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3화
93. 여파 1
[<밤하늘의 달빛 내림> 시청률 조사 기관 TNK 기준 평균 13.3% 쾌조의 스타트!]
[과감한 노출! 화끈한 액션! <밤하늘의 달빛 내림>이 보여준 사극의 새로운 변신! 역대급 출발로 새로운 한류 열풍의 전조!]
[<파란 하늘> TNK 기준 5.9%로 기대 이하의 성적을 거두다.]
[드라마 전쟁의 첫 라운드는 <파란 하늘>의 완패!]
[흥행 보증수표 주영인. 이대로 주저앉나?]
기사를 확인한 주영인이 인상을 구겼다.
“고작 5.9%? 뭐야? 진짜야?”
아침 일찍부터 찾아온 강명길 팀장이 그녀를 달랬다.
“원래 아역들이 나오는 화는 시청률 안 나오는 게 상식이잖아. 넌 후반 10분밖에 안 나왔으니까 이딴 기사들에 신경 쓰지 마. 2화부터가 진짜 승부니까.”
“상대는 13%가 넘는다는데 뭐가 그리 태연해요! 더블스코어로 발리고 있잖아요! 지금!”
강명길 팀장은 심드렁하기만 했다.
이미 주영인이 에이스 엔터로 이적한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그나마 회사에 남는 마지막 그날까지 챙기라는 대표의 특별 지시 때문에 이러고 있지.
그게 아니었다면 아예 오지도 않았을 거다.
“다른 기사들도 좀 읽어 봐요. 직접 보면 짜증만 나니까.”
“짜증 나면 그냥 무시하는 게 좋을 거 같은데······”
“어서요!”
강명길 팀장이 연예 기사면 1위부터 10위 기사에 달린 기사 제목과 베스트 댓글을 읽기 시작했다.
“원작도 강추. 역시 밤하늘의 달빛 내림. 한수호 몸매 캐사기······”
상대 드라마 칭찬 댓글에 주영인이 인상을 찌푸렸다.
“누가 상대 기사만 읽으래요? 거기까지만 하고 우리 기사도 좀 읽어 봐요.”
강명길 팀장은 한숨을 내쉬고 <파란 하늘>의 기사와 댓글을 읽기 시작했다.
“자극이 부족한 파란 하늘 MSG 빠진 건강식?”
“계속.”
“주영인. 촌스러운 의상도 완벽하게 소화······”
“20년 전이니까 촌스러운 게 당연하지! 안 그래요?”
“어. 어. 그래.”
“짜증 나. 정말. 내가 왜 이 드라마를 시작했지?”
고작 한 화가 방송된 것뿐이지만 주영인의 스트레스는 극단으로 치닫기 시작했다.
이제까지 자신의 촉이 틀린 적은 없었다.
그래서 정윤호라는 운 좋은 매니저가 고른 작품이라는 것만으로 강행했었다.
하지만 이번엔 너무 촉에 의존한 게 아닌가 하는 불안함이 그녀를 흔들어대고 있었다.
‘빨리 에이스 엔터와의 계약을 마무리 지어야겠어. 자칫하면 시청률이 더 엉망이 될지도 몰라.’
처음으로 실패를 맛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자 등 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강 팀장님.”
“응?”
“오늘 스케줄. 저 혼자 갈게요.”
“혼자?”
“예. 그러니까 회사 돌아가 보셔도 좋아요.”
오자마자 돌아가라는 말에 강명길은 의아해하면서도 알겠다고 답했다.
어차피 주영인의 제멋대로인 행동에는 익숙했으니까.
“그럼 나 먼저 간다?”
“그러시라니까요?”
빽 하는 고음에 강명길 팀장은 부리나케 문을 나섰다.
그 순간 주영인은 강감찬 대표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지금 당장 에이스 엔터로 이적하겠노라 선언했다.
-알겠다. 어차피 네 편의는 봐 주기로 했으니까.
강감찬 대표도 아쉬운 목소리로 허락했다.
그리고 그날 오후.
주영인은 에이스 엔터와의 계약서에 도장을 찍었다.
* * *
촬영 현장의 분위기는 암울했다.
1화라고는 하지만 <파란 하늘>이 5.9%인데 비해 경쟁작은 그 두 배의 결과를 보여줬으니까.
