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84화
784. 스케줄 조정
방송국 PD들은 그 어떤 누구라도 자기 작품에서 맹활약하는 주연이 다른 작품에 출연하는 것을 반기지 않는다.
주연 배우의 이름이 기사에 거론될 때는 현재 자기가 연출을 맡은 작품의 이름만 나오기를 바라서였다.
그렇기에 방송국 PD들과 출연 스케줄 조정을 하기 위해서는 배짱과 동시에 온갖 정보를 머릿속에 담고 있어야 했다.
난 잠깐 심호흡을 한 뒤 오복희 PD가 있다는 세트용 초가집 문을 열고 들어갔다.
달칵.
문을 열자 오복희 PD와 류한준 CP와 김격식 드라마 국장 세 명이 탁자에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쉽진 않겠군.’
오복희 CP와 드라마국 국장까지 와 있는 걸 보니 스케줄 조정의 협상이 쉽진 않겠다 싶었다.
CP나 드라마 국장급이 되면 이런 협상 경험치가 PD를 훌쩍 뛰어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난 절대로 물러설 생각이 없다.
유진이의 드라마 출연 스케줄을 조정해야 영화도 찍을 시간이 생기기 때문이다.
먼저 오복희 PD가 날 보며 환한 얼굴로 인사를 하면서 대화가 시작되었다.
“오랜만이에요 정 실장님. 안 그래도 우리 정 실장님 회사 이야기하던 중이었는데~ 여기 앉으세요.”
“오랜만입니다 PD님.”
“예. 그러니까 좀 자주 오고 그러세요. 우리 정 실장님이 현장에 없으니까 분위기가 안 살아나잖아요~”
“회사 상장 준비로 급한 일들이 많았습니다. 앞으로는 종종 올 예정입니다.”
김격식 드라마 국장도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친다.
“그래 우리 정 실장은 현장에 있을 때가 제일 빛나는 사람이잖아.”
즐거운 분위기 속에서 대화가 시작되었으나 두 사람은 계속해 말을 돌리고만 있다.
이러다가 촬영을 핑계로 빠져나가려는 게 분명하다.
그때 오복희 PD가 다시 한번 말을 돌린다.
“아 그리고 요즘 유진 씨가 촬영장에서 너무 잘해 주셔서 얼마나 든든한지 몰라요~ 그래서 말인데······.”
그 순간 난 그녀의 말을 끊었다.
“칭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만 오늘은 약속하신 드라마 출연 스케줄 조정 때문에 왔습니다. 유진이는 내일부터 LT 엔터와 영화 제작에 들어가니까 일주일에 이틀만 촬영 스케줄을 좀 빼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오복희 PD가 드디어 말을 돌리는 걸 포기하고선 날 설득하기 시작한다.
“정 실장님. 아직 영화 제작사도 제대로 안 정해졌다면서요? 그러니까 당분간은 드라마 촬영에 집중하고 영화 쪽은 한 달만 제작 일정을 좀 미뤄 주면 안 돼요? 예?”
김격식 드라마 국장도 곁에서 말을 거든다.
“그래 정 실장도 알다시피 지금 <화란전>이 21화에 35% 나온 건 진짜 기적이야 기적! 더군다나 판권 해외 판매를 진행 중인데 다들 유진 씨 분량이 늘어났으면 하더라고. 그러니까 당분간은 드라마에만 좀 집중해 주면 안 될까?”
촬영 스케줄을 조정하러 왔는데 오히려 촬영 분량을 늘려 달라고 하다니.
하지만 <화란전>에서는 유화 공주역의 유진이만큼이나 악역인 1왕후와 2왕후 그리고 정화 공주와 도화 공주 캐릭터도 중요했다.
한우주 작가가 쓴 대본에서는 조연 캐릭터들이 유화 공주란 캐릭터의 서사를 완성하기 때문이다.
유진이의 출연 스케줄을 조정하는 것도 중요했지만 한우주 작가의 대본을 지키는 것 또한 내가 할 일이다.
그래서 난 즉시 거절 의사를 밝혔다.
“죄송합니다. 출연 분량을 조절할 순 없습니다.”
“에이~ 그러지 말고 제발 내 사정 좀 봐줘. <신의 이름으로>의 판권을 산 해외 바이어들이 유진 씨만 찾아. 게다가 오 PD 말대로 영화는 좀 미뤄도 되잖아? 응? 그렇게만 해주면 유진 씨 출연료도 지금 당장 편당 1억 5천만 원까지 올려 줄게.”
