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88화
788. 영화 제작 시작 3
저작권.
창작물에 관한 권리 전반을 일컫는 말이다.
그런데 이 저작권은 ‘저작인격권’과 ‘저작재산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저작인격권’이라는 건 해당 창작물을 만든 사람이 누구인지를 밝히는 권리로 양도와 대여가 불가능하다.
하지만 ‘저작재산권’은 ‘저작인격권’과 달리 돈을 주고 살 수 있다.
마치 ‘주식’처럼 말이다.
그러니 저작재산권을 통째로 사버리면 현재 최태용의 이름으로 저작권이 등록된 <꿈은 이루어진다>의 미래 수익을 우리 쪽에서 모조리 가질 수 있다.
다만 미래의 권한을 함께 사는 것이기 때문에 곡 비가 몇 배로 뛰게 된다.
하지만 <꿈은 이루어진다>가 연간 30억씩 벌어들일 것을 생각하면 그 정도 투자할 가치는 있었다.
그렇게 원래의 저작권자가 정당하게 수익 배분을 받을 수 있게 만들 방법은 찾았지만 또 한 가지 더 처리할 일이 남았다.
그건 바로 최태용 작곡가에게 착취당하고 있는 원곡자 윤세연과 한혜정을 이 스튜디오에서 빼내는 것이었다.
“세연 씨. 용기 내서 말해 줘서 고맙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앞으로도 계속 이곳에서 지내실 생각입니까?”
새끼 작곡가로 유명 작곡가의 곁에서 일을 배우는 건 작곡가로 데뷔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두 사람은 이미 핑크다이아의 <다시 말해줘>로 데뷔할 실력을 이미 갖춘 셈이다.
“아뇨. 근데 따로 나간다고 해도 저희가 스튜디오를 만들 돈이 있는 것도 아니고······ 당분간은 아르바이트해서 생활비를 좀 벌고 나서 그때 둘이서 작곡 활동이나 하려고요.”
“그러면 두 사람. 우리 선우랑 같이 작곡 한번 해보시는 거 어떻습니까?”
두 사람은 회귀 전 빅 히트곡인 <꿈은 이루어진다>를 작곡했고 아이돌 서브 타이틀곡도 작곡할 실력이 된다는 걸 증명했다.
그러니 천재 작곡가인 방선우와 함께 작업한다면 시너지를 낼 수 있을 것이 확실했다.
“저 정말요? 방선우 작곡가님이랑요?”
“예. 지금 두 분이 만든 곡은 충분히 시장에도 먹힐 수준입니다. 그러니 저희랑 계약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윤세연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자기 손을 들어서 볼을 꼬집어본다.
“아야야. 아픈 거 보니까 꿈은 아닌데······.”
유진이가 손을 뻗더니 여전히 볼을 잡고 있는 윤세연의 손을 떼 준다.
“왜 자기 볼을 괴롭혀요? 예쁜 얼굴에 흉지겠어요.”
유진이가 다정히 말하며 볼을 만져 주자 윤세연은 당황해서 어쩔 줄 몰라 한다.
“저 안 씻었는데······.”
유진이가 빙그레 웃으며 윤세연의 손을 꼭 잡는다.
“괜찮아요. 그리고 윤호 오빠 말대로 이젠 우리 회사로 가서 꿈을 이뤄 보세요. 친구랑 같이요.”
유진이는 내가 아무런 이유 없이 사람을 영입하지 않는 걸 누구보다 잘 안다.
그래서 그녀는 다정한 말투로 상대가 안심하고 확신할 수 있도록 말을 해주고 있었다.
‘고맙다 유진아.’
유진이와 함께 다닐 때면 날 무조건 믿어 주는 든든한 빽이 생긴 것 같은 기분이다.
유진이의 다정한 말에 녹아내린 윤세연이 날 보며 말한다.
“저 혜정이랑 같이 굴렁쇠로 갈게요. 어차피 여기랑은 계약서를 안 썼으니 바로 옮겨도 돼요.”
“알겠습니다. 혹시 음악 작업은 뭐로 하셨습니까? 여기 있는 컴퓨터로요?”
“저랑 혜정이 모두 개인 노트북으로 작곡하고 있어요. 여긴 최종적으로 편곡할 때만 사용하고요.”
나중에라도 저작권 자체를 가져올 생각으로 혹시나 하고 물었는데 다행히 증거 자료는 가지고 있었다.
그때 윤세연이 묻는다.
“저기 근데······ 그러면 저희는 굴렁쇠 엔터 소속 작곡가가 되나요?”
