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9화· 꿈틀거리는 것들의 군주 ‘카알루트’ (4)
[‘에덴’에 입장합니다!]
진혁과 떨어진 고인물 코퍼레이션의 멤버들이 성역에 입장했다·
화르륵!
쿠쿠쿵····
불타는 성벽과 무너지는 건물들·
화려함과 고고함을 상징하던 신성한 세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어둠이 짙게 깔린 도시는 아포칼립스의 한 장면을 연상케 했다·
“왜 천사들이 한 놈도 보이지 않는 거지?”
“그러···게요· 마력탐지에 걸린 게 아예 없어요·”
“···통째로 증발해버린 것 같은 느낌이야·”
모두가 한 마디씩 내뱉었다·
너무나 텅 비어버린 세계는 낯설다 못해 이질적이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바로 그때·
“흡!”
천마가 허공을 향해 손을 내질렀다·
콰아아앙!
방금 전까지 아무것도 없던 공간에 표창 하나가 튕겨나갔다·
빙그르르 회전하던 날붙이가 그대로 떨어졌다·
“웬 놈이냐?”
천마의 말에 기둥 뒤에 있던 남자가 박수를 치며 나타났다·
“이야 반응 속도가 장난 아니네? 그래도 나름 신경 써서 던진 거였는데·”
얼굴이 자세히 보이지 않는다·
무언가 마법이나 술식을 부린 건지· 씰룩이는 입 꼬리만이 확연하게 보일 뿐이었다·
쭈뼛하고·
모두의 팔에 솜털이 곤두섰다·
“과연 네놈이 마지막 배후라 불리는 놈이구나·”
천마의 목소리가 가라앉았다·
일전에 진혁에게서 들은 적 있는 인물·
세계의 멸망을 고하는 가장 큰 재앙을 마주하게 된 순간이다·
게다가·
“저 남자· 왕관을 가지고 있어요·”
빙글빙글·
남자의 손가락 끝에는 ‘신성의 왕관’이 원을 그리고 있었다·
“잘 됐군· 귀찮게 찾아다닐 필요 없이 베어버리면 될 테니까·”
스릉·
천유성이 잴 것도 없다는 듯이 검을 뽑았다·
“싸우려고? 글쎄· 별로 좋은 선택은 아닐 텐데···· 그 잘생긴 얼굴에 보기 싫은 흉터가 생길 수도 있어· 그러다가·”
“무슨 자신감인지 모르겠다만 여기 모인 전력이라면 그 고인물 놈이라도 이길 수 있다·”
“이거 섭섭하네· 너는 내가····”
툭·
남자의 신형이 사라졌다·
“···!?”
천유성이 반사적으로 뒤쪽을 방어했다·
칼날이 비스듬하게 움직이며 사각에서 오는 검격을 받아냈다·
카아앙!
묵직한 일격이다·
아니·
“크윽·”
천유성의 팔이 가늘게 떨렸다·
견디려는 생각이 버텨야한다는 일념으로 변했다·
분명 남자가 들고 있는 건 흔해빠진 검·
그런데·
대체 뭐란 말이냐 이 터무니없는 무게는?
마치 거대한 태산을 하나의 검에 압축시켜놓은 것만 같다·
내기를 모으고 마력을 폭발시키고 있지만 쳐낼 거라는 생각은 손톱만큼도 들지 않았다·
“그 녀석보다 약하다고 생각해?”
남자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에는 묘한 광기가 서려 있었다·
···무겁다·
“노오옴!”
콰앙!
이상함을 느낀 암황이 즉시 남자의 뒤를 잡았다
[‘흑천마황공 10식’ – ‘암륜분쇄권’이 발동됩니다!]
무시무시한 파동이 몰아쳤다·
척수를 통째로 부숴버리겠다는 생각이다·
“파괴력은 나쁘지 않은데 너무 동작이 커·”
하지만 주먹이 등에 닿기 바로 직전 새하얀 눈보라가 흩날렸다·
촤촤촤촤촤촤!
작은 칼날들이 암황을 그대로 집어삼켰다·
“크아아아!”
순백의 눈이 붉게 물들였다·
“당장 멈추거라!”
[엘리스가 ‘블러드 로드’ – ‘선혈개화’를 발동합니다!]
남자의 발밑에 붉은 꽃잎이 나타났다·
“제압하겠습니다!”
테레사의 성호가 하늘에서 떨어졌다·
혈계 마법과 신성 마법이 위와 아래에서 동시에 뿜어졌다·
콰콰콰콰콰콰콰!
붉은 파도와 금빛 물결이 시야를 어지럽혔다·
쿠웅!
암황이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제법 심각한 부상을 입긴 했지만 너무 늦지 않게 도와준 덕에 목숨은 건졌다·
“제기랄·”
천유성 역시 아직까지 떨리는 팔을 제대로 가누지 못 했다·
고작 검을 한 번 나눴다고 이런 꼴이라니·
분노와 수치심에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이야· 진조와 성녀의 조합은 확실히 다르긴 다르네· 주신들보다 훨씬 더 위협적이었어·”
강기를 이용한 실드·
남자의 몸에 반투명한 막에 펼쳐져 있었다·
엘리스의 눈썹이 역팔자로 휘었다·
“여기에 온 신격들을 전부 다 쓰러뜨린 것이냐?”
