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4화· 공허룡(空虛龍), ‘에테리온’ (1)
어깨· 팔· 다리·
무수히 박힌 무구들 사이로 붉은 혈액이 떨어졌다·
또옥· 또옥····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는지· 저 커다란 상처에서 피가 거의 나오지 않았다·
진혁의 얼굴은 이미 하얗게 질려 있었다·
당장이라도 쓰러져버릴 것처럼·
쿠웅·
결국 버티다 못해 한 쪽 무릎을 꿇었다·
“허억· 허억· 독한 놈 같으니라고·”
“마력을 이렇게까지 쥐어짜게 될 줄이야·”
싸우던 고대룡들이 거친 호흡을 몰아쉬었다·
소나기처럼 공격을 퍼부어도 버텨내는 진혁 탓에 마력과 체력을 한계까지 써버리고 말았다·
“····”
항상 호쾌하게 웃던 아스카람은 더 이상 웃지 않았다·
멀리서 투척한 무구가 무려 400·
가진 것에 절반 가까이를 쓰고나서야 겨우 이겼다·
그것도 누구의 공격도 받지 않는 만전의 상태에서· 상위급 무구를 전부 사용하고 나서야 얻은 결과였다·
만약 1:1로 싸웠더라면····
이곳에 있는 그 누구도 저 인간을 이길 수 없을 것이다·
아니 고구마에게 마력 공급만 하지 않았더라도 너덜너덜해진 건 자신들이었을 것이다·
“다행이라면 다행인가·”
미스티가 진혁과 백희를 번갈아 바라봤다·
만약 자존심을 부렸더라면 어떤 끔찍한 결과가 일어났을지····
으으·
상상만 해도 전신에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다·
그래도·
이제 끝이다·
무력해진 인간을 마무리 짓는 거야 그 누구라도 손쉽게 할 수 있었으니까·
“적이지만 대단했어· 그 예우로 마지막 정도는 직접 끝내주도록 하지·”
스릉·
미스티가 드래곤의 이빨을 벼려 만든 칼을 꺼냈다·
툭·
정확히 진혁의 심장에 닿은 칼끝·
칼날이 유독 시린 빛을 뿜어냈다·
“계약자!”
“진혁 씨!”
“대체 뭘 하고 있는 거냐!”
여기저기서 동료들의 고함소리가 들렸다·
사력을 다해 진혁이 있는 곳까지 오려고 했다· 모든 것을 내팽개친 채 어떻게든 진혁을 구하려 했다·
그러나 모두가 상대하고 있던 존재들은 단순히 의지만으로 떨쳐내기엔 너무나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어딜·”
“너흰 우리랑 계속 놀아야지·”
“감히 등을 보이는 것이냐?”
각기 다른 음성과 함께 흉흉한 고유능력들이 폭발했다· 거기에 그들을 보좌하는 각 일족의 드래곤들까지·
개개인의 힘으로는 감당하기 힘든 전력이었다·
더 이상 도와줄 수 있는 건 없어보였다·
푹!
칼끝이 살 속을 파고들었다·
마력이 녹은 피가 흘러내렸다·
쿠쿠쿠쿠쿵!
지축이 요동친 건 바로 그때였다·
생전 처음 느껴보는 불길함이 범람하기 시작했다·
“···무슨?”
힘을 주던 미스티가 우뚝 멈췄다·
어느새 머리는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쩌저적!
허공에 생기는 균열·
통상적으로 다른 공간에서 무언가 넘어올 땐 게이트라는 매개체가 반드시 필요할 터·
그런데·
그 상식이 지금 무너지고 있었다·
떨어지는 파편들의 숫자가 늘어날수록 흘러나오는 마력 역시 더욱 짙게 느껴졌다·
“뭐 뭐야?”
“세상에나····”
승리를 눈앞에 둔 드래곤들 사이에서 거대한 동요가 일어났다·
쩌저저적····
갈라지는 공간과 그 사이에서 보이는 보라색 용·
타오르는 화염과 마력의 폭풍은 지금까지 보고 경험했던 그 어떤 것과도 달랐다·
[‘호크라샤의 전당’이 새로운 로드를 바라봅니다·]
마정석에서 튀어오르던 스파크가 멈췄다·
[‘용맹의 왕관’이 주인을 인정합니다·]
에테리온의 머리 위로 선명한 왕관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크오오오오!”
쩌렁쩌렁한 포효소리가 대기를 떨게 만들었다·
공기가 짓눌리고 마력마저 흩어진다·
고대룡의 피어·
그것은 같은 동족마저도 두려움에 떨며 하늘을 나는 것마저 잊어버리게 만들었다·
콰아앙!
콰콰콰쾅!
수많은 드래곤들이 지상으로 곤두박질쳤다·
역중력 마법을 펼치거나 물리적으로 다시 날아오를 생각 따윈 못 했다·
하얗게 얼룩진 머릿속에선 그런 기본적인 것들을 사고할 수 있는 여유 자체가 사라졌기 때문·
에테리온의 마력이 진혁을 부드럽게 감쌌다·
권역이 만들어지며 진혁이 세계와 단절되었다·
화르륵!
