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4화
84. 유혹
굴렁쇠 엔터에서 부서 간 이동 발령은 전적으로 대표이사의 권한이다.
하지만 현재 강감찬 대표가 일본으로 출장을 간 상태.
그렇다면 현재 회사 내 최고 결정권자는 이기철 이사였다.
설마 이 타이밍에 부서 간 이동 발령 지시를 내려올 줄이야.
‘그렇다면 정식 발령 공지는 3일 뒤인 건가?’
김동수는 짜증을 지우고 부드러운 말투로 말을 이었다.
“정 대리. 아니 윤호야. 내가 그동안 너한테 좀 모질게 대한 거 인정한다. 하지만 너만큼 일 잘하는 놈도 없다는 것도 알아. 내가 기대가 커서 그랬어 인마.”
어처구니가 없다.
기대?
김동수라는 인간의 실체가 모든 인간을 이용대상으로 보는 냉혈한인 걸 나만큼 잘 아는 이가 또 있을까.
난 어이없단 표정을 들키지 않기 위해 심호흡을 하며 물었다.
“그거야 그렇다 치고. 왜 한 달 동안 주영인 씨를 맡으란 겁니까? 앞으로도 계속 맡을 거라고 영인 씨를 속이라고요?”
“배우들 작품 들어갈 때마다 스트레스로 변덕스럽게 구는 게 어디 하루 이틀이야? 그러니까 일단 땜빵이나 좀 해 달라는 거지.”
그럴싸한 말이었지만 저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순 없다.
한 달?
그렇게 시작한 게 두 달 석 달로 늘어나면?
물론 이미 발령이 난 이상 무조건 싫다고 할 수가 없다.
대표가 직접 나서서 모조리 뒤엎어버리면 또 모를까.
유진이와 체리블라썸도 중요하긴 하다.
하지만 회사로써는 큰돈을 벌어다 주는 주영인의 재계약이 훨씬 더 중요한 문제일 테니까.
“만약에 한 달이 지나도 영인이와의 재계약이 안 되면 내가 책임지고 배우 2실로 돌아갈 수 있게 해줄 테니까 나 한번 믿어 봐.”
김동수는 거짓말을 할 때 더 당당해지는 습관이 있다.
한 치의 양심의 가책도 없는 뻔뻔한 모습을 보니 주먹으로 한 대 쥐어박고 싶은 마음이 불쑥 들었다.
“일단은 구 실장님과 상의부터 해보겠습니다.”
김동수의 얼굴이 환해졌다.
“뭐 그게 편하다면 그렇게 해. 어차피 이사님이 결재는 마쳤으니까. 하여간 정식 발령 나면 그때부터 잘 해 보자고?”
잘 부려먹겠다는 소리겠지.
욱하고 치밀어 오르는 무엇인가를 참고 곧장 사무실을 나섰다.
정식 발령이 공지로 뜨기까지는 앞으로 3일.
어떻게든 이 계획을 수포로 돌릴 방법을 찾아야 했다.
* * *
강지영 본부장의 사무실.
콰앙!
거칠게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배우 2실의 실장 구성철이다.
“강지영. 너 지금 무슨 생각하는 거야! 어?”
“구 선배! 여기 회사예요!”
구성철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본부장실의 문을 닫았다.
하지만 여전히 씩씩대고 있었다.
“윤호가 배우 3실 발령이라니! 걔 지금 한창 바쁜 거 너도 알잖아!”
강지영이 구성철을 달래며 자리에 앉혔다
“일단 진정 좀 해요. 구 선배. 저도 아는데······ 저라고 이러고 싶어서 그러겠어요? 하지만 이기철 이사 말도 틀린 건 아니잖아요.”
이건 순전히 주영인이라는 돈 되는 배우를 놓치냐 마냐 하는 중요한 문제였다.
강지영은 김동수 실장이 워낙에 급하게 요청해서 전결을 내렸으니 양해해 달라는 이기철 이사의 부탁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구성철은 그제야 조금 화를 가라앉힐 수 있었다.
주영인이 그런 조건을 걸었다면 별다른 수가 없으니까.
다만.
“한 달만 윤호를 붙여놓으면 영인이가 계약 연장을 해주긴 한 대?”
“이 이사가 책임지고 재계약할 거라네요. 그리고 한 달 뒤에 정 대리가 도저히 못 하겠다고 손을 털면 책임지고 2실로 돌려보낸다고 약속하시더라고요.”
운영 이사가 전결을 한 체면도 있으니 이번엔 양보해 줄 수밖에 없는 상황.
강지영에게 상세한 이야기를 들은 구성철이 한숨을 쉬었다.
변덕스러운 주영인의 태도는 밉지만 재계약을 앞둔 시기의 연예인은 그야말로 갑 중의 갑이다.
“하아~. 화내서 미안하다.”
“괜찮아요. 저도 처음 들었을 때 얼마나 빡 돌았는데요.”
