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5화
85. 트로이의 목마 1
“······그러니까 주영인 씨의 개인 매니저가 되달라는 말씀이신 것 같은데. 맞습니까?”
“네. 휴가랑 보너스도 별도로 챙겨 드릴게요. 아시겠지만 이 정도면 탑스타의 개인 매니저들이나 받는 대우에요.”
날 쳐다보는 주영인의 눈빛이 묘하게 반짝였다.
이래도 안 넘어올 거냐는 듯 자신감이 가득했다.
이 무렵이면 주영인이 벌어들이는 수익이 연간 15억은 될 테니 이 정도 조건을 부르는 것도 무리도 아닐 거다.
다만 남을 위해서는 1원도 돈을 쓰기 아까워하는 주영인이 이런다는 게 새삼 놀라웠다.
난 가만히 그녀의 눈을 마주했다.
그 순간.
회귀 전 그녀와 함께한 기억의 단상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자기 자기는 다시 태어나도 나랑 결혼할 거야?
-갑자기 그게 뭔 소리야?
-빨리 대답해 봐.
-뭔 소리를 하는 건지······. 그래 그래야지. 너는?
-으흠~. 어쩔까나?
-뭐야? 네가 먼저 물어 놓고? 너 그거 다시 만나면 나랑 결혼하지 않을 거라는 소리 맞지?
-됐어. 우리 자기는 역시 내 마음을 잘 몰라. 그나저나 연봉 협상했다며? 근데 올해는 김 대표가 얼마나 준대? 10억? 15억?
-하여간 욕심은. 성과급까지 받으면 한 20억 정도 되려나?
-올~ 우리 남편 능력 좋네? 그럼 이번 이탈리아 가서 신상 백 하나 사도 되지? 아니다. 2개 정도만 살게.
-이번엔 또 얼마짜리 사려고?
-에이~. 나 정도면 5천 이하는 들면 안 돼. 주영인 체면이 있지 싼 거 들고 나가면 사람들이 욕해. 당신은 당신 부인이 욕먹는 게 듣기 좋아?
과거의 기억도 다이어리처럼 지워졌으면 좋겠다.
이렇게 문뜩문뜩 치솟아 올라 짜증을 불러일으키지 않게.
‘그래. 여기서 화내봤자 무슨 의미가 있으려고.’
난 애써 기억을 지우곤 그녀의 제안을 거절했다.
“관심 없습니다.”
당황한 주영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어지간해서는 당황하지 않는 그녀가 침까지 튀겨가며 말했다.
“정 대리님! 천만 원이 아니라 1억이요 1억! 회사에서 월급 따박따박 받고 가외로 매년 억 단위 돈이 더 들어온다고요!”
주영인의 강변하는 말에도 난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얼마를 준다고 해도 개인 매니저는 안 합니다. 전 회사에서 뼈를 묻고 이사까지 올라가는 게 꿈이니 그런 제의는 접어두시죠.”
주영인이 날 이리저리 훑어보기 시작했다.
뭐 이런 사람이 다 있냐는 눈치였다.
주영인이 한숨을 쉬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출세 루트를 타시겠다? 좋아요. 대신 정식으로 발령 나면 내가 제일 우선이어야 해. 그건 알죠?”
출세 루트가 아니라 네가 싫다고!
난 이해가 가지 않아 주영인에게 되물었다.
“한 가지만 묻죠. 왜 이렇게 억지까지 써 가며 저를 끌어오려는 겁니까? 김동수 실장님이 이제까지 잘 해줬잖습니까?”
주영인이 짜증 가득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몰라서 물어요?”
“몰라서 묻습니다.”
심드렁한 내 대답과 달리 내 속엔 천불이 나는 거 같았다.
‘제발 좀 떨어져!’
‘무슨 순간접착제도 아니고 왜 나한테 들러붙으려는 건데?’
그런 내 속도 모른 채 주영인이 입을 열었다.
“정유진과 체리블라썸의 일. 거기다 이태풍 씨를 끌어온 일까지. 아무리 살펴봐도 우리 회사에는 당신만 한 매니저가 없어요. 물론 김동수 실장까지 포함해서.”