“편하신 대로 하시면 됩니다. 단 전속 작곡가가 되시면 회사에게 수익 배분을 조금 더 하는 대신 월급과 숙소가 제공될 겁니다.”
“그러면 전속할게요.”
“저기······ 앞으로 많이 버실 수 있는데 생각을 좀 더 해보시죠?”
“아뇨······ 이 스튜디오에 온 어떤 누구도 저희한테 관심을 가지고 물어본 사람이 없어요. 하지만 정 실장님은 달랐잖아요. 그러니까 앞으로는 굴렁쇠에 속해서 보호받고 싶어요.”
그녀들에게는 미래의 꿈보다 당장 먹고살 일이 중요한 상황이었다.
유진이가 그 마음을 이해한다며 곁에서 거들어 준다.
그녀도 버거퀸에서 굴렁쇠에 스카우트될 때 일단 월급을 받는 굴렁쇠 엔터 직원으로 스카우트됐기 때문이다.
“잘 생각했어요. 실은 저도 굴렁쇠 엔터 대리예요.”
유진이가 대리 명함을 꺼내 내밀자 윤세연이 놀란 표정을 짓는다.
“진짜요?”
“예.”
유진이 덕분에 설득이 쉽게 끝이 났다.
그렇다면 이제 곡 협상 준비를 해야 했다.
“자 자세한 건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죠. 그리고 일단은 곡부터 사야겠네요. 최 작곡가님 성격상 한 곡만 부르면 엄청 비싸게 부를 거라서 여러 곡의 저작재산권을 동시에 살 건데 혹시 추천할 곡들이 있습니까?”
150곡 중에서 내가 들은 건 고작 5곡이다.
어차피 <꿈은 이루어진다>를 사려고 왔기에 나머지는 가볍게 흘려들었었고.
그래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윤세연에게 물었더니 자신 있게 만든 곡이 있다며 곡을 골라 준다.
그때였다.
‘어? 이것들은······.’
윤세연은 150곡 중 10개를 골랐는데 그중 <봄빛 설렘> <벚꽃길> <천 일의 하루> <이런 노래 저런 노래>는 앞으로 4년 동안 TK 엔터에서 데뷔한 아이돌들의 타이틀곡이었다.
이 곡들이 모두 새끼 작곡가인 윤세연과 한혜정의 곡이었을 줄이야.
<꿈은 이루어진다>를 찾으러 왔다가 졸지에 능력자 둘을 건져 버렸다.
하지만 난 얼른 표정을 관리하며 헛기침을 했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골라 주신 것 중에서 4곡이랑 <꿈은 이루어진다>를 사도록 하죠.”
“예! 부탁드릴게요.”
저작재산권을 나눠 준다고 말은 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권리 일부를 찾아온다는 것만으로도 윤세연의 얼굴에는 미소가 어린다.
작곡자에게 음원은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아이였기 때문에 그 수익이 최태용 작가보다는 나나 우리 회사로 오는 게 좋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난 원곡자의 이득을 빼앗고 싶은 생각 따위는 없었다.
내게는 이들과 함께하는 그 자체가 큰 이득이었기 때문이다.
‘세연 씨. 저작재산권에 대한 수익도 나눠 드리고 언젠가 그 저작권도 찾아 드리겠습니다.’
난 그렇게 다짐한 후 윤세연이 골라 준 곡을 플레이했다.
역시나 기억 속의 그 곡들이 맞았다.
그로 인해 입꼬리가 올라가는 걸 멈출 수가 없었다.
하지만 돈을 벌 수 있다는 것보다도 원곡자의 손에 정당한 수익을 안겨 줄 수 있다는 사실이 더욱 기뻤다.
* * *
잠시 후.
녹음실 문이 열리더니 최태용 작곡가가 헐레벌떡 뛰어온다.
“헉헉. 미안해. 쁘띠모 애들 컴백 때문에 신경이 좀 예민해서 달래 주느라고 늦었어. 그런데 곡은 어때? 다 들어 봤어?”
난 짧게 심호흡을 하고 답했다.
“예. 하나같이 마음에 듭니다.”
“하하하. 역시 우리 정 실장은 곡 보는 눈이 있다니까? 그래. 그러면 그중에 사고 싶은 곡을 골라 봐. 내가 싸게 해줄게.”
거짓말이다.
그는 단 한 번도 싸게 곡을 준 적이 없다.
다른 작곡가의 적어도 3배 이상은 부르면서.
하지만 시치미를 뚝 떼고 말했다.
“음~ 그런데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무슨 부탁?”
“곡의 사용권만 사는 게 아니라 아예 저작재산권을 통으로 사고 싶습니다.”
