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1화
91. 컴 백 홈 3
서두른 보람이 있었는지 5분도 채 지나지 않아 체리블라썸의 숙소에 도착했다.
띡띡띡.
닫힌 현관문을 열자 기다렸다는 듯 거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너 정말 이럴래?”
“아빠! 저 정말 가기 싫어요!”
남색 정장을 입은 40대의 깐깐하게 생긴 표정의 남자가 은아의 손목을 붙잡고 끌어당기고 있었다.
저 사람이 바로 유은아의 아빠 유한석이다.
체리블라썸 멤버들도 유한석을 막느라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아저씨! 이러지 마세요!”
“내가 내 딸 데려간다는 데 넌 왜 방해야!”
우연희가 유한석의 왼쪽 손목을 붙잡고 늘어지고 있다.
“이거 가택 침입인 거 아시죠?”
“웃기고 있네. 내 딸내미 사는 데야!”
양은비는 유한석의 오른쪽 손목을 붙들고 따지고 있다.
마지막으로 세리는 입을 앙 벌리고 유한석의 팔뚝을 물어뜯으려고 하고 있었다.
“은아 언니 놓아줘! 안 놓아주면 물 거야!”
완전히 난장판이다.
난 신발을 벗을 틈도 없이 현장으로 뛰어들었다.
“이게 뭐 하는 짓입니까!”
유한석도 젊은 남자가 나타나자 조금은 경계하는 눈빛을 보이기 시작했다.
“넌 또 뭐야?”
“전 체리블라썸의 매니저 정윤호라고 합니다.”
사정이야 어찌 되었건 은아의 아버지다.
난 반절을 하며 명함을 내밀었다.
하지만 유한석은 날 힐끗 쳐다보며 코웃음을 쳤다.
마치 나 같은 건 안중에도 없다는 듯 명함도 받지 않고서.
‘하긴 의사나 변호사 말고는 인간으로도 안 본다고 했었지?’
그러나 난 이런 인간들이 가진 약점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회귀 전 이런 부류의 인간들과 일상적으로 어울렸으니까.
유한석이 나를 무시하고 다시 한번 은아의 팔을 끌었다.
“어서 가자니까! 이따위 돈도 안 되는 일은 이만하면 충분히 했잖니!”
“아빠! 이번은 진짜 잘 될 거예요. 제발 한 번만 기회를 주세요!”
평소에 조곤조곤하게 말하는 은아답지 않게 격렬히 감정을 토로했다.
그래 봐야 소귀에 경 읽기였지만.
“시끄러워. 그따위 성공이 뭐 대수라고. 너도 KY 로펌의 김용석 대표 알지? 아빠 친구 중에 제일 잘 나가는 집안이라고!”
“그게 저랑 무슨 상관이에요.”
“그런 집에서 들어온 혼사다!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칠 셈이냐!”
“싫어요!”
“싫어도 할 수 없어! 아빠가 늘 말했지? 한 번의 선택으로 인생의 성패가 갈린다고. 스펙을 쌓으라고 했지 이따위 딴따라 짓에 빠지라고 한 적 없다. 하여간 한심하기는!”
유한석은 간절히 애원하는 은아의 부탁을 가볍게 무시했다.
뭐 ‘딴따라’?
연예인의 위상이 얼마큼 올라갔는데 아직 저런 말을 하는 사람이 있다니.
더는 볼 수 없었다.
난 저벅저벅 걸어가 유한석의 손목을 살짝 비틀며 급소 부위를 꾹 눌렀다.
“악!”
극심한 통증을 느낀 유한석은 은아의 팔을 놓고 한 걸음 물러났다.
나는 황급히 은아와 유한석의 사이를 벌렸다.
“은아야. 괜찮아?”
“네. 하지만······.”
아빠가 꽉 움켜쥔 탓에 은아의 새하얀 팔목이 붉게 변해 있었다.
‘멍들겠네.’
은아에 팔에 남은 흔적을 보니 괜히 울컥하고 화가 치밀어 올랐다.
아무리 아빠라지만 이제 20살 된 애를 마치 매매혼이라도 시키듯 팔아치우려 들다니.
지금이 21세기 대한민국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난 심호흡을 하며 감정을 가라앉히기 위해 애를 써야 했다.
이제부턴 유한석을 상대해야 했으니까.
은아가 풀려나자 우연희가 은아를 꽉 껴안으며 감쌌다.
양은비는 은아의 눈물을 닦아주며 토닥거렸고.
그리고 막내 세리는 두 팔을 활짝 펴 절대 은아를 못 데려가게 하겠다는 듯 유한석을 노려보고 있었다.
“흐흑.”
우연희의 품에 안긴 은아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했다.
통증 때문인지 아니면 아빠가 찾아와 난동을 피운 것 때문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유한석은 욱신거리는 팔을 부여잡고 날 위협해왔다.
“너 뭐야? 깡패야? 내가 내 딸 데려가겠다는데 네가 뭔데 날 막아!”
