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4화
94. 여파 2
“2화 시청률은 9.5%. 이 정도면 첫 주 스타트로 나쁘지 않아 얘.”
“9.5%요?”
“정확한 집계야 내일 나오겠지만 뭐 그렇다네? 하여간 축하해.”
김솔잎 작가가 눈빛을 번뜩이며 되물었다.
“그럼 밤하늘은요?”
“왜? 신경 쓰여?”
“당연하죠!”
이지연 작가가 그제야 프로 작가답다며 웃음을 지었다.
“최종은 15.7%. 중간에 10.4%까지 떨어졌다가 다시 올라갔다더라. 너도 참 입봉부터 상당한 난적을 만났어.”
최종 스코어 6.2% 차이.
그래도 이 정도면 꽤 선전하는 중이다.
“아 진짜. 하필이면 왜 이런 상대를 만나서는!”
이지연 작가는 그 모습이 재미있다며 놀려댔다.
“솔잎. 너도 작품 런칭하니까 별수 없지?”
“뭐가요?”
“뭐긴. 날 히스테릭하다고 놀린 거 하나도 기억 안 나? 난 엄청 기억 잘 나는데?”
“아 진짜. 제가 언제 작가님을 놀렸다고 그러세요!”
이지연 작가는 우리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두 사람 봤지? 저게 바로 작가 짜증이잖아.”
이지연 작가의 디스에 하마터면 웃음을 터트릴 뻔했다.
이지연 작가의 히스테릭한 행동은 김솔잎 작가의 몇 배는 더하는 걸 아니까.
“하여간 다 좋은데 전화는 켜 둬. 정 CP가 너 전화 안 받는다고 난리가 났더라. 오죽하면 내가 이렇게 직접 왔겠니?”
“어? 충전! 깜빡했어요.”
그제야 폰을 놓아둔 곳을 깨닫고 충전기에 폰을 꽂았다.
시청률이 올랐다는 말에 유진이 또한 긴 한숨을 내쉬었다.
나 역시도 살짝 안도했다.
김성운 PD가 1화에 너무 파격적인 수를 쓴 탓에 살짝 겁을 먹은 게 사실이니까.
“자자. 일단 밥부터 먹자. 너 딱 보니까 한 끼도 안 먹었지?”
이지연 작가의 말에 식탁을 살폈다.
대본 수정을 하면서부터 쓰지도 않았는지 식탁 위에는 먼지가 가득했다.
그 탓에 광고지를 바닥에 깔고 이지연 작가가 사 온 배달 삼겹살을 늘어놓았다.
이지연 작가는 자신은 저녁을 먹었다며 내가 건네준 커피를 홀짝였다.
“그런데 다들 시청률 차이가 줄어든 이유는 안 궁금해?”
상추에 삼겹살을 세 개를 놓고 한입에 씹던 김솔잎 작가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네. 완전 궁금해요. 그니까 어서 말해주세요. 네?”
이지연 작가는 먹다가 체하겠다며 잔소리를 하다가 성화를 못 이겼는지 유진이를 가리켰다.
“저요?”
“그래. 유진이 너.”
이지연 작가는 정삼룡 CP에게 들은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 * *
4월 3일 아침 회의 시간.
구성철 실장을 비롯한 2실 모두의 표정이 어제와는 완연히 달라졌다.
특히나 유진이 이름이 거론된 기사들이 실시간으로 올라오는 상황이라 회의가 진행될수록 분위기가 밝아지고 있었다.
“이야. 기사들 좀 봐라. 이거.”
“그러게 말입니다. 실장님.”
[<파란 하늘> 2화 시청률 9.5% <밤하늘의 달빛 내림> 2화 시청률 15.7%]
[<파란 하늘>과 <밤하늘의 달빛 내림> 불꽃 튀는 시청률 대결. 다음 주 시청률 추이는?]
[시작부터 뜨거워지는 양사의 드라마 전쟁.]
[<파란 하늘>의 노을이 불판 액션! 불꽃 액션!]
유진이가 고깃집을 찾은 손님들의 불판을 갈아줄 때마다 머리 뒤로 불판을 휘젓는 동작을 한 게 뜻밖의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고깃집 30년 달인이나 진기명기 수준의 손재주라며.
회식 당일.
유진이가 술에 취해 고깃집을 주름잡는 것을 본 김솔잎 작가가 급히 수정해서 넣어둔 장면이 대박을 터트렸다.
[<파란 하늘> 정유진. 화제의 등장!]
(불판갈이 춤.GIF)
(댓글)
-노을이 말투 웃김. 촌스러운데 귀여움.
-교복 핏 오지네.
-근데 교복 입고 불판 갈이 춤은 좀 깼다.
-ㅋㅋㅋ. 버거퀸 광고에 이어서 흥행 연타.
-고깃집 알바 경험이 있어서 그런지 현실감 지림.
구성철 실장의 얼굴에 환한 웃음꽃이 피었다.