복잡한 권리에 얽히기 싫다고 말하자 최태용 작곡가의 눈이 번뜩였다.
“그래? 누구한테 줄 건데? 뭐 신인한테 줄 거다. 뭐 솔로를 키운다 이딴 소리는 씨알도 안 먹히니까 하지 말고. 정 실장 정도 되는 사람이 여기까지 왔다면 이름 있는 쪽에다가 넘기려는 거 아냐? 안 그래?”
역시나 경험 많은 그를 상대로 신인에게 주니까 싸게 달라는 핑계는 통하지 않았다.
그래서 난 제일 그럴싸한 핑계를 대었다.
“<프로젝트 I.O.A> 경연의 미션곡으로 쓰려고요.”
그제야 최태용 작곡가가 미소를 씨익 짓는다.
“미션곡으로도 쓰고 나중에 공연에도 쓰겠다 이거지? 편곡도 그쪽에서 편하게 할 생각이고.”
“예.”
최태용 작곡가가 한몫 잡겠다는 표정으로 제안을 한다.
<프로젝트 I.O.A>가 요즘 제일 핫하다는 걸 알고서.
“흐흐흐. 그래? 그럼 우리 거래를 시작해 볼까?”
“얼마에 파실 겁니까?”
“저작재산권까지 가져가려면 1곡에 3천만 원은 기본으로 줘야지. 아 몇몇 곡들은 프리미엄이 붙는 데 그건 그쪽에서 곡을 고르면 알려줄게.”
어차피 음원이라는 건 발매되지 않으면 아무런 가치도 없다.
그래서 곡의 저작재산권은 싼 건 100만 원에도 거래되곤 한다.
하지만 상대는 곡당 무려 3천만 원을 불러 버리고 있었다.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하지만 여기서 내가 <꿈은 이루어진다> 딱 하나만 고른다면 프리미엄이라면서 곡 하나에 3억을 부르고도 남을 인간이 바로 최태용이라는 인간이다.
그렇기에 난 터무니없는 요구를 꾹 참고서 묶어서 협상을 시작했다.
“곡당 3천만 원은 너무 비쌉니다. 대신 마음에 드는 것 5곡에 1억 내겠습니다. 곡을 고르는 건 제가 하고요.”
“에이~ 그건 안 되지. 무작정 5곡을 고르는 데 1억? 그러면 곡당 2천만 원이잖아. 좀 더 써. 안 그러면 난 거래 못 해.”
“그럼 1억 2천. 더는 안 됩니다.”
“노우. 프리미엄은 빼 줄 테니까 5곡에 1억 5천!”
결국 그의 입에서 금액이 나왔다.
난 고민하는 척 시간을 끌었다.
그러다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알았습니다. 대신 5곡은 제 마음대로 고릅니다?”
“잠깐만 요 20개는 절대로 안 파는 곡들이니까 빼고서 골라.”
최태용 작곡가는 자신이 직접 작곡한 곡인지 아끼는 곡 20곡을 따로 뺀다.
하지만 어차피 상관이 없었다.
내가 고른 5곡들은 그 리스트에 없었으니까.
“아깝네요. 제가 고른 곡들도 있었는데······.”
“흐흐. 그래? 그럼 다시 계산하시든가.”
“아닙니다. 예산이 한정된 상태니까 대안을 선택하는 수밖에요.”
난 최태용을 띄우며 시간을 끌다가 잠시 후에야 내가 픽한 곡들을 찍었다.
선택을 마치고 나자 그가 씨익 웃는다.
“뭐 너무 아쉬워하지는 마. 정 실장이 다시 고른 곡도 충분히 좋은 곡들이니까.”
최태용 작곡가는 광대가 승천하는 미소를 지은 채 법무팀에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나 역시 곽무혁 법무팀장에게 연락을 넣어 계약 준비를 부탁했다.
입꼬리가 올라간 최태용 작곡가의 표정을 보니 날 호구 잡았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하지만 영화가 나오게 되면 그땐 그도 뼈저리게 알게 될 것이다.
누가 진짜 호구였는지.
곡당 3천만 원?
지금 내가 산 <꿈은 이루어진다>는 연간 30억은 벌고도 남을 초대형 히트곡이다.
나머지 4곡 역시도 만만치 않은 수익을 벌어들일 인기곡이었고.
그러니 설령 저작권 소송에서 이기지 못 해서 곡의 저작권을 가져오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최태용 작곡가는 최소 백억 대에 달할 미래 수익을 날리게 된 셈이었다.
* * *
최태용 작곡가의 지하 스튜디오 입구.
