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0화
90. 컴 백 홈 2
‘유은아 납치 사건’.
이맘때쯤 은아의 아버지가 숙소로 밀고 들어와 딸을 데리고 가버린 황당한 사건을 우린 그렇게 불렀다.
은아는 회사의 소송 거론과 엄마와 언니의 도움 덕에 2주일이 지나서야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나 이미 깨져버린 멘탈은 회복될 수가 없었다.
남은 체리블라썸 세 명은 제대로 된 연습을 못 했고 결국 3집 앨범은 처참히 박살이 나버렸다.
그 이후.
체리블라썸은 자연스레 해체 단계를 밟게 되었고.
그때의 일 때문에 은아는 한동안 방황하다 아버지와 절연까지 했었다.
물론 그러다 연기자 생활을 준비해 대박을 터트리지만 결과론적으로 은아의 배우 데뷔를 가능하게 한 일이지만 이번에는 결코 그 일을 겪게 할 생각이 없었다.
은아가 힘들어하는 걸 보고 싶지 않았으니까.
어쨌건 그때의 일 때문에 굴렁쇠 엔터에서는 매년 회사 자체 세미나를 열어 가족 때문에 발생하는 돌발 상황 대응법을 교육했었다.
그날의 기록이.
여전히 지워지지 않고 있었다.
[에브리데이 V10]
[2020년 5월 11일]
-PM 01:00 소속 연예인의 가족 대응법 교육 (지하 2층 소극장).
이 일정이 남아 있다면 이유는 단 하나.
이번에도 유은아의 아버지 유한석이 찾아온다는 거였다.
난 은아에게 경고하기 위해 체리블라썸의 숙소로 향했다.
* * *
체리블라썸의 숙소에 도착해 현관문을 열자 TV 소리와 함께 신음이 들려왔다.
“끄으으······응.”
깜짝 놀라 중간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갔다.
하지만 이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들 뭐해?”
체리블라썸의 네 명이 소파와 바닥에 각양각색의 모습으로 늘어져 내는 소리였다.
흰색 붉은색 파란색 노란색 파워터프걸 파자마를 입고서.
스프레이식 파스를 얼마나 뿌려댔는지 냄새가 진동하고 있었다.
소파 턱에 머리를 대고 있던 우연희가 몸을 바로 했다.
“정 대리님. 어서 오세요. 근데 죄송해요. 저 손이 안 올라가요~.”
양은비는 바닥에 앉아 소파에 등을 기대고 있다.
“오셨어요?”
은아는 낑낑대며 수줍게 손을 올렸고.
“안녕하세요.”
마지막으로 바닥에 축 늘어져 있던 세리는 날 발견하고 지렁이처럼 꿈틀대며 다가오며 외쳤다.
“세하~.”
신발을 벗으며 세리를 향해 말했다.
“팔도 못 들면서 다가오지 마. 징그러워.”
멈칫!
세리가 온몸을 꼬물거리며 기어오다 그대로 멈춰 버렸다.
“세리가 징그럽다니. 나 완전 충격······”
세리가 고개를 털썩 숙인다.
괜스레 미안해져 하이파이브를 해 줄까 싶었다.
그런데.
갑자기 세리가 옆구르기를 시작했다.
뱅그르르르.
눈 깜짝할 사이 세리가 현관 입구까지 굴러왔다.
그리고 부들부들 떨며 힘겹게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세하~.”
무슨 인사 못 해 죽은 귀신이 달라붙었나?
“그 그래. 세하다.”
찰싹.
“헤헤.”
그제야 세리가 환한 얼굴을 짓더니 오른손을 내렸다.
이내 몰려오는 근육통에 몸을 부르르 떨면서.
“으아아아. 내 팔 팔······”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온다.
바닥에 쭉 늘어져 있는 세리를 돌아 소파로 향했다.
“박선녀 선생님이 훈련을 얼마큼 시키길래 다들 근육통이야?”
