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7화
87. 트로이의 목마 3
잠시 촬영 현장을 벗어난 인근 주차장.
뒷좌석에 앉은 주영인은 악다구니를 쓰며 날 노려보고 있었다.
나 때문에 이렇게 힘들다면서 말이다.
“내 곁에 있으라고요! 내가 돈 더 챙겨 줄 테니까 딴 애들 말고 나만 챙겨달라고요!”
목에 핏대를 세우며 말하는 주영인의 말이 조금은 낯설다.
주영인의 투정이 한두 번이 아니지만 오늘은 좀 세다.
“안 한다고 몇 번이나 말씀드렸을 텐데요?”
주영인이 날 노려본다.
“그래요? 그럼 나 재계약 안 할 거예요.”
또 협박인가?
하지만 이 정도면 나도 할 만큼 했다.
회사가 시키는 대로 했고 그녀의 온갖 부탁도 들어줬다.
그러니 더는 그녀의 말을 들을 생각이 없다.
“그럼 재계약하지 마세요.”
“뭐라고요?”
“하지 마시라고요.”
“그 그게 무슨······”
“내 말 이해 못 해요? 난 그쪽 개인 매니저 안 한다고요. 돈을 트럭으로 줘도 당신하고는 안 해!”
주영인의 시선을 마주한 채 똑똑히 말했다.
1억도 싫고 1인 회사를 설립해 줘도 싫다고.
주영인이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도 궁금증이 가득한 표정이다.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그게 내가 회귀 전 터득한 단 하나의 교훈이니까.
주영인의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부릅뜬 그녀의 눈에선 굵은 눈물이 투두둑 떨어져 내렸다.
연기인가 의심했지만 이번은 진심인 듯했다.
날 노려보는 주영인을 가만히 쳐다보다 천천히 몸을 돌렸다.
“30분 뒤에 현장으로 돌아갈 거니까 눈이나 한숨 붙이세요.”
머리가 복잡해진 난 팔짱을 끼곤 눈을 감아 버렸다.
뒷좌석에선 조용히 눈물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 * *
[3월 17일]
출근했지만 부서 이동 발령 공지가 나지 않고 있었다.
[3월 18일]
강감찬 대표와 강지영 본부장이 외근 중이라 만날 수가 없었다.
[3월 19일]
여전히 아무런 연락이 없다.
한 달간의 약속 기간이 끝났는데도 인사 발령이 없다니.
‘왜지?’
난 곧장 구성철 실장을 찾아갔다.
그런데 뜬금없는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강감찬 대표가 아직 결재하지 않은 상태라 부서 이동이 곤란한 상황이라니.
“실장님! 한 달만 지나면 돌아올 수 있도록 해주신다고 약속하셨잖아요!”
“여기서 이야기할 게 아니라 딴 데서 이야기하자. 따라와.”
배우 2실 직원들이 하나둘 사무실로 들어오고 있었기에 구성철 실장의 뒤를 따라 옥상으로 향했다.
푸른 우레탄 바닥이 보이는 옥상 한 귀퉁이까지 움직였다.
구성철 실장이 한숨을 쉬며 말한다.
“윤호야. 한 달만 더 배우 3실에 있으면 안 되겠냐?”
“예? 설마 대표님이 그러라고 하세요?”
“하여튼 눈치하고는. 그래. 네가 간 뒤로 김동수 쪽 애들이 현장에서 사고 치는 게 반으로 줄었잖냐.”
하지만 이제는 하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었다.
이미 김동수가 극도로 날 경계하기 시작했으니까.
“말씀하시는 게 뭔지는 알겠는데. 앞으로는 지금처럼 하긴 힘들 겁니다. 저 지금 거의 대기 발령 상태나 다름없거든요.”
“대기 발령?”
“예. 그냥 자리만 지키고 앉아 있다니까요? 김 실장님이 더는 설치지 말라던데요. 이 이사님한테도 한 소리 들었고요.”
“끄응······. 그렇냐?”
자리 한쪽을 차지한 채 망부석처럼 멍하니 있다는 말에 구성철 실장이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일단 임원 회의가 끝나면 본부장님부터 만나보자.”
미세먼지가 없어 오래간만에 맑은 하늘이 보인다.
한숨을 내쉰 구성철 실장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본다.
“공기가 참 맑네. 이럴 줄 알았으면 캔커피라도 하나 뽑아왔어야 했는데······”
“제가 가서 뽑아올까요?”
“아서라. 이제 와서 무슨······.”
구성철 실장이 피식 웃는다.
다음엔 올라오기 전에 뽑아오자며.
“그런데 영인이 재계약은 어떻게 되어 간다던?”
구성철 실장의 질문에 현재 김동수가 얼마나 주영인 때문에 곤란한지를 말했다.