“그런데 지금 윤호 때문에 유진이랑 체리블라썸은 완전히 상승 곡선 탔는데······ 혹시 꺾여 버리면 어떻게 하냐?”
구성철의 말에 강지영이 고개를 저었다.
“최대한 유진 씨랑 체리블라썸에게 인력 배치해 드릴게요. 일단은 주영인 씨 문제가 급하니까 그 고비만 넘기죠.”
정유진이 잘 나간다 하더라도 아직은 주영인에 비해 급이 한참 밀린다.
두 사람이 벌어들이는 수익 차이는 최소 10배 이상.
<파란 하늘>이 방영되면 주연을 맡았으니 얼마나 더 들어올지도 모르고.
즉 주영인을 놓친다는 건 연간 수십억이 단숨에 날아가게 된다는 뜻이었다.
구성철이 머리를 부여잡았다.
3월 중순만 되었어도 <파란 하늘>의 방영과 체리블라썸의 신곡 활동 때문에 거절할 핑계라도 댔을 거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도 없었다.
구성철이 한숨을 쉬다 강지영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본부장. 네 체면이 좀 상하긴 하겠지만 일본에 계신 대표님한테 한번 말해 보면 안 될까?”
강지영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능력 없으면 내려오라던 아버지의 호통이 다시 떠올랐다.
“생각 좀 해보고요.”
한숨을 쉰 구성철이 소파에 몸을 기댔다.
머리가 복잡해진 탓에 구성철이 괜한 짜증을 부렸다.
“그런데 영인이 걔는 강 팀장도 있는데 왜 갑자기 윤호 타령이야?”
강지영이 타는 목을 얼음물로 달랬다.
“영인 씨 성격 몰라요? 자기가 가지고 싶은 건 다 가져야 하잖아요. 요즘 정 대리가 손댄 건들이 전부 쭉쭉 치고 올라오니까 관심이라도 생겼나 보죠.”
구성철이 머리를 벅벅 긁었다.
“하여간 연예인들. 조금만 인기 있으면 왜 이렇게 다들 제멋대로인지 몰라.”
“제 말이요.”
두 사람은 한숨을 쉬며 또 다른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기 시작했다.
* * *
배우 2실로 돌아오자 나를 본 직원들이 우르르 벌떼처럼 몰려들었다.
“정 대리. 버거퀸 광고 잘 봤다. 근데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걸 받았냐? 응?”
“그런 광고가 뜰 줄 꿈에도 몰랐는데. 난 이제 보는 눈이 한물간 건 아닌지 모르겠다.”
“에이 우리 중에 진짜로 그런 병맛 광고가 뜬다고 생각한 사람 몇이나 있겠어요? 솔직히 정 대리 쟤가 특이한 거지.”
배우 2실의 직원들이 연신 엄지를 치켜세웠다.
“저기 구 실장님 못 보셨어요?”
“실장님? 본부장님 뵈러 간 지 좀 됐는데. 곧 오실 거야.”
“알겠습니다. 그리고 주말 동안 들어온 유진이 광고 리스트가 있나요?”
“어. 저기 내 책상 위에 있으니 가져가라.”
터무니없는 광고비를 제시한 것들을 제외하면 쓸 만한 것만 추려도 다섯 건 들어와 있었다.
버거퀸의 추가 광고 휠리스에서 들어온 스포츠화 광고 LM 의류와 과자 음료 광고까지.
LM 의류를 제외하고는 1년짜리에 3천에서 5천 사이의 계약들이다.
‘생각보다 짭짤하네.’
아직 드라마도 제대로 시작하지 않았는데 휴먼스토리와 버거퀸 광고 덕에 유진이의 인지도가 날로 높아지고 있었다.
‘이러다 휴먼스토리가 인생작이 되겠는데?’
유진이의 필모에 예상치 못한 게 하나 끼어들었지만 나쁠 건 없었다.
광고 리스트를 확인한 나는 곧장 유진이에게 까톡을 보냈다.
[정윤호 매니저 : 유진아. 광고 리스트임. 하기 싫은 게 있으면 미리 말해 줘.]
5초도 지나기 전 곧장 까톡이 되돌아왔다.
까톡!
[러블리♡유진 : 5개나? 우리 매니저님 완전 능력자인 듯?]
[정윤호 매니저 : 그것도 거른 거란다.]
[러블리♡유진 : 소녀~. 매니저님이 시키는 건 무엇이든 할 자세가 되어 있나이다! (굽신_공손_이모티콘)]
[정윤호 매니저 : 박불출 감독님 정도는 순한 맛으로 느낄 진짜배기 광고들이 있는데······]
유진이가 화들짝 놀라 전화를 해 온다.
장난이라 말하자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대신 버거퀸 광고 이상의 병맛은 좀 걸러달라나?
아무리 자본주의의 노예가 되었다고 해도 기준은 지키잔다.
