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2화· 고대의 등반자들 (2)
“네놈····”
크랑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알고 있는 인물이다·
정확히는 놈에 관해서 여러 존재들이 경고를 해왔다·
-무슨 꿍꿍이를 가지고 있는 건진 모르겠지만 위험해요· 놈이 펼친 계략에 고인물 코퍼레이션 역시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고 들었어요·
며칠 전 자신들의 사도인 장보경이 그런 말을 했었다·
‘남자’라 불리는 놈은····
강진혁이 가장 크게 경계하고 있는 자이며 아우터 갓 세력에 속한 이들 역시 전면적인 충돌은 피하려고 한다고·
“에휴· 반응을 보니 안 좋은 이야기를 많이 들었나보네· 아무래도 이미지 메이킹은 실패했나봐·”
남자가 혀를 차면서 천유성 옆에 섰다·
툭·
그러면서 천유성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뭐 그래도 내 편이 생겼으니 이미지가 좀 망가지는 건 참아야지· 이번에 아주 날카로운 검을 손에 얻었거든·”
새로운 힘까지 부여받아서····
그 칼날이 태고의 존재들에게까지 닿을 수 있게 만들었다·
설령 강진혁이라 하더라도 절대 쉽진 않을 것이다·
게다가·
“원거리에도 아주 든든한 분이 합류해주셨지· 아마 네가 이곳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확률은 없다고 봐야 할 거야·”
높은 바위 위에는 은발의 소녀가 앉아 있었다·
엘리스 폰 아타락시아였다·
남자의 말에 엘리스의 눈썹이 역팔자로 휘었다·
“착각하지 말거라· 짐은 그대에게 넘어가지 않았다· 그저 계약 때문에 이곳에 있는 것이니라·”
“아아· 너무 신나서 그만 말실수를 했네· 사과할게· 아무렴 위대하신 아타락시아의 진조께서 누군가에게 복종할 성격이 아니지·”
남자가 어깨를 으쓱이며 엘리스의 분노를 흘려넘겼다·
“그래도 약속한 것은 지켜야 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으리라 믿어·”
“···그래· 알고 있다·”
엘리스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그러면서 자신의 왼쪽 팔을 움켜쥐었다·
덜덜덜·
경련이 조금씩 거세졌다·
혈관을 타고 흐르는 피가 유독 뜨겁게 느껴졌다·
아무리 마력으로 제어를 하려고 해도 제어가 안 될 만큼·
그 모습을 곁눈질로 지켜보던 남자가 쿡쿡 웃었다·
“무의미한 저항을 계속 하려고 한다니까· 진조란 분들은· 그게 매력적인 점이지만·”
짜악·
손뼉을 마주치는 것으로 다시 한 번 이목을 집중시킨다·
“그럼 슬슬 성유물을 가져가야겠습니다· 도망친 영감님이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완전히 자각한 터라 대비하려면 준비해야 할 게 많거든요· 정말이지 최후의 만찬을 준비하는 데는 여러 가지로 손이 많이 간다니까?”
대화는 거기서 끝났다·
천유성이 검을 머리 위로 치켜들었다·
[검마극일신]
검마의 검을 계승하되·
제 1식·
그걸 넘어 새로운 색(色)을 가미했다·
이것은 천유성의 검이며 동시에 남자의 검이기도 했다·
[‘진홍의 흑련’이 발동됩니다!]
알 수 없는 검격이 크랑의 목을 향했다·
***
콰콰콰콰콰···!
보는 것만으로도 전신이 얼어붙을 것만 같은 서릿발이 휘몰아쳤다·
“····”
“····”
얼어붙은 뱀들·
각종 함정들 역시 그 기능을 멈춰버렸다·
모든 것을 멈춰버리는 혹한 속·
사박·
서리혼령이 우아한 발걸음을 옮겼다·
걸을 때마다 눈송이 결정들이 주위를 완벽하게 잠식해 나갔다· 만약 누군가 기습을 가한다고 하더라도 저 눈송이에 가로막혀버릴 것이다·
‘과연 대단하긴 하네·’
진혁이 그녀의 뒤에서 걸으면서 감탄사를 내뱉었다·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등반자들이 등장할 거라는 건 알고 있었다· 허나 게임에서 보고 경험했던 것과 실제로 마주하는 건 차원이 다른 이야기였다·
“이쪽이 맞는 건가요?”