순간 구성철 실장이 너털웃음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 * *
배우 3실의 회의실.
김동수가 내민 커피를 한 모금 마신 주영인이 인상을 찌푸렸다.
“늘 마시던 커피 없어요?”
“없어.”
주영인의 이마가 찌푸려졌다.
커피를 내려놓은 주영인이 김동수를 보며 말했다.
“실장님. 나 요즘 실장님한테 실망 많이 한 건 아시죠?”
정윤호를 다시 배우 2실로 돌려보내겠다고 이야기한 뒤부터 이렇게 삐딱선을 타고 있었다.
김동수는 골이 지끈거렸다.
재계약 기간은 5년에서 3년으로 줄여주겠다는 것은 물론이고 수익 배분을 최대한 유리하게 해주겠다는 제의도 먹히지 않았다.
심지어 업계 최고의 조건을 들이밀었다.
현재 이번에 영입한 S급 여배우 여은실보다도 더 좋은 조건을.
하지만 주영인은 다른 조건은 필요 없으니 지금처럼 정윤호만 계속 붙여 달라고 하고 있었다.
대화는 수레바퀴처럼 헛돌기만 했다.
그러다 불현듯.
김동수의 가슴속에 뭔가가 치솟아 올랐다.
시기.
질투.
분노.
사실 남자로서도 그녀에게 관심이 있었기에 주영인의 입에서 정윤호의 이름이 나오는 것도 진저리쳐지게 싫었다.
“이제 그만 좀 해! 안 된다고 했지! 사람이 말을 했으면 좀 듣는 척이라도 하라고!”
잠시의 정적이 흘렀고 주영인은 꼬고 있던 다리를 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았어요.”
김동수는 갑자기 변한 주영인의 태도에 혹시나 하고 물었다.
“도장 찍을 거지? 조건은 내가 말한 대로 업계 최고로······”
주영인이 김동수의 말을 끊었다.
“나 에이스 엔터 이찬동 실장님 만나러 갈 거니까 그렇게 아세요.”
“뭐 뭐?”
“이찬동 실장님이 그랬거든. 내가 에이스 엔터에 오기만 하면 원하는 매니저는 누구든지 붙여준다고. 거기 가서 정 대리 스카우트해 달라고 부탁하려고요.”
얼마나 당황했는지 김동수의 말문이 막혔다.
에이스 엔터라면 부동의 업계 1위다.
특히 이찬동은 그 에이스 엔터의 실세고.
그가 가진 자금력과 역량이라면 정윤호를 영입하는 것도 문제가 아닐 거라 생각했다.
김동수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주영인을 놓치는 것도 싫거니와 그녀를 내정했던 광고주들에게서 받던 짭짤한 리베이트도 모두 날아갈 판이니까.
“여 영인아. 자 잠깐만! 없던 일로 할게! 정 대리. 네 곁에 계속 붙여준다니까!”
김동수의 말에 주영인의 발걸음이 멈췄다.
“약속할 수 있어요?”
짧은 한마디였지만 그것이 말하는 바는 명확했다.
마지막 기회를 준다는 것.
“아 알았어. 내가 그놈 다리 몽둥이를 분질러서라도 네 곁에 붙여두마.”
김동수는 정윤호를 배우 2실로 보내려는 계획을 조금만 미루기로 생각했다.
‘일단 재계약만 하자. 재계약만. 5년짜리 계약을 해놓고 나면 지가 어쩔 거야?’
분노를 삭이던 김동수는 억지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그 순간 머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아니지. 그냥 재계약만 하면 트집을 잡아서 정윤호를 회사에서 쫓아내면 되잖아?’
김동수는 그게 좋겠다며 웃음을 지었다.
주영인은 그런 김동수의 속내도 모르고 피식하고 웃음을 흘렸다.
“왜 가만히 있는 사람 다리를 분질러요? 얌전히 온전하게 내 옆에 데려다 놓기만 하세요.”
김동수는 마냥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주영인이 나가고 김동수는 임원 회의를 벌이는 회의실로 향했다.
주영인이 업계 1위인 에이스 엔터와 접촉한다는 건 알려야 했으니까.
* * *
굴렁쇠 엔터테인먼트 지하주차장.
정유진은 배우 2실의 매니저 이영진과 함께 회사에 출근했다.
한 달의 시간이 지나 정윤호가 자신의 매니저로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 아무런 소식이 없기에 상황을 알아보러 온 것이다.
집에선 미소가 아줌마와 함께 웰컴 케이크도 준비하고 있는데.
‘회사는 왜 아직 발령을 안 내주는 거야!’
정유진은 불만 가득한 심경을 감추고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그때였다.
주영인이 지하주차장에 나타났다.