유진이의 현재 출연료가 편당 1억 1천만 원이니 편당 4천만 원을 더 준다는 건 남은 20화 동안 8억을 더 준다는 소리다.
‘출연료 인상으로 선수를 치다니 제법인데?’
하지만 지금은 그 돈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
“이미 굴렁쇠 엔터가 주식 공모 절차에 들어가면서 유진이의 차기작을 발표했습니다. 그러니 이번 주말 이내로 유진이 영화 작품 감독님도 발표하고 제작에도 들어가야 합니다.”
굴렁쇠 엔터로서도 절대 포기할 수 없다고 배짱 있게 나서자 김격식 국장도 할 말이 사라졌다.
주식 공모에는 출연료 상승과는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돈이 걸려 있기 때문이었다.
드디어 승기를 잡았다 싶던 그 순간 경력 많은 류한준 CP가 슬쩍 꼼수를 제안한다.
“그러면 제작 발표만 하고 제작 일정은 뒤로 좀 미루면 되지 않나? 그러면 주식 시장에 큰 영향은 안 미치고 우리 드라마 촬영도 순조롭게 진행할 수 있잖아. 안 그래?”
늙은 여우의 한 수가 제법이다.
그러자 김격식 국장이 구세주를 만난 듯 밝은 표정으로 말을 거든다.
“그래! 그리고 정 실장이 곤란하면 협상은 우리가 나서서 LT 엔터랑 할게. 어때?”
눈속임이라.
그렇게는 못 하지.
지금부터 분량을 늘리면 한 달 뒤엔 유진이는 <화란전>에서 절대 빠져나올 수가 없게 된다.
다시 말해 영화 제작은 <화란전>이 끝날 때나 찍을 수가 있게 될 것이다.
‘이거 아무래도 경력 많은 이들이 있다 보니 협상이 만만치가 않은데······.’
그렇다면 마지막 강수를 두는 수밖에.
“두 분 말씀대로 유진이 영화 제작을 미룰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 경우 50화 이후로는 절대 스케줄을 빼지 못하고 바로 영화에 투입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잠깐 그 말은······.”
“예. 영화를 찍어야 하니까 <화란전>은 50화에서 이후로는 절대 연장 촬영이 불가하다는 말씀입니다. 그래도 괜찮으시겠습니까?”
현재 <화란전>은 35%에 근접한 시청률이 나오는 중이었기에 방송국 내부에서는 드라마 연장을 논의 중이라는 소식이 들리고 있었다.
그래서 난 지금 당장 스케줄 조정을 해주지 않는다면 드라마 연장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해 버렸다.
그러자 김격식 드라마 국장과 류한준 CP 그리고 오복희 PD의 입이 닫혀 버렸다.
드라마의 시청률은 보통 엔딩 무렵 때 최고로 상승하는데 그때 한 화만 연장해도 막대한 광고 수입을 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즉 <화란전>이 연장되지 않으면 MBS로서는 수십억이 날아가게 되는 셈이다.
꿀꺽. 꿀꺽.
말없이 침을 삼키는 소리만 들린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드라마 연장. 필요 없으십니까?”
그때였다.
김격식 드라마 국장이 한숨을 내쉬며 오복희 PD와 류한준 CP를 쳐다본다.
“오 PD. 류 CP. 이거······ 못 이기는 게임이다. 우리가 졌어.”
오복희 PD와 류한준 CP마저 한숨을 푹 내쉬며 동의를 뜻한다.
“그렇네요. 알았어요. 그러면 오늘 밤 촬영 끝나면 데려가세요.”
“크흠······ 늙은 생강만 매운 게 아니라 요즘은 젊은 생강도 눈물 나게 맵구만 그래.”
결국 유진이는 다음 주부터 일주일에 월요일과 화요일 양일간 빠질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았다.
난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그렇게 드라마 출연 스케줄 조정 전쟁은 나의 승리로 끝이 나고 있었다.
* * *
스케줄 조정이 끝이 난 후 어색해진 분위기를 풀기 위해 현장 스태프들의 회식을 약속했다.
그리고 촬영 시간이 다 되었었기에 초가집에 있던 방송국 스태프와 나 그리고 이영진이 모두 밖으로 나왔다.
오복희 PD는 스케줄 조정이 불발되자 아쉬운 얼굴을 하고 모니터 앞 감독석으로 향했다.
