 하더라고· 어쨌거나· 시련의 탑이라는 거대한 세력들의 집합소에서 같은 동족만큼 소중한 이들은 없대나 뭐래나·”
참고로 엘리스가 그런 말을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그러거나 말았거나 지금 여기 있는 사람이 하는 말이 곧 진실인 법이다·
실제로 가장 큰 적이던 엑센시온을 처리한 뒤로 과거 이야기는 거의 안 하기도 했고·
“···!?”
진혁의 말에 아뮬람의 눈동자에 지진이 일어났다·
설마 엘리스가 자신들을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동시에·
두근!
이미 한 번 포기했던 꿈의 불씨가 되살아났다·
뱀파이어들의 목적은 본래의 층계를 넘어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리라는·
그래서 고귀한 밤의 귀족으로서 그 누구의 지배도 받지 않겠노라는·
그런 소망이 말이다·
“애초에··· 그릇이 작은 건 우리 쪽이었군·”
고민은 길지 않았다·
이미 진혁의 피에는 미하엘과 오필리아를 비롯한 데카서스의 혈향이 짙게 배어있었다· 비릿함이 아닌· 동료로 인정하는 자만이 보일 수 있는 따스한 향이었다·
“도와주겠다는 거야?”
“그래· 한 번 잘못된 길을 선택했던 몸· 두 번 다시 같은 과오를 반복하지 않겠다·”
아뮬람이 한쪽 무릎을 꿇었다·
[진조 ‘아뮬람 드 데카서스’가 플레이어 강진혁과 엘리스 폰 아타락시아에게 충성을 맹세합니다·]
[모든 데카서스 가의 혈족들의 능력치가 10%만큼 상승합니다!]
[명망 높은 가문의 합류에 모든 뱀파이어들이 이 현상을 관심 있게 지켜봅니다·]
아직까지 시련의 탑에는 몰락하거나 도망친 여러 뱀파이어들이 존재한다·
위대한 가주들의 몰락으로 인해 생존을 위해 뿔뿔이 흩어졌거나· 혹은 멀리서 관망하던 명망높은 고대 가문들이·
하지만· 공식적으로 데카서스 가의 아뮬람이 합류하게 되었으니 아타락시아의 무게에 더욱더 거대한 힘이 실리게 될 것이다·
“내가 뭘 하면 되는 거냐?”
진혁이 엘리스의 정혈을 추출해 만든 핏방울을 건넸다·
“우선 이걸 마셔· 그리고 저기 펼쳐지고 있는 혈계 마법 보이지?”
저걸 파훼해라·
너라면 가능하다·
겸사겸사 몸빵도 좀 해주면서 시간도 끌어줬으면 좋겠다·
보아하니 이제 정말로 조금만 더 버티면 될 것 같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