우연희가 끙끙대며 대답했다.
“아뇨. 저희가 따로 연습했어요. 쁘띠모가 같은 날 컴백한다고 해서요.”
아 그거였군.
“설마 다들 겁먹은 건 아니지?”
세리가 다시금 옆 구르기를 하더니 소파 곁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바닥에 누운 채 고개를 젓는다.
“아니······에요. 절대로!”
그리고 담이 걸렸는지 세리가 징징거렸다.
“으으으. 은비 언니. 내 목. 내 목 좀 바로 해 줘.”
“하여간 얘는 손이 왜 일케 많이 가는지. 그냥 일어나 앉아.”
세리는 도저히 혼자선 못 일어나겠다며 쭝얼거렸다.
양은비가 세리를 껴안아 일으키더니 소파에 기대 앉혔다.
“됐지?”
“으응! 생큐.”
그런데 체리블라썸이 갑작스레 눈빛으로 뭔가 대화를 나눈다.
무슨 꿍꿍이냐고 물으려고 하는 순간.
체리블라썸은 얼굴에 환한 미소를 담고 외쳤다.
“정윤호 매니저님의 복귀를 환영합니다! 와~!!”
피식하고 웃음이 나왔다.
그 말을 하려고 방금 그런 거야?
“고맙다.”
피식하고 웃음이 함께 나온다.
우연희가 소파 옆 탁자에서 뭔가를 꺼내 들었다.
“뭔데 이건?”
“아 저희가 용돈 모아서 산 거예요. 복귀 기념 선물이요.”
체리블라썸은 여전히 매달 적자라 아직 정산을 받지는 못했다.
그래도 강감찬 대표의 정책에 의해 한 달에 30만 원씩 별도로 용돈을 받는다.
그 돈을 모아 샀단다.
우연희가 살짝 부끄러운 듯 케이스를 조심스레 건네왔다.
민트색 케이스에 분홍 리본이 달려 있다.
“이게 뭐야?”
“열어 보세요!”
세리가 나보다 더 들뜬 표정이다.
리본을 풀고 확인해 보니 커프스버튼에 벚꽃 모양이 새겨져 있다.
검은 바탕에 은빛 벚꽃.
세련되어 보이는 원형 커프스버튼을 든 나는 들뜬 표정의 체리블라썸 네 사람을 쳐다봤다.
우연희가 대표로 말했다.
“저희 늘 챙겨주시는데 저흰 해드린 게 없는 거 같아서요.”
얘들이 또 살짝 감동을 주려 하네.
“해 준 게 왜 없어. 지금처럼 열심히 하는 것만 봐도 가슴이 뿌듯한데.”
다들 부끄러워하는 표정이다.
“근데 이거 비싸지 않든?”
“괜찮아요. 그렇게까지는 안 비쌌어요.”
아르마니 제품인데 안 비쌀 리가.
하지만 꼭 받아줬으면 좋겠다는 표정이라 거절할 수가 없다.
양은비가 돈 이야기가 나오지 않게 재촉해 왔다.
“정 대리님. 어서 착용해 보세요!”
난 커프스버튼을 받아들고 와이셔츠에 달기 위해 방향을 바꿨다.
그러자 벚꽃무늬의 색상이 변한다.
옅은 분홍색으로.
“어?”
그러자 세리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말했다.
“이쁘죠? 이쁘죠?”
“그래. 이쁘네. 마음에 꼭 든다.”
세리의 얼굴이 환하게 빛난다.
“그거 은아 언니가 골랐어요!”
은아는 얼굴이 빨갛게 물들었고.
“그 그게······ 저······.”
커프스버튼까지 달자 손목에 약간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기분 좋네.’
난 이참에 체리블라썸에게 한 가지를 부탁했다.
“그리고 말인데 우리끼리 있을 땐 그냥 편하게 오빠라고 하면 안 될까? 정 대리라고 하니까 괜히 거리감 느껴져.”
