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화
8. 정 스타 1
6층 회의실의 문을 열자 김동수와 배우 2실의 구성철 실장이 으르렁대고 있었다.
“구 실장님은 도대체 애 교육을 어떻게 하시는 겁니까? 현장 근무 시간에 배우를 팽개쳐 놓고 엉뚱한 곳에 가 있질 않나! 제 지시는 씹고 이지연 작가가 정유진을 찍었네 어쩌네 하네 거짓말이나 하질 않나!”
“너 인마 말 다 했어? 애초에 우리 실 직원을 네 맘대로 차출하려 한 것부터가 문제잖아!”
“단역보다는 영인이처럼 돈을 벌어다 주는 캐시 카우를 신경 쓰자는 게 뭐가 문젭니까? 급하면 다른 실 손도 좀 빌려야죠?”
따박따박 덤벼드는 김동수의 말에 구성철 실장이 화를 벌컥 낸다.
“야! 유진이가 언제까지 단역일 것 같아? 그리고 주영인 걔는 너희 3실이 데리고 와야지! 왜 그걸 내 새끼보고 데리고 오라고 해?”
다툼이 길어지기에 헛기침을 하며 인기척을 내었다.
“큼. 저 왔습니다.”
고개를 돌린 김동수는 성큼성큼 내게로 다가왔다.
“야! 1년 차. 내 지시를 씹고 현장 이탈까지 해? 너 미쳤냐? 이게 어디서 거짓말이야?”
콱!
김동수가 내 멱살을 붙잡았다.
순간 죽음을 받아들이는 5단계를 거친 게 말짱 도루묵이란 걸 다시금 깨달았다.
‘이게 바로 6단계인가?’
분노가 치밀어오르는데 이상하게 웃음이 새어 나오려고 한다.
아마도 한계치를 넘어버린 분노 탓인 모양이다.
‘다시 보니 XX 반갑다. 김동수.’
* * *
경력 6년 차 32살의 김동수.
유능하고 야심만만한 성격의 소유자다.
날카로운 눈매에 포마드 헤어스타일 그리고 은색 실루엣 안경테를 낀 김동수가 멱살을 잡고서는 날 뚫어지게 쏘아보고 있었다.
굴렁쇠 엔터에서 2년 차에 대리를 달고 4년 차에 팀장 6년 차에 실장이 되기까지.
남들은 10년은 족히 걸릴 실장을 6년 만에 달며 승승장구한 김동수는 배우 3실을 맡은 후에도 여전히 빠른 성장을 이어가고 있었다.
물론 회사 내 최대 파벌인 서울예술종합대학교(‘서예종’) 라인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긴 했지만 김동수의 능력만은 업계의 누구도 부인하진 못했다.
그런 배경이 있기에 김동수는 타 부서의 직원들마저 마치 자기 직속 부하처럼 써먹곤 했었다.
회사의 대선배인 구성철 실장 앞에서도 내 멱살을 잡을 정도의 위세를 떨치면서 말이다.
하지만 이제는 달라질 거다.
놈의 실체를 누구보다 잘 아는 내가 돌아왔으니까.
한바탕 할까 싶었지만 지금의 난 1년 차 매니저.
난 화를 꾹꾹 눌러 담으며 김동수를 쳐다보며 말했다.
“저기 제가 잘못은 했는데 멱살은 좀 풀고 말씀하셨으면 합니다.”
별것 아닌 일에도 겁을 먹던 과거와 달라진 탓에 김동수가 당황했다.
“뭐? 하 이 새X 보게. 야! 1년 차. 너 때문에 오늘 주영인 스케줄 하나 날아간 거는 알아?”
그 순간 구성철 실장이 끼어들었다.
“야! 왜 내 새끼 멱살을 잡아? 그거 안 놔?”
김동수가 부들부들 떨더니 멱살을 풀었다.
“길게 말할 거 없고. 1년 차 넌 6개월간 50% 감봉이다. 그리 알아!”
아 이건 좀 현타가 오는데.
6개월이라니!
월급 220만 원 받는데 반으로 깎으면 110만 원이다.
생각보다 문책이 좀 세다.
슬쩍 구성철 실장을 쳐다보니 인상을 쓰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쯤 되면 되돌리기 힘든 것 같다.