울컥하는 마음을 억지로 눌렀다.
“아버님. 은아는 저희 굴렁쇠 엔터와 전속으로 계약을 맺은 상황입니다. 계약 조항을 보시면 알겠지만 아무리 아버님이라도 이렇게 억지로 데려가실 순 없습니다.”
“그딴 계약 해지하면 그만이야! 야! 유은아 너 이리 안 와?”
날 지나치려는 유한석의 앞을 가로막았다.
“이러시면 안 됩니다! 아버님!”
“안 되긴 뭐가 안 돼? 위약금 내면 될 거 아냐!”
유한석이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혹시 위약금이 얼만지나 알고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왜? 한 1억 되냐? 아냐? 2억? 그래 봤자······”
난 그의 눈을 똑바로 노려보며 답했다.
“오늘 자로 41억 3730만 원입니다.”
유한석이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눈을 부릅떴다.
“뭐라고? 너 이 새X. 그걸 말이라고······”
“체리블라썸을 연습시키고 오늘까지 활동하는 데 회사에서 사용한 돈은 오늘 자로 대략 13억 7900만 원입니다. 그리고 일방적인 위약을 요구할 시 배상은 통상적으로 3배고요. 그리니 정확히 말한 게 맞습니다.”
내 사무적인 어투에 유한석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유한석 같은 사람이 무서워하는 두 가지는 자신보다 더 높은 지위의 사람이 가진 권력과 그리고 돈뿐.
난 그 중 한 가지를 이용해 그를 상대하기 시작했다.
‘인생은 실전이야. 아저씨.’
유한석은 이내 믿지 못하겠다는 듯 고함을 질렀지만 그 기세는 한풀 꺾여있었다.
“어 어린놈의 새X가 어디서 사기를 쳐?”
“그러니까 계약서를 들고 가셔서 변호사에게 문의해 보시면 되겠네요. 위약금 조항에 대해서는 아주 구체적으로 작성해 놓았으니 헷갈릴 일도 없을 겁니다.”
유한석의 동공에 지진이 일어났다.
당장 확인할 방법도 없지만 나한테 밀리기는 싫은 듯했다.
난 쉴 틈을 주지 않고 그를 몰아세웠다.
승기를 잡았을 때 몰아쳐야 오늘을 넘길 수 있을 테니까.
“KY 로펌의 대표이신 김용석 대표님이 친구분이라고 하셨죠? 그분에게 자문받으시면 되겠네요. 아니면 그냥 제가 연락을 드릴까요? 댁의 예비 며느리를 데려가시려면 위약금은 주고 가시라고.”
유한석 같은 부류의 사람들이야말로 자기보다 높은 사람에게는 한없이 약한 법.
그 상대가 친구이자 미래의 사돈이라 하더라도.
그리고 그런 내 생각은 그대로 맞아떨어졌다.
“너 너! 거 거기 전화하기만 해봐! 내가 가만 안 둬!”
유한석의 목소리가 덜덜 떨리고 있었다.
만약에 이 난리를 피운 게 알려지면 혼사가 파탄 날까 두렵겠지.
방구석 여포라고 하지 않던가.
자기 가족에게는 이따위 형편없는 짓을 하지만 남에게는 체면을 내세우려는 것도 이런 부류들의 특징이니까.
아무튼 이쯤 되면 게임 끝이다.
난 유한석을 바라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저희도 계약이 깨지지만 않는다면 굳이 소문낼 생각은 없습니다. 하지만 경고하는데······”
난 말을 끊으며 한 걸음 다가갔다.
유한석이 반사적으로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났다.
“또 이렇게 밤늦게 찾아오시면. 이번에 있었던 가택 침입 건까지 포함해 기물 파손 폭력 등으로 고소하겠습니다.”
“뭐 가택 침입? 기물 파손? 어디서 그딴 개소리야!”
“의사 선생님이라고 하시더니 법은 잘 모르시는가 보군요.”
난 유한석을 보며 고소할 거리를 언급하기 시작했다.
-이곳은 은아뿐 아니라 다른 세 사람이 거주하는 공용 공간이다.
-회사에서 임대한 공간에 함부로 들어왔고 폭력을 사용했고 밤늦게 들어와 공포감을 조성했다.
-그리고 체리블라썸이 목숨보다(?) 소중히 아끼는 벚꽃 나무 화분을 파손했고.
-그러니 정신적 피해는 말도 못 할 지경이다.
그렇게 쉬지 않고 몰아붙였더니 유한석의 넋이 나가버렸다.
법이란 게 그렇다.
엄격하게 따지면 얼마나 많은 게 걸려드는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니까.
거기다 체리블라썸의 숙소 밖과 현관 쪽에는 CCTV가 달려 있다.
그러니 유한석이 거실에서 벌인 짓은 모두 녹화되어 있을 거고.
“그러니 이 이후로는 제게 연락 주십시오.”
유한석이 내 명함을 낚아채었다.