“아 그리고 어젯밤에 윤호가 김 작가를 만났는데 유진이 분량을 늘이겠다는 언질이 있었단다.”
“오. 그래요?”
모두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예. 작가님도 유진이 덕분에 힘을 많이 받으셨답니다. 유진이가 시청률을 견인했으니 좀 더 살려보겠다고 하시더라고요.”
감독과 상의를 해야 하겠지만 작가가 선언을 한 마당이니 그대로 될 확률이 100%다.
“지금 말하기는 조금 이르긴 하다만. 이렇게만 되면 올해 유진이 상 하나 받을 것 같지 않냐?”
구성철 실장이 툭 하고 말을 던졌다.
“예. 이번 작품만 잘 나오면 신인상은 충분히 기대해 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회귀 전에는 올해 6월부터 방영되는 <복사꽃 삼형제>의 정은진이 신인상을 획득했다.
시청률 21%를 달성했던 <복사꽃 삼형제>를 이겨내려면 반드시 그 이상의 시청률을 달성해야 하는 상황.
하지만 <파란 하늘>이라면 충분히 넘어설 수 있을 거란 확신이 있었다.
이미 회귀 전 <파란 하늘>의 2화 시청률 8.9%를 넘어섰으니까.
그런데 그때였다.
벌컥.
회의실의 문이 열리더니 상기된 표정으로 성민석 팀장이 들어왔다.
“성 팀장은 무슨 일이야? 광고라도 들어 왔나?”
자리에 앉은 성민석 팀장이 물 한잔을 단숨에 마시고서야 올라온 이유를 말했다.
“광고는 아니고요. 어제 방송 때문에 섭외가 들어왔습니다. SBC 예능국뿐만 아니라 MBS랑 KBC에서도요.”
“뭐?”
“SBC의 구석 식당과 달리는 친구들 MBS에서는 진짜 용사 리턴즈 KBC는 전지적 관찰자 시점에서 출연 일정을 잡아보자는데요.”
하나같이 방송사들이 내세우는 간판 예능들이다.
“이제 고작 2화 나갔는데 너무 빠른 거 아냐?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래?”
웅성웅성.
다들 영문을 몰라 옆자리에 앉은 동료들과 의견을 나누는 소리가 들려왔다.
“요즘 눈에 띄는 신인이 없어서 예능국들이 다들 급하답니다. 이미 저희 말고도 <밤하늘의 달빛 내림> 측에도 섭외가 들어갔고요.”
순간 방송국 PD들이 어떤 그림을 그리고 있는지가 머릿속에 훤히 그려졌다.
아마 이쪽에는 주영인과 유진이를 캐스팅하고 상대편에서는 한수호와 고은영을 캐스팅해서 대립각을 세워 보겠다는 계획일 거다.
“정 대리 생각은 어때?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
모두의 시선이 내게 몰렸다.
하지만 난 웃음을 가득 머금은 채 내 생각을 늘어놓았다.
순간 다들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 * *
회의를 마치자마자 유진이를 픽업해 <파란 하늘>의 촬영 현장으로 이동했다.
유진이는 오늘 회의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들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헐~ 예능에 안 나가도 된다고요?”
“응. 올해는 웬만하면 광고하고 드라마만 출연하기로 결정 났으니까.”
유진이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뜨려면 뭐든 해야 한다고 하셨잖아요. 그래서 버거퀸 광고도 했고.”
“그랬지.”
“근데 왜요?”
“출연료가 마음에 안 들어.”
유진이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아니 도대체 출연료가 얼마길래요?”
“20만 원.”
“진짜요? 너~무 짜다.”
“그것도 타 방송국 이야기고 SBC에서는 공짜로 우정 출연해 달라고 하더라고.”
유진이도 어지간히 황당한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예능 출연료가 이 정도로 적을 줄은 상상도 못 한 표정이다.
아예 고정 패널이 되면 출연료를 높게 부를 수 있다.
하지만 드라마를 홍보해주겠다는 핑계로 예능에 출연하면 제작진들은 이처럼 말도 안 되는 수준을 제시하곤 했다.
자기들이 마치 엄청난 혜택이라도 베풀어주는 것처럼.
그래서 난 모든 제안을 거절했다.
<파란 하늘>의 시청률이라면 나중에는 그 10배를 주고서라도 출연시키려 할 테니까.
배우에게 있어서 몸값은 때론 프라이드이기도 하다.
그러니 유진이를 결코 싼 값에 넘길 생각은 없었다.
유진이가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영화 홍보용으로 출연하는 경우가 아니고는 TV에서 얼굴 보기 힘든 선배님들이 많더니. 그래서였어요?”
“빙고. 그래도 예능에 나가고 싶으면 말만 해. 나오라는 데는 많으니까.”
“아뇨. 스케줄은 오빠가 정해주는 대로 나갈게요. 어차피 내 매니저는 오빠니까요.”
뭐가 되었든 시키는 대로 하겠다고?
