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9화
99. 태풍 2
입구를 둘러싼 경호원들을 모두 때려눕히고 거실로 들어왔다.
온몸이 땀으로 젖어 나도 모르게 숨이 헐떡거렸다.
그런데 이태풍의 거실에선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펼쳐져 있다.
김애자 부회장은 여기가 자기 집이라도 되는 양 소파에 편히 앉아 있고 맞은편에는 이태풍과 이대호가 무릎을 꿇고 있다.
짜증이 확 하고 치밀어 오른다.
이태풍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형······”
“어서 일어나! 내가 대천 쪽 사람들 만나지 말라고 한 거 못 들었어?”
“아 아니 그게. 그러려고 했는데······.”
이태풍이 당황해 말을 버벅거렸다.
“혀 형. 그러니까 이게 어떻게 된 거냐면······ 이분들이 막 밀고 들어와서······.”
이태풍이 사정을 말하려 했다.
하지만 난 사정 같은 건 관심 없었다.
마약 같은 심각한 일 즉 범죄만이 아니면 뭐든 막을 수 있으니까.
그리고 내겐 김애자 부회장의 협박을 막아낼 방법이 있고.
“사정은 나중에 듣자. 일단 일어나.”
순간 김애자 부회장의 인상이 팍하고 구겨졌다.
“임 비서! 내가 아무도 못 들어오게 하랬지!”
“예! 예!”
임 비서라는 정장의 남자가 내게로 다가온다.
입술을 꽉 깨물더니 날 향해 대뜸 주먹을 날렸다.
난 날아오는 주먹을 피한 뒤 몸을 돌려 임 비서의 명치에 가볍게 주먹을 꽂았다.
퍼억!
임 비서가 명치를 부여잡고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끄으으윽.”
믿었던 비서가 쓰러지자 당황한 김애자가 밖에서 대기하던 경호원들을 부르려 했다.
“장 팀장~~!”
“밖에 있는 친구들은 다 쓰러뜨리고 왔으니까 소용없습니다.”
난 멍하니 있는 이태풍을 향해 외쳤다.
“어서 안 일어서? 이태풍?”
이태풍이 내 모습에 자신을 얻은 듯 비틀대면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순간 소파에 앉아 있던 김애자 부회장이 이태풍을 향해 손가락을 뻗었다.
“내 허락 없이 움직여만 봐!”
이태풍과 이대호가 잠깐 흠칫거렸지만 결국 내 말대로 몸을 일으켜 버렸다.
힘들게 일어난 두 사람은 얼굴을 찌푸리며 다리를 만지작거렸다.
김애자 부회장이 날 찢어 죽일 듯한 표정으로 노려보기 시작했다.
“감히······. 내 일을 방해해? 내가 누군지나 알아?”
김애자 부회장의 뾰족한 음성이 송곳이 되어 고막을 찔러댔다.
“대천그룹 김애자 부회장님 아니십니까? 그런데 왜 사람 무릎을 꿇리고 그러시나 모르겠습니다? 요즘 재벌들 갑질하다가 잡혀가는 거 못 보셨어요?”
비꼬며 말하자 김애자의 볼이 부르르 떨린다.
“가 감히······”
김애자가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리곤 대뜸 손을 치켜 올렸다.
‘미친.’
다짜고짜 쳐올리는 그녀의 손길을 살짝 피했다.
휘익.
김애자 부회장은 자신의 힘을 못 이기고 바닥에 철퍼덕하고 쓰러져버렸다.
이제까지 자신이 휘두르면 모두가 맞아줬겠지.
하지만 난 그 손에 맞아줄 생각이 없었다.
“이이익! 감히 내 손을 피해?”
자기 멋대로 인생을 살아와서 그런지 사고방식이 정상이 아니다.
“함부로 손찌검하지 마십시오. 그러다 감방 갑니다.”
김애자 부회장이 이를 악 깨물고 부들부들 떤다.
“너 이태풍 스캔들이 터지면. 전부 다 네 책임이라는 거나 알아 둬!”
김애자 부회장이 폰을 꺼내 들었다.