“자체 밸런스 패치를 좀 했어· 균형이 너무 일방적으로 기울어져버리면 쇼가 흥행하지 못 하거든·”
“죽인 건··· 아니겠지?”
“글쎄· 어떻게 했으려나?”
남자가 어깨를 으쓱했다·
“요리조리 대답을 피하려 한다면 짐의 손으로 직접 그 주둥아리를 열게 해주는 수밖에·”
[고유성창 ‘개벽의 계시록’이 발동됩니다!]
붉은 고리가 떠오르며 아까와는 차원이 다른 마력이 솟구쳤다·
쿠쿠쿠쿠쿠쿠!
유형화된 붉은 파장이 원을 그리며 퍼져나갔다·
“아타락시아의 진조랑은 항상 붙어보고 싶었어· 성녀 씨 역시 마찬가지고· 잘 모르고 있겠지만 당신들은 이 쇼에서 꽤나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거든·”
“그게··· 무슨 뜻이지?”
“곧 알게 될 거야· 기다리던 클라이맥스까진 이제 한 걸음만 남았으니까·”
남자가 검을 앞으로 뻗었다·
[‘검의 개변’이 이루어집니다·]
평범하던 칼날이 그 모습을 바꾸기 시작했다·
용의 비늘을 떠올리는 외형·
알아볼 수 없는 태고의 언어와 고대 룬어들이 그 표면을 장식해 나갔다·
“이 일검을 받아낸다면 왕관을 주도록 하지·”
남자가 결코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했다·
엘리스가 천천히 상대의 눈을 바라봤다·
당연히 신성의 왕관을 넘긴다는 것에 반대급부가 없을 리 없다·
“대신 실패한다면 엘리스와 성녀· 둘 다 나와 함께 가줘야겠어· 참고로 말하자면 이건 일방적인 제안이야· 거부하면 왕관과 동행 둘 다 강제로 해버릴 거니까·”
“재밌구나· 그 도발 친히 받아주마·”
엘리스가 고고하게 응했다·
동시에·
[절대법령 ‘타락한 자들의 회랑’이 재현됩니다!]
전장 선택과 유사한· 일시적으로 자신에게 유리한 지역을 현현시키는 고유 결계가 발동되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 위치한 왕좌 위엔 가장 위대한 진조가 위치했다·
우우우웅!
붉은 혈액들이 사방에서 몰아쳤다·
혈계식으로 이루어진 절대 방어·
“오거라·”
순혈의 왕관을 쓴 엘리스가 손가락을 까딱였다·
***
탓·
진혁이 빠르게 움직다·
기괴하게 생긴 통로들이 연이어 펼쳐졌다·
“복잡하긴 하네·”
아무리 네크로노미콘이 있다고 한들 모든 정보를 알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게다가 카알루트의 내부는 과거 탑을 공략했을 때도 번번이 헤맸던 악명 높은 장소· 단 한 번이라도 실수했다간 여기서 뼈를 묻어야 할 것이다·
후웁·
진혁이 호흡을 가다듬으며 온몸의 기감을 깨웠다·
제아무리 페시스의 능력을 갖고 있다고 해도 시시각각 변하는 이 내부에선 리스크가 너무 높았다·
그렇기에·
“어때?”
적절한 조력자들의 도움이 필수적으로 요구된다·
킁킁!
노움이 연신 코끝을 움직였다·
“이쪽이 역한 냄새가 더 강한 것 같아·”
“바람이 불어오다 말다하고 있어·”
“습도는 22·5% 정도야·”
“이쪽이 더 따뜻해!”
“다들 조용히 해· 머리 아파·”
갈고 닦여진 본능·
지금까지 수많은 험지를 함께하면서 단련된 정령수들의 감각은 꽤나 큰 도움이 되었다·
기존에 알고 있던 것과·
정령수들이 전해준 정보를 종합해····
최선의 결론을 도출한다·
진혁이 방향을 결정했다·
그렇게 복잡한 통로를 따라 얼마나 안으로 들어갔을까?
우뚝하고·
진혁의 발걸음이 멈췄다·
내부에 거대한 공간이 나타났다·
“여기는····”
“내 위장 중 하나다·”
목소리가 들린 건 바로 그때였다·
저 위쪽에·
혈관들로 만들어진 카알루트의 인간형 분신체가 있었다·
말을 더듬었던 처음과 달리 자연스레 언어를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
‘제대로 가고 있다는 뜻이군·’
진혁이 그 부분을 긍정의 신호로 받아들였다·
“보면 볼수록 놀랍구나· 당연히 오는 도중에 질식해 죽거나 벌레에 당했을 거라 생각했거늘· 정확히 이 안까지 들어올 줄이야·”
“냄새가 역한 쪽만 찾으니 그리 어려운 건 아니더라고·”
“후후· 끝까지 입은 쉬질 않는구나· 뭐 좋다· 이제부터는 그런 요행 따위는 통하지 않을 테니까·”
카알루트가 슬쩍 위를 바라봤다·
쩌어억·
거대한 위장의 윗부분이 벌어지며 직경 10m에 이르는 구멍이 나타났다·
콸콸콸콸!
