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9화· 고대의 등반자 ‘하사신’ (1)
쿠쿠쿠쿠쿠!
검은 천들로 둘러쌓인 미로의 중심부·
그곳에 앉아 있던 하사신이 분노를 참지 못하고 일어섰다·
“하필이면 이 타이밍에··· 방해를 하다니·”
‘고대의 맹세’·
열 마리의 도마뱀들이 서로를 집어삼킨 외형을 하고 있는 성유물이다·
이걸 완전히 흡수할 수만 있다면 오래 전 탑을 등반하던 등반자들을 제어할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을 터·
다시 말해·
‘태고의 존재들’에게 닿을 수 있는 격을 갖출 수 있었다·
‘서리혼령과 검마를 비롯해 성가신 놈들이 전부 내 명령에 복종할 테니까·’
물론· 이러한 전력을 보유한 뒤 50층과 전면전을 치를 생각은 없었다·
단지·
그들과 대화하고 협상할 수 있는 위치에 오를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하다·
‘50층을 넘보지 않는 대가로 그 외에 모든 권한을 넘겨받을 수 있어·’
내로라하는 상층부의 거대 세력들을 모두 무릎 꿇리고 그 위에 군림할 수 있다는 소리다·
일인지하 만인지상·
탑의 2인자로서의 자리를 확고히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런데·
은밀하게 준비하던 일이 고작 몇 명 때문에 차질을 빚게 생겼다·
하사신이 달아오른 머리를 애써 식혔다·
“설마 이걸 알고 여기에 왔을 리는 없겠지·”
고작해야 인간 따위가 탑의 최상층 부를 좌지우지 할 수 있는 ‘고대의 맹세’에 대해 알고 있을 확률은 0에 수렴했다·
그 가능성은 배제하도록 하자·
그렇다면·
“묘왕이 이곳에서 흘러나오는 마력의 위화감을 감지한 거로군·”
십이지신 중 가장 약한 축에 속하는 묘족·
대신 마력의 흐름을 감지하는 능력과 속도에 관해서는 다른 왕들보다 한 수 위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런 묘왕이 탑 밖으로 나와서 길을 안내할 자와 계약을 맺은 거라면····
저들의 동행과 이 상황에 대해서 어느 정도 설명이 가능했다·
“어설프게 냄새를 맡은 걸 후회하게 해주지·”
하사신의 눈에서 지독한 살기가 피어올랐다·
동시에·
스윽·
척·
어둠 속에서 기척을 숨기고 있던 수많은 하사신들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우리의 염원을 방해하는 자·”
“전부 이곳에서 뼈를 묻게 하리라·”
“킥킥· 팔팔하게 뛰는 활어가 해체하는 맛이 있지·”
“
남녀노소·
서로 다른 모습을 한 하사신들이 뾰족한 이빨을 내비쳤다·
그래·
이곳은 암살자들의 땅·
“바로 나의 영토이니라·”
고대의 등반자들도 감히 정면에서 들어올 엄두를 내지 못한 죽음의 금지(禁地)· 이곳에 숨겨져 있는 비밀을 간파하지 않는 한·
침입자들이 살아서 나갈 확률은 전무했다·
***
“허억· 허억·”
“끄으으····”
바티칸에서 온 사제들이 거친 숨을 토해냈다·
사시나무처럼 떨리는 팔과 다리·
심장 역시 터질 듯이 빠르게 고동쳤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조금 전까지도 피할 수 없는 죽음이 턱밑까지 쫓아왔었으니까· 만약 테레사와 진혁이 아니었다면 자신들 중 살아있는 자는 단 한 명도 없었을 것이다·
“····”
아센시오가 완전히 사기가 꺾여버린 동료들을 바라봤다·
간신히 목숨만 건졌다 뿐이지·
더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길 안내··· 아니지· 감시 역할을 하는 건 이쯤에서 그만두는 게 어떤가요? 이 정도 상황이라면 바티칸에서도 정상참작을 좀 해줄 텐데·”
진혁이 혀를 차며 다가왔다·
“알고··· 계셨던 겁니까?”