주영인은 확신에 찬 듯한 말투로 계속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나와 함께 하자는 거예요. 내 몸값을 더 올려 줄 사람을 매니저로 선택하는 건 당연한 일이잖아요. 안 그래요?”
계산적인 사람이란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고작 24살에 이렇게까지 생각할 줄이야.
굴렁쇠 엔터의 직원들을 일일이 다 비교했다는 그녀의 말에 혀가 내둘러진다.
주영인에게 밉보이고 날 포기하게 할 생각이었는데 그게 불가능하다는 걸 알았다.
무려 1억이라는 돈을 주면서도 자기 개인 매니저로 삼으려고 하기까지 할 줄이야.
주영인의 눈이 더욱 짙은 탐욕을 담고서 이글거리고 있었다.
회귀 전 주영인이 한번 찍은 목표를 포기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이렇게 된 이상 차라리 이 상황을 이용해야겠다는 게 좋겠다.
때론 지는 게 이기는 길일 때도 있으니까.
“그럼 저도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말해 봐요. 뭐든 들어드릴 테니까.”
자신만만한 그녀에게 난 한 가지 조건을 걸었다.
밤 9시 칼퇴근.
어떤 경우에라도 말이다.
주영인은 한참을 고민하다 그 조건을 받아들였다.
“알았어요. 그렇게 하죠.”
“약속하신 겁니다. 어떤 경우라도?”
“호호. 그까짓 것쯤이야.”
인상을 잔뜩 찌푸렸던 주영인의 얼굴에 드디어 웃음이 깃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순간 난 속으로 웃음을 터트렸다.
‘후회하게 될 거야 주영인.’
* * *
주영인과 이야기를 마치고 곧바로 강지영 본부장에게로 달려갔다.
“딱 한 달만 견뎌요. 어차피 김동수 실장이 영인 씨와의 재계약만 따내면 끝나는 일이니까.”
강지영 본부장이 이 일만 끝나면 고생한 대가를 주겠다 말했다.
고생보다는 이런 일이 다시는 없었으면 좋겠다고 했더니 그 또한 알겠다는 대답을 들을 수가 있었다.
“그럼 유진이랑 체리블라썸. 잘 부탁드립니다 본부장님.”
“알겠어요. 저만 믿으세요.”
그렇게 난
주영인과 한 달간의 시간을 같이 보내게 되었다.
그리고 그 한 달 동안.
배우 3실에 배치되어 세세한 정보를 캐낼 생각이었다.
애당초 주영인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 진짜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이었으니까.
* * *
[2월 17일]
주영인의 스케줄이 끝나고 곧장 유진이의 집으로 향했다.
9시 넘어서 유진이의 집에 도착하니 미소가 단식을 선언하고 버티고 있었다.
‘삼촌 미워!’와 ‘흥칫뿡!’을 열세 번 정도 반복하고서는 토라져 돌아앉은 채로.
단식 전에 저녁은 잔뜩 먹였다고 하니 다행이긴 했지만.
걱정이 된 나는 미소를 곰돌이 젤리로 유혹해 단식 선언을 마무리 지을 수가 있었다.
미소는 입안 가득 젤리를 우물거리면서도 매일 9시에 퇴근해 꼭꼭 자기를 보러 와야 한다고 엄포를 놓았다.
그리고 유진이는 대뜸 성공을 다짐했다.
반드시 주영인보다 성공해 회사에게 두 번 다시는 이런 고민을 하지 않게 만들어 주겠노라고.
[2월 18일]
당분간 배우 3실에 집중한다는 소식을 들은 체리블라썸이 경악했다.
우연희는 이러다 내가 아예 주영인 전담으로 발령되는 게 아닐까 걱정했다.
어쨌건 한 달은 금방 갈 테니 연습이나 열심히 하라 이야기했다.
세리는 반드시 1등을 한 뒤에 날 전속으로 삼겠다며 의지를 불태웠다.
유진이는 어떻게 하냐 물었더니 유진이까지는 인정이란다.
[2월 21일]
며칠이 지나자 배우 3실도 조금은 익숙해졌다.
