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8화
98. 태풍 1
[에브리데이 V10]
[날짜 : 2020년 4월 12일]
-PM 01:00 이태풍 자택에서 대천그룹 김애자 부회장과의 미팅
회귀 전 오늘.
김동수의 지시를 받은 난 이태풍과 대천그룹 부회장 김애자의 만남을 주선했다.
하지만 이 제의는 이태풍의 연기자 인생을 진흙탕으로 만들게 된다.
이태풍의 단독 스폰을 하겠다는 게 김애자의 목적이었으니까.
후일 이태풍이 난독증을 고치고 연기자로서 자립했지만 그땐 이미 김애자의 스폰을 받은 상태.
그래서 언제든 김애자 부회장이 부르면 촬영을 그만두고 그녀에게 달려가는 신세가 됐고.
그 결과.
알음알음 소문을 들은 연예계 관계자들은 이태풍의 성공을 모두 김애자의 후원 때문이라며 비하했었다.
그 탓에 이태풍이 얼마나 좌절을 경험했었는지 모른다.
죽도록 노력해도 자신의 노력을 인정받지 못했으니까.
이번에는 절대로 그런 일이 일어나는 걸 좌시할 생각이 없다.
“후우. 왜 이렇게 차가 막혀.”
이태풍의 집으로 가는 길은 주차장을 연상시킬 정도로 꽉 막혀 있었다.
자가용 헬리콥터라도 있었으면 좋으련만.
여전히 일정이 사라지지 않았기에 이태풍에게 전화를 걸었다.
뚜루루루.
그런데 이태풍과 그의 매니저 이대호 두 사람 모두 전화를 받지 않았다.
“설마 현장 녹화 중인가?”
오늘 이 일정 때문에 오후 1시에 MBS의 <스타 맛집! 멋집!> 현장 촬영에 이태풍을 꽂아 넣었었다.
현장 촬영을 하는 터라 전화를 받지 못하나 싶어 MBS의 <스타 맛집! 멋집!>의 AD인 김영은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기대가 무너졌다.
-아 오늘. 촬영할 맛집 사장님이 갑자기 마음을 바꾸셔서 촬영이 며칠 연기되었어요. 안 그래도 막 연락 드리려던 참이었는데.
이태풍은 현장에 왔다가 방금 집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운명의 수레바퀴가 이번에도 내 계획을 비틀어 버렸다.
현재 시각 12시 50분.
난 꽉 막힌 도로를 빠져나가며 이태풍에게 쉼 없이 전화를 걸었다.
그때였다.
-어? 윤호 형?
“왜 이렇게 전화를 안 받아!”
-죄송해요. 이제 막 집에 도착했어요.
두 사람 모두 진동으로 해 놓은 터라 전화를 못 받았다고 한다.
“지금 김애자 부회장이 근처에 왔을 테니까 절대 문 열어주지 마. 알았지?”
-예? 그분이 왜 제 집에 와요?
“아무튼! 내가 갈 때까지는 아무도 들이지 마! 가서 설명할 테니까!”
-아 알았어요.
이태풍의 확답을 받았다.
그런데.
여전히 다이어리의 일정이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 * *
대천그룹은 부회장 김애자의 부친 김부호가 설립한 재계 서열 17위의 대기업이다.
현재의 회장은 김애자의 남편인 성학수.
하지만 그는 데릴사위였고 실제로 그룹의 지배권을 가진 건 김애자였다.
김애자는 번쩍번쩍 빛나는 롤스로이스 팬텀의 뒷자리에 앉아 청담동의 한 주택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기가 우리 이태풍 씨의 집인가?”
김애자의 나이는 올해 48살이지만 매년 피부과에 3억 이상을 투자하는 터라 외견상의 나이는 30대 중반 정도로 보였다.
“예. 부회장님.”
“아담하네. 큰집으로 바꿔줘야겠다.”
혼잣말을 하던 김애자가 보조석을 향해 지시했다.
“열어.”
“알겠습니다.”
김애자의 명령에 조수석에 앉은 경호팀장 장무석이 차에서 내렸다.
경호팀장이 이태풍의 집 문에 있는 인터폰을 눌렀다.
삐이.
“대천그룹에서 나왔습니다.”
이내 인터폰에서 이대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죄송합니다만 돌아가 주시겠습니까? 저희 태풍이는 대천그룹 쪽 사람과는 만날 생각이 없습니다.
경호팀장 장무석은 피식하고 웃은 뒤 나지막한 목소리로 경고했다.
“부회장님을 모시고 온 거니까 문 여시죠.”
낮은 목소리의 협박에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답변이 들려왔다.
-경찰에 신고하기 전에 돌아가십시오.
달칵.
경호팀장은 인상을 쓰고 다시 인터폰을 눌렀다.
삐이- 삐이-.
여러 번 눌러도 받지 않자 경호팀장은 폰을 꺼내 들었다.
『베이~비 샼! 뚜루루뚜둣!』
“뭐야? 이건.”
요란한 동요 벨 소리가 10초 동안 이어졌다.
달칵.
-여보세요?
이태풍의 목소리다.
경호팀장은 짧게 대꾸했다.