최태용 작곡가는 1억 5천만 원이 입금되자 입꼬리를 내리지 못하고 입구까지 배웅을 나왔다.
“정 실장. 다음에도 곡 필요하면 언제든지 찾아와~”
“예. 그럼 나중에 또 뵙겠습니다.”
최태용 작곡가는 유진이에게도 인사를 한 뒤 몸을 돌려 지하 스튜디오로 들어갔다.
지잉~
문이 닫히고 나서 시계를 확인했다.
오전 11시 40분.
이따가 미소와 천호동에 있는 학교 정문에서 12시 20분경 보기로 했으니 이젠 슬슬 출발해야 했다.
하지만 난 발걸음을 떼지 않고 유진이에게 말했다.
“유진아. 잠깐만.”
유진이가 씨익 웃는다.
“세연 씨 보고 가자고요?”
“이젠 말 안 해도 척이네.”
유진이가 어깨를 으쓱인다.
“당연하죠.”
늘 함께 있다 보니까 굳이 말하지 않아도 유진이는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고 있었다.
5분 뒤.
지잉~
윤세연이 끝부분이 닳은 물 빠진 분홍 점퍼를 입고선 어깨에 가방을 둘러메고 나온다.
역시나 생각한 대로 50만 원의 곡 비조차 못 받고 나온 게 분명했다.
“세연 씨! 여기요!”
윤세연이 내 목소리를 듣고 깜짝 놀라 고개를 든다.
“아 아직 안 가셨어요?”
“이거 드리고 가야죠.”
난 주머니에서 100만 원이 든 봉투 하나를 꺼내 들었다.
턱.
“일단 가지고 가서 급한 대로 쓰세요. 친구분 병원도 좀 데려가고요.”
“예? 예?”
“선금 같은 거니까 돌려줄 걱정하지 말고 쓰세요. 이따가 저녁때 뵙죠. 아 그리고 집이 혹시 어디예요? 가는 길이면 태워 드리게요.”
윤세연이 어쩔 줄을 몰라 부들부들 떨다가 봉투를 꼭 쥐고 말한다.
“이 돈은 꼭 갚을게요 실장님!”
“아뇨 곡을 골라준 보답이라고 생각하세요.”
적당히 핑계를 대며 그녀의 부담을 낮춰 줬다.
윤세연이 연신 고맙다며 고개를 끄덕인다.
“감사합니다 실장님.”
“예. 그나저나 집은 어디세요?”
“집은 천호동 쪽이에요.”
“잘됐네요. 우리 그쪽으로 가는 데 타세요.”
다행히 같은 방향이라 윤세연을 태운 뒤 천호동으로 향했다.
그리고 천호동으로 가며 그녀의 파트너 한혜정과도 통화했다.
룸메이트이자 공동 작곡가인 윤세연에게 사정을 들은 한혜정은 울음을 참지 못했다.
-흑. 감사합니다. 정 실장님.
한혜정은 아르바이트하다가 허리를 다쳐 누워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방세가 밀려 있어서 곤란했던 상황이었다고 한다.
50만 원이 필요했던 건 밀린 방세를 내지 않으면 일주일 안에 집을 비워 달라고 집주인이 독촉해서였고.
“일단 일은 다 잊고 제가 알려 주는 병원으로 가세요. 여기 세연 씨한테 주소 드릴게요.”
-예. 그러면 이따 뵐게요. 그리고 정말 감사합니다.
“예.”
난 그렇게 전화를 끊은 뒤 뒷좌석에 앉은 윤세연에게 김수명 원장의 수명 클리닉 주소를 알려 줬다.
“병원에는 미리 전화해 놓을 테니까 택시 타고 가서 데스크에 굴렁쇠 정 실장이 보냈다고 말씀하시면 됩니다. 그리고 그 근처에서 맛있는 거 먹고서 저희 회사로 오세요. 저희도 미소 데리고 회사로 갈 거거든요.”
“예. 실장님.”
“그리고 추가로 작곡한 것들 있으면 꼭 좀 들어 봤으면 합니다.”
“알겠어요. 혜정이랑 같이 한 작업들 다 들고 갈게요.”
두 사람은 혹시나 돈이 될까 싶어 만들어 둔 곡들이 100곡도 넘는단다.
그중에서 내가 아는 것들은 또 몇 곡일지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꿈은 이루어진다>와 같은 히트곡을 구한 것만으로도 성공이라 할 수가 있었다.
하지만 그런 곡을 뽑아낼 수 있는 이 두 사람을 얻은 것이 오늘의 진짜 성공이었다.
* * *
학교 앞으로 가서 미소를 픽업해 ‘미리내’로 이동했다.