SNS에서도 <밤하늘의 달빛 내림>에 관한 검색어가 압도적으로 거론되는 중이다.
[실시간 검색 순위]
1위 밤하늘의 달빛 내림
2위 밤하늘 여주 고은영
3위 밤하늘 남주 한수호
4위 밤하늘 원작 소설
······
10위 파란 하늘 주영인
기사 댓글에는 ‘밤하늘의 달빛 내림 종방까지 본방 사수’ 라던지 ‘물에 젖은 한수호의 복근’ 같은 내용이 가득했다.
현장 분위기가 도저히 호전되지 않아 결국 오늘 촬영은 9시 반에 끝나버렸다.
차를 몰고 서울로 오는 동안 유진이가 뒤늦게 기사를 확인했다.
“오빠. 이거 사기 아니에요?”
“사기지. 설마 한수호가 1화부터 웃통을 벗어 던질 거라고는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으니까.”
<밤하늘의 달빛 내림>은 월식이 있는 날 현대를 사는 남자 주인공 ‘명월’이 수백 년 전으로 돌아가 왕가의 공주 ‘은월’을 만나는 이야기다.
원작의 밀리언페이지의 파워도 무시할 수 없었지만 대표적인 연예계 얼짱인 한수호가 상의를 벗어 버렸다.
원래 드라마의 시청률은 ‘노출씬’이 등장하는 순간 폭등한다.
‘1화부터 한수호가 상반신을 다 드러내고 액션을 펼치는 데 무슨 수로 이겨?’
심지어 전투 장면은 미드 <스파르타쿠스>를 뺨치게 잘 나왔다.
‘역시 김성운 PD네.’
회귀 전에는 <밤하늘의 달빛 내림>은 서정적인 분위기였다.
하지만 김성운 PD가 메가폰을 잡은 뒤 정반대의 그림이 나왔다.
1화를 눈물 대신 액션.
그리고 인기 배우의 상의 탈의로 덕에 시청률이 급상승해 버렸다.
그 모든 건 김성운 PD가 어떻게 하면 시청률을 올릴 수 있는지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었다.
유진이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다시금 물었다.
“시청률 차이가 너무 나는데 괜찮을까요?”
좌회전 깜빡이를 넣어서 차선을 변경한 뒤 그녀의 걱정에 답했다.
“오늘 2화부터는 네가 나오는 분량이 확 늘어나니까 그때부터는 시청률이 팍팍 뛸 거야. 내가 장담한다니까? 트러스트 미~.”
유진이가 피식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아 오빠. 무슨 근거 없는 자신감이에요?”
“첫 화에는 네가 안 나왔잖아.”
유진이는 오늘 방영될 2화부터 출연한다.
그러니 어제 시청률에는 큰 책임이 없다.
“그래도 첫 화부터 격차가 확 벌어지니 힘이 조금 빠지긴 하네요.”
“주영인만 하려고? 걔는 1화 후반에 얼굴을 비췄는데도 이 모양이잖아.”
그때였다.
김솔잎 작가의 전화가 걸려왔다.
-지금 좀 와 줄 수 있어요?
난 두말하지 않고 알겠다고 답했다.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작가의 호출에는 즉각 응하는 게 불문율이니까.
* * *
4월 2일.
밤 10시.
<파란 하늘>과 <밤하늘의 달빛 내림>이 두 번째로 맞붙는 시간이 찾아왔다.
SBC 주조정실.
어제와는 달리 임원은커녕 드라마국 국장도 찾아오지 않았다.
“팀장님. 오늘은 대표님 안 오시겠죠?”
“생각을 좀 하고 살아라. 어제 그 꼴을 봤는데 오시겠냐?”
기술팀장의 잔소리에 질문했던 직원이 머리를 긁적였다.
하지만 그 순간.
문이 열리며 정삼룡 CP가 나타났다.
“어? CP님? 현장 안 나가셨습니까?”
“나까지 현장에 나가면 다들 긴장 타서 안 되지. 자자. 다들 이것 좀 마시고 힘 좀 내라. 이제 막 시작인데 왜 이리 죽을상이야?”
워낙에 동 시간대 MBS의 <밤하늘의 달빛 내림>이 쾌조의 스타트를 한 탓에 다들 기가 죽었다.
