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5화
95. 선택의 시간 1
시청률 21.5%의 <팔방미인>.
이상아 작가의 작품으로 여주인공인 박수연이 MBS의 최우수상을 수상한다.
그 사실을 알기에 솔직히 고민이 된 건 사실이다.
유진이의 연기력이면 그 이상도 바라볼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이 업계에서 오래 버티기 위해서는 작가와의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했다.
그리고 내가 생각하는 유진이의 필모에 <팔방미인>은 어울리지 않는 것도 있었고.
나는 아쉬움을 감추고 차수연 제작 PD에게 거절의 의사를 밝혔다.
“죄송합니다. 차기작은 이지연 작가님과 이야기가 되는 중이라서요.”
“헉! 이지연 작가님이랑요?”
“예.”
“그럼 설마 편성 취소된 그 작품?”
“네. 그거요.”
차수연 PD가 그제야 헛기침을 내뱉으며 한발 살짝 물러났다.
“이지연 작가님이 상대라면 저희가 물러나야죠. 대표님에게도 그리 전할게요. 대신 차기작 잡기 전엔 우리랑 꼭 한번 자리해요. 우리도 S급 작가 여러 명 모시고 있는 거 아시죠?”
“예. 압니다. 그리고 S급 작가가 아니라도 대본만 좋으면 합니다. 배우 성공하는 게 꼭 작가 인지도를 따라가는 것도 아니잖습니까?”
그제야 차수연 제작 PD의 얼굴이 조금은 풀어졌다.
“뭘 좀 아시네. 드라마 성공이야 작가 빨을 타긴 해도 배우가 뜨고 지는 건 별개니까. 근데 정 대리님. 내가 진짜 궁금해서 그러는데 리얼로다가 1년 차 맞아요?”
난 웃으며 말했다.
“4월 1일 지났으니까 이제 2년 차인데요?”
차수연 제작 PD는 그게 그거 아니냐며 입을 가리고 웃음을 터트렸다.
“하여간 앞으로 잘 해 봐요. 아 물론 이번 드라마에 최선을 다하는 게 우선이지만.”
차수연 제작 PD가 살짝 웃으며 사라져갔다.
고작 2화가 방송되었는데 유진이를 대하는 제작사의 대접이 이렇게 바뀌다니.
진땀을 흘려가며 뛰어다닌 보람이 있었다.
하지만 <파란 하늘>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 * *
꾹!
강감찬 대표는 주영인이 보내온 계약 해지 합의서에 도장을 찍었다.
“이건 오늘 중으로 에이스 엔터로 보내 줘.”
“이대로 말입니까? 다른 조건을 좀 더 찔러봐도 될 것 같습니다만.”
곽무혁 법무팀장의 말에 강감찬 대표가 고개를 저었다.
“미우나 고우나 우리가 발굴했던 배운데 질척거리지 말고 곱게 보내주자고.”
“예.”
“그보다 체리블라썸의 은아 문제는 어떻게 되어 가나?”
“유은아 양의 아버지께서 변호사를 통해서 내용증명을 요구하더군요. 이제까지 체리블라썸의 운영비로 얼마나 썼는지 알려달라 하십니다. 그리고 그 금액의 사 분의 일만 인정하겠다네요.”
“결국 그렇게 하는군. 곽 팀장. 알지? 윤호가 하자는 대로 해 줘.”
“예. 정 대리가 꽤 머리를 잘 굴렸더군요. 그래서 시간 좀 끌다가 이달 말쯤이나 회신해 주려고 합니다.”
강감찬 대표가 너털웃음을 짓는다.
“그래. 그러면 이만 나가 봐. 본부장은 좀 남고.”
곽무혁 법무팀장이 고개를 숙이며 대표실을 나갔다.
탕.
문이 닫히자 강감찬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젠 주영인과 진짜로 남이 된 탓이다.
“쯧. 영인이 그 녀석. 뭐가 그리 급해서는. 이대로 쭉쭉 치고 올라가서 시청률이 더 올라갔을 때 가면 지금 받는 것보다 20%는 더 받았을 건데.”
“어쩌겠어요. 자기 복이 거기까지인데.”
강감찬도 주영인이 첫 화가 나가고 받았던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는 보고를 들었다.