매일 아침 커피를 타주며 직원들과의 거리가 조금씩 가까워지자 배우 3실이 돌아가는 사정을 들을 수가 있었다.
그런데 역시나 이상한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곧장 사정 파악에 나섰고 배우 3실에서 돈이 조금씩 새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증거를 얻기는 만만치 않을 것 같다.
[2월 22일]
현장에서 내가 주영인을 케어하는 동안 유진이는 동기인 영진이가 맡았다.
최종혁이 유진이를 노리는 걸 빼면 다행히 아직은 큰 문제가 없는 상황이다.
문제라면 주영인.
날이 갈수록 그녀가 나와의 거리를 좁혀오고 있다.
부담될 정도로.
[2월 24일]
주영인의 광고 촬영을 위해 제주도로 이동했다.
그런데 예약이 꼬였는지 룸이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
주영인에게 방을 내준 뒤 난 승합차로 내려왔다.
그런데 밤 9시 30분이 되어서 주영인에게 전화가 왔다.
퇴근한 터라 받지 않았더니 자신의 방을 누군가가 지켜보는 듯하다고 문자가 왔다.
퇴근했으니 까톡 보내지 말라고 답하고선 폰을 덮었다.
주영인이 진짜라며 연신 까톡을 보냈지만 답하지 않았다.
다만······.
혹시나 사실일까 걱정이 된 탓에 그녀의 방 앞으로 몰래 올라가 2분 정도 머물렀다.
하지만 이내 거짓말인 걸 깨달았다.
점점 그녀의 거짓말도 늘어나고 있다.
[2월 25일]
배우 3실의 매니저들과 더 가까워졌다.
커피를 타 주며 그들이 상대하는 PD와 스태프들이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걸 알려주기 시작했다.
처음엔 귓등으로도 안 듣던 인간들이지만 막상 성과가 나타나니 점차 관심을 보여왔다.
내 말을 듣고 현장에 나가면 큰 도움이 되니까.
그 덕에 배우 3실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이야기를 조금 더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김동수가 괜히 대인 흉내를 낸답시고 배우 3실을 휘젓고 다녀도 아무런 제지를 하지 않은 탓에 가능한 일이다.
덕분에 회귀 전에는 알지 못했던 배우 3실의 문제점을 파악할 수 있었다.
[3월 1일]
나는 커피를 마시러 온 A급 스타 성한영에게 차기작이 엎어질 거라는 걸 살짝 귀띔해줬다.
큰맘 먹고 다이어리의 내용을 말해줬건만 성한영은 재수 없다며 내게 욕을 퍼부었다.
하지만 그날이 가기 전.
다시 날 찾아온 성한영이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혹시 신기가 있냐고.
저녁 식사 자리에서 프로젝트가 취소되었다는 걸 통보받았다는 거다.
그때부터는 거리를 두던 3실 배우들이 하나둘 날 찾아오기 시작했다.
몇 개는 아는 것들.
몇 개는 짐작한 것들.
몇 개는 찍은 것들로 배우들의 앞일에 벌어질 일을 ‘예측’해 주며 더욱 관계를 깊게 만들었다.
[3월 5일]
성은수 안무 팀장이 체리블라썸을 일절 봐주지 않는다는 걸 강지영 본부장이 알아차렸다.
그 순간 회사가 발칵 뒤집혔다.
덕분에 가수 1실과 2실 사이에는 커다란 벽이 생겨버렸다.
가수 1실 직원들은 어중이떠중이가 모여 만든 체리블라썸의 신곡은 당연히 망할 거라며 악담을 퍼붓고 있었다.
하지만 그 말에 자극을 받았는지 체리블라썸은 연습의 강도를 더욱 올렸다.
사정을 들은 박선녀 안무가도 이를 악물었고.
덕분에 성공할 확률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
[3월 6일]
LM 의류의 문영미 대표와 의류광고를 독점으로 맺었다.
HK 의류에서 유진이를 탐낸다고 말했더니 최종 계약에서 5천만 원이 뛴 1년간 2억 5천만 원으로 계약이 성사되었다.