얘가 또 이렇게 감동을 주네.
매니저로서는 솔직히 이런 연예인만 있으면 전부 엎드려 절하고 업고 다녀도 모자랄 판이다.
“대신 너무 밤늦게 하는 건 지양해주세요. 요즘 늦게 좀 들어갔더니 미소 볼이 남산만큼 부풀고 있어요. 요로케요.”
유진이가 미소의 표정을 따라 한다.
눈을 홅기듯이 뜨면서 볼을 팽팽하게 불리고 있다.
사진을 찍어서 스타그램에 올리고 싶었지만 웃음을 참느라 애를 써야 했다.
* * *
남양주 촬영장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린 유진이가 기지개를 펴며 차가운 공기를 들이켰다.
“으아! 상쾌하다!”
시청률이 오른 탓에 현장 분위기가 어제와는 달리 후끈하게 달아올라 있었다.
게다가 유진이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진 건 물론이다.
메이크업 팀에 들러 분장을 마친 유진이의 의상과 화장을 점검했다.
여고생 교복을 입은 유진이가 한 듯 안 한 듯한 옅은 화장을 하고 씨익 웃는다.
“어때요?”
“잘 어울려. 화장 잘 먹었네.”
“그러면 저 촬영 다녀올게요.”
“수고!”
유진이는 스태프들과 인사를 나누며 촬영에 돌입했다.
대기 의자를 펼치고 세팅을 하는데 차수연 제작 PD가 얼굴에 웃음꽃을 머금고 나타났다.
“정 대리니~임.”
나근나근하게 날 부르는 차수연 제작 PD의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졌다.
“왜 왜 그런 눈빛이세요?”
“호호. 우리 유진 씨 덕분에 현장 분위기가 좋아져서 고마워서 그렇죠. 오늘 아침에 협찬 연락이 얼마나 왔는지 뽀뽀라도 해주고 싶다니까?”
“협찬 연락이 왔다고요?”
차수연 제작 PD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아시다시피 우리 현장 소품들이 대부분 20년 전 거라서 구하기 힘들었거든요. 그런데 어제 방송 나가고 나서 소품 협찬해 준다면서 여러 기업에서 연락이 와서 내 걱정거리도 확 줄었어요”
시청률도 올려 주고 기업들이 가지고 있던 물품도 기부받고 차수연 PD에게 점수도 따고.
이게 바로 일석삼조다.
“덕분에 우리 강 PD도 힘 좀 받았잖아요. 저기 좀 봐요.”
차수연 제작 PD는 손가락으로 강수훈 PD를 가리켰다.
강수훈 PD는 상기된 표정으로 카메라맨들과 촬영감독을 불러모아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카메라 3번. 유진 씨 왼쪽. 지미집 노을이 뒤 맡으시고요. 노을이 얼굴 나오게 부탁합니다. 그리고 카메라 7번은 바스트 샷으로 좀 잡아주세요 촬영 감독님. 동선 꼬이지 않게 통제 잘 해주세요.”
“오케이! 강 감독. 오늘 텐션 좋은데? 집에 좋은 일이라도 생겼나?”
“어제 시청률 보셨잖아요. 이대로 치고 올라가면 조만간 잡을 거 같지 않습니까?”
“허허허. 하긴 그것도 그렇네. 좋아. 다음 주에는 역전해보도록 나도 힘 좀 써 볼까?”
비록 오늘 촬영분은 13화 후반부라 다음 주에 나갈 3화와는 관련이 없다.
하지만 나중에 편집하기 편하도록 미리 유진이 분량을 늘이고 있었다.
주영인이 치고 나가야 하는 자리를 유진이가 채워주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차수연 PD가 주변을 살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기 우리 대표님이 유진 씨 차기작 잡혔는지 좀 알아보라고 하던데······ 혹시 결정 난 거라도 있어요?”
차기작이라니.
벌써?
블루드래곤이라면 온갖 드라마 시놉시스를 보유하고 있을 터.
순간 블루드래곤이 제작을 했던 드라마 리스트들이 머릿속에 흘러 지나갔다.
하지만 이내 머리를 털었다.
유진이가 출연할 차기작은 이미 정해져 있으니까.
“아쉽게도 잡혀 있습니다.”
“아 내가 조금 더 빨리 물었어야 했는데. 하여튼 어느 제작사인지 모르겠지만 발 한번 빠르네요.”
이 사람이 처음에 유진이가 아닌 박진희를 밀던 사람이 맞는가 싶다.
차수연 PD가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연이어 질문을 던져왔다.
“근데 몇 월에 잡혀 있어요?”
“7월이요.”
“그러면 계약은 하셨나요? 안 했으면 김은영 작가 차기작 ‘팔방미인’은 어때요? 유진 씨 정도면 차기작은 슬슬 주연 가야죠.”
차수연 PD는 시청률 21.5%를 찍는 <팔방미인>을 들고 나를 유혹해댔다.
조연이 아닌 주연으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