어제 이기도 국장이 대판 짜증을 부린 것도 영향을 주었고.
머리를 긁적인 주조정실 직원들은 음료수를 건네받으며 질문을 던져왔다.
“강 PD는 같이 안 오셨습니까?”
기술팀장의 질문에 정삼룡 CP가 피식 웃었다.
“당분간 조정실 근처에는 얼씬도 안 한대. 현장에서 목숨을 걸겠다더라고.”
“상대가 워낙에 강해서 그런 거니 힘 좀 내라고 전해 주십쇼. 저희야 송출밖에 안 하니까 특별히 뭐 해줄 말도 없고······”
“허허. 무슨 그런 소릴. 자네들 없으면 일이 안 돌아가는 걸 누가 몰라? 에너지 드링크 먹고 그런 쉰 소리 할 거면 물어내!”
정삼룡 CP는 자기가 사 온 드링크는 한 병에 5만 원짜리라며 실없는 농담을 해댔다.
덕분에 분위기가 조금은 풀어지고 있었다.
“자자. CP님 말씀대로 우리도 힘 내보자고!”
“예. 팀장님.”
다시 10시가 되었다.
“스탠바이. 광고 넘어가고~ 시작합니다.”
버거퀸 광고의 흥겨운 화면이 지나가고 난 뒤 드라마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5분이 지난 시점이다.
“강 대리. 분당 시청률 어떻게 되어가고 있어?”
기술팀장 박상근의 질문에 강우성이 답했다.
“파란 하늘 분당 시청률 4.2%입니다. 그리고 밤하늘은 분당 시청률 10.5%입니다.”
“어제보단 좋지만 역시 더블스코어가 나오는군.”
혹시나 하는 기대가 무너지는 순간이다.
주조정실의 내부에선 한숨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대로라면 오늘은 얼마큼 차이가 벌어질지 수군대는 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다만 정삼룡 CP만큼은 한 가지 사실을 놓치지 않았다.
“잠깐. 저쪽 분당 시청률 10.5%라고 했나?”
“예? 예. CP님.”
“미안한데 지금부터 5분마다 두 작품의 분당 시청률 좀 불러 줘.”
“예?”
귀찮긴 했지만 누구 지시라고 거절할까.
차기 국장으로 가장 유력한 사람이자 그 이상도 노린다는 임원 후보의 지시였으니까.
잠시 후 5분 뒤.
“파란 하늘 5.1% 밤하늘 10.4%입니다.”
“뭐야? 밤하늘이 왜 떨어져?”
주조정실 직원들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파란 하늘이 0.9% 올랐다는 것보다 밤하늘이 0.1% 떨어졌다는 소리가 더 귀에 들어오고 있었다.
정삼룡 CP는 뭔가 알아챘다는 듯한 표정으로 얼굴에 미소를 담았다.
“기다려 봐. 오늘 재미날 것 같으니까.”
“CP님. 혼자만 웃지 마시고 이야기 좀 해주시죠?”
기술팀장의 말에 정삼룡 CP가 고개를 저었다.
“결과 나오고 나서 이야기하자고.”
그렇게 10분이 지났을 무렵이다.
“파란 하늘 7.6%로 급등! 밤하늘 11.8%입니다. 좁혀지고 있습니다!!”
시청률이 급등하자 주조정실 직원들이 부산해졌다.
“진짜야? 잘못 본 거 아냐?”
“아닙니다. 두 번 세 번 확인했다니까요. 보세요.”
강우성 대리는 분당 시청률을 보이는 그래프를 가리켰다.
그곳엔 갑작스레 치솟은 그래프 곡선이 보였다.
“진짜······네?”
다시 한번 10분이 지난 뒤.
“파란 하늘 8.5% 밤하늘 12.1%? 뭐야. 이거······”
순간 정삼룡 CP가 환한 미소를 지었다.
“하하! 내가 뭐랬어? 지켜보자고 했지?”
파란 하늘의 상승세는 그치지 않고 상승하기 시작했다.
앞으로 남은 시간 10분.
정삼룡 CP는 3화 편성이 다음 주라는 게 아쉬울 뿐이었다.
드라마가 끝난 직후.
정삼룡 CP는 다급히 인터폰을 들었다.