순간 이태풍이 다급한 목소리로 말한다.
“형! 얼른 말려요! 저 부회장이 제 전 여친과 찍은 사진들 잔뜩 들고 있어요!”
난 이태풍을 안심시켰다.
“신경 쓰지 마.”
“형? 그게 무슨······”
난 괜찮다고 하고선 김애자를 보며 웃음 지었다.
“전화해 보십쇼.”
“응?”
“기자한테 전화해 보시라고요.”
“너 내가 전화 못 할 줄 알아?”
“아뇨. 하시겠죠. 하지만 전화하시기 전에 제가 가진 패도 들어보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김애자가 코웃음을 친다.
“네가 가진 패가 뭐든 간에 너 따위가 날 막을 수 있을 거 같아? 대천그룹의 이 김애자가 힘을 쓰면······”
하지만 난 김애자 부회장의 말이 끝나기 전.
남자 이름들을 한 명씩 거론하기 시작했다.
“김석훈. 장무열. 이동기······”
내 입에서 이름이 나올 때마다 김애자의 동공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지금 거론되는 건.
과거부터 지금까지 김애자 부회장이 특별 스폰한 남자 배우들의 리스트니까.
그것도 업계에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네 네가 그 그걸 어떻게?”
김애자 부회장이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에이 영업 비밀을 누가 그렇게 쉽게 알려줍니까? 하여간 서로 끝장전 한 번 가 볼까요? 부회장님은 태풍이 사진 풀고 전 부회장님이 그 배우들하고 얽혔던 사진 모조리 풀고요.”
김애자 부회장이 부들대며 날 죽일 듯 노려본다.
“감히 대천그룹의 주인인 나에 관한 기사를 올릴 언론이 있다고 생각해?”
대천그룹 정도가 되면 마음에 들지 않는 기사를 쓴 언론에 광고를 끊어버린다는 협박으로 기사를 막을 수 있다.
혹은 법무팀이 언론을 망하게 소송을 걸어버린다고 협박해 상대를 무너뜨릴 수도 있고.
하지만 난 언론에 기사를 넘길 생각이 없었다.
아니 사실은 그 사진은 애초에 내 손에 없었기에 넘길 수도 없었다.
내가 아는 김애자의 스폰 건은 앞으로 7년이나 지난 후 ‘연예가토크’란 신문에 잠깐 등장했다가 몇 시간 만에 사라지게 되는 기사였다.
그 후로 이주 만에 ‘연예가토크’ 신문사가 망해버렸기에 기억하고 있던 건이었다.
즉 다시 말해 처음부터 끝까지 블러핑을 치는 중이었다.
태연하게 굴어야 했다.
그래야 진실을 들키지 않을 테니까.
“부회장님께서 뭔가 착각하시나 본데 그 사진은 언론사에 팔 거 아닙니다. 대천그룹의 힘 한 번 쓰면 다 막힐 건데 제가 미련하게 왜 그럽니까?”
“너······ 설마?”
김애자 부회장의 낯빛이 변한다.
내가 무슨 말을 할지 아는 눈치다.
“예. 여동생이신 김애련 전무이사님한테 직통으로 자료 넣을 겁니다. 제가 가진 자료는 그분이 제일 잘 사용하지 않겠습니까?”
김애자 부회장은 대천그룹의 영애로 태어나 가지고 싶은 걸 다 가지고 살았다고 들었다.
돈 앞에 불가능한 건 없었고 현재 대천그룹의 회장인 성학수 회장도 사실상 바지 회장이다.
대천그룹은 김애자의 아버지 명예회장 김부호가 설립한 거니까.
다만 자매 사이가 좋지 않았다.
회귀 전 두 사람의 치열한 경영권 다툼은 경제지 1면을 여러 번 채웠으니까.
“그러니까 좋게 말할 때 태풍이한테 관심 접으십시오.”
이런 승부는 잃을 게 많은 사람이 불리한 법.
김애자 부회장은 날 뚫어지게 쳐다보다 대꾸도 없이 천천히 일어났다.