“나 대천그룹 경호팀장 장무석이요. 사진 하나 보낼 테니 일단 받아보쇼.”
전화를 끊을 것을 생각하고 말을 짧게 한 경호팀장이 먼저 폰을 끊고 파일을 전송했다.
30초 정도 지났을 무렵.
지이잉.
이태풍네 집 주차장 문이 올라가고 있었다.
“건방진 새끼. 진작에 열 것이지.”
문이 열리는 걸 본 김애자가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잘했다는 표시다.
롤스로이스 팬텀이 열린 주차장 문으로 들어가자 장무석은 허리를 펴고 뒤편의 검은 SUV를 향해 손을 들었다.
SUV 뒷좌석에서 검은 정장의 남자 두 사람이 차에서 내렸다.
“영호하고 한석이. 두 사람은 입구에서 대기한다. 나머지는 나랑 같이 들어가고.”
“예.”
절도 있는 모습으로 인사한 두 사람이 이태풍의 집 입구를 지켰다.
검은 SUV에 올라탄 경호팀장은 앞서간 김애자를 뒤따라 이태풍의 집으로 들어갔다.
달칵.
차에서 내린 김애자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마당에 정자라. 얼굴만 괜찮은 게 아니라 취향도 괜찮네. 아주 마음에 들어.”
김애자는 느릿느릿한 발걸음으로 하이힐을 또각대며 현관으로 향했다.
수행비서 임상기가 먼저 나서서 현관문을 열었다.
“임 비서만 빼고 다들 밖에서 기다려.”
“예. 부회장님.”
임상기의 뒤를 따르던 경호팀장이 허리를 굽히며 현관 밖으로 나섰다.
김애자가 거실로 들어서자 인상을 잔뜩 찌푸린 이태풍과 그의 앞을 가로 막고 선 거구의 이대호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김애자는 가당치 않다는 듯 웃으며 주변을 살폈다.
“손님이 왔는데 반응이 왜 이래?”
이대호가 발끈하며 외쳤다.
“그런 사진으로 사람을 협박하는 게 손님이라고요?”
김애자가 입을 가리고 조소했다.
“호호호. 그 정도 사진 가지고 놀라긴.”
경호팀장 장무석에게 받은 사진은 지난번 회사에서 가지고 있던 이태풍의 약점이다.
인생 첫 번째 여자 친구였던 김은영이 전 소속사에 2천만 원을 받고 팔았던 자신과 함께 침대에 누워있는 사진.
믿었던 첫사랑 김은영의 배신 이후 이태풍은 단 한 명도 여자를 가까이 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그 사진이 어떻게 된 건지 김애자의 손에 들어가 있었다.
이태풍이 김애자를 노려봤지만 김애자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오히려 즐거워하는 기색이다.
그사이 수행비서 임상기가 소파에 흰 천을 깔았다.
“부회장님. 여기 앉으시죠.”
김애자가 고개를 끄덕인 뒤 마치 자신의 집인 양 소파에 앉았다.
“태풍 씨도 거기 좀 앉아. 오늘은 좋은 이야기를 하러 온 거니까.”
부드러운 말과는 달리.
김애자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은 반대편 소파가 아닌 자신의 앞 바닥이다.
이태풍과 이대호는 당연히 거부했다.
“싫습니다.”
“그래? 임 비서. 언론사에 사진 뿌려. 그리고 김은영이 보내온 다른 사진도 함께 뿌리고.”
“예. 부회장님.”
임상기가 폰을 꺼내 들자 이태풍이 입술을 꽉 깨물고 무릎을 꿇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치욕적이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상대는 재벌가 사람.
그중에서도 막 나가기로 유명한 대천그룹의 실질적인 지배자니까.
이렇게라도 고개를 숙이지 않으면 자신의 힘을 과시하기 위해서라도 더 강하게 나온다는 걸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이태풍의 머릿속으로 자신을 믿어주는 정윤호의 얼굴이 떠올랐다.
정윤호가 시키는 대로 문을 걸어 잠그고 버티고 싶었지만 사진을 본 순간 그럴 수가 없었다.
이 사진이 존재한다는 건 정윤호에게도 말하지 않은 탓이었다.
전 소속사와 완전히 해결하고 왔었다고 생각했던 일인데 여기서 터질 줄이야.
이태풍은 무릎을 꿇은 채 주먹을 꽉 쥐었다.
순간 곁에 서 있던 매니저 이대호 역시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분해서 눈에 눈물이 고일 정도다.
하지만 자기 배우가 무릎을 꿇었으니 매니저로는 같이 할 수밖에 없었다.
쿠웅.
이대호가 무릎이 나갈 정도로 큰 소리로 무릎을 꿇었다.
김애자가 그제야 얼굴을 밝혔다.
“다행히 사람이 아둔하진 않네. 좋아. 임 비서. 멈춰.”
“예. 부회장님.”
김애자는 두 사람이 무릎을 꿇고 자신에게 굴종하자 그제야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오늘은 내가 우리 태풍 씨에게 좋은 제의를 하러 온 거니까 너무 딱딱하게 굴지 말자. 표정 풀고.”