우연희와 양은비가 서로를 쳐다본다.
그러자 세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내 곁에서 말한다.
“그래. 언니들은 유노 오빠한테 너무 거리를 벌리는 것 같았어. 매정하게!”
세리가 내 대변인이다.
그런데 세리야.
넌 너무 들러붙어서 탈이야.
아주 거리감 0의 강아지 같아.
우연희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연이어 양은비가 대꾸했다.
“하긴 나도 그랬어요. 난 그동안 내가 홍길동이라도 된 줄 알았다니까요.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고.”
세리가 고개를 갸웃한다.
“언니가 왜 홍길동이야? 유노 오빠가 혹시 신통력 써?”
아냐.
세리야.
그런 말이 아냐.
양은비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하지만 세리는 혼자서 고개를 끄덕이며 스스로 대답했다.
“하긴 유노 오빠가 신기가 있다고 매니저 언니들이 그러던데.”
혼자서 납득 하지 마!
엉망진창이 된 대화를 간신히 정리한 뒤 체리블라썸 멤버들의 현재 신곡 준비 상황을 들을 수가 있었다.
뮤직비디오 촬영 땐 어떤 일이 있었는지 그리고 안무는 어떤지.
작곡가 방선우와 작사가 장예빈이 티격태격하며 다음 곡을 만드는데 전력을 다하고 있다는 이야기.
박선녀 안무가가 세리를 칭찬한다는 믿기지 않는 이야기를 말이다.
네 사람이 웃으며 조잘대는 이야기를 듣다 보니 두 시간이 후딱 지나가 버렸다.
“그런데 세리는 이번 곡으로 처음 센터에 서는 거지? 부담이 심하진 않고?”
세리가 자기 목을 잡고 천천히 끄덕였다.
“전혀요. 어제는 박쌤이 나보고 수제자라 불렀다니까요?”
양은비는 그 모습을 보며 어이가 없는지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거야 너 기죽을까 하는 말씀이시겠지. 사실요. 세리가 출 수 있게 춤을 고친다고 박쌤이 안무를 몇 번이나 바꾼 건지 기억도 안 나요.”
양은비의 폭로에 세리가 투덜거린다.
“아니거든~?”
“맞거든~?”
또 싸우겠네.
“스톱 스톱. 그건 그렇다 치고 세리는 하여간 잘할 수 있다는 거지?”
끄덕.
세리가 잘 출 수 있다면 그것만 해도 다행이다.
이젠 내가 온 이유를 말할 시간이다.
조만간 은아의 아버지가 이 숙소에 쳐들어올 테니까.
어떻게 말을 꺼낼까 싶었는데 다행히 고민할 필요 없이 우연희가 먼저 물어봐 준다.
“그런데 오늘 무슨 일이세요?”
“아 은아랑 할 이야기가 있어서.”
세리가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날 뚫어지게 바라봤지만 이건 세리가 알 필요는 없는 이야기다.
“은아야. 둘이서만 이야기할 수 없을까?”
은아가 주변을 둘러보곤 고개를 저었다.
“다 같이 들으면 안 될까요?”
“회사 이야기 아니니까 겁먹지 마. 그리고 너희 집안 이야기라서 단둘이 하려는 거야.”
은아가 주변을 둘러보고 단호한 표정으로 답했다.
“괜찮아요. 우리 멤버들한테는 뭐든 다 들려줄 수 있으니까요.”
은아의 말에 나머지 셋이 감동했다.
“우왕~ 언니. 나 감동!”
세리가 은아에게 푹 안겼다.
내 기억에 은아는 나머지 세 사람과 친하긴 해도 약간의 거리를 뒀었다.
그런데 더는 아니다.
세리가 사 온 파워터프걸 파자마를 입고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알겠어. 딴 건 아니고. 너희 아버지. 요즘에는 별말씀 안 하시니?”
은아의 표정이 급속도로 어두워졌다.
나머지 세 사람이 긴장하기 시작했다.