‘태풍이를 포기 못 하겠다는 건가? 생각보다 질기네.’
결국 김애자 부회장의 무거운 입이 열렸다.
“알았어. 태풍 씨 사진은 다 없애지.”
기껏 생각해 낸 타협 안이 그것뿐이라니.
“조건은 제가 가진 자료 모두를 파기하라는 거겠죠?”
“당연한 소리!”
“아뇨 그렇게는 못 합니다.”
사진이 없는데 어떻게 없애?
대미를 장식할 마지막 블러핑이다.
“뭐라고?”
“제가 김애련 이사님에게 그 사진들을 풀면 그때는 절 죽이든지 살리든지 하십시오. 하지만 화장실 들어갈 때 다르고 나올 때 다른 게 사람 마음인데 방어할 수단을 함부로 버릴 생각은 없습니다. 태풍이 사진이 풀리지 않는 이상 제가 그 사진을 쓸 생각은 없습니다.”
김애자 부회장이 날 보며 부르르 떨었다.
“그 사진이 풀리면······ 너부터 가만 안 둬.”
섬뜩한 경고를 한 김애자 부회장은 날 쏘아보더니 문 밖으로 그대로 걸어나갔다.
쓰러진 임 비서도 내버려 두고 말이다.
뒤늦게 일어난 임 비서가 허겁지겁 그녀의 뒤를 따랐다.
현관 밖에는 내 주먹에 쓰러졌던 경호팀들도 몸을 추스르고 도열해 있었다.
김애자 부회장은 그들에겐 눈길도 주지 않고 집을 나섰다.
몰려왔던 태풍이 물러나고 있었다.
* * *
회사로 돌아가는 차 안.
김애자는 치솟는 분노를 억누르고 있었다.
오랫동안 눈여겨봤던 미남 배우 이태풍을 손에 넣으려던 계획이 이렇게 허무하게 실패하다니.
그것도 갑작스레 등장한 매니저 한 놈 때문에.
김애자는 분노를 삭이며 앞자리의 임상기 비서를 불렀다.
“임 비서. 정윤호라는 그 인간 뒷조사 좀 해봐.”
임상기가 명함을 받고 말했다.
“예. 부회장님. 어디까지 파 볼까요?”
김애자는 임상기를 노려보며 말했다.
“뭘 어디까지야. 털어서 나오는 데까지 파. 그게 뭐든 간에!”
“예. 알겠습니다.”
“그리고······ 그 녀석이 말한 명단에 있는 배우들 입단속 단단히 시켜. 증거 자료 하나도 안 남게 제거하고. 알겠어?”
“아 알겠습니다.”
김애자는 화가 머리끝까지 났지만 반대로 정윤호에 대한 호기심도 생겼다.
현 회장인 남편도 자신에겐 함부로 덤벼들진 못했다.
그러나 정윤호는 고작 엔터 회사 매니저 주제에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자신을 역으로 협박했다.
그런 상대를 김애자는 모른 척 놓아둘 생각은 없었다.
지시를 내린 김애자는 뒷좌석에 몸을 뉘었다.
롤스로이스 팬텀 뒷좌석의 차양을 닫는 버튼을 누르자 지잉 하는 소리와 함께 창문에 커튼이 쳐졌다.
따사로운 햇살을 가려져 어둑어둑해진 롤스로이스 팬텀의 뒷좌석에서 김애자는 묘한 미소를 지으며 정윤호의 이름을 곱씹었다.
“두고 봐 정윤호. 너 사람 잘못 건드렸어.”
* * *
굴렁쇠 엔터테인먼트 대표이사실.
“여기 이번 신입 사원들 인사 파일입니다.”
강감찬 대표는 강지영 본부장이 건넨 인사 파일을 손에 들었다.
“어디 보자.”
세 명의 인사 파일 서류를 꼼꼼히 살피던 강감찬의 표정에 이채가 떠올랐다.
“본부장. 이 친구 혹시 메달리스트 아니냐?”
강감찬 대표는 정상봉의 사진을 보고 깜짝 놀라 외쳤다.