“예· 300m 정도만 더 가다가 오른쪽 세 번째 통로로 들어가면 됩니다·”
진혁이 거침없이 대답했다·
서리혼령이 묘한 눈으로 진혁을 바라봤다·
놀란 건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야 그럴 수밖에·
하사신은 등반자들 중에서도 가장 은밀하고 어두운 축에 속하는 자이다· 철저하게 자신의 거점을 만들어두고 먹잇감을 초대해 사냥하는 걸 즐길 터·
그런데·
‘대단하네요· 이 구역에 대해서 이토록 완벽하게 알고 있다니·’
처음에는 반신반의 했는데·
진혁이 가자고 하는 대로만 가면 정확하게 안쪽으로 들어가는 길이 나타났다·
함정과 신수들에 대한 대비 역시 감탄이 절로 나올 지경이었다·
‘최근 들어 상층부가 떠들썩하다고 듣긴 했는데 설마· 이 남자 때문인 걸까요·’
워낙 자기 멋대로 살아가는 등반자들이라지만 상층부에 관한 소식은 간간이 접하고 있었다·
어떤 세력이 멸망했다든가·
상위 신격 중 누군가가 죽었다든가 하는·
그리고·
여러 소식 중에는 누군가 태고의 존재들에게 도전한다는 이야기도 포함됐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그런 천재지변에게 정면으로 맞서는 자는 존재할 리 없었으니까·
그렇기에·
“당신이 탑을 오르는 이유는 뭔가요?”
서리혼령은 물어야만 했다·
이런 새로운 강자가 탑에 온 목적에 대해서· 그리고 그 속에 감춰진 소망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그러자 빙하조형을 사용하던 진혁이 잠시 걸음을 멈췄다·
“탑의 정상이 보고 싶거든요· 혼자가 아니라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그 광경을 눈에 새기고 싶습니다·”
“겨우··· 그것뿐인가요? 소문으로는 온갖 부귀영화가 보장된 건 물론 소원까지 들어준다고 하던데·”
“누군가는 그런 걸 애타게 찾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저에게는 부질없는 것들이라고 생각합니다· 탑의 정상은 그런 걸 쫓기 위한 자들을 위해 있는 공간이 아니거든요·”
“알면 알수록 재밌는··· 분이네요·”
서리혼령의 입가에 미묘한 미소가 나타났다·
지금껏 강자들과의 문답에서 나온 것들은 너무나 뻔한 종류였다·
정복 파괴 원한 독점 구원 명예 등·
그것이 가식이든 진실이든·
오롯이 자신의 근원적인 욕망에 기반한 소원들이었다·
하지만·
‘달라·’
마치 모든 것을 초월한 자를 상대하는 것처럼·
상대의 순수한 욕망에는 한점 얼룩도 묻어 있지 않았다·
진심으로 동료들과 함께 탑의 정상을 보는 것으로 족한 것이다·
그 순수한 소망에·
두근···!
오랫동안 얼어붙어 있던 서리혼령의 마음속 무언가가 꿈틀거렸다·
[복사조건: 고대에 탑을 등반했던 서리혼령은 탑의 최정상 부근을 공략하던 중 압도적인 절망을 마주해 그 목표를 접었습니다· 그런 그녀에게 잃어버린 꿈을 되찾게 해주고 그녀에게 신뢰를 얻을 수 있다면 서리혼령이 가진 고유성창과 고유능력 중 하나를 복사할 수 있습니다· (단 복사할 수 있는 능력의 범위와 숙련도는 서리혼령의 감정의 폭에 따라 달라집니다·)
‘쉽네· 쉬워·’
꿈 많은 소년 코스프레를 한 것만으로도 가볍게 넘어오다니· 이래서 사회생활을 많이 안 해본 애들은 다루기 쉬운 법이다·
진혁이 입맛을 다셨다·
마주하는 것조차 쉽지 않은 고대의 등반자들의 능력을 복사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
이걸 놓치면 바보지·
특히나 서리혼령과는 빙계 능력이란 공통점을 통해 어느 정도 호감을 다져놓은 상황이었으니까·
적당히 감정선 좀 건드려주고·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공감대을 형성해주면 충분하다·
‘여기에 온 김에 하사신의 능력까지 꿀꺽해야겠어·’
놈의 고유성창 역시 굉장히 진귀하긴 마찬가지다·
“서두르죠· 30분 뒤에는 뱀보다 더한 것들이 나올 겁니다·”
“알겠어요·”
그렇게 서로가 다른 생각을 품은 채 둘의 여정이 이어졌다·
***
약 20분이 더 흐른 무렵 진혁과 서리혼령은 미궁의 가장 깊숙한 곳에 도달했다·
으스스한 분위기다·
검은 휘장들이 흩날리는 거대한 공간은 마치 중세 시대 카타콤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타닥· 타닥·
지금까지 봐 왔던 것들과의 차이점은 이곳에는 수많은 촛불들이 밝혀져 있다는 것이다·
그 한가운데엔 성유물 ‘고대의 맹세’와 그걸 어루만지고 있는 하사신이 있었다·
드디어 본 게임 시작이다·
“기어이 여기까지 왔군· 예상보다 훨씬 더 빨리 말이야·”
하사신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방금 전까지도 계속해서 성유물을 흡수하는 데 전력을 다한 듯 몸에선 연신 마력을 담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늦을수록 저 미궁이 지옥으로 변할 것 같아서· 관광은 생략하고 최대한 서둘러 왔어·”
“시작하기 앞서 마지막으로 묻지·”
하사신이 곡도를 움켜쥐었다·
“여기까지 와서 제안이라···· 일단 한 번 들어나 볼까?”
