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7화
97. 선택의 시간 3
이기철 이사는 HK 의류에서 건넨 정식 제안서 서류를 꺼내 들었다.
“자 봐라. 구왕수 대표의 직인 찍힌 거. 이래도 의심이 나면 네가 직접 전화를 해서 확인해도 좋다.”
이기철 이사가 내민 서류는 대표이사가 직접 싸인을 한 HK 의류 공식 서류였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하지만 역시나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HK 의류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는 몰라도 몇 개월 뒤에 대표가 바뀐다는 것만은 분명하니까.
난 그런 위험을 무릅쓰고 싶진 않았다.
특히 유진이의 미래가 걸린 문제라면.
내 속도 모른 채 이기철 이사가 말을 이었다.
“위약금도 자기들이 부담해 준단다. LM 의류 측에는 내가 잘 말할 테니까 넌 유진이만 설득해. 또 독자 브랜드를 런칭하면 3년간 별도 인센티브가 있는 거 알지? 이거 한 방이면 연간 수십억이 들어올 수도 있으니 잘 설명하고.”
유진이를 최종 설득하라는 말에 난 속으로 욕설을 퍼부으며 답했다.
“힘들 거 같습니다. 이사님.”
“뭐?”
평온하던 이기철 이사의 표정이 급속도로 흔들렸다.
잔뜩 찌푸린 표정이 마치 화난 두꺼비처럼 보인다.
“야! 내 말 못 들었어? 홍성범 전무가 아니라 구왕수 대표가 직접 연락해 왔다잖아!”
“이미 유진이는 홍 전무 이야기를 들은 뒤 마음이 완전히 떴습니다. 두 번 다시 HK 의류 이야기는 하지 말라고 콕 짚어서 이야기했고요.”
이기철 이사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너 이 새끼 내가 만만해? 이 이기철이가 어떻게든 설득하라고 하잖아!”
강감찬 대표에게 밀려서 그렇지 이기철도 연예계를 헤쳐오느라 쌓인 내공이 장난이 아니다.
하지만 난 이 정도로 겁을 먹을 인간이 아니라는 거다.
이기철 이사보다 몇 배는 더 큰 거물들과도 상대해 봤거든.
“좋게 말하면 말귀를 알아먹어야 할 거 아냐! 당장 가서 정유진한테 전해! HK 의류로 계약 잡혔다고!”
강한 음성이 고막을 울렸다.
“못 합니다.”
콱!
이기철 이사가 벌떡 일어나 내 멱살을 잡았다.
옛날 매니저들은 다 이랬다.
수틀리면 주먹을 쓰지.
맞아줄까?
아니면 피할까?
그때였다.
똑똑.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어떤 놈이야!”
“이 이사. 나 정수혁이요.”
이기철 이사가 독사 같은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다 멱살을 잡은 손을 놓았다.
“이 이야기는 나중에 다시 하지. 일단 나가 봐.”
난 꾸벅 인사하고 문밖으로 나섰다.
정수혁 재무이사가 날 보며 웃음을 지었다.
요즘 유진이 소식이 참 좋다며 웃더니 나만 들을 수 있게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 문제는 대표님에게 전해 둘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가 봐.”
정수혁 재무이사가 눈을 찡긋한다.
“감사합니다. 이사님.”
그러고 보니 이 사람도.
내가 지켜야 하는 사람 중 하나였다.
정수혁 재무이사는 이기철 이사와 김동수가 굴렁쇠 엔터를 잡아먹기 위해 가장 먼저 공격하는 사람이었으니까.
* * *
태블릿으로 기사를 확인하던 최종혁이 씁쓸한 입맛을 다셨다.
빗속에서 2시간이 넘는 동안 고생을 했건만 상대역인 정유진만 화제가 된 탓이다.
“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엉뚱한 놈이 번다더니. 내가 딱 그 꼴이네. 어차피 잡아먹을 거라면 잔챙이보다는 대어로 커 주는 게 좋지만.”
앞 좌석에서 운전을 하던 매니저 유한석이 인상을 찌푸렸다.
“아무리 본부장님 지시라고 하지만 정유진이는 안 건드는 게 좋지 않겠냐? 걔 건들다가 연예가 빅뉴스 애들 큰코다치지 않았어? 주강용 기자인가?”
최종혁이 피식하고 웃음을 흘렸다.
“그거야 주강용 그놈이 멍청해서 그런 거고. 잔말 말고 어서 기자 하나 물어서 기사나 엮어. 유진이 걔랑 나랑 요새 통하는 게 있다니까 그러네.”
“그럼 뭐라고 할까? 최종혁. 정유진이 내 이상형. 이 정도면 돼?”
“형. 왜 이래 아마추어같이? 내가 관심이 있다고 하는 게 아니라 그 반대로 해야지!”
“야 그건 저쪽에서 부인하면 끝이야. 그냥······ 정유진 최종혁 뜨거운 눈빛 정도로 하자.”
