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2화
92. 첫 방송
“은아가 미성년자만 벗어나면 아버지도 간섭 못 해. 그러니까 그때까지만 너희들이 곁에서 잘 지켜줘.”
동시에 은아의 아버지 문제를 어떻게 대응할지 말해주자 다들 귀를 쫑긋 세우고 내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네 오빠!”
체리블라썸 멤버들이 일제히 대답했다.
그런데 여전히 은아는 기가 죽어 있었다.
아빠가 거칠게 현관문을 두들기길래 설득해 보겠다고 문을 연 게 자신이었으니까.
“죄송해요. 다 저 때문이에요.”
“아냐 은아 언니.”
“아냐. 은아야. 안 열 수가 없었잖아.”
양은비와 세리가 번갈아 달랬다.
나 역시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 말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아빠였으니까.
그러는 동안에도 우연희는 몇 번이고 내 말을 곱씹으며 내가 한 말을 기억에다 담았다.
그룹의 맏이로서 꼭 은아를 지키겠다는 굳은 표정을 하고서.
네 사람의 우애 좋은 모습을 본 탓인지 어떤 일이 생겨도 이 멤버들은 지켜주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보통 대부분의 걸그룹들은 서로가 죽고 못 사는 관계가 아니라 죽이지 못해 안달이 나 있는 게 기본이다.
멋모를 때야 사이좋게 지내지만 조금만 지나면 고된 스트레스를 서로에게 풀어대니까.
하지만 체리블라썸 4인방은 이런 난리를 겪고도 오히려 더 끈끈해진 것만 같았다.
그 모습을 보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이런 모습이야말로 회귀한 뒤로 내가 보고 싶었던 장면이었으니까 말이다.
* * *
이동민 실장부터 한명호 팀장 그리고 이주영 대리까지.
체리 블라썸을 관리하는 모두가 숙소로 모였다.
“수고했다. 윤호야. 잘 대처했어.”
사정을 들은 한명호 팀장은 자기가 현장에 있었다면 그렇게 당차게 나가지 못했을 거라며 혀를 내둘렀다.
“죄송해요. 하필이면 오늘 같은 날 제가 자리를 비워서······.”
이주영 대리가 한숨을 내쉬며 사과하자 이동민 실장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돌발 사고였으니까 잘 넘어갔으니 더 미안해하지 말자.”
“예.”
이주영 대리도 업무차 나갔다 온 거라 큰 질책을 받진 않았다.
이동민 실장이 소파에 앉은 체리블라썸을 보며 싱긋이 웃는다.
“다들 많이 놀랐지?”
“예!”
역시 세리.
모두가 괜찮다고 애써 웃으며 답하려 했지만 솔직한 세리는 놀랐다고 큰 소리로 외쳤다.
이동민 실장이 계속해 말을 이었다.
“특히 은아. 네 잘못 아니니까 고개 숙이지 말고.”
“예.”
“다들 알겠지만 우리 회사는 계약 쪽에 있어서는 다른 대형 회사보다 철두철미하단다. 법무팀에 훌륭한 분들이 많이 계시니까 너무들 걱정하지 말고.”
은아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동민 실장과는 내 계획을 공유했기에 더는 길게 이야기가 이어지진 않았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미성년자는 아무리 계약을 철저히 해도 빠져나갈 구석이 있다.
그렇기에 내가 처음부터 생각한 작전은 단 하나.
일단 유한석을 몰아내고 어떻게든 시간을 끌자는 거였다.
앞으로 한 달 정도 남은 은아의 생일을 지나자마자 재계약을 해버리면 더는 아빠가 간섭할 수 없어지니까.
하지만 여전히 내 다이어리의 일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에브리데이 V10]
[2020년 5월 11일]
-PM 01:00 소속 연예인의 가족 대응법 교육 (지하 2층 소극장).
아직 일정이 사라지지 않은 걸 보니 아무래도 유한석은 본인의 생각을 포기하지 않은 듯했다.
은아가 성인이 되기까지 한 달.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다.
* * *
<파란 하늘>의 첫 방송이 코앞으로 다가오면서 현장에서도 전에 없던 긴장감이 흐르기 시작했다.
경쟁작인 <밤하늘의 달빛 내림>은 원작 팬들과 남자 주인공인 한수호의 팬들은 하나로 뭉쳐 기사 댓글을 선점하며 분위기를 달구고 있었다.
(댓글)
-완소 최성은 작가님 드라마 데뷔 경축!
-밤하늘의 달빛 내림 남주 이름이 수호래. 내 최애 한수호가 수호 역을 맡다니. 아무래도 운명인 듯?
-파란 하늘이 경쟁작? 거긴 주연이 누구죠?
-ㅋㅋ 그쪽은 신경 끄고 우린 수호님만 수호하면 됨.