“나에게 협력해라· 그렇다면 2인자의 자리를 약속하겠다· 50층을 제외한다면 가장 위에서 군림하게 해주겠다는 소리다·”
“이야· 어떻게 악역이라는 놈들은 매번 제안할 때마다 그리 영양가 없고 한결같은 제안만 하는지 모르겠다니까·”
화끈하게 나갈 거면 2인자가 아니라 네놈보다 상석을 제안했어야지·
안타깝지만 협상은 결렬이다·
“서리혼령· 너 역시 같은 의견인가?”
“당신보다는 이쪽이 훨씬 더 흥미로워서요· 게다가· 개인적으로 승산이 없는 쪽에 붙는 취미는 없는지라·”
“안타깝군· 좋은 전력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거늘·”
혀를 찬 하사신이 힐끗 진혁이 있는 곳을 바라봤다·
“그런데 같이 온 동료들은 보이지 않는군· 네놈보다 실력이 떨어져보이긴 했는데 아직 도착하지 않은 것이냐? 아님 쥐새끼처럼 숨어서 기습의 기회라도 엿보고 있는 것이냐?”
“그건 네가 알 필요 없어·”
테레사와 청하는 다른 할 일이 있다·
그러니 그쪽은 신경쓰지 마라·
지금 당장은 우리를 상대하는 것만으로도 벅찰 테니까·
진혁이 깔끔하게 선을 그었다·
스윽·
척·
진혁과 서리혼령이 각자의 무기를 꺼내들었다·
서로 다른 형태의 눈송이와 서리가 서서히 그 권역을 넓혀나갔다·
[‘빙결의 영역’ – ‘서리 감옥’이 발동됩니다!]
쩌저적·
지면과 벽이 서서히 얼어붙기 시작했다·
“뭔가 착각하고 있는 모양인데····”
하사신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순간·
오싹하고·
무시무시한 칼바람이 몰아쳤다·
촛불들이 좌우로 격하게 흔들리며 춤을 추었다·
동시에·
[‘고대의 맹세’가 새로운 주인의 부름에 응답합니다!]
사사삭·
원통형의 성유물에 달라붙어 있던 도마뱀들이 빠르게 움직였다·
콰콰콰콰콰콰!
엄청난 마력의 폭풍이 원통의 내부에서 뿜어져 나온다·
‘설마·’
진혁의 동공에 지진이 일어났다·
분명 이런 일이 벌어지기 전에 처리하려고 그토록 속도를 올렸을 터· 그런데 어째서인지 하사신은 기존보다 몇 배는 빠르게 성유물을 흡수하는데 성공했다·
무슨 장난을 친 건지 모르겠다·
허나 확실한 건 지금 이 상황이 가정할 수 있는 경우의 수 중에서 최악이라는 것이다·
몰아치는 격류 속·
“내가 한 건 제안이 아니야·”
하사신의 섬뜩한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일종의 자비지· 마지막으로 그 비루한 목숨을 건질 수 있는·”
저건 그냥 하는 말이 아니다·
되도 않는 허세나 궁지에 몰린 사냥개가 하는 협박은 더더욱 아니고·
“큭!”
아직까지 몇 분의 여유는 있을 터·
완전히 성유물이 발동되기 전에 승부를 봐야 한다·
그리 생각한 진혁이 ‘빙하조형’으로 만든 얼음 가시들을 투척했다·
콰콰콰쾅!
순식간에 하사신이 서 있던 곳이 벌집으로 변했다·
하지만 이미 하사신은 그곳에서 사라진 뒤였다·
“크하하하! 몇 분 안에 날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나? 이거 내 분신 몇을 처리하더니 주제 파악을 못하게 되었군· 좋다· 그 생각이 얼마나 멍청한 건지 알려주지·”
[고유성창 ‘검은 밤의 초대’가 발동됩니다!]
하사신의 고유성창이 발동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