하지만 모니터 앞에 앉은 오복희 PD는 대번에 프로의 눈빛을 하고선 드라마 연출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자자 다들 준비됐으면 촬영 들어가겠습니다. 연출팀 보조 출연자들 의상 체크 다시 한번 하고 라인 맞추세요.”
지금부터 찍을 30화의 씬 11은 유화 공주가 백제와의 전쟁이 벌어지는 평원에 응원차 나왔다가 백제군의 급습에 신라의 장군이 도망간 걸 보고 직접 나서서 패잔병을 수습해 전쟁을 치르는 장면이다.
현재 축구장만큼 넓은 평지 양쪽에는 백제군과 신라군으로 분장한 출연자 각각 300명씩 무려 총 600명이나 도열해 있었다.
그리고 창을 든 보병과 말 위에 앉아 칼을 든 기마병 앞에 유진이가 흰 깃털을 날리는 백마 위에 앉아 있었다.
아직 촬영이 시작하기 전이지만 유진이는 금빛 삼족오가 새겨진 붉은 갑옷을 입은 채 이미 근엄한 표정으로 배역에 몰입해 있다.
덕배는 유진이의 곁에서 검은 갑옷을 입은 채 검은 말을 타고서 배역 몰입을 마치고 앉아 있었고.
푸르르릉~
군마 분장을 한 말들이 머리를 위아래로 흔들며 흥분한 듯 굴기 시작한다.
그때 스태프들이 멀리서 무전으로 정렬이 끝났음을 알려 왔다.
치지직.
-PD님. 정렬 끝났습니다.
“그럼 다들 앵글에서 빠지세요!”
-예.
출연 배우들을 제외하고 스태프들이 앵글 밖으로 벗어난다.
순간 오복희 PD가 긴장한 표정으로 외친다.
“드론 띄워!”
-예. PD님.
위잉 하는 소리와 함께 드론이 하늘로 떠오른다.
드론이 하늘 위로 올라가 소리가 사라지자 오복희 PD가 외친다.
“자 한 방에 갑시다. 배우 대역들은 잘 준비하고 계시고 양 진영은 돌진하다가 30m 앞에서 신호와 동시에 멈춥니다. 자~ 갑시다 레디 액션!”
1번 카메라가 유진이의 바스트 샷을 잡는다.
그러자 유진이의 놀라운 연기가 모니터에 비춰지기 시작했다.
피가 덕지덕지 묻어 있는 붉은 투구 안.
유진이의 눈빛에 푸른 안광이 번뜩인다.
그때 유진이가 옆구리에 차고 있는 칼을 천천히 빼어 든다.
짙은 흙색의 검집에서 차갑게 시린 푸른 검이 스르릉 소리를 내며 빠져나온다.
칼을 빼든 유진이는 천천히 들어 올려 앞으로 쭉 하고 뻗었다.
태양에 반사된 칼날이 번뜩인다.
그때였다.
유진이가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포효하기 시작했다.
『대 신라의 공주로서 명하노니 신라의 땅을 짓밟으려고 하는 저 간악한 무리를 단 한 명도 남기지 말고 쓸어 버리도록 하라!』
유진이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오디오를 가득 채운다.
그 순간 패잔병 역의 배우들이 칼과 창을 꾸욱 쥔다.
패잔병들의 전열이 가다듬어지고 그들의 지친 얼굴에는 열기가 샘솟기 시작한다.
마치 진짜 전쟁이라도 하듯 말이다.
순간 보고 있던 스태프들이 낮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역시 정유진. 카리스마 끝내주네.
-단역 배우들 긴장한 거 봐봐.
-진짜 전쟁 나가는 것처럼 다들 표정이 끝내주네.
현장을 사로잡는 유진이의 카리스마에 스태프들은 흥분하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곁에 있는 덕배가 칼을 빼 들고 힘차게 포효한다.
『신국을 위하여!!』
덕배의 외침이 마치 늑대의 울음소리처럼 평지에 넓게 퍼진다.
듣는 사람의 심장을 두근두근하게 만드는 패기가 한껏 담긴 목소리였다.
그 순간 곁에 선 조연 배우자들이 일제히 창과 칼을 하늘 위로 들어 올린다.
『신국을 위하여!』
『신국을 위하여!』
그와 동시에 덕배가 칼날을 뽑고선 말을 타고 달려 나갔다.
덕배는 마치 대장군과도 같은 기세로 질주했고 신라군의 기마병들이 그 뒤를 따랐다.
그리고 그 뒤를 보병들이 돌진하는 장관이 이어졌다.
