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1화· 고대의 등반자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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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릿저릿·
피부를 타고 전해지는 날카롭고 섬뜩한 마력·
‘하사신’이 암살에 특화된 고대의 등반자라면· 지금 저 게이트 너머에서 넘어오고 있는 존재는 1:1에 특화된 패도적인 힘을 보유하고 있었다·
“킥킥! 네놈이 지금까지 온 침입자들과는 확실히 다르다는 건 알겠다· 허나·”
하사신의 표정이 기괴하게 뒤틀렸다·
입꼬리가 찢어지는 걸 보면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탓이리라·
“또 다른 등반자를 상대하면서 내 암습에 반응하는 건 불가능할 거다·”
곡도를 따라 다시 한 번 보라색 마력이 타올랐다·
뭐 저 말이 완전히 틀린 건 아니다·
전사형이든 탱커형이든 검수든 간에·
든든하게 버텨줄 수 있는 놈이 있다면 놈의 성명절기는 10배 이상 까다로워진다· 무엇보다 아직 하사신의 진짜 힘이라 할 수 있는 고유성창은 꺼내지도 않았다·
그러나·
“글쎄· 보아하니 너도 지금 누가 넘어오고 있는지는 모르는 것 같은데 자존심 강한 등반자들이 과연 네 말을 순순히 들어줄까?”
아직 ‘고대의 맹세’를 완벽하게 흡수하지 못한 탓에 ‘제어’가 아닌 ‘현현’만 가능한 상태다·
괜히 이 타이밍에 암스테르담에 온 게 아니라는 소리다·
“묘왕 녀석· 꽤나 많은 걸 알고 있었군·”
“내가 알아낸 거라는 생각은 1도 안 하는 거냐?”
“묘족 놈들이 호기심이 많고 귀가 발달해서 그런지 항상 성가시긴 했지· 이번 기회에 아주 다 쓸어버리긴 해야겠어·”
“야· 내 말 듣고 있는 거지?”
무시당하는 게 살짝 상처받으려고 한다·
“뭘 말하고 싶은지는 알겠는데 하나만 알고 둘은 잘 모르는구나· 나와 인간인 네놈 중 과연 그들이 누구 편을 들어줄까? 무엇보다 난 이미 등반자들이 가장 구미가 당길만 한 걸 준비해 뒀다·”
파츠츠!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게이트가 완전히 개방되었다·
저벅·
그 사이로 누군가 나왔다·
“근사한 초대장을 받긴 했는데···· 초대장을 보낸 자가 당신이었나요?”
허리까지 오는 푸른빛이 도는 머리카락·
창백한 피부와 근사한 드레스가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미모를 뽐내는 우아하면서도 품위 있는 여성이다·
하지만·
그런 외적인 것보다 훨씬 더 와 닿는 건 공간 전체를 얼어붙게 만드는 혹한의 냉기였다·
“내가 보낸 초대장이라 불만이라는 건가? 오랜만에 만난 인사치곤 많이 쌀쌀맞구나· 혹한의 마녀여·”
“암살자의 은신처에 들어오고 싶어 하는 여자는 없는 법이랍니다· 그보다 어쩐 일이죠? 초대장을 쓸 정도면 꽤나 중요한 일이라는 걸 텐데?”
“의뢰를 하나 하지·”
하사신이 비수를 꺼내 진혁을 가리켰다·
“척살 의뢰인가요· 암살자인 당신이 그런 의뢰를 하다니· 보통 인물이 아닌가 보군요·”
서리혼령이 어둠 저 너머에 있는 진혁의 실루엣을 힐끗 바라봤다·
“혼자서도 가능하긴 하지만 그런 데다 힘을 낭비하고 싶진 않아서 말이지· 대신 협조한다면 그대의 무구를 넘겨주겠다·”
“내 창을 찾았다는 말인가요?”
심드렁하던 서리혼령의 분위기가 180도 달라졌다·
“확보한 건 아니다· 대신 그 위치를 찾을 수 있는 방법은 알아냈지·”
제대로 미끼를 물었다고 생각한 하사신이 미소를 머금었다·
절대 거부하지 못할 거라 확신하면서·
그런데 바로 그때·
“으음 저기····”
가만히 이 상황을 지켜보던 진혁이 손을 들었다·
“그 창이라는 거· 제가 갖고 있는 것 같은데요?”
어느새 아공간에서 서리혼령의 창을 꺼낸 건 덤이었다·
“그건··· 제 창···이 틀림없어 보이는데·”
“네 네놈이 어떻게 그걸 가지고 있는 것이냐!?”