“그래도 양심은 있는지 이번 드라마로 인해 발생하는 수익은 저희와 분배한다네요?”
“그거야 몇 푼이나 한다고.”
주영인 나름대로 몇 개월 일찍 계약을 풀어준 데 대한 보은을 하고 간 셈이다.
수억에 달하는 거금이지만 주영인의 몸값에 비하면 그리 높은 돈은 아니었다.
강감찬은 창문을 쳐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내 생각을 굳혔는지 지시를 내렸다.
“이제부터는 유진이한테 집중해서 힘을 실어줘라.”
“안 그래도 그럴 참이에요.”
강감찬 대표의 지시에 강지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 참. 다음 주 월요일 신입 사원 최종 면접이 있는데 나오실 건가요?”
강감찬 대표가 고개를 저었다.
강지영 본부장의 눈에 이채가 스쳐 지나갔다.
연습생과 신입 사원이 들어올 때면 언제나 직접 확인했으니까.
“이제 그런 건 네 선에서 알아서 해.”
“알겠어요. 그렇게 할게요.”
강지영이 결재서류를 챙겼다.
그런데 강감찬이 강지영의 발걸음을 잡는 말 한마디를 더 했다.
“그리고 신입 사원 중에서 제일 빠릿한 놈으로 골라서 윤호 밑에 붙여줘라. 앞으로 윤호가 많이 바빠질 거니까.”
강지영이 깜짝 놀라 되물었다.
“설마······ 정 대리에게 벌써 팀장 연수 시키는 거 아니시죠?”
강감찬이 씨익 웃는다.
“맞는데?”
“농담이시죠?”
“당연히 진담이지.”
강지영은 걱정된다는 듯 말했다.
“정 대리 능력이야 충분히 알지만······ 대리 단 지 얼마나 되었다고요? 반발이 장난 아닐 거예요.”
강지영의 반문에 강감찬은 손을 내저었다.
“일단은 윤호가 사람을 어떻게 쓰는지 직접 보고 판단해보자. 이번에도 문제가 없다면 더 큰일을 맡겨볼 참이다. 반발은 우리 선에서 무마해야지.”
강감찬은 정윤호의 성장에 모험을 걸었다.
혼자서 배우 3실에 들어가 고참들을 흔들 수준이라면 팀장 아니 그 이상의 업무도 처리할 수 있을 거란 확신이 들었으니까.
“잠깐만요. 아빠! 설마 배우 3실뿐만 아니라 배우 1실도 흔드실 생각이세요?”
새로운 탑스타가 잔뜩 들어온 배우 3실에 비해 배우 1실은 그리 많은 배우를 영입하지 않았다.
이미 가지고 있는 탑스타들만으로도 안정적인 라인 업을 갖추고 있었던 탓이다.
하지만 강감찬은 현재 굴렁쇠에서 가장 수익을 많이 올리는 배우 1실마저 흔들려고 하고 있었다.
“배우 1실 놈들도 너무 고인 물이 되었어. 그러니 이참에 경각심 좀 가지게 해줘야지.”
강지영은 침을 꼴딱 집어삼켰다.
“그게 될까요?”
“이번 작품이 왠지 감이 좋아. 윤호 그놈이 이지연 작가를 물리치고 파란 하늘을 선택한 것부터 시작해서 결국 여기까지 왔잖냐. 그놈이 크면 배우 1실 꼰대들도 긴장 좀 타겠지.”
강지영이 말없이 한참을 버티다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그러면 거기에 맞게 준비할게요. 그리고 저도 조금 더 큰 그림을 그려 볼게요.”
강감찬은 따듯한 눈빛으로 강지영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단둘이만 있는 터라 편한 말투였다.
“그래. 그렇게 해. 그리고 지영아. 내가 늘 미안하다. 이런 곳으로 널 끌어들여서.”
서울예술종합대학교 라인과 힘겨루기를 시켜 미안하다는 말에 강지영이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아이참. 아빠는? 됐어요. 내가 하고 싶어서 온 거라니까요?”
강지영은 오늘따라 아빠의 따뜻한 말투가 간지러웠다.
늘 사랑하고 존경하는 아빠지만 요즘 들어 갑자기 이렇게 따뜻한 말을 조금씩 한다.