그 기준이 박불출 감독인가 보다.
기준 한번 낮다.
하지만 덕분에 어지간한 광고는 다 받아들일 수가 있게 되었다.
“그래. 그럼 수고하고 처리할 일들 마치면 들릴게.”
-네. 이따 봬요.
전화를 끊은 난 한숨을 내쉬었다.
유진이에겐 지금 현재 상황을 말할 수 없었으니까.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머리를 쥐어 싸매고 고민에 빠졌다.
그런데도 이번만큼은 마땅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10분이나 지났을까.
피로가 가득한 표정의 구성철 실장이 돌아왔다.
“일들 봐. 그리고 윤호는 나 좀 따라와라. 잠깐 이야기 좀 하자.”
구성철 실장이 자신의 방을 가리켰다.
구성철 실장의 방으로 따라 들어가자 예상했던 대로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이기철 이사가 김동수의 제안을 받아 날 배우 3실로 부서 이동 발령을 냈다는 것.
“아무래도 한 달은 지원 나가야 할 거 같다. 한 달이 지나도 김 실장이 해결을 못 하면 내가 대표이사님 찾아가서라도 널 다시 빼 오마.”
“본부장님도 같은 생각이신 겁니까?”
“그래. 하지만 이건 알아 둬. 나나 본부장님이나 모두 너 안 보내려고 애썼다. 근데 지금은 마땅한 방법이 없더라. 주영인이 나간다는데 일단은 잡아야지. 안 그래?”
강감찬 대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볼까 싶었지만 입을 다물었다.
그 생각을 안 했을 두 사람이 아니니까.
“실장님.”
“응?”
“정식 발령하기 전에 제가 영인 씨를 한 번 만나보면 안 됩니까?”
“뭐 하려고?”
“될지 안 될지 모르지만 저 포기하라고 설득이나 한번 해보려고요.”
“사고를 치려는 건 아니지?”
“설마요.”
솔직히 그런 생각을 안 해 본 건 아니다.
하지만 시치미를 뚝 떼고 고개를 저었다.
구성철 실장은 말조심하라고 신신당부를 하곤 전화를 붙잡았다.
“알겠다. 지금 바로 전화해 보마.”
* * *
주영인과의 약속 장소는 배우 2실의 회의실로 잡았다.
드르륵.
배우 2실의 회의실이 열리더니강명길 팀장을 대동한 주영인이 등장했다.
곧바로 <파란 하늘>을 촬영하러 갈 셈인지 교복 위에 코트를 걸치고 있다.
주영인은 주먹만 한 금빛 링 귀걸이를 짤랑대며 내 맞은편으로 다가왔다.
강명길이 의자를 대신 빼주자 자리에 앉은 주영인이 손을 내저었다.
“강 팀장님. 둘이서만 이야기할 수 있게 해줄래요?”
“그 그래.”
자리에 앉으려던 강명길 팀장이 인상을 쓰곤 회의실을 나섰다.
내 전처이자 악연의 대상인 주영인을 마주하자 온갖 생각이 다 든다.
‘내 인생에서 제발 좀 사라져 줘!’ 같은 드라마 대사라도 외치고 싶었다.
아니면 구성철 실장의 말대로 머리털이라도 뽑아버리던가.
통속적인 드라마 감정 표현이 사실은 꽤 리얼한 거라는 걸 깨달았을 때 주영인의 입이 열렸다.
“발령 소식. 들었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그전에 궁금한 게 있습니다. 도대체 왜 절 붙여달라는 겁니까? 까놓고 말씀드리자면 전 영인 씨 와 잘 안 맞다고 생각하는데요?”
주영인이 코웃음을 치며 웃었다.
“물론 첫 만남은 좀 별로였죠. 그런데 우리 정 대리님은 과거를 속에 많이 담아두는 성격인가 봐요? 난 다 잊었는데.”
참을 인을 세 번 정도 그리곤 답했다.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전 영인 씨에게 관심 없습니다.”
주영인이 내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상관없어요. 내가 관심 가지게 만들면 되니까.”
자신만만한 주영인의 태도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풉.”
주영인이 인상을 찌푸렸다.
자기 앞에 넘어오지 않은 남자는 없었다는 오만한 태도는 여전하다.
아니 여전하다는 말은 이상하군.
나 만나기 전부터 이랬구나 하는 게 옳겠지.
“왜 웃죠? 내가 못 할 것 같아서?”
마치 10분만 주면 꼬셔주겠다는 태도에 웃음이 났다.
한 번 당했으면 되었지 두 번?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일이다.
그때였다.
주영인이 날 노려보며 말했다.
“1억. 다른 배우들에게서 손 떼고 나만 전속으로 담당해 주면 매년 그만큼 드리죠. 연봉과 별개로 내가 직접 주는 보너스예요. 이래도 관심 없어요?”
와우.
이건 좀 센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