“얼마 전까지 우리 테레사 씨를 이단으로 몰고 갔던 당신들이· 하루아침에 호의적으로 변했다라···· 제가 의심병이 많아서 그런지 몰라도 전혀 믿을 수가 없거든요·”
아무리 가브리엘이 교황의 꿈속에 찾아가서 으름장을 놓았다고 한들·
신념을 가진 이의 생각을 그리 쉽게 바꿀 수는 없는 법이다·
아센시오의 표정이 한 층 더 어두워졌다·
뭐라도 변명을 하긴 해야 했으나 이미 타이밍을 놓쳤다·
무엇보다 진혁의 말대로 더 이상 들어가는 건 자살행위나 다름없다·
“알겠습니다· 저희는 여기서 물러나도록 하죠· 바티칸에 이 상황에 대해 즉시 보고하고 지원할 수 있도록 조치하겠습니다·”
지원은 개뿔·
어차피 우리의 목숨 따위는 조금도 관심없다는 걸 알고 있다·
오히려 테레사나 정체불명의 토끼 귀를 한 인외종이 죽길 바라고 있겠지·
“대신 그건 내려놓고 가세요·”
진혁이 아센시오가 가지고 온 성유물을 향해 손가락을 까딱였다·
‘선악의 검’
선악과(善惡果)의 마력을 이용해 만들어냈으며 한 쌍의 뱀이 맞물려 있는 외형이 특징적인 양날검이다·
츄릅·
진혁이 입맛을 다셨다·
‘29층에 있는 유적과 미궁 전체에서 랜덤으로 얻을 수 있어서 이번에는 찾는 걸 포기했는데 호박이 넝쿨째로 굴러왔네·’
신성력에 비례해 공격력을 증폭시켜주는 효과가 있는 데다 추가 옵션만 5개가 붙어 있는 사기적인 성유물·
굳이 거추장스럽기만 한 아센시오나 나머지 사제들이 이곳에 오도록 내버려둔 건· 적절한 타이밍에 저걸 꿀꺽하기 위함이었다·
“아 안 됩니다· 이것만큼···· 절대로· 절대로 넘겨드릴 수 없습니다· 제 권한 밖의 일이에요·”
아센시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사제들을 잃고 후퇴한 것만으로도 온갖 질책이 쏟아질 텐데 거기에 성유물까지 잃어버린다?
파문은 당연한 거고 잘못했다간 종교 재판에 회부될지도 몰랐다·
물론·
그런 사정 따위가 진혁에게 통할 리 없었다·
스릉·
단검이 예기를 뿜어냈다·
“뭔가 좀 오해가 있나본데 이건 제안이 아니에요· 거부하면 뭐 하사신에게 당한 시체 수가 좀 더 늘어나는 거죠·”
바티칸에서 어떤 처벌이 있든 그건 알 바 아니고·
지금 당장 시체가 되고 싶지 않다면 순순히 검을 넘기는 걸 추천한다·
일반 시민들이 득실대던 아까와 달리·
이곳에선 따로 증인이 되어줄 만한 이는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흐응· 그래 이 맛이지· 이렇게 순도 높은 마기는 탑 전체를 통틀어도 찾아볼 수 없다니까?”
타락한 테레사가 혀로 입술을 적셨다·
“히이익·”
청하는 악마라도 본 것처럼 슬금슬금 뒷걸음질쳤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다· 라는 걸 아센시오 역시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저 남자라면 얼마든지 자신들을 전부 처리하고 강제로라도 검을 빼앗을 수 있었다·
“알겠···습니다· 대신 다 사용하시면 바티칸에 돌려주실 수는 있겠습니까?”
“물론이죠· 잘 쓰고 나중에 곱게 반납하도록 최선을 다해 노력해보겠습니다· 언제가 될진 모르지만 돌려드리긴 할 거예요· 아마도·”
진혁이 생긋 웃었다·
그리고 아센시오로부터 선악의 검을 받았다·
***
시련의 탑 후반부에서 발생하는 굵직한 이벤트 중 하나·
하사신의 미궁은 방치했다가는 언약에 버금가는 대재앙으로 변질되는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최악인 점은 고대의 등반자들이 모두 놈의 밑으로 들어가기에 50층의 공략을 사실상 불가능하게 만들어버린다는 것이다·
‘다행히 니알라토텝에게 한 방 먹여놨으니 이번에는 개입하지 못하겠지·’
과거에는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그놈 때문에 몇 번이고 고배를 마셨다·
동료가 아예 없는 상황에서 양쪽으로 두드려맞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걸 생각한다면 지금은 조건이 훨씬 더 나았다·
진혁이 새로 얻은 검을 테레사에게 던졌다·
테레사가 한 손으로 가볍게 검을 잡았다·
“흐음· 그냥 준다고?”
“너 말고· 원래 테레사 씨한테 주는 거야·”
“어머나· 질투 나려고 하네· 그런 순딩이보다는 내가 더 좋지 않아? 고분고분하기만 하는 애는 금방 질릴 텐데?”
