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77화
777. 감독을 찾아서 4
복한중 서예종 총장은 화를 억누른 채 한범수 학과장의 처분부터 내리기 시작했다.
“한 교수. 자넨 서예종 교직원으로서 학교의 품위를 손상했으니 학과장 자리에서 물러나야겠네. 차기 학과장은 주중에 최일중 교수로 발령 내도록 하지.”
“초 총장님!”
“내 말 안 끝났으니까 끝까지 들어.”
복한중 총장은 한범수 학과장의 입을 다물게 한 뒤 계속해서 말을 한다.
“그리고 내일부터 진행하던 수업도 최일중 교수에게 넘기고 휴직해. 2학기부터는 부에노스아이레스 대학교에 가서 안식년을 취하고. 거기 날씨도 좋고 질 좋은 고기가 그렇게 싸다고 하더군.”
“부에노스아이레스라면 지구 반대편 아르헨티나의 수도 아닙니까?”
“그래서 뭐? 가기 싫어? 그럼 사표 내든지.”
대학교 총장이라 그런지 지구 반대편에 보내 버리겠다는 이야기를 참으로 위트 있게 한다.
당황한 한범수 학과장의 다리가 휘청거렸다.
하지만 복한중 총장은 그런 한범수 학과장의 상태를 보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대신에 그는 연이어 예지현 쉐프의 처분을 내리기 시작했다.
“예지현 쉐프. 앞으로 우리 서예종 교수진을 비롯해 대학원생 중 어떤 사람도 이 레스토랑을 이용하지 않을 걸세. 올해 말까지 잡아 놓은 예약도 모두 취소할 테니 그리 알아 둬.”
“총장님! 그 그런 게 어디 있어요!”
복한중 총장은 대꾸도 하지 않고 함께 온 비서실장을 쳐다본다.
“김 비서. 레스토랑 예약 취소하는 데 법적인 문제라도 있나?”
“없습니다. 그리고 가장 가까운 교수단 회식이 다음 주니까 그것부터 바로 취소하겠습니다.”
예지현 쉐프의 얼굴이 사색으로 변한다.
“초 총장님! 갑자기 이러시는 게 어디 있어요? 교수님들이 안 오시면 저흰 망한다고요!”
“그러길래 왜 이런 갑질을 했나?”
복한중 총장은 혀를 쯧쯧 차더니 비서실장을 향해 지시를 이어 간다.
“비서실장. 그리고 교수들한테도 단체 문자 넣어. 혹시라도 개인적으로 사람들 데리고 이곳에 얼씬하다가 내 눈에 띄면 각오하라고.”
비서실장이 고개를 끄덕인다.
“궁서체 폰트 12로 찐하게 처리해서 메일 보내겠습니다.”
“그래.”
예지현 쉐프는 멍하니 넋을 잃고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플로센스’는 한범수 학과장의 빽으로 운영되는 이탈리안 레스토랑이다.
그리고 주로 서예종에서 특별 회식을 하거나 외부 손님들이 교수들을 접대하는 곳으로 쓰이는 장소였다.
그런데 그게 금지되었으니 플로렌스가 문을 닫는 건 시간문제였다.
복한중 총장은 마지막으로 안길태 총무처장을 보며 한숨을 내쉰다.
하지만 안길태 총무처장은 자신의 빽을 믿는지 두 사람보다 태연한 기색이다.
“총장님. 너무 빡빡하게 구시는 거 아닙니까?”
“헛소리는 됐고. 우리 총무처장은 오늘 일신상의 이유로 사직서를 내는 게 좋겠어.”
“사 사직서요? 고작 이걸로요?”
“고작이라고 했나?”
안길태 총무처장이 언성을 높인다.
“그럼 고작이지 뭡니까? 화가 나서 나도 모르게 손을 올렸을 뿐입니다. 사람을 때리지도 않았고요. 그런데 사직이라뇨!”
그때였다.
난 기회다 싶어 폰을 꺼내 녹음된 파일을 틀었다.
안길태 총무처장의 목소리가 생생히 흘러나온다.
-옷이 젖어서 교훈을 좀 주려는데······.
-씨X! 내가 너랑 굴렁쇠 엔터는 반드시 끝장을 내줄게.