최종혁은 마음에 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오케이. 그렇게 해. 열애설 분위기 알잖아?”
최종혁은 안대를 쓰며 콧노래를 불렀다.
“도착하면 깨워. 나 잔다?”
“그래.”
유한석 매니저는 한숨을 내쉬며 전화를 걸었다.
-예. 연예 빅타임 박은교 기잡니다.
“저 TK 엔터 유한석입니다.”
-아 한석 씨. 웬일? 나한테 전화를 다 주고? 목소리 까먹겠다.
“실은 제보를 하나 할 게 있어서요······”
유한석 매니저의 말이 이어지는 동안 뒷좌석에 앉은 최종혁의 입가로 음흉한 미소가 맴돌았다.
* * *
해가 뜨기 전부터 배우 2실의 대회의실은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구성철 실장이 리모컨을 누르자 대형 LCD 화면에 어젯밤에 올라온 기사가 떴다.
[최종혁과 정유진 “사랑이 싹트는······”]
-연일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는 <파란 하늘>의 촬영 현장.
-극 중 ‘성맑음’ 역할을 맡은 최종혁과 ‘김노을’ 역의 정유진과 뜨거운 눈빛을 나누고 있다.
-핑크빛 무드가 넘쳐나는 드라마에서처럼 현실에서도 또 하나의 스타 커플이 탄생할지도 모르는······
<좋아요 150 싫어요 5373>
(댓글)
-미친 최종혁이랑 정유진 사이에 사랑이 싹터? 아 또 낚시 기사에 낚였네.
-이야 정유진이 뜨니까 별에 별 찌라시가 다 올라오네.
-ㅋㅋㅋ. 여기 정유진 엮으려고 했다가 탈탈 털린 연예가 빅뉴스임.
-스타그램에 해명 글 올라왔음. 고소 조심하세요~. 기자님.
구성철 실장의 커다란 콧구멍에서 뜨거운 김이 푹푹 뿜어져 나온다.
“금방 내려갈 것 같습니다. 댓글도 전부 욕뿐이네요.”
주영훈 팀장의 말에 오덕구 팀장이 반박했다.
“주 팀장. 그렇게 만만하게 볼 거 아냐. 현장에서 최종혁이 그렇게 지분거린다는 거 몰라?”
주영훈 팀장이 날 쳐다보며 물었다.
“요즘도 그래?”
“예. 솔직히 말하면 점점 심해지고 있습니다.”
주영훈 팀장은 고생이 많다며 혀를 찼다.
눈치를 보던 박인기 팀장도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이거 그냥 놔두면 안 되겠는데요?”
구성철 실장이 내게 방법이 없겠느냐 물었다.
“일단 그냥 한번 대화나 나눠 보겠습니다.”
“대화?”
다들 의아해하는 눈치였지만 난 더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회귀 전 알고 있던 거로 경고할 거란 걸 어떻게 말해?
“그럼 저 먼저 나가보겠습니다.”
나는 회의실을 빠져나와 비상구 계단으로 내려가며 최종혁에게 직접 전화를 걸었다.
『넌 나의 사랑~ 나만의 사랑~ 오 마이 베이베~』
5년 전 유행했던 라틴풍 노래가 컬러링으로 들려왔다.
-여보세요?
최종혁의 목소리다.
“굴렁쇠 엔터. 정윤호입니다.”
-아 유진이 매니저? 기사보고 전화했나 보네. 오해할까 봐 미리 말하는데 나랑은 전혀 상관없는 일이야.
최종혁이 발뺌을 했다.
난 들은 척 만 척하고서 내 할 말만 조곤조곤하게 꺼내 들었다.
“장미진 허송미 조윤주 씨 아시죠?”
전화기 너머로 정적이 흘렀다.
이 세 사람은 최종혁의 여자들.
그것도 언론에 한 번도 밝혀지지 않은 최종혁과 관계로 피해를 받은 여배우들이다.
만약 이들의 이름과 최종혁의 이름이 언론에 함께 오르내린다면?
최종혁이 받을 타격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런데 최종혁의 반응이 내 예상 밖이다.
-어디서 좀 주워들은 게 있나 본데. 씨X. 증거 있어 증거?
증거는 없다.
하지만 증인은 있다.
이 세 명과 그 지인들.
마음먹고 나서면 쓸만한 증언 하나 얻는 건 그리 어렵지도 않았고.
-한 번만 더 그 누님들 이름을 지껄여 봐. 내가 널 가만둘 거 같아?
으르렁대는 최종혁의 목소리에 웃으며 답했다.
“저야말로 경고합니다. 혹여나 유진이하고 얽혀서 선을 넘는 일이 발생하면 제가 어떤 식으로 움직이는지 잘 한번 보십시오.”
-이 건방진 자식이!