“언제 뒤에서 찌를지 모르는 것보단 100배는 더 나아·”
정신 나간 몇몇 놈들은 그런 걸 즐기는 모양이지만·
이쪽은 그런 배드 엔딩을 맞을 생각이 없다·
“이럴 줄 알았으면 따라오지 말걸· 그랬어· 하아· 난 왜 맨날 바보 같은 선택만 하는 걸까?”
청하가 울먹였다·
토끼 귀는 완전히 아래로 접혀 있었다·
“그만 툴툴대고 집중해· 이번 일만 잘 처리하면 묘족이 십이지신 중에서 2인자 정도가 되게 만들어줄 테니까·”
제천대성을 재낄 수는 없겠지만 그 아래 정도는 충분히 노려볼 만하다·
아니·
‘내 목적을 위해서라도 청하를 그 위치에는 올려둬야 해·’
방법은 이미 생각해뒀다·
저 순두부 같은 멘탈을 잘 케어하는 게 오히려 더 큰 문제지·
“지 진짜 약속하는 거야?”
진혁이 전폭적으로 도와준다는 말에 풀이 잔뜩 죽은 청하의 눈빛이 조금 달라졌다· 어느새 귀가 반쯤 올라간 건 덤이었다·
“난 한 번 뱉은 말은 반드시 지켜· 그 부분은 걱정하지 않아도 돼·”
“응! 알겠어· 한 번 힘내볼게!”
청하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렇게 탑 밖에 만들어진 미궁 탐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꺼지지 않는 성화’가 발동됩니다!]
[‘태초의 불꽃’이 발동됩니다!]
화르륵!
파칙!
테레사의 빛과 진혁의 불꽃이 길을 밝혔다·
또 다시 언제 어디서 암습이 가해질지 모르는 상황· 그렇기에 신중하고 천천히 전진할 수밖에 없었다·
스르륵·
벽의 한 쪽에서 작은 빛이 점멸했다·
완벽하게 미궁과 동화되어 있는 하사신이었다·
‘역시 정석대로 가는군·’
침입자들의 동선과 목적을 파악하는 것은 승리를 위한 기본 중에 기본·
이곳에 왔던 수많은 침입자들처럼 이번에도 역시 같은 방식을 따르고 있었다·
피식·
하사신의 입에서 약간은 허무하다는 실소가 흘러나왔다·
그래도 조금은 재밌는 사냥이 되지 않을까 내심 기대했는데 이런 식으로 가면 결과는 너무나 뻔하다·
자신에게 도달하기는커녕 잘해봐야 반도 못 가서 전멸하겠지·
하사신이 느긋하게 상대를 어떤 식으로 처리해야 할지 궁리하기 시작했다·
***
진혁이 조금씩 좁혀오는 무언가를 간파했다·
스륵· 스르륵·
꿈틀거리는 그림자·
‘빛을 포식하는 뱀’
불이나 빛을 삼키며 그 덩치와 독성을 증가시키는 신수다·
24시간 정도면 그 능력이 정점에 이를 터·
독이 절정에 이른 뱀들이 침입자들을 유린하는 사이 사각에서 암습을 가한다·
바로 하사신이 가장 즐겨하는 사냥 방식이었다·
‘뭐 천천히 공략한다면 놈이 원하는 대로 흘러갔겠지·’
어둠 속에서 신중하게 이동하는 이들은 매번 하사신의 수에 당할 수밖에 없으리라·
‘과연 어떤 표정을 지을까 궁금하네·’
다음 수는 생각해 뒀다·
일종의 스피드런·
시간이 갈수록 미궁의 난이도가 대폭 상승하는 특성상 오히려 무모하다 싶을 정도로 빠르게 치고 가는 게 공략 포인트다·
이미 모두에게 그 사실을 전해 두었다·
“지금·”
진혁이 신호를 줬다·
“예!”
“응!”
콰앙!
탓!
파팟!
거의 동시라고 해도 좋을 찰나 셋이 전력을 다해 질주하기 시작했다·
[‘빙하조형’이 발동됩니다!]
급속도로 퍼져나가는 서릿발이 뱀들을 집어삼켰다·
빛과 불을 포식하지만 대신 냉기에는 취약한 특징을 찌른 것이다·
“키에에에!”
“케에에!”
아직 새끼에 불과한 뱀들이 온 몸을 마구 비틀었다·
뱀들이 기어나오던 구덩이에 사람 하나가 들어갈 만한 공간이 만들어졌다·
“흐음· 굉장히 수상해 보이는 구덩이네· 나는 저쪽으로 가볼까나·”
진혁이 지체없이 심연 속으로 몸을 던졌다·
“무 무슨?”
지켜보던 하사신의 얼굴이 경악으로 일그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