에이 뭐.
미소를 구한 대가로 이 정도면 싸지.
뭐 필요한 게 있으면 적당히 경비로 좀 돌리면 되는 거고.
“알겠습니다. 시말서는 내일 아침 책상에 가져다 놓겠습니다.”
덤덤한 내 대응이 비위에 거슬렸는지 김동수 실장의 얼굴이 또 일그러졌다.
“이 시건방진 새X가······”
어라? 왜 주먹은 꽉 쥐고 그러실까?
설마 치게?
피하려고 자세를 잡는데 곁에 있던 구성철 실장이 화를 내며 나섰다.
“1절만 해라 새꺄! 감봉이면 됐지 내 눈앞에서 내 새끼를 패려고? 보자 보자 하니까. 너 진짜 나한테 뒤지고 싶냐? 어?”
구성철 실장은 172cm 정도의 키에 배가 볼록 튀어나온 아저씨지만 젊을 땐 전문적으로 유도를 했었다.
전국체전에서 메달도 딸 정도의 실력이라 가볍게 손만 대면 전치 4주는 나온다는데 오늘 좋은 구경 하나 싶다.
화가 나면 사람을 반으로 접어버린다던데 말이다.
그때였다.
회의실 문이 열리며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쯤들 하세요!”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른 강지영 총괄 본부장이 나타났다.
강지영 본부장은 몸에 딱 달라붙은 검은색 투피스 정장을 걸친 샤넬 액세서리를 입고 있었다.
키가 170cm가 넘는 모델 체형으로 연예인을 해도 꽤 인기를 끌 외모였다.
강지영 본부장은 흐트러진 옷차림으로 술 냄새를 진하게 풍기고 있었다.
“두 분이 싸운다고 연락 와서 MBS 최 대표님이랑 술 마시다가 뛰어왔잖아요!”
강지영 본부장의 질책에 두 실장이 황급히 한 걸음씩 물러났다.
“본부장님. 그게 아니라 이 자식이······”
“저기요. 지금 내가 그만하란 말 못 들었어요? 김.동.수.실.장.님.”
김동수가 고개를 숙였다.
강지영 본부장은 한숨을 내쉬더니 내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쪽이 정 스타죠?”
“정윤호라고 합니다. 죄송합니다. 본부장님.”
나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기에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강지영 본부장이 손을 저으며 내 말을 끊었다.
“됐어요. 사과하라는 게 아니니까. 그것보다 오늘 이지연 작가님한테 로비라도 했어요?”
“예?”
갑자기 무슨 뜬금없는 소리지?
“아니 대체 어떻게 했길래 우리 배우를 마지막 화까지 출연시켜 준다고 하는 거예요?”
강지영 본부장이 화색을 머금고 한 대본 수정 이야기에 회의실의 분위기가 돌변했다.
순간 이제까지 날 거짓말쟁이로 몰던 김동수가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본부장님. 방금 말씀하신 게 사실입니까? 이지연 작가라면 한 번 넘긴 대본을 수정하지 않기로 유명하신 분이시잖습니까!”
기뻐하던 강지영 본부장의 표정이 다시금 일그러졌다.
“뭐야? 이 강지영이 그딴 거짓말을 할 정도로 경우 없어 보였나? 김 실장님. 지금 저랑 해보자는 거예요?”
“아니 그런 게 아니라······.”
강지영 본부장의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김동수가 움찔거렸다.
강지영 본부장은 카리스마 넘치는 표정을 짓고 김동수의 얼굴 앞에 폰을 내밀었다.
“자요. 자. 이거 보이세요?”
[(이지연 작가) : 오늘 현장에서 재미난 배우를 봤는데 유진 팍인가? 아 유진 정이라고 했었지 참. 하여간 얼굴도 그 정도면 괜찮고 발성도 괜찮더라? 마음에 들어.]
이지연 작가 성격상 이 정도면 극찬에 가까웠다.
그런데 까톡 메시지를 본 김동수가 억지를 부렸다.
“이 이게 어떻게 추가 출연에 관한 내용입니까? 요즘 실적이 빈약한 2실을 감싸시려고 그러시는 거라면······”
김동수가 평소에는 이런 실수를 할 사람이 아니다.