두두두두.
수백 명이 일제히 서로를 향해 달려가자 지축이 울리기 시작한다.
그때 오복희 PD가 인터콤으로 지시를 내린다.
“지금 출발!”
히이이이잉~
유진이의 대역 박애린 액션배우가 붉은 갑옷을 입고 백마를 타고 앵글 밖에서 달려와 돌격하는 진형의 제일 앞으로 뛰쳐나간 것이다.
그리고 유진이는
처음 그 자리에 서서 풀을 뜯어 먹는 백마 위에 앉은 채 꼿꼿이 허리를 펴고 표정 연기만 하고 있었다.
말을 경보 수준으로만 탈 수 있는 유진이에겐 아직 마상 전투와 말을 타고 달리는 장면은 무리였기 때문이다.
* * *
“오케이~~ 컷!!”
돌진 씬 마상 전투 씬 충돌 씬 등등.
몇 개의 씬을 나눠 힘든 마상 전투 씬 촬영을 안전하게 마무리 지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패잔병들을 모은 신라군이 승리하고 포효하는 장면까지 촬영을 마쳤다.
대부분이 대역 촬영이었지만 유진이 역시도 액션을 중간중간 한 터라 붉은 갑옷에 가짜 피를 덕지덕지 묻힌 채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오복희 PD가 숨을 헐떡이는 유진이를 향해 다음 촬영이 가능하냐 물었다.
“유진 씨 30화 씬 30. 바로 촬영할 수 있겠어?”
“예······ 헉헉.”
지금부터 찍을 씬은 전쟁을 끝낸 유화 공주 앞에 도화 공주가 뒤늦게 원군을 끌고 나타나 대화를 나누는 씬이다.
사실 극 중에서 도화 공주는 현장 시찰을 나온 유화 공주가 적의 손에 죽임을 당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죽기는커녕 전공을 세운 유화 공주를 보고 시기와 질투에 휩싸이는 씬이다.
“알았어. 유진 씨. 그러면 1분 뒤에 규리 씨랑 촬영하자.”
“예.”
유진이가 대답하자 오복희 PD는 말에 올라탄 민규리를 쳐다본다.
민규리는 연푸른색 무복으로 갈아입은 채 말 위에 앉아 있다.
어릴 때부터 승마를 한 덕분에 민규리는 말을 너무도 잘 다루고 있었다.
“규리 씨. 준비됐어?”
푸르르릉.
민규리는 말의 목을 어루만져 진정시키며 준비가 되었다고 답했다.
“예. PD님.”
“알았어. 그러면 바로 갈 테니까 준비해.”
“예.”
민규리가 숨을 쉬며 배역 몰입을 하기 시작했다.
민규리 역시 재능이 뛰어났기에 액션과 동시에 얼굴에 짜증이 잔뜩 깃든 도화 공주로 빠르게 변신해 버렸다.
그 순간 오복희 PD는 칼을 든 유진이와 말에 탄 민규리를 향해 힘차게 외친다.
“레디~~ 액션!”
유진이가 피가 뚝뚝 흘러내리는 칼을 아래로 내린 채 천천히 앞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붉은 투구와 갑옷에는 검은 피 칠갑이 되었고 곱고 고운 피부에는 피떡이 달라붙어 있다.
『늦었구나······ 도화.』
저벅저벅.
십수 명을 도륙 낸 유화 공주로 배역에 몰입한 유진이는 진득한 살기를 뿜어내며 말을 향해 다가갔다.
그때였다.
말이 유진이의 살기 어린 눈빛을 보고 겁을 먹고 날뛰기 시작했다.
『히이이잉~』
말이 날뛰기 시작하자 민규리는 있는 힘을 다해 말을 진정시키려 한다.
“워~ 워~”
자칫 사고가 날 뻔했지만 민규리가 이를 악물고 말을 진정시키며 촬영을 이어간다.
민규리는 갑자기 벌어진 상황에 이를 갈면서도 차분히 자기 대사를 하기 시작했다.
『무사······하셨네요?』
공손하고 정중한 말투지만 죽지 않아서 아쉽다는 마음이 가득한 목소리다.
그 순간 유진이가 북극의 얼음장처럼 차가운 목소리로 답한다.
『내가 죽기를 바랐나 보군 우리 도화는?』
『그럴 리가 있겠어요? 유화 언니?』
순간 유진이가 말없이 말 위의 민규리와 눈을 마주하기 시작했다.
민규리가 지지 않겠다는 듯 유진이의 싸늘한 시선을 마주한다.