이태풍은 울컥하는 심정을 참으며 대꾸했다.
“제 일은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부회장님.”
김애자가 피식하고 웃는다.
“내가 성격이 좀 직설적이니까 솔직하게 이야기할게. 그동안 자기 얼굴 반반한 거 하나 믿고 막 들이밀다가 드라마 영화 하는 것마다 다 말아먹었잖아. 그런 상황에서 스폰서 하나 없이 새 작품 잡을 수 있을 거로 생각하는 건 아니지?”
재벌의 후원을 받는 배우를 출연시키면 제작비를 받거나 광고를 챙기는 일은 흔하다.
관행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배우는 그 대가로 가진 자들의 인형이 되는 거고.
이태풍은 신랄한 평가에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신······경 써 주시는 건 감사 합니다만 제 차기 작품은 정해져 있습니다.”
이태풍은 울분을 참으며 정윤호의 약속을 떠올렸다.
난독증을 호전되게 해준 사람.
녹음 파일을 줬을 뿐 아니라 온갖 난독법의 교정법을 알아 와 자신을 도와준 그 사람이 최성문 감독의 작품에 주연을 만들어 준다 약속했었다.
그 약속을 굳게 믿고 있었다.
이태풍의 거부에 김애자는 인상을 찌푸렸다.
“어린애처럼 굴지 말고 성인이면 똑똑하게 처신해야지. 그리고 내가 어디 큰 걸 바라는 건 아냐. 그저 한 달에 한 번 정도 내 식사 상대나 해주면 되니까. 그러면 우리 대천 백화점 메인 광고 모델로 삼고 태풍 씨가 출연하고 싶은 작품도 적극적으로 도와줄게. 어때?”
모든 스폰이 그렇듯 이런 제안을 받아들이면 그때부터가 시작이다.
밥 한 끼가 술 한잔이 되고.
술 한잔이 그 이상이 될 수도 있었다.
부르면 달려가는 개처럼 사는 삶.
그리 살다 허무하게 사라지는 선배들을 한두 번 본 게 아니다.
이태풍이 떨리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사모님. 죄송합니다. 전 그런 일 안 합니다.”
김애자의 입에서 즉시 노호성이 터져 나왔다.
“사모? 내가 왜 사모야? 나 대천그룹 부회장이야! 우리 성 회장 그 인간은 바지고! 그러니까 두 번 다시 날 그렇게 부르지 마!”
짜증이 가득 난 김애자의 말이 이어졌다.
“그리고 내가 태풍 씨를 잡아먹기라도 한대? 아 재수 없어. 이봐 임 비서. 당장 기자들한테 자료 돌리고······”
순간 이태풍이 무릎으로 기어 김애자의 앞으로 다가갔다.
“제 제발 부회장님.”
김애자는 이태풍의 그런 모습이 마음에 들었는지 깔깔대며 웃었다.
“태풍 씨. 생각보다 심지가 굳네. 아주 좋아. 그런 건 좋은데 그래도 내가 하는 말에 토를 다는 하는 인간들을 워낙에 질색하거든.”
김애자가 몸을 숙이자 블라우스가 달라붙어 군살 없는 몸매 라인이 드러났다.
하지만 이태풍은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김애자는 웃음 가득한 표정으로 차근차근 자신의 계획을 털어놓았다.
“전 여친이 참 질이 나쁘더라. 걔가 태풍 씨 사진 수백 장을 우리한테 넘겼어. 근데 태풍 씨가 계속 내 말을 안 듣잖아? 그러면 난 태풍 씨가 다른 작품에 캐스팅되는 날 이걸 언론에 풀 거야. 그럼 어떻게 될~까?”
김애자의 나긋나긋한 목소리가 마치 마녀가 늪으로 부르는 저주의 목소리처럼 들렸다.
“그 그건······”
“그니까 나 나쁜 여자 만들지도 마. 내가 자기한테 호감이 있어서 밥 한 끼 하자는 게 그게 그렇게 잘못된 거야? 앞으로는 자기한테 얽히는 더러운 일도 내가 다 막아줄게.”
이태풍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자신만 눈을 딱 감으면.
과거 사진들이 공개되지도 않고 큰돈을 벌 수 있다.
‘인생. 참······ 엿 같네.’
이태풍에겐 자신의 잘생긴 얼굴이 저주와도 같이 느껴졌다.
그런데 그때였다.
김애자의 수행비서 임상기의 안 주머니에서 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지이잉.
김애자가 인상을 찌푸렸다.
이태풍이 무너지기 직전이었는데 방해를 받은 탓이다.
“임 비서. 나 중요한 이야기 하잖아!”
“죄 죄송합니다. 부회장님.”
수행비서 임상기는 화들짝 놀라 주방으로 가 전화를 받았다.
“뭐라고?”
임상기는 놀란 눈으로 현관문으로 뛰어갔다.
벌컥.
거칠게 열린 현관문으로 경호팀장이 무릎을 꿇고 숨을 헐떡이는 게 보였다.
그리고 그 앞으로 한 남자가 보였다.
“태풍아. 형 왔다!”
땀으로 이마가 젖은 한 남자가 임상기를 쪼갤 듯 노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