상처가 빠르게 회복된다·
주인이 무사한 걸 확인하자 이번엔 모든 분노가 눈앞에 있는 적에게 향했다·
“으으으····”
“로 로드를 뵙···습니다·”
새로운 로드로 등극이 된 이상 일반적인 드래곤들은 그 권위에 함부로 거역하지 못한다·
아니 로드라는 지위가 없다고 하더라도 드래곤들이 공허룡의 앞에서 버틸 수 있다는 건 불가능했다·
덜덜 떨며· 자비를 구할 뿐·
그러나 희망의 시작을 알려야 할 새로운 로드는····
피로 얼룩진 개시를 고했다·
우우우웅!
입에 맺히는 보라색 화염·
[‘단죄의 검’이 소환됩니다!]
끝없이 압축된 극한의 겁화가 세상을 집어삼켰다·
콰콰콰콰콰콰콰!
보이는 모든 시야가 단색으로 물들었다·
⁕⁕⁕
일방적인 폭력·
브레스 한 번으로 인해 수백의 드래곤들이 그대로 증발해버렸다·
단죄의 검이 뚫고 나간 자리엔 끝없는 심연이 펼쳐져 있었다·
층계 자체를 관통해버린 여파다·
탑이 자체적으로 상처를 수복하고 있긴 했지만 저런 터무니없는 걸 현실로 보게 될 거라곤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무슨··· 이런 힘이····”
“이 정도 브레스를 사용할 수 있다고?”
그나마 이성을 붙잡고 있는 건 고대룡들뿐이었다·
그마저도 에테리온의 현현과 그가 보인 위용에 넋이 나가있는 상태였지만·
···최악이다·
에드온이 완전히 역전되어버린 상황에 침음성을 내뱉었다·
고대룡들마저 두려워하던 태고의 존재에 버금가는 개체·
봉인이 완전히 풀린 걸로도 모자라서 생명력을 담보로 전성기 그 이상의 힘을 발휘하고 있었다·
저건 이 자리에 있는 그 누구도 상대할 수 없다·
사왕 백희 역시 처음 보여줬던 여유가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이 감각·
이 느낌·
대체 언제였더라? 이런 압도적인 절망을 느껴본 것이?
제천대성이 분노해 이성을 잃어버린 ‘그 사건’·
그래· 그걸 목도했을 때 이후로는 처음이었다·
“도망쳐야 해요·”
이성이 그리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그랬다간 우리 모두 그분들께 죽는다·”
에드온이 담담하게 현실을 알렸다·
그렇다·
이곳에 있는 모든 이들은 단순히 자신들만의 유희를 위해서 온 게 아니다· 일족의 생존을 위해서·
더 나아가서 모든 것의 배후에 있는 태고의 존재들의 명령을 따르기 위함이다·
왕관을 회수하고 어떤 책을 손에 넣는 것·
혹은····
강진혁이라는 인간의 존재를 말살하는 것·
최소한 그 정도는 달성해야지만 이 난장판에 대한 변명거리가 될 것이다·
“물론 그대도 우리와 함께 하기로 했으니 뒷수습하는 걸 도와줘야겠어·”
미스티가 자포자기에 가까운 미소를 지었다·
“미쳤군요· 저런 괴물하고 싸우라는 겁니까?”
“협약이니 뭐니를 들먹인 건 네가 먼저잖아? 아니면 우마왕에게 이 사실을 고스란히 알려줄까? 태고의 존재들께서 분노한 게 알려진다면 우마왕이 직접 널 죽일 텐데?”
“···큭·”
백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단단히 약점을 잡혔다·
“너무 최악만 상상하지 말아라· 에테리온이 아무리 강력하다고 한들 이제 막 본신의 힘을 되찾은 상태· 아직 완벽하게 몸에 적응하진 못했을 거다· 게다가· 우리 쪽도 이번 전쟁을 위해 모든 전용무구와 성유물들을 전부 가져왔다·”
어쩌면·
모두가 함께 덤빈다면····
승산이 남아있을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진혁을 포함해 고인물 코퍼레이션 멤버 대부분이 한계에 도달한 상태였으니까·
“우오오오!”
아스카람이 굉음과 함께 마력을 폭발시켰다·
양 쪽 머리에 굵은 뿔이 솟구쳤고·
전신의 근육이 터질 듯이 팽팽하게 부풀었다·
[‘블루 혼’이 개방됩니다!]
압축과 강화를 거듭해 만들어낸 푸른 창·
근력이 뒷받침된 투척으로 인해 수십 개의 소닉 붐을 만들어냈다·
[스킬 ‘가속의 고리’가 발동됩니다!]