JU 엔터테인먼트의 건물에 딸린 주차장에는 주영인의 차뿐이었다.
미소와 함께 내린 다음 주영인의 사무실로 가서 간단한 도시락을 시켜 먹었다.
이후 위층의 ‘미리내’로 올라간 다음 대본 리딩장으로 향했다.
한유식 대표의 제작 스태프와 인사를 나누고 나자 주연인 성규환 배우와 조연 배우들이 차례차례 입장했다.
오상도 PD와 현종연 실장 유태평 작가까지 입장하고 인사를 나눈 뒤 유진이와 난 매니저들이 앉은 뒷좌석으로 빠졌다.
주영인 역시 자기 자리에 앉은 순간 우리 곁에 있는 미소에게 손짓했다.
“미소야. 여기로 와서 앉아.”
“네~”
미소가 주영인의 곁으로 다가가서 앉는다.
현재 촬영 중인 <실종 – 잃어버린 자들>에서 엄마와 딸로 연기를 하다 보니 관계가 많이 좋아져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유진이가 피식 웃는다.
“미소가 처음에는 영인이를 진짜 싫어했는데 요즘에는 아닌 거 같아요. 가끔 보면 막 질투가 날 정도로 친하다니까요? 이거 봐봐요.”
유진이의 폰에는 촬영 현장에서 찍은 두 사람의 사진이 있었다.
유진이는 심통이 난다는 듯 툴툴대면서도 미소를 보는 눈에는 하트가 어려 있었다.
“아 맞다. 스타그램용 영상 찍어야지.”
난 대본 리딩 영상을 촬영한 다음 스타그램에 올릴까 하고 폰을 꺼내 들었다.
폰을 꺼낸 다음 미소를 보고 웃자 미소가 손을 흔들어 준다.
미소가 다시 대본 책을 잡고 대본 리딩을 준비한다.
그런데 그때 유진이가 내 팔을 덥석 잡는다.
“오빠······ 우리 미소 연기 보고 놀라지 마세요.”
“응? 왜?”
“보시면 알아요. 저도 깜짝 놀라서 연기를 말릴 정도였거든요”
최근에는 여러 일 때문에 미소의 연기를 보지 못한 터라 오른손으로 폰을 든 채 알겠다고 답했다.
“어.”
잠시 후.
제작사 미리내의 대표 한유식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지난번 사전 미팅 때 못 오신 분들도 여럿 계시니 모든 출연자가 모인 건 오늘이 처음입니다. 하지만 너무 긴장하지 말고 일단 한번 맞춰 본다는 생각으로 대본 리딩 해봅시다. 스텝 바이 스텝. 첫날은 부족한 걸 찾아가는 과정이니 작은 실수로 스트레스들 받지 마시기 바랍니다.”
월영신 역의 박상규를 비롯해 대학생 커플 역 일곱 살 아이를 데리고 온 부부 운동부 젊은 사내역 중년 부부 친구들의 역들을 비롯해 스태프들까지 40명이 넘는 이들이 일제히 입을 다문다.
“오 PD. 시작하지.”
“예.”
안경을 쓴 오상도 PD가 대본 책을 잡는다.
“바쁜 분들을 힘들게 모셨으니 바로 가겠습니다. 지문은 내가 읽고 나서 각자 대사를 연기해 주시면 됩니다. 처음은 미소지?”
“네!”
“내 지문 리딩이 끝나면 바로 연기 시작해 줘.”
“예.”
지금부터 연기할 장면은 100년 전 박수무당의 재물로 쓰이던 7살 아이 일영(日影)의 마지막 순간이었기에 미소는 심호흡을 하며 배역에 몰입하기 시작했다.
“자······ 씬 1. 100년 전 연무도. 남해의 안개가 자주 끼는 섬. 연무도. 한 달에 한 번 지독한 안개가 끼는 이 섬에서는 박수무당 월영(月影)이 자신의 신력을 보완하기 위해 7살 아이를 동자신으로 만들려는 음모가 진행되고 있다. 작은 나무통 안. 통 안의 일영(日影)은 아무것도 먹지 못한 채 통 사이로 스며드는 물만 먹고 6일을 버텼다. 감각은 무뎌지고 이제 막 시야조차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 순간 일영은······.”
오상도 PD의 내레이션이 끝났다.
그때였다.
탁.
미소가 들고 있던 대본 책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모두의 시선이 미소에게 모인다.
미소가 양팔을 앞으로 쭉 뻗고선 시체처럼 상체를 테이블에 축하고 늘어뜨린다.
그리고 그 순간 유진이의 말대로 미소의 소름 끼치는 연기가 펼쳐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