하지만 오늘은 화가 많이 났는지 상황 판단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김동수의 억지에 강지영 본부장의 눈꼬리가 역팔자로 치솟아 올라갔다.
“와 진짜 생각할수록 어이가 없네? 바빠 죽겠는데 실장들끼리 싸워서 회사를 난장판으로 만든다고 해서 달려왔더니. 이 강지영이가 그렇게 우습게 보여요?”
강지영 본부장이 화를 내며 까톡 메시지를 아래로 스크롤 했다.
[첨부 파일]
[<아침이 간다> 23화 수정 대본 – 이설란 역]
[<아침이 간다> 24화 수정 대본(엔딩) 수정 대본 – 이설란 역]
“보이세요? 이 작가님이 직접 보낸 수정 대본! 왜요? 아주 그냥 브리핑이라도 해 드릴까요?”
김동수의 얼굴이 돌처럼 딱딱하게 굳었다.
이건 억지를 넘어 대놓고 본부장의 권위를 넘본 거나 다름없는 행동이었으니까.
“죄 죄송합니다. 제가 실수를······ 한 것 같습니다.”
김동수의 사과에도 강지영 본부장이 차가운 태도를 풀지 않았다.
“아니 왜 사람이 ‘적당히’를 몰라요? ‘적당히’를! 오늘 조민성 씨를 MBS 창사 특집 드라마의 주연으로 꽂으려고 최 대표한테 한참 작업하고 있었는데 급히 달려오느라 그거 날린 건 또 어쩔 거야 진짜!”
조민성 배우는 굴렁쇠 엔터의 얼굴과도 같은 탑스타.
그런 배우의 드라마 출연이 지금 소동 때문에 무산되었다는 말에 김동수 실장의 얼굴이 벌겋게 물들고 있었다.
“저기 그게······”
“그만! 더 할 말도 없고 그쪽 이야기를 더 듣고 싶지도 않아요. 나가서 바깥에 구경하는 직원들이나 정리하세요. 그리고 정 스타 감봉은 취소할 거니까 그리 아시고요.”
“아 알겠습니다.”
김동수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어깨가 앞으로 굽어 있는 게 나름 보기 좋았다.
그래 김동수.
사람이 그렇게 좀 겸손해야지.
강지영 본부장을 내게도 지시를 내렸다.
“하지만 정 스타도 시말서 제출하세요. 어쨌건 업무시간에 자리 비운 건 사실이잖아요? 그쵸?”
절반으로 깎일 월급이 서류 한 장으로 대체되었다.
상황이 정리되자 강지영 본부장이 김동수를 보고 말했다.
“안 나가고 뭐 해요? 내가 문까지 열어 드려요?”
“아 아닙니다.”
김동수는 거세게 문을 닫으며 회의실을 나갔다.
* * *
한바탕 소란이 끝이 나자 구성철 실장이 몸을 움츠리며 말했다.
“미안해. 본부장. 그런데 조민성 배우가 창사 특집 드라마 출연 놓친 걸 알면 가만히 안 있을 텐데 어떻게 하지?”
구성철 실장이 직위가 낮아도 굴렁쇠 엔터 초기부터 있었기에 단둘이 있을 땐 이렇게 편히 대화하는 사이다.
강지영 본부장이 의자에 앉은 뒤 피식 웃는다.
“뻥인데요?”
“뭐?”
“내가 미쳤어요? 조민성 배우 출연 건을 놔두고 오게? MBS 최 대표랑 벌써 출연 확정 짓고 왔죠.”
“그 그래?”
“아깐 김동수 실장이 계속 대들기에 울컥해서 말해 본 거예요. 그런데 아 진짜 애들도 아니고 이게 뭐예요?”
“면목 없다. 하하하.”
“웃지 마요. 구 선배. 나 아직 화 안 풀렸으니까.”
하지만 이야기가 이어질수록 분위기가 조금씩 풀려가고 있었다.
“그럼 저는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인사를 하고 일어나자 강지영 본부장이 날 잡았다.
“어딜 가요? 임시라고 해도 정 스타가 유진이 담당 아녜요? 회의 참석해야죠.”
“제가요?”
“당연하죠. 그리고 이 작가가 직접 대본 수정해서 추가 두 화분에 출연해 달라고 했는데 현장에서 어떻게 대응할 건지는 상의 안 해요?”