서리혼령과 하사신이 동시에 허를 찔렸다·
***
‘일이 재밌게 돌아가네·’
진혁이 속에서 터져나오는 웃음을 애써 진정시켰다·
크흠! 큼!
젠장· 쉽지가 않다·
나름 연기에는 도가 텄다고 생각했는데도 이런 상황이 닥치면 표정을 제어하는 게 힘들다니까·
가장 필요할 때 서리혼령을 불러준 하사신에게 고마운 감정까지 느껴졌다·
그나저나· 여기서 서리혼령을 만날 줄이야·
직접 보니까 범접할 수 없는 외모와 품격에 넋을 잃어버린 것만 같았다·
평정심을 되찾은 진혁이 입을 열었다·
“가장 순수하고 차가운 곳을 탐험하다 보니 그 끝에서 당신의 유물들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운영자 중 하나를 처리하고 얻은 거지만·
그런 사실까지 말할 필요는 없겠지
여기서 중요한 건 어디까지나 서리혼령이 얼마나 위대하고 고고한 존재였는지를 잘 포장하고 띄워주는 거다·
보통 이런 놈들이 인정 욕구에 아주 목말라 있거든·
강하긴 강한데 알아주는 존재는 몇 없고·
그마저도 태고의 존재들 때문에 제대로 기를 못 펴고 있으니까·
당연히 칭찬이 고플 수밖에·
다소 차갑던 서리혼령의 표정이 눈에 띄게 달라졌다·
“서리의 힘을 추구하는 자가 아직까지 남아 있다니· 예전에 전부 명맥이 끊겼을 줄만 알았어요·”
“전부는 아니죠· 아직 제가 남아 있으니까요· 북쪽의 가장 끝에서 마지막 서리 조각의 주인을 뵙습니다·”
한치의 어긋남도 없는 예법·
공손하게 예를 표한 진혁이 가지고 있던 두 개의 성유물을 건네려 했다·
전용무구인 ‘창’·
그리고·
그녀가 사용하는 저항력과 친화력을 극한까지 올려주는 반지·
오랜 세월 서리혼령이 찾고 있던 것들이었다·
그래· 분명 당장이라도 손에 넣고 싶을 진데·
“아니요·”
서리혼령은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예?”
진혁이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설마 이용료라든가· 이자라든가를 내라는 건 아니겠지?
그랬다간 서리의 의지고 뭐고 간에····
“제가 제 것을 되찾고 싶었던 건 어디까지나 엄한 이들의 손에 넘어가는 걸 방지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허나 제 의지를 잇는 이가 남아 있다면· 그리고 그 분이 스스로의 힘으로 그걸 찾아냈다면·”
당연히 계속해서 그 소유권을 유지하는 게 옳다·
적어도 서리혼령은 그리 생각했다·
뭐야· 그런 의미였나·
그리 마음 써주면 앞으로도 잘 사용하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저야말로 감사하죠· 그보다· 확실히 수련을 열심히 하셨나 봐요· 제 냉기에도 부리는 눈송이들이 얼어붙지 않은 걸 보면요·”
‘빙하조형’으로 만든 눈송이가 부드럽게 흩날렸다·
초창기부터 사용해온 능력이라서 이미 그 경지는 완숙한 상태· 심지어 서리혼령조차도 당연히 서리의 의지를 이어받았다고 확신하는 지경이었다·
반면
이 상황에서 유일하게 외면받는 이가 있었다·
“크윽·”
하사신의 표정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지원을 위해 부른 등반자가 오히려 상대와 인연이 있던 것이다·
아니 어디 그뿐이랴?
오랫동안 못 만난 직계 후손이라도 본 것처럼· 아주 흐뭇해하며 미소까지 짓고 있었다·
분위기가 훈훈하다 못해 더워지려고 한다·
준비했던 수가 헛짓거리가 되다 못해 오히려 상대에게 날개를 달아준 꼴이 되었다·
하사신이 그림자 속으로 녹아들었다·
이렇게 된 이상 죽이되든 밥이되든 하나는 제거해야만 한다·
스륵!
어둠을 타고 순식간에 공간을 뛰어넘은 암살자가 진혁의 목덜미를 노렸다·
아까보다 더 짙고 불길한 성명절기가 폭사되었다·
자신이 당하더라도 반드시 상대를 죽이겠다는 의지가 느껴진다·
퇴로나 방어를 아예 신경 쓰지 않고 있었으니까·
진혁이 전신의 감각을 곤두세웠····
‘그럴 필요도 없겠네·’
하사신의 곡도보다 0·1초가량 빠르게·
쩌저저적!
얼음줄기가 뿜어졌다·
“크아아아!”