태권도 국가대표 정상봉.
선 굵은 잘생긴 외모에 키 193cm나 되는 정상봉은 4년 전 아시안 게임 결승전에서 긴 다리를 이용한 호쾌한 뒤돌려차기로 상대를 KO 시키며 20살에 일약 스타가 된 인물이다.
그런 그가 굴렁쇠 엔터의 신입 사원 리스트에 있었다.
“어떻게 이런 친구가 우리 회사에 지원했지?”
“메달을 따고 나서 부상 때문에 재활만 거듭했답니다. 그런데 다시 돌아가려고 하니 갑자기 죽도록 가기 싫었다고 하더라고요.”
“허어. 그래서 아예 그 판을 떠났구만.”
“예. 그래서 뭘 할까 고민하다가 선배가 굴렁쇠 엔터를 소개해 줘서 지원했답니다.”
“선배? 혹시 우리 회사에 그 선배가 있나?”
강감찬의 말에 강지영이 씨익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 선배라는 사람이 저희 체리블라썸의 팬이랍니다. 회사 홈페이지에 체리블라썸 컴백 스케줄 확인하러 왔다가 채용공고 보고 알려줬다고 하더군요.”
강감찬이 흐뭇하게 표정을 지었다.
“허허. 인연이 닿으려니 그렇게도 되는군 그래. 그래도 참 세상 좋아졌어. 나 땐 연예인 매니저 하면 딴따라 심부름꾼이라면서 누구한테 직업 소개도 못 했는데. 내가 너희 엄마랑 결혼한다고 했다가 너희 외할아버지한테 맞아 죽을 뻔했거든.”
강감찬이 추억을 꺼내자 강지영이 피식하고 웃는다.
“안 그래도 엄마가 그때 이야기해 줬어요. 할아버지가 곡괭이 자루를 들고 쫓아가니까 아빠가 맨발로 도망쳤다고요.”
“큼큼. 그게 바로 작전상 후퇴라는 거다.”
강감찬이 헛기침을 했다.
“엄마 말은 다르던데요?”
강감찬은 엄마가 잘못 기억하고 있다며 손사래를 쳤다.
실제로 그 당시 허락을 받을 수 있었던 건 눈앞의 소중한 딸 강지영을 이미 배고 있다는 아내의 청천벽력같은 선포 덕분이었다.
장인이 허탈해하며 며칠을 말도 안 하다가 결국 허락을 했을 때는 얼마나 기뻤던지.
그만큼 매니저라는 직업은 과거에 천시받던 직업이었다.
세상이 바뀌었다는 생각을 하며 강감찬은 다시금 인사 파일에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이 친구. 설마 매니저 하다가 연예인으로 빠지려고 지원한 건 아니겠지? 키도 크고 인물도 좋은데.”
강지영은 고개를 저었다.
“안 그래도 확인해봤더니 자긴 끼가 없어서 연예인은 생각도 해본 적도 없고 할 생각도 없다더라고요.”
강감찬이 고개를 끄덕였다.
“정 대리가 사람을 고르고 싶다고 하던데 인사 파일은 보여줬냐?”
“예. 정 대리는 정상봉 이 친구를 선택했습니다.”
강감찬이 피식 웃는다.
“고 녀석. 알맹이만 쏙 빼먹는구나.”
프로필에는 나머지 두 사람이 학력이나 회사 경험도 모두 앞섰다.
하지만 정상봉은 두 사람이 가지지 않은 장점이 있었다.
고된 연예계에서 가장 필요로 하는 건 의외로 체력과 인내심이다.
금메달리스트 정상봉이라면 두 가지 모두 갖추고 있는 게 당연했고.
그때 강지영이 인사 파일 하나를 더 내밀었다.
“대표님. 그리고 이것도 좀 봐 주십시오.”
“누구야? 신입은 원래 세 명 온다고 하지 않았나?”
“이쪽은 경력직입니다.”
강지영 본부장이 별도로 뽑아놓은 서류를 건넸다.
그런데 역시나 서울예술종합대학교 출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