아무튼 이제 HK 의류 걱정을 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문영미 대표는 결코 HK 의류에게 유진이를 뺏기지 않을 거라 다짐했으니까.
[3월 10일]
내가 목숨을 걸고 구했던 장준혁으로부터 상태가 상당히 호전되었다며 곧 퇴원한다는 연락을 받았다.
앞으로 몇 개월 동안은 통원 치료를 할 테지만 상태가 좋아지면 바로 작품 활동을 시작할 거라고 큰소리를 쳤다.
전담 매니저인 이승훈에게 조심스레 물어보니 6월은 되어야 가능할 것 같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요즘은 장준혁과 얽힌 광고 계약 문제를 해결하느라 회사 법무팀이 많이 바빠졌을 거라나.
껄껄 웃는 이승훈 매니저의 목소리를 들으니 내 기분도 덩달아 밝아지는 것만 같았다.
[3월 11일]
이태풍의 상태가 나날이 호전 중이다.
난독증을 고치기 위해 그의 전담 매니저 이대호와 함께 대본을 연기하고 녹음한 파일을 넘겨줬더니 이제는 아예 대본 전체를 달달 외울 정도에 이르렀다.
이태풍의 연기는 하루가 다르게 좋아지고 있었다.
이제 배우 2실로 돌아갈 날이 코 앞이다.
그런데 최근 날 보는 김동수의 눈빛이 심상치 않다.
스파이를 보는 듯한 표정을 보니 아무래도 들킨 것 같다.
요 한 달간 내가 배우 3실에서 해 오던 일들을 말이다.
* * *
3월 16일.
굴렁쇠 엔터의 이인자 이기철 이사는 탕비실에서 가지고 온 커피를 홀짝이고 있었다.
“허 참! 정 대리 그 자식. 커피 타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네.”
매일 아침 정윤호가 탕비실에 타 놓은 커피는 그야말로 인기 절정.
특히나 하루에 한 통 이상은 타 놓지 않았기에 커피 한 잔을 먹기 위해 일찍 출근하는 매니저들도 생겨났다.
“거참. 이사 체면에 더 타 달라고 조를 수도 없고.”
이기철은 부서를 옮긴 정윤호가 생각보다 적응도 잘하는 데다 주영인의 관리도 나무랄 데가 없었기에 내심 만족하고 있었다.
정윤호가 주영인을 맡고 나서부터는 주영인은 더는 김동수나 이기철 이사를 찾아와 괴롭히지 않았으니까.
아예 정윤호를 배우 3실로 영입할까 하는 마음도 들었다.
똑똑.
“누구야?”
“접니다.”
김동수의 목소리다.
“들어와.”
달칵.
문이 열리고 김동수가 짜증 가득한 표정으로 들어왔다.
“이사님도 그 커피 드십니까?”
“왜? 이게 기가 막히게 입에 짝짝 붙더라고. 맛이 아주 좋아. 김 실장도 한 잔······”
“하아······”
김동수가 한숨을 쉰 탓에 이기철이 신경질을 부렸다.
“왜? 뭔데 아침부터 복 나가게 한숨이야!”
“이사님. 요즘 배우 3실 분위기 몰라서 그러십니까?”
“무슨 분위기? 화기애애하고 좋더만? 일도 다들 잘한다면서?”
김동수가 인상을 와락 쓰며 소파에 앉았다.
“요즘 씨드머니 만드는 게 진행이 잘 안 됩니다.”
“그건 또 왜!”
이기철이 깜짝 놀라 외쳤다.
김동수가 말하는 씨드머니는 굴렁쇠 엔터를 상장시키며 잡아먹기 위한 군자금이었으니까.
그 작전이 실패한다면 새로운 회사를 설립할 창업자금이기도 하고.
김동수의 눈길이 이기철의 커피잔을 가리켰다.
이기철은 그 시선을 따라 커피잔으로 눈길을 향했다.
“설마 정 대리 때문에?”
“······예.”
“좀 알아듣게 이야기해 봐.”
이기철을 따라 소파에 앉은 김동수는 최근에 불거진 문제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