상대 드라마의 팬들이 모여 본방 사수대를 만들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대로 초반 주도권이 넘어가나 했지만 유진이의 팬 카페도 적극적인 대응을 시작하며 막상막하의 다툼이 시작되었다.
엎치락뒤치락.
두 드라마의 이름이 실시간 검색어에서 순위 고지전을 벌이자 현장 분위기도 덩달아 술렁거렸다.
다들 드라마 경험이 없는 소설가와 신인 PD의 조합이라며 깔봤었다.
하지만 상대 드라마의 예고편이 잘 뽑혀 나오고 나서는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져 버렸다.
“생각보다 잘 나왔던데? 때깔이 아주 그냥 화사한 게······”
“김성운 PD이라고 했던가? 연출자가 초짜라 편하게 가나 했더니 이거야 원······”
다들 긴장을 숨기지 못하는 상황이다.
하지만 그나마 다행인 건 최고참인 이사랑 선생님이 흔들림 없이 중심을 잡아줬다는 점이다.
“결과는 1화가 나와보면 알겠지. 긴장한다고 달라지는 거 없으니까 우리 일이나 제대로 하자고. 다들 신입처럼 왜 이래?”
경력 40년 차의 여배우의 한마디에 현장의 분위기가 조금은 차분해지고 있었다.
상대가 명 연출가 김성운 PD의 입봉작이라지만 난 김솔잎 작가의 대본과 유진이를 믿는다.
그리고 내가 알던 미래도.
“오늘도 힘내자. 유진아.”
“네 오빠.”
유진이는 주변에 흔들리지 않고 천연덕스럽게 연기에 집중하고 있었다.
역시 내 배우다.
* * *
4월 1일 오후 9시 50분.
나는 회의실에 모인 2실 식구들과 함께 <파란 하늘> 1화가 시작되기만을 기다렸다.
“언제 시작하냐?”
구성철 실장은 도저히 못 참겠다는 듯 벌떡 일어나 서성거렸다.
그러다 결국 애가 타 내 쪽으로 다가왔다.
“윤호야. 현장 분위기는 어떻든?”
회귀 전 <파란 하늘>은 시청률 7.5%로 쾌조의 스타트를 끊었다.
하지만 현재는 그때와는 상황이 달라졌다.
자멸해버린 이지연 작가의 <신의 이름으로>가 취소되고 그를 대신해 <밤하늘의 달빛 내림>이라는 강력한 경쟁작과 정면으로 맞붙었으니까.
그래도 자신은 있었다.
“현장 분위기는 좋습니다. 배우들도 다들 자신만만하고요.”
구성철 실장이 고개를 끄덕이다 되물었다.
“그런데 밤하늘의 달빛 내림 소설 원작이 엄청 유명하다던데. 혹시 읽어는 봤고?”
“예. 잘 썼습니다. 여성향 로맨스지만 남성 독자도 무난히 볼 수 있는 작품이거든요. 솔직히 말하면 굉장히 재미있던데요.”
구성철 실장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 넌 굉장히 여유만만해 보이는데?”
“에이. 그거야 우리 작가님 대본과 유진이를 믿으니까 그렇죠.”
구성철 실장이 머리를 벅벅 긁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끄응. 네 말대로만 되면 얼마나 좋을까. 일단 잘 되길 빌어보자.”
유진이가 배우 2실의 최고 기대주다 보니 다들 걱정이 태산이었다.
“시작합니다!”
순간 2실 회의실에 걸린 TV에서 <파란 하늘>의 오프닝 곡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 * *
SBC 주조정실.
기술팀과 편성팀 직원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송출에 문제없는지 다시 한번 확인해 봐.”
“예. 문제없습니다.”
“그러면 다들 스탠바이. 광고 끝나면 바로 송출한다. 전원 체크 리스트 다시 한번 확인하고!”
주조정실의 직원들은 뒤편에 앉은 드라마국 국장 이기도와 정삼룡 CP 그리고 강수훈 PD의 눈길을 느낄 새도 없이 분주한 상태였다.
이기도 국장이 곁에 앉은 정삼룡 CP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어때? 오늘 시청률 잘 나올 거 같아?”
“예. 현장에서 고생을 많이 했더군요. 퀄리티가 아주 죽여 줍니다.”
“이 사람이 말귀가 이리 어두워서야. 우리 말고. 밤하늘 말이야.”
이기도 국장이 인상을 쓰며 MBS의 동 시간대 작품을 언급했다.
“원작이 유명하긴 한데 최성은 작가가 초짜 아닙니까?”
“그쪽 예고편 본 팬들이 다들 잘 나왔다고 난리던데 감당할 수 있겠어?”