마법진들이 펼쳐지며 날아가는 창이 몇 미터 단위로 가속했다·
멀리 떨어진 공간과 공간을 하나의 점으로 가로지르는 화이트 홀이 만들어졌다·
막는 것은커녕····
근처에 있는 것만으로도 그 폭풍에 휘말려 갈기갈기 찢겨나갈 것이다·
하지만·
[절대용언 ‘공허의 파동’이 발동됩니다!]
최강의 일격은 단 한 번의 손짓에 의해 그 의미를 잃어버렸다·
퍼걱!
블루 혼이 엿가락처럼 꺾였다·
동시에·
쿠웅!
“···컥!?”
보이지 않는 압도적인 힘에 아스카람이 그대로 짓눌렸다·
우두둑! 콰드득!
몸이 지면을 파고든다·
터무니없는 마력·
근섬유 하나하나마저 아스카람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생각만으로 발현되던 용언도 얼어붙은 지 오래였다·
‘죽음’·
시련의 탑에서 가장 오랫동안 살아왔던 존재 중 하나가 처음으로 죽음의 냄새를 맡았다·
제아무리 호전적인 고대룡이라고 하더라도 두려움에 빠질 수밖에·
무구·
남은 무구를 사용해야····
그리 생각하면서 바닥에 꽂힌 방패를 향해 손을 움찔였을 때였다·
화르륵···
퍼퍼퍼퍼펑!
아스카람이 서 있던 공간이 불꽃으로 뒤덮였다·
“크아아아악!”
보라색 겁화가 춤을 췄다·
“아 아스카람!”
“크윽! 당장 저 불부터 어떻게 꺼야····”
나머지 고대룡들이 물과 얼음을 이용해 불꽃을 제어하려 했다·
허나·
타오르는 불꽃은 그 누구의 접근도 허락하지 않았다·
10초·
그 짧은 찰나에 최강의 종족이 까만 재만 남았다·
에테리온의 시선이 천천히 돌아갔다·
아직까지 진혁의 목숨을 위협한 것에 대한 분노가 사그라들지 않았다·
[‘용맹의 왕관’ – 약자멸시(弱者蔑視) 효과가 부여됩니다!]
티끌만큼이라도 공포심을 느낀다면 모두 약자멸시의 대상이 된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 광경을 보고도 두렵지 않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 위로·
[허무의 주언 ‘무(無)의 영역’이 발동됩니다!]
용언의 끝이라 할 수 있는 광역기가 드래곤 레어 전체를 구속했다·
아스카람과 마찬가지로 고대룡들이 그 자리에서 굳었다·
“큭!”
“우 움직일 수가····”
“말도 안 되는· 우리 전부를 타겟으로도 이런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같은 고대룡끼리 이런 격차라니·
도저히 납득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현실을 받아들일지 여부는 에테리온에게 하등 관심 밖에 있는 이야기다·
콰콰콰콰콰콰콰콰!
일직선으로 그어진 선이 에테리온의 시야에 보이는 모든 것들을 집어삼켰다·
그것이 드래곤이든 고대룡이든·
땅이나 마그마이든 상관없다·
실재하는 것이라면·
그 불꽃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할 테니까·
⁕⁕⁕
“꿀꺽!”
“굉···장하네요·”
“이게 우리가 알던 그 고구마가 맞아요?”
“귀엽기만 하던 아이였는데 세상에나·”
지켜보던 멤버들이 저마다 감탄사를 내뱉었다·
전율이 절로 일어나는 광경·
탑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절대자의 위용이 어떤 것인지 온몸으로 실감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앞으로 괜찮은 마정석이 있으면 좀 나눠줘야겠구나·”
엘리스마저도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크흠· 이래야 우리 구마지·”
진혁도 팔짱을 낀 채 그 의견에 동조했다·
“···!?”
“너···!”
“계약자! 괜찮은 것이었느냐?”
멀쩡한 진혁의 모습에 다들 깜짝 놀란 얼굴로 달려왔다·
분명 피투성이가 되어 있던 진혁이었다
아니 말이 좋아 피투성이지·
수많은 무구들에 적중당해 몸이 형상을 유지하고 있는 게 신기할 지경이었다·
그런데·
이토록 멀쩡할 줄이야·
“아슬아슬하긴 했어·”
고구마의 진명을 개방하는 게 어디 쉬운 줄 아나·
어르고 달래고 보듬고·
수많은 빌드업을 쌓아놔야만 비로소 도달할 수 있는 일이다·
80% 이상의 마력을 전부 회복에만 쏟아부어야 했지만 다행히 고구마의 성체를 현현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나저나·
‘복잡한 심정이네·’
공허룡 ‘에테리온’·
과거 탑을 올랐을 때는 한 번도 마주한 적 없던 문헌 속 고대룡의 실체를 보게 되었다·
소중한 동료가 자신을 위해 몸을 불사르는 장면은 가슴이 뭉클해질 수밖에 없는 일이리라·
“고마워·”
진혁이 그 누구도 들을 수 없을 만큼 작은 말로 속삭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