반투명한 액체가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매캐하게 피어오르는 연기·
단백질 따위는 닿는 순간 흐물흐물하게 만들어버리는 카알루트의 위액이다·
“나는 허기를 느끼면 영양가 넘치는 마력덩어리를 먹기 전까진 위액을 멈추지 않지·”
제물을 바치거나·
안에서 녹아서 영양분이 되거나·
선택지는 두 개뿐이다·
“과연 네놈은 어떤 걸 선택할지 궁금하군·”
카알루트가 느긋하게 관망했다·
제물이라····
진혁의 시선이 슬쩍 옆으로 향했다·
그곳엔 5대 원소를 상징하는 정령수들이 있었다·
“응?”
“주인···?”
“서 설마·”
눈을 마주친 정령수들이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이 인간이라면·
얼마든지 제물로 바치고도 남는다·
아니 오히려 그걸 즐길지도 모른다·’
그런 불안한 긴장감이 팽배했기 때문이다·
“히이익!”
“사 살려주세요!”
운디네와 실피드가 서로를 꼭 끌어안으며 비명을 질렀다·
누가 보면 동네 유치원생에게 접근하는 유괴범이라도 본 줄 알겠네·
“야 아무리 그래도 내가 그 정도는 아니야·”
동고동락한 동료를 방패로 삼고 살아남다니·
쯧·
고인물에게도 넘지 말아야 할 선이라는 게 있다·
하지만· 카알루트의 말처럼 이 지옥에서 빠져나가려면 무언가 다른 방법을 생각해야만 하겠지·
의리를 지키다가 다 같이 죽는 배드 엔딩은 이쪽에서도 사양이다·
“보니까· 네 분신체도 꽤 영양이 넘쳐나는 것 같은데 그걸 제물로 바쳐도 이 위액이 멈추지 않을까?”
“호오· 나쁘지 않은 추론이구나·”
카알루트의 분신체가 턱을 쓰다듬었다·
그러면서 말을 이었다·
“확실히· 내 의념이 깃든 이 살덩이에는 그에 걸맞은 마력이 있지·”
역시나·
예상이 맞았다·
“그럼 고민은 끝이네·”
저 더러운 분신체를 위액에 쑤셔넣고 이곳에서 탈출한다·
진혁이 ‘신속의 왕관’을 착용했다·
[고유성창 ‘뇌신’이 발동됩니다!]
[고유성창 ‘페이즈2’가 발동됩니다!]
속도에 최적화된 형태가 갖춰졌다·
콰앙!
진혁이 자리를 박찼다·
눈 한 번 깜빡할 찰나에 카알루트의 코앞까지 도달했다·
“멍청하긴· 내가 그 사실을 왜 순순히 알려줬다고 생각하는 거지?”
[한정스킬 ‘신체개조’가 발동됩니다!]
카알루트의 주위로 다수의 방패들이 나타났다·
카가가가강!
진혁이 방패의 틈 사이를 파고들며 두 자루의 단검을 어지럽게 휘둘렀다·
하지만 a4용지만 한 크기의 방패들이 빼곡하게 빈틈을 메우며 계속해서 수를 불려나갔다·
동시에·
카알루트의 팔이 급속도로 팽창했다·
랜서의 형태로 변한 팔이 그대로 진혁의 심장을 노렸다·
콰아아앙!
가까스로 피했다·
그런데·
랜서가 꽂힌 지점에서 검은색 외피를 지닌 기괴한 형태의 지네들이 뿜어져나왔다·
촤촤촤촤촤!
“키에에에!”
“케에에에!”
지네들이 괴성을 지르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족히 5m가 넘는 크기에 성유물에 버금가는 갈고리들을 달고 있었다·
지네들에게 신경을 쓰는 사이 카알루트의 눈이 진혁에게 향했다·
퍼퍼퍼퍼펑!
카알루트의 시선이 닿는 부분이 그대로 폭발했다·
녹색 연기가 뿜어지며 조금 전까지 진혁이 있던 곳이 구덩이로 변했다·
부글부글·
구덩이에선 또 다른 벌레의 알들이 생겨난 상태였다·
“이 안에선 내가 곧 신이다· ”
게임을 하는 데 있어서 신은 관조만 할 뿐·
결코 거래나 이용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너희 중에서 제물이 될 자를 고르는 걸 추천하지·”
어차피 결말은 정해져 있고·
이건 그 결말을 보기 전에 즐기는 가벼운 유희에 지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