“예. 대표님. 방금 시청률 집계 끝났습니다!”
최종 시청률을 전해 들은 김갑수 대표의 입에서 너털웃음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내가 갈 날을 잘못 잡았나 보군 그래. 으하하.
* * *
김솔잎 작가의 전화에 차를 돌려 그녀의 집으로 향했다.
차가 막힌 탓에 도착하니 밤 11시다.
띵동.
김솔잎 작가가 오피스텔의 문을 열고 나왔다.
머리를 올려 젓가락을 꽂고 라면 국물이 묻은 트레이닝복 차림이다.
옷차림을 보니 며칠은 두문불출한 것 같다.
“어서들 와요.”
가볍게 인사하고 안으로 향했다.
김솔잎 작가가 소파를 주섬주섬 치우기 시작했다.
“작가님. 괜찮아요.”
“여기 쿠션이 있으니까 저희 그냥 바닥에 앉겠습니다.”
출력한 원고들이 가득 쌓여 있던 소파를 치우던 김솔잎 작가가 머리를 긁적였다.
“그 그럴래요?”
김솔잎 작가는 한숨을 내쉬곤 좌식 의자에 몸을 기댔다.
“늦은 시간에 와 달라고 해서 미안해요.”
“아닙니다. 작가님.”
김솔잎 작가는 시청률 차이가 두 배 이상 벌어지다 보니 멘탈이 반쯤 나간 상태였다.
“1화 시청률을 보고 나니까 괜히 혼자 있기 싫어서요. 근데 부르고 나니 괜히 불렀다 싶네요. 아 말하다 보니 점점 더 미안하네.”
뱃심 두둑한 김솔잎 작가가 횡설수설하는 걸 보니 불안하긴 한 모양이다.
“아닙니다. 작가님. 언제라도 부르시면 달려와야죠.”
유진이가 손을 꼭 잡고 눈을 맞추자 김솔잎 작가의 입에서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설마 자기 자신이 작가 갑질을 할 줄 몰랐다면서.
“잠깐. 아 내가 미쳐. 유진 씨. 미소도 집에서 기다릴 텐데······ 아 진짜 생각해보니 내가 진짜 미친 X이네. 두 사람 내가 차비 줄 테니까 어서 가 보세요.”
내 차가 있는데 차비는 무슨.
김솔잎 작가가 자기 지갑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이랬다가 저랬다가.
작가들의 집필 불안증은 희한한 방식으로 나타난다.
그래도 이 정도면 양호한 편이다.
최소한 미안하다고는 표현하니까.
“작가님. 미소는 10시만 되면 꿈나라로 갑니다. 이미 잠들었다고 전화 받았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래요? 다행이네. 그러면 뭐라도 좀 드실래요? 근데 내 폰이 어디 있나 모르겠네.”
김솔잎 작가가 자기 폰을 찾느라 허둥지둥거렸다.
내가 시키겠다고 말하려 할 때 띠리링 소리와 함께 문이 자동으로 열렸다.
“솔잎. 뭐 해? 어라? 유진? 유노? 두 사람도 있었어?”
이지연 작가가 양손에 뭔가를 들고 나타났다.
‘구워주는 3초 삼겹살’이라 적힌 봉투에 다른 한 손에는 커다란 생맥주가 세 통이나 있었다.
“넉넉히 사 오길 잘했네.”
이지연 작가의 말에 김솔잎 작가가 퉁명스레 대꾸했다.
“무슨 일이세요? 바쁘시다면서요?”
“너 그 꼴 하고 있을까 와 봤지. 어서 이거나 받아. 나 팔 떨어지겠다.”
김솔잎 작가가 일어나기 전 내가 먼저 달려가 삼겹살과 맥주를 받았다.
“유노는 언제부터 와서 쟤 진상 보고 있었어?”
진상이라는 말에 김솔잎 작가는 그런 적 없다며 버럭 화를 냈다.
“저희도 막 왔습니다.”
신발을 다 벗은 이지연 작가가 거실로 향하며 다시 물었다.
“방금? 그러면 2화 시청률 들었어?”
“아뇨 아직 SNS 반응도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그래?”
이지연 작가가 씨익하고 웃음을 머금으며 말했다.
“파란 하늘 2화 시청률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