굴렁쇠 엔터에서 1년 차는 팀 회의도 참석하기 어렵다.
하지만 무려 실장급 회의에 참석할 기회라니.
인생 2회차.
시작부터 출발이 좋은 것 같다.
* * *
유진이의 육성 계획 회의.
강지영 본부장과 구성철 실장은 수정 대본 때문에 발생할 일을 알려주기 시작했다.
어떤 일이 생길지는 잘 알고 있었지만 마치 처음 듣는 듯 연기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주의 사항을 말한 구성철 실장이 강지영 본부장을 쳐다본다.
“본부장. 한번 이쁘게 본 배우는 계속 데리고 가는 게 이지연 작가 스타일이잖아. 차기작에도 유진이 쓰려고 하지 않을까?”
“그래서 이참에 유진 씨를 한번 푸쉬해 볼까 하는데. 구 선배는 생각은 어때요?”
“나도 생각이 없는 건 아닌데 너무 일찍 밀었다가 부작용 나지 않을까 걱정이다.”
“구 선배답지 않게 쫄긴. 그냥 질러요. 이 작가님이 먼저 배역 제안해오면 전 절대 거절 안 할 거예요.”
이지연 작가가 유진이에게 꽂혔기에 자연스레 차기작 캐스팅 이야기가 나올 가능성이 있었다.
다만 한 가지 큰 문제가 있었다.
내년에 방송되는 이지연 작가의 차기작 <신의 이름으로>는 쫄딱 망해 버리니까.
‘이걸 어떻게 말한다?’
이지연 작가가 ‘나랑 같이할래?’라고 묻는다면 ‘싫어요! 작가님 작품 폭망해요!’라고 말해야 할 판이다.
하지만 아직 대본도 나오지 않은 이 시점에서 그 이야기를 꺼내 들 순 없었다.
이 판에 있는 누구라도 드라마계의 대모인 이지연 작가의 작품이 망할 거라곤 생각지 않을 테니까.
남은 방법은 하나뿐.
최대한 빨리 다른 작품에 유진이를 꽂아 넣는 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이었다.
그 사이 회의가 끝이 나고 있었다.
“그러면 구 선배. 남은 두 화 현장에서 마무리 잘해주세요. 일단은 그게 우선이니까요.”
“오케이. 그리고 우리도 현장에는 윤호 말고도 오 팀장 붙일게. 아무래도 팀장급 하나가 있는 게 중량감이 있으니까.”
이야기를 마친 강지영 본부장의 시선이 나에게 향했다.
“그런데 오늘 현장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나 말해봐요. 이지연 작가님이 아무 이유 없이 분량을 늘리고 그럴 리는 없고. 안 그래요?”
“실은 오늘 현장에서······”
현장에서 있었던 일을 털어놓았다.
“유진이가 좋은 연기력을 보였다. 그리고 이지연 작가가 그 모습에 반했다?”
“예. 이제 막 데뷔하긴 했지만 주연을 맡겨도 해낼 정돕니다.”
“호호호. 자기 배우에 대한 믿음이 보통이 아니네요?”
강지영 본부장이 날 기특하다는 듯 쳐다본다.
“이제 1년 차 맞죠?”
“예.”
“지금 이 태도. 절대 변하지 마세요. 아시겠죠?”
“알겠습니다. 본부장님.”
똑 부러지는 대답에 구성철 실장이 너털웃음을 지으며 내 칭찬을 해댔다.
“거봐. 본부장. 내가 늘 윤호 이놈 보통내기가 아니랬잖아.”
고맙습니다 구 실장님.
“어머. 구 선배. 전 왜 그런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없죠?”
강지영 본부장이 고개를 갸웃한다.
“하하하. 그 그랬나?”
구성철 실장이 슬그머니 내 눈치를 살피며 몸을 돌렸다.
3초 만에 감동이 사라진다.
고마운 거 취솝니다 구 실장님.
“자 그러면 다음 질문.”
강지영 본부장이 차가운 말투로 정색하고 물었다.
“9시 뉴스는 나도 봤어요. 그런데 현장에 있어야 하는 시각에 천호동에는 왜 간 거죠?”
날카로운 그녀의 음성이 귓가를 두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