“그리고 말 같지도 않은 그 기사들이나 내리라고 하십시오. 기사 제목 뽑는 센스 하고는. 지금이 쌍팔년도도 아닌데.”
순간 최종혁은 쌍욕을 하며 전화를 끊어 버렸다.
고막이 살짝 따끔하긴 했지만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연예 기사면 1위에 있던 기사가 삭제되었다.
[본 기사는 언론사의 요청으로 삭제되었습니다.]
적어도 하루는 걸릴 줄 알았는데 고작 두 시간 만에 기사가 내려갈 줄이야.
내 생각보다 담이 작은 놈인 것 같았다.
“시키면 시키는 대로 잘하면서. 그러게 왜 괜히 센 척이야?”
난 피식 웃으며 지하주차장으로 향했다.
유진이 때문에 바쁘긴 하지만 오늘만큼은 이태풍을 챙겨야 하기 때문이다.
이태풍이 스폰의 세계에 발을 들이느냐 마느냐 하는 일이 생기니까.
“태풍아. 내가 간다.”
* * *
“빌어먹을······.”
연예 빅타임의 기자에게 기사를 내리기 위해 최종혁은 사비를 써야 했다.
이게 다 그 정윤호라는 녀석이 알고 있는 자신의 과거 때문이었다.
아무도 몰랐는데.
아니 정확히는 당사자들 말고는 모르는 일이었다.
거기다 헤어져도 더럽게 헤어진 여자들이라 누가 부추기기라도 하면 너 죽고 나 죽자고 덤빌 수도 있는 폭탄들이다.
그런데 어떻게 정윤호가 그걸 알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종혁아. 도대체 무슨 일인데 니가 직접 올리라고 한 기사를 갑자기 또 내린 거야?”
매니저 유한석의 질문에 최종혁이 인상을 찌푸렸다.
“형은 쓸데없는 걸 알려고 하지 마. 알면 다치니까 운전이나 똑바로 하라고.”
유한석은 한숨을 쉬고 회사로 돌아가는 운전대를 잡았다.
속으론 씨X을 외치면서.
회사로 돌아온 최종혁은 호흡을 가다듬고 마동팔 본부장을 찾았다.
“형은 여기 있어.”
유한석을 문밖에 세워둔 최종혁이 홀로 본부장실로 들어갔다.
달칵.
“본부장님. 저 왔어요.”
본부장실에서 서류에 파묻혀 있던 마동팔이 고개를 들었다.
인상을 찌푸린 마동팔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또 무슨 일이야? 정유진에 관한 이야기 아니면 나가. 나 바쁘니까.”
최종혁이 씩씩대며 답했다.
“정유진 걔 이야기예요.”
마동팔 본부장이 자리에서 일어나 소파에 와 앉았다.
“말해 봐.”
최종혁을 바라보는 마동팔의 얼굴에 호기심이 깃들었다.
“오늘 기사 보셨어요?”
“무슨 기사?”
최종혁이 오늘 삭제된 기사를 언급했다.
“1위를 했었다고? 왜 말 안 했어?”
“하아. 씨X. 정윤호 그 인간 때문에 바로 내렸어요.”
“왜?”
최종혁은 자기가 과거에 쳤던 사고를 정윤호가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렇단 말이지······.”
마동팔이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그리곤 최종혁을 향해 말했다.
“뒤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넌 좀 더 강하게 푸쉬를 해 봐라.”
“본부장님! 정윤호가 제 구린 일들을 알고 있다니까요? 그러다 괜히 놈이 들이받기라도 하면!”
“쓰읍!”
마동팔의 입에서 독사가 혀를 날름거리는 소리가 흘러나오자 최종혁이 입을 다물었다.
“걔들은 회사에서 맡아 주마. 그러니까 넌 겁먹지 말고 하던 대로만 해. 그리고 앞으론 미리미리 보고하고. 그래야 우리 쪽에서도 미리 손을 쓸 거 아니냐 응?”
“죄송합니다. 앞으로는 미리 알리겠습니다.”
“알았으면 됐다. 하지만 타이밍은 좋았어. 후속 기사는 내가 손 써 보마.”
기사는 삭제되었지만 실시간 검색어 8위가 ‘정유진 열애설’이고 5위가 ‘최종혁과 정유진’이다.
몇 시간 정도 올라와 있었던 기사치고는 파급력이 좋았기에 마동팔은 최대한 활용해 볼 생각이었다.
그러다 최종혁의 상품 가치에 손상이 나면 버리면 그만이다.
모로 가던 정유진이만 밟을 수 있다면 박은빈과의 재계약이 성사될 테니까.
아직 박은빈에게는 뽑아먹을 수 있는 게 수십억 아니 백억 정도는 족히 될 거란 판단 때문이었으니까.
그런 속내를 모른 최종혁은 마동팔의 약속을 받고 자신만만하게 일어났다.
정유진을 반드시 자기 사람으로 만들겠다는 생각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