하지만 고삐를 잡은 민규리의 손은 덜덜 떨리고 있었다.
민규리는 손끝을 움직이는 섬세한 연기로 유진이의 연기에 지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그때 유진이가 이를 갈고 칼자루에 손을 올린다.
그러고선 당장이라도 민규리를 베어 버릴 듯한 섬뜩한 표정을 짓는다.
그런데 그때였다.
이번엔 말이 주춤주춤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이히히힝~』
그때였다.
“컷! 오케이!! 그만해요 유진씨! 됐습니다!”
진짜로 사고가 날 것 같았기에 오복희 PD가 촬영을 멈춰 세웠다.
그 순간 유진이는 한숨을 쉬고 빠르게 배역에서 빠져나왔다.
그에 비해 민규리는 몰입한 배역에서 나오는 게 꽤 시간이 걸리고 있었다.
그리고 두 사람의 연기를 멍하니 보고 있던 스태프들은 감탄사를 늘어놓으며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
-크흐~ 정유진. 나날이 연기력이 올라가네.
-어떻게 말이 겁을 먹냐?
-와 진짜 눈빛으로 사람 하나 죽이겠는데?
-민규리도 쫄았는가 본데?
-그래도 민규리 제법이네. 쫄긴 해도 저 정유진의 눈빛을 받아 냈잖아.
-하긴 요즘 메소드 연기를 익혔다던데······ 그래서 그런가?
-그렇다고 해도 정유진한테는 안 되지.
유진이의 연기력에 대한 칭찬이 끝도 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 * *
“수고하셨습니다!”
촬영을 끝낸 유진이는 빠르게 배역 몰입에서 벗어나 생글생글 웃고 있다.
핏물이 가득한 붉은 갑옷을 입은 채로 말이다.
“유 유진 씨. 하하하. 입 옆으로 핏물 흘러내려. 닦아 닦아!”
“그 그래. 유진 씨. 빨리 좀 씻어. 무섭다 야.”
유진이가 피 칠갑이 된 갑옷을 입고 돌아다니면서 스태프들을 경악하게 만들었다.
그에 비해 말에서 내린 민규리는 휘청거리고 있었다.
그때 오복희 PD가 큰소리로 외친다.
“민규리!! 괜찮아?”
그제야 민규리가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숙인다.
“오 오늘 수고 많으셨습니다.”
-역시 유진이가 주연이네.
-왜? 민규리도 저만하면 장난 아니지. 정유진 연기에 조금씩 맞서잖아.
-와~ 진짜 메소드 연기까지 해야지 정유진이랑 비슷해지는구나.
유진이에 대한 칭찬을 잔뜩 들으며 유진이의 얼굴 앞에 흰 수건을 내밀었다.
유진이가 수건으로 얼굴을 닦은 뒤 스태프들을 향해 힘차게 외친다.
“저희 회사에서 오늘 ‘춤추는 생삼겹살’에서 한턱 쏠 테니까 다들 가지 마세요!! 오늘 고생하신 대역 배우님들은 특히요!!”
대역 배우들의 입에서 다시 한번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유진이가 생긋 웃어 준 뒤 발걸음을 옮긴다.
“유진아. 바로 씻으러 갈 거지?”
“가짜 피가 끈적끈적 달라붙어서 그러고는 싶은데 잠깐만 좀 쉬다가요. 저 죽겠어요.”
철컥이는 무거운 갑옷 탓인지 유진이는 조금만 쉬고 싶다고 한다.
“어 그래.”
난 유진이를 데리고 우선은 근처 대기 의자로 향했다.
“일단 갑옷이라도 좀 벗자.”
“네. 그래야겠어요.”
핏물이 잔뜩 묻은 붉은 갑옷을 하나둘 벗기던 그때였다.
민규리가 우리 쪽으로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쟨 또 왜 와?’
최근 장소연의 이슈 때문에 사이도 좋지 않고 TNT 엔터와는 소송 중인 상황이다.
그런데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고서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어느새 내 앞에 도착한 민규리는 작게 숨을 몰아쉬고 말한다.
“후~ 정 실장님. 잠깐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요?”
“무슨 일인데?”
그때였다.
민규리의 입에서 터무니없는 말이 흘러나왔다.
“저 굴렁쇠 엔터로 가게 됐거든요. 앞으로 잘 좀 봐 달라 부탁드리려고 왔어요.”
민규리가 우리 굴렁쇠 엔터로 온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