‘그러고 보니 아빠 건강 검진 결과가 나올 때가 되었는데. 설마 어디 아프기라도 하신 건 아니겠지?’
엄마에게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한 강지영이 서둘러 일어났다.
“먼저 나가볼게요.”
강지영이 일어나자 강감찬이 장난스레 말했다.
“수고해라. 술 너무 마시지 말고. 우리 궤짝.”
“아 요새는 저 안 마셔요! 요즘은 나 한 홉도 안 된다니까요?”
“내가 듣는 이야기는 좀 다르던데······”
“아빠!”
“으이쿠.”
강지영 본부장이 흥하고 문을 닫고 나가자 강감찬 대표는 소파에 몸을 실었다.
그리곤 조용히 혼잣말을 내뱉었다.
“뇌종양이라······. 그놈 참 용하단 말이야. 이걸 어떻게 알았을까?”
요즘 들어 어쩐지 피곤하다 하더니.
3월에 받은 건강 검진에서 작은 종양이 자라나고 있었다는 걸 알았다.
조만간 수술을 받아야 했기에 자신의 빈 자리를 채워줄 사람들이 더욱 필요한 상황이 되었다.
* * *
[(공지) 주영인 씨는 오늘 에이스 엔터로 이적했음을 알립니다.]
회사에 출근한 김동수 실장은 까톡을 받자마자 자신의 방에서 욕을 내뱉었다.
“X팔.”
애지중지하던 주영인을 이렇게 허망하게 놓칠 줄이야.
강감찬 대표가 처음 그녀를 맡으라고 한 이후부터 지금까지. 단 하루도 빠짐없이 그녀의 일정을 직접 챙겼다.
비록 실장으로 승진한 후에는 뜸해지긴 했어도 일주일에 한 번씩은 현장에도 나갔다.
최근엔 남자로서 관심도 있다고 속마음을 털어놓기도 했건만 주영인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래도 언젠간 자신의 진심을 알아줄 거라 생각했는데.
“정윤호! 그 자식 때문에!”
김동수 실장의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아 올랐다.
안 그래도 보기 싫은 놈이었는데.
모든 게 정윤호 때문에 생긴 일 같았다.
“진즉에 자근자근 밟았어야 했어. 정윤호 그놈!”
김동수는 한참을 씩씩대다가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잠에서 덜 깬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진소미! 날새는 언제 나오는 거야!”
-아 진짜. 아침부터 왜 이렇게 소리를 질러?
“닥치고. 언제 나오냐고!”
-앞으로 석 달 안에 집행 유예 떨어질 거예요.
김동수가 으르렁거렸다.
“최대한 빨리 나오게 힘 좀 써 봐.”
-뭐야? 분위기가 왜 이래? 무슨 일 있어요?
“밟아야 하는 놈이 있거든. 그놈 뒤를 좀 캐야겠다.”
-흐음. 사람 뒤 캐는 건 나도 잘하는데.
“시끄러워. 넌 일 하나 시키려면 돈을 미친 듯이 먹잖아!”
-어머? 이 오빠 말하는 거 좀 봐? 그럼 날새는 돈 안 드나?
김동수는 더는 말을 하지 않았다.
-알았어요. 알았어. 하여간 최대한 빨리 앞당겨볼게요. 그니까 재촉하지 마요. 어르신들 수틀리면 되던 것도 안 돼.
“후우. 알았다.”
그런데 그때였다.
전화를 끊기 전 진소미가 한마디를 이었다.
-그보다 나 이참에 변호사 자격증이나 딸 거예요. 법조 브로커 짓을 제대로 하려면 변호사 아니면 안 되겠더라고. 사람들이 날 너~무 무시하는 거 있죠?
“변호사?”
-나 공부 잘했다는 거 알잖아요.
술장사를 할 때부터 법대 출신이라는 과거로 유명했던 진소미다.
집안 사정이 어려워서 술장사로 뛰어들었지만 머리만큼은 비상하기도 했고.
순간 김동수의 머리가 반짝였다.
“스폰 필요해? 필요하면 내가 해줄까?”
-와우. 화끈해서 좋네. 대신 그런 종류의 스폰은 아닌 거 알죠?