억지를 부려 자신의 매니저를 강탈해 간 인간이지만 선배였기에 억지로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선배.”
“넌 오늘 일정도 없을 텐데? 회사엔 뭐 하러 왔어?”
정유진은 최대한 인내심을 발휘하며 답했다.
“윤호 오빠 인사 발령 때문에 왔어요.”
정유진의 말에 주영인이 콧방귀를 끼었다.
“니가 뭔데 내 매니저 인사 발령 문제를 들먹여?”
정유진이 미간을 찌푸리며 답했다.
“방금 내 매니저라고 하셨나요?”
“그래. 내 매니저. 왜? 그 말이 거슬려?”
정유진은 몸을 살짝 떨다 조곤조곤 말을 이었다.
“윤호 오빠가 왜 그쪽 매니저죠? 임시로 파견 간 건데!”
“임시? 그거야 네 생각이고.”
30cm도 되지 않은 거리까지 좁혀진 두 사람의 눈에서 스파크가 파바박 튀었다.
혹여 충돌이 일어날까 싶어 강명길 팀장과 이영진이 두 사람을 말렸다.
“영인아. 다음 스케줄 가야지.”
“아 놔 봐요. 잡지 마. 잡지 말래도?”
“유진아. 빨리 올라가자. 응?”
“영진 오빠. 나 신경 쓰지 말고 먼저 올라가세요.”
매니저들이 잡는 두 손을 뿌리친 정유진과 주영인은 이글대는 눈빛으로 상대를 노려보고 있었다.
“야. 정유진. 선배한테 이렇게 덤비는 거 실장님들이 알면 가만히 계실 거 같아? 니가 아무리 정 대리에게 마음이 있어도······”
주영인의 선을 넘은 발언에 정유진의 머릿속에 퓨즈가 끊겨 버렸다.
“누가 할 소리. 우리 윤호 오빠한테 꼬리 친 게 지금 누군데요?”
“꼬리? 야! 너! 말 다 했어?”
발끈한 주영인이 머리채를 휘어잡으려는 듯 오른손을 뻗었다.
하지만 정유진이 잽싸게 뒤로 물러난 탓에 주영인의 오른손이 빈 허공을 갈랐다.
정유진이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외쳤다.
“경고하는데······ 한 번만 더 손 쓰면 나도 가만 안 있을 거야. 후배한테 맞고 쪽팔리고 싶지 않다면 조심해요.”
“이 이게 진짜 미쳤나?”
대형 사고가 날 판이다.
말싸움이 아니라 본격적으로 손이 오간 탓에 놀란 매니저들이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둘 다 그만해! 그러다 얼굴에 상처 나면 오늘 촬영 끝이야! 그리고 정유진! 너 선배한테 그게 무슨 말버릇이야!”
“유진아! 너도 그만해.”
두 매니저의 벽에 가로막힌 주영인이 외쳤다.
“야 넌 딸까지 있는 게 왜 정윤호한테 집착해! 그냥 적당히 벌어 먹고살면 되잖아!”
순간 정유진이 인상을 굳혔다.
딸이 있는 게 왜?
미소를 입양한 일이야말로 짧은 인생에서 최고로 잘했다고 생각하는 건데.
그리고 정윤호에 대한 관심?
좀 있으면 어때서.
순간 정유진의 머릿속에는 정윤호가 했던 이야기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생각이 끝남과 동시에 정유진은 주영인을 향해 쏘아붙였다.
“윤호 오빠야말로 날 올려 줄 수 있는 사람이니까!”
“뭐?”
“못 들었어요? 윤호 오빠는 그쪽보다 더 높은 곳으로 날 이끌어줄 사람이라는 거?”
눈을 부릅뜬 정유진의 표정은 평소와는 달랐다.
으스스한 분위기를 뿜어내는 모습에 강명길 팀장마저 움찔거릴 정도다.
“나 나보다 높이 올라간다고? 네가?”
주영인은 자신보다 한창 후배인 정유진의 기세에 밀렸다는 걸 믿을 수가 없었다.
“윤호 오빠가 그렇게 말했거든. 내가 당신보다 훨씬 재능 있다고.”
정윤호의 판단이 그렇다?
주영인의 표정이 돌처럼 굳었다.
그게 사실이라면 더 놔 줄 수 없다.
“야! 내가 가만히 보고만 있을 거 같아?”
“마음대로 해봐요. 막을 수 있나!”
주영인과 정유진은 한참 서로 쳐다보며 눈싸움을 시작했다.
그러다 매니저들이 말려 각자의 길로 향했다.
주영인은 촬영 현장으로.
그리고 정유진은 계획을 바꿔 대표이사실로 향했다.
정윤호가 절대로 자신에게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지금 현재 정유진의 눈에는 보이는 게 없는 상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