정삼룡 CP가 인상을 찌푸렸다.
이제 드라마가 시작될 텐데 왜 벌써 초를 치나 싶은 탓이다.
그때였다.
주조정실의 문이 열리며 김갑수 대표가 비서와 임원들을 이끌고 나타났다.
순간 조정실의 직원들이 벌떡 일어났다.
김갑수 대표는 이기도 국장의 말을 들은 듯 살짝 나무랐다.
“하하하 이 국장. 왜 시작하기도 전에 김을 빼? 긍정적으로 생각하라고.”
이기도 국장이 급히 고개를 숙였다.
“오셨습니까.”
“아. 됐어. 됐어. 다들 앉아. 기술팀은 나 신경 쓰지 말고 하던 일이나 계속들 하세요.”
김갑수 SBC 대표가 손을 저었다.
1분도 안 남은 드라마 송출이나 신경 쓰라면서.
“잘 될 테니까. 다들 긴장 풀고 편하게 보자고.”
주조정실의 뒤편에 의자가 빠르게 세팅되었고 말단 직원 몇몇은 눈치를 보다 불편한 자리를 떴다.
광고가 끝나는 즉시 기술팀장이 신호를 내렸다.
그 순간 <파란 하늘>의 인트로 영상이 경쾌한 음악과 나오기 시작했다.
1화에서 1980년을 추억하게 하는 영상이 나오자 김갑수 대표와 임원진들이 흐뭇한 웃음을 지었다.
“저땐 나도 참 개구쟁이였는데······”
“하하. 저도 부모님 속 많이 썩였었죠.”
“하하하. 그런가?”
주로 50대인 임원들이 저마다 자기 초등학생 시절 때의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무난하게 시작된 드라마를 보던 임원들은 연신 미소를 띠었다.
1화를 이끌어가는 아역들의 연기가 생각 이상으로 훌륭했기 때문이다.
“아역들이 대부분 신인이라길래 걱정을 했더니. 이 정도면 생각 이상인데요?”
“그러게 말입니다. 다들 앞으로 좋은 배우가 될 것 같군요.”
하지만 임원들의 흐뭇한 반응과 달리 분당 시청률 그래프를 확인하는 직원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보지 않아도 문제가 생겼다는 걸 안 순간 임원들도 천천히 입을 다물었다.
결국 이기도 국장이 힘들게 입을 열었다.
“몇 프로야?”
“저기······”
“몇 프로니까?”
이기도 국장의 채근에 편성팀 직원 강우성이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분당 1.5%로 스타트 끊었습니다. 그리고 5분 지난 시점에 지금은 2.2%입니다.”
“뭐? 1.5% 스타트? 지금 겨우 2.2%라고?”
주조정실의 분위기가 싸해졌다.
아무리 아역들로 서막을 열었다지만 <파란 하늘>에 걸었던 기대치에 비하면 너무 저조한 스타트였다.
다들 5% 스타트에 지금쯤 8% 정도는 기대하고 있었는데 말이다.
김갑수 대표의 얼굴에서도 웃음기가 싹 가셨다.
주조정실에는 적막이 감돌기 시작했다.
20분이 지났을 무렵.
“분당 3.7%까지 상승했습니다.”
조금은 나아졌지만 절대 만족스럽진 못한 수치.
이기도 국장이 눈을 질끈 감고 되물었다.
“밤하늘은 얼마야?”
주변을 살피던 기술팀 강우성 TD가 바싹 마른 입술에 침도 적시지 못하고 대답을 망설였다.
“어허! 얼마냐니까?”
“바 밤하늘은 분당 9.2%입니다.”
순간 김갑수 대표를 비롯해 임원들의 헛기침이 이어졌다.
“어흠.”
“크흠.”
잠시 후 김갑수 대표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어색한 표정으로 직원들을 안심시켰다.
“이제 뭐 시작이니까 조바심 내지들 말지. 그럼 나는 일이 있어서 좀 가봐야겠군. 그리고 정 CP.”
“예. 대표님.”
“끝나면 시청률 나한테 다이렉트로 보고 해.”
김갑수 대표가 주조정실을 나가자 이기도 국장이 펄펄 날뛰기 시작했다.
“어떻게 된 거냐고! 그렇게 돈을 퍼부었는데 왜 밀리는 거냐고! 입이 있으면 말들 해 보란 말이야!”
정삼룡 CP는 이기도 국장의 말에 반박할 수 없었다.
길길이 날뛰는 상사와의 논쟁은 성난 불에 기름을 붓는 어리석은 짓이니까.
그리고 한 시간이 지난 뒤.
<파란 하늘> 1화의 시청률 최종 시청률 집계가 나왔다.
결과를 받아든 정삼룡 CP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이건 좀······”
고작 1화지만.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결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