하사신의 몸이 그대로 얼어붙기 시작했다·
“감히 서리의 의지를 잇는 이에게 암습을 펼친 건가요? 그것도 제가 뻔히 지켜보고 있는 와중에?”
“네년···· 죽고 싶은 것이냐? 고작 인간 한 명을 지키려다가?”
분노에 찬 살기가 서리혼령에게 향했다·
빨려들어갈 것만 같은 푸른 빛의 눈동자는 그 시선을 정면에서 마주봤다·
“알량한 협박이라면 관두세요· 처음부터 당신의 제안 따위를 받아들일 생각은 없었으니까·”
“몇 시간 뒤에도··· 그 건방진 태도를 유지할 수 있길 바라지· 진심···으로 말···이야·”
서리가 더욱 짙어질수록 하사신의 말이 흐려졌다·
그리고 얼음기둥이 천장까지 닿았을 때·
더 이상 암살자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게 되었다·
⁕
하사신의 분신체를 처리한 서리혼령이 진혁에게 다가왔다·
“잘은 몰라도 뭔가 곤란한 일이 있나 보군요· 저런 거머리 같은 자의 표적이 된 걸 보면요·”
“놈이 고대의 맹세를 이용해 등반자들을 부리려 하고 있습니다· 태고의 존재들과 거래를 하기 위해서 말이죠·”
“예? 그 그럴···수가·”
진혁의 말이 충격적이었는지 서리혼령의 눈이 토끼 눈처럼 동그랗게 변했다·
하기야 등반자들 사이에서도 금기로 취급받는 성유물의 이름이 언급된 거니까·
하지만 잠시뿐이었다·
서리혼령이 주어진 정보들을 토대로 현실을 받아들였다·
“고대의 맹세가 목적이었다면 초대장을 사용한 것도 어느 정도 이해가 되네요· 게다가· 제가 단지 시작이었을 뿐이라니·”
“도움이 필요합니다· 저걸 내버려뒀다간 등반자들 전체가 놈의 휘하에 들어가게 될 거예요·”
한 명 한 명이 탑의 정상에 도전할 수 있는 괴물들·
비록 고꾸라지긴 했으나 제대로 된 기연과 방법만 손에 넣는다면 능히 탑의 균형을 깨드릴 수 있는 자들이었다·
그런 절대자들이 한 명에게 복속된다?
상층부의 거대 세력들은 물론 십이지신마저 일주일이나 버틸 수 있을지 장담하기 힘들었다·
“알겠어요· 누군가와 함께 하는 건 제 스타일이 아니지만 이번 만큼은 예외로 하도록 하죠·”
[‘임시 계약’이 작성되었습니다·]
[고대의 등반자 ‘서리혼령’이 합류했습니다·]
이걸로 든든한 카드 한 장이 추가로 들어왔다·
***
같은 시각·
서걱!
“끄으으· 어째서····”
일렁이는 백색 화염에 뒤덮인 존재가 비틀거리다 한 쪽 무릎을 꿇었다·
쿠웅!
모래 먼지가 솟구쳤다·
가슴에 입은 상처에서는 계속해서 푸른 화염이 울컥울컥 쏟아져 나오고 있는 중이었다·
한 눈에 봐도 중상이다·
심장이 있는 부위가 통째로 날아갔으니 제 아무리 50층의 존재라 하더라도 살아남기는 힘들어 보였다·
‘크랑’·
엘더 갓의 일원으로 까칠까칠한 피부에 서로 다른 얇고 기다란 검을 든 게 특징이었다·
멸망해버린 행성의 보물을 수호하기 위해 이곳에 있었건만·
난데없는 침입자로 인해 모든 걸 잃어버리게 생겼다·
저벅·
침입자가 천천히 모래 사이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 머리카락을 한 장신의 남성·
천유성이었다·
손에 쥔 검에서는 형언할 수 없이 불길한 검은 마력이 뿜어져 나왔다·
“감정이나 원한은 없다·”
찢어진 옷 사이로 가슴팍이 보였다·
누군가에게 당한 것 같은 상처가 남아 있었다·
“그저 내 목적을 위해서 움직일 뿐·”
붉게 물든 눈동자에선 강렬한 욕망만이 불타올랐다·
“정신 지배···를 당한 건가· 고인물 코퍼레이션에 속한 인물이 어째서 나를 공격하나 했더니· 무언가 장난을 친 거였군·”
크랑이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주술이나 제약 혹은 흑마법·
어떤 종류이든 간에 강렬한 속박이 느껴졌다·
바로 그때·
“하하하· 엘더 갓들이 눈치가 빠르긴 빨라? 나름 신경 써서 새겨 넣은 건데·”
천유성의 뒤에서 또 다른 이가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