설마 아버지라는 말 한마디가 이 정도로 무거울 줄은 생각지도 못한 표정이다.
은아가 다시 입을 열 때까지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다.
그리고 30초 정도가 지났을 때.
은아가 낮은 목소리로 현재 상황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아직 생일도 안 지났으니까 19살 만으로 하면 18세인 은아에게 선을 보라고 한단다.
아직은 법적으로 미성년자인데도 말이다.
“뭐? 선을 보라고 하신다고?”
“네.”
은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지간해선 놀라지 않은 양은비도 당황한 표정이다.
“와. 대박이다 너희 아빠!”
우연희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이고 세리는 은아를 대신해 화를 내고 있었다.
당황한 티를 억누르며 물었다.
“아버지가 정형외과 의사 선생님이라 했었지?”
“네. 상대편 남자는 아빠 친구인 로펌 대표 장남이고요.”
은아의 아버지는 10층짜리 빌딩을 소유한 강남 엘본 정형외과의 원장이다.
그런데 아빠 친구가 맏아들이 이번에 미국으로 유학을 가게 되었단다.
홀로 미국으로 가면 분명히 사고를 친다며 집안 어르신의 명으로 결혼을 하고 가라고 했다나?
그리고 남자 쪽은 28살이라고 한다.
‘도둑놈이네 그놈.’
심지어 지금의 나보다 한 살이나 더 많다.
회귀 전 왜 은아가 아버지랑 절연한 건지 이제야 완벽히 이해할 수 있었다.
“아이돌을 허락하신 것도 실은 스펙 쌓으라고 하신 거예요. 난 머리가 나빠서 좋은 대학을 가지는 못할 테니까 방송에서 얼굴이나 알리라고요.”
아이돌에 대한 인식이 좋아졌으니 머리 나쁜 넌 스펙에 한 줄이라도 적을 거리가 있어야 했다면서.
“우린 그런 것도 모르고. 미안해.”
우연희가 은아의 손을 붙잡고 미안해했다.
오랫동안 같이 살았으면서도 그런 힘든 일이 있었는지 몰랐다는 표정이다.
“아냐. 언니. 나도 이번 앨범 안 되면 시키는 대로 시집이나 갈까 생각도 했었는데 뭐.”
은아가 부끄러워했다.
아빠가 시키는 대로 시집이나 가는 것도 괜찮겠다고 생각한 것은 사실이라며.
얼마나 시달렸으면 그런 생각을 했을지.
입맛이 참 쓰다.
“은아야.”
“네?”
“그러면 아버지 전화는 전혀 안 받는 거야?”
“예. 전화 받으면 또 무슨 말을 할지 몰라서요. 그냥 성공해서······ 성공해서······ 독립할 거예요. 아빠한테서.”
은아가 두 손을 꽉 쥐고 답했다.
‘걱정하지 마. 내가 도와줄게.’
그러게 속으로 답한 뒤 불안해하는 은아에게 말했다.
“은아야. 나중에 아버지 전화 오면 나 좀 바꿔 줄래?”
은아가 불안한 표정으로 꼼지락거린다.
“아빠 전화를요?”
“어. 내가 이야기를 잘해볼게.”
내가 생각한 방법을 사용하려면 일단은 유은아의 아버지가 찾아오는 걸 최대한 늦춰야 했다.
은아가 잠깐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운명은 바꾸기가 참으로 힘들었다.
* * *
새벽부터 이어진 촬영에 녹초가 된 유진이를 집에다 데려다준 후 회사로 차를 돌렸다.
체리블라썸의 뮤직비디오 편집본이 나왔다는 연락을 받은 탓이었다.
그런데 압구정에 막 들어온 순간 세리의 전화가 걸려왔다.
-유노 오빠! 오빠! 은아 언니! 아빠 왔어요!
당황한 세리의 목소리가 울렸다.
유한석이 생각보다 이르게 숙소로 찾아와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