“니 머리에는 관심이 있지만 몸에는 관심 없어. 돈은 확실히 대 줄 테니 넌 변호사 따면 내 밑에서 10년만 일해라.”
전화기 너머로 진소미의 날카로운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날로 먹을 생각하지 말고 5년으로 퉁 쳐요. 싫음 말고. 난 딴 스폰 찾으면 되니까.
“쯧. 비싸게 굴긴.”
-그럼 잘 해 봐요 스폰서님.
진소미는 앞으로 두 달 안에 무조건 날새를 빼내겠단 약속을 마치고 전화를 끊었다.
* * *
[(공지) 주영인 씨는 오늘 에이스 엔터로 이적했음을 알립니다.]
유진이의 촬영을 보던 중 주영인이 이적했다는 까톡이 날아왔다.
그 탓에 배우 2실의 단톡방이 술렁거렸다.
[구성철 실장 : 얘는 작품이 끝나기도 전에 이적하네. 미친 거 아냐?]
[오덕구 팀장 : 이거 갑자기 무슨 소립니까?]
[주영훈 팀장 : 내가 주영인 저거 사고 칠 줄 알았다니까요. 하여튼 통제가 안 되는 배우는 키워봐야 소용이 없다니까.]
[박인기 팀장 : 내가 주영인 걔한테 그동안 당한 거 생각하면 가기 전에 한마디는 쏘아 주는 건데······]
[동기 이영진 : 법무팀에 일하는 최은우 대리님께 들었는데 이적 자체는 어제 했다는데요. 오늘 에이스 엔터로 계약 해지 통보서 보내줬답니다.]
[구성철 실장 : 정 대리. 현장에 주영인 왔냐? 이제 우리 회사 관리 배우 아니까 괜히 얽히지 마라.]
[정윤호 대리 : 예. 신경 쓰겠습니다.]
신경 쓰지 말자고 했건만 신경이 안 쓰일 수가 있나?
뭐랄까?
이제까지 아슬아슬하게 안장을 얹혀놓고 고삐를 매어둔 말이 모든 구속을 떨쳐내고 광야로 달려나간 것 같은 기분이다.
제어핀이 사라진 주영인이 또 어떻게 나올 건지 모르겠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주차장으로 거대한 밴이 들어왔다.
문이 열리고 에이스 엔터의 이찬동 실장과 주영인이 내렸다.
순간 회귀 전의 아내가 돌아온 것 같은 착각에 휩싸였다.
평소에 입던 옷보다 한두 단계는 더 클래스 있는 명품 투피스 정장에 한정판 주얼리와 하이힐까지.
말 그대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억 소리 나게 걸치고 있다.
그 탓인지 주영인의 얼굴에 당당한 표정이 물씬 묻어나왔다.
역시 그녀에게는 돈이 최고의 비타민이다.
지나가던 양순호 조연출이 발걸음을 멈췄다.
“어? 영인 씨? 강 팀장은 어떻게 하고 에이스에 이 실장님이랑 같이 와요?”
주영인이 활짝 웃으며 대꾸했다.
“아 저 오늘 이적했어요.”
“뭐? 드라마 촬영 중에?”
“걱정하지 마세요. 깔끔하게 이적해서 절대로 탈 없을 테니까요.”
“아니 그래도 이런 경우는 미리 이야기해 줘야지······.”
순간 이찬동 실장이 특유의 부드러운 웃음으로 혼란에 빠진 스태프들을 안심시켰다.
“하하하. 설마 저희 에이스 엔터 못 믿으시는 건 아니시죠?”
“아 아니요. 그런 말이 아니라.”
스태프들을 이찬동 실장에게 맡긴 주영인은 또각대는 구두 소리를 내며 내게로 다가왔다.
“정 대리님. 인사도 못 하고 이적해서 죄송해요. 섭섭하시진 않죠?”
“섭섭은요. 오히려 영인 씨를 섭섭하게 해드린 건 전데요 뭘.”
“호호. 다행히 그건 아시네.”
주영인이 먼저 손을 내밀더니 악수를 권해왔다.
무슨 꿍꿍이인 건지 생글대며 웃는 얼굴을 보니 왠지 등골이 오싹했다.
그녀의 눈빛에는 여전히 ‘탐욕’이라는 감정이 묻어 나오고 있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