“빌어먹을. 고작 말단 매니저 따위가······”
말단 매니저라.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난 내 직업에 전혀 부끄러움이 없다.
누군가를 빛나게 할 수도 있고 이렇게 지켜줄 수 있으니까.
오히려 자랑스러웠다.
결국 유한석은 은아에게 집으로 당장 안 들어오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협박을 내뱉고는 씩씩대며 나가버렸다.
30초 안에 나가지 않으면 경찰을 불러 주겠다고 말한 덕분이다
* * *
이렇게 한바탕 폭풍우가 물러갔다.
우연희와 양은비가 서둘러 흐트러진 거실을 치웠다.
그러는 동안 난 은아의 팔에 난 상처를 확인했다.
아빠에게 잡힌 부위를 빼고는 특별히 아픈 곳은 없어 보였다.
은아는 내가 자신을 붙잡고 있는데도 거부감 없이 멍하니 쳐다만 보고 있다.
“아 미안.”
“······”
손을 뗐는데도 은아는 내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었다.
“아무래도 멍이 들지도 모르니 얼음찜질이라도 해야겠다. 그리고 한 팀장님이 오시면 함께 병원으로 가 보자.”
“네······”
은아가 날 빤히 쳐다보며 고개를 끄덕인다.
“잠깐만. 아이스팩 가지고 올게.”
나는 냉장고로 가 임시로 아이스팩을 만들기 시작했다.
비닐봉지에 얼음을 담고 손수건을 감싼 뒤 은아가 팔을 잡힌 부위에 둘렀다.
은아가 눈을 질끈 감는다.
“많이 아프니?”
“조금······요. 근데 괜찮아요.”
“자세한 건 봐야겠지만 뼈가 부러지거나 한 건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
은아가 얼굴을 붉게 물들였고 때마침 청소를 마치고 돌아온 세리는 연신 감탄사를 터트렸다.
“유노 오빠! 짱! 짱! 손으로 꽉! 하니까 아저씨가 악! 악! 하고. 막막 뭐라고 하니까 아저씨가 주춤주춤 도망가고!”
세리야 흥분을 가라앉히렴.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못 알아먹겠다.
하지만 우연희도 양은비도 세리의 말을 알아들었는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가족처럼 지내다 보니 텔레파시라도 통하는 걸까.
“우리 회사가 계약 위반이라도 하면 모를까 네 아버지가 강제적으로 널 데려갈 수는 없을 테니까 은아는 너무 걱정하지 말고.”
“네······”
“이건 네 매니저로서 약속할 수 있어. 설령 대표님이 보낸다고 해도 내가 막는다. 오케이?”
연예인의 가족은 매니저들이 가장 어려워하는 부류다.
재계약 시즌이 되면 가족들의 갑질에 시달리는 건 일상다반사.
명절이 되면 선물을 보내고 굽신거리는 일 정도는 관습처럼 되어 있을 정도다.
군대에서 장군뿐만이 아니라 장군의 아내와 아들 딸이 귀족 대접을 받는 것과 비슷한 경우랄까?
하지만 난 그럴 생각이 없었다.
아니 애당초 가족에게까지 특별 대우를 해주길 바라는 연예인이라면 이쪽에서 사양이라고.
그때였다.
은아의 커다란 눈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몽글몽글 방울진 눈물이 은아의 새하얀 볼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흐흐흑.”
은아가 눈물을 터트린 순간 숙소는 천천히 눈물바다로 변해버렸다.
“은아야. 괜찮아. 우리가 있잖아. 흑.”
우연희가 은아를 달래며 울기 시작한다.
“흑흑. 왜 울어? 흑흑. 울 이유가 없잖아.”
양은비는 울 이유가 없다며 울고.
“우아아앙!”
세리는 그냥 목 놓아 운다.
애들을 달래려고 했지만 누구부터 달래야 할지 모르겠다.
내 보고를 받은 이동민 실장은 회사에서 한명호 팀장은 김포에서 이주영 대리는 일산에서 각각 달려오는 중이지만 지금 이 자리에는 나 혼자뿐이니까.
한참을 울다 간신히 눈물을 그친 은아가 날 향해 고개를 숙였다.
“오빠······ 감사합니다.”
“고맙긴. 매니저로서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인데.”
다들 진정이 된 건지 눈물을 그치고 각자 자기 할 일을 하기 시작했다.
우연희가 부엌으로 가 타온 따뜻한 우유를 건네왔다.
“난 매니저 오빠가 말빨로 은아 아빠를 물리칠 줄은 꿈에도 생각도 못 했거든요. 완전 변호사 같았음.”
뭐야 그건.
세리도 연신 쌍 엄지를 치켜 올렸다.
“짱짱! 멋있었어요 우리 유노 오빠. 짱!”
솔직히 조금은 부끄러웠다.
네 사람의 이런 직설적인 표현이 부담스럽기도 하고.
“다들 잠시 주목.”
난 헛기침을 하고선 앞으로 생길 일을 말해주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