-무릎이라도 꿇고 빌면 또 모를까 아니면 용서 안 해줘!
복한중 총장이 폰에서 흘러나온 안길태 총무처장의 목소리를 듣고선 부들부들 떤다.
“정 실장이 저 녹음 파일을 언론에 뿌리면 어떻게 할 거야? 총무처장 자네 선에서 책임질 수는 있고?”
“아니 그래도······.”
“그리고 자네가 사직을 안 하면 내가 잘려! 그러니까 자네 당장에 사직서 내!”
안길태 총무처장이 씩씩대며 말한다.
“후회 안 하십니까? 이런 식으로 절 자르시면 서예종 올해 하반기 예산이 싹 다 삭감될 수도 있습니다.”
“거참. 자네 처삼촌이 그렇게 해주신대?”
“당연하죠! 그분이 절 얼마나 예뻐하시는데요!”
복한중 총장이 코웃음을 치며 말한다.
“내가 설마 자네 처삼촌이 누군지도 모르고 이럴까. 아니다 그냥 잘난 처삼촌한테 전화나 해봐. 직접 듣는 게 낫겠지.”
“제가 하라고 하면 못 할 줄 아십니까?”
“아 글쎄. 그러니까 직접 전화해 보라니까?”
안길태 총무처장이 하라면 못 할 줄 아냐며 씩씩대면서 곧장 전화를 건다.
“아 예. 저 길태입니다.”
그때였다.
폰에서 흥분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길태 너! 너 지금 무슨 짓거리를 한 거야?
“예?”
-씨X. 지금 토요일에 가족들이랑 밥 먹다가 차관님에게 호출당했다. 처조카가 어떤 개망종이냐며 노발대발하시더라. 너 종업원한테 갑질을 했다면서? 그것도 너희 학교 교직원 아내한테? 야 인마! 요즘이 어떤 세상인데 그딴 짓을 저질러!!
“아. 그 그게······.”
-헛소리하지 말고 너 퇴근하는 대로 집에서 딱 기다려. 오늘 니 대가리가 깨지든 내 대가리가 깨지든 둘 중 하나는 깨지는 날이니까.
달칵.
전화가 끊긴 순간 회반죽처럼 안길태 총무처장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하얗게 질린 안길태 총무처장이 도저히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으로 날 쳐다본다.
“도대체 너······ 대체······ 누구에게 전화했길래 총장님에 처삼촌까지······ 이래? 대통령에게 전화라도 한 거냐?”
난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말씀드렸잖아요. 친구 아빠에게 전화했다고.”
최은태 회장이 한국의 사채왕으로 사회 각층에 막대한 영향력을 미치는 거물이지만 지금의 내게는 그저 친구 아빠일 뿐이다.
* * *
넋이 나간 교수들과 예지현 쉐프를 두고 플로렌스를 나왔다.
복한중 총장이 당황함을 감추지 않은 채로 말한다.
“아 앞으로 우리 서예종이 자네를 건들 일은 없을 걸세.”
서예종 출신의 개인이 날 어찌하는 거야 못 막겠지만 학교 차원에서 조직적인 방해를 하는 건 없을 거라 못을 박는다.
“그러니까 회장님께 잘 좀 이야기해 주게.”
“알겠습니다.”
“저기 지금 좀 전화해 주면 안 되겠나? 내가 회장님 아니 선배님께 전화하기는 좀 어려워서 말이야.”
복한중 총장이 식은땀을 흘리고 있다.
대체 무슨 협박을 했길래 이러는지 모르겠지만 알겠다며 전화를 걸었다.
몇 번의 벨 소리 끝에 전화가 닿는다.
“회장님.”
-그래. 잘 해결됐나?
“예. 복 총장님께서 깔끔하게 처리해 주셨습니다.”
-하하하. 그래. 역시 돈줄을 끊는 게 확실하군.
“대체 뭐라고 하셨습니까?”
-뭐라고 하긴 서예종에 매년 가는 기부금 200억은 끊고 서예종에 개인적으로 대출해 준 수천억은 회수한다고 했지 뭐.
내가 들어도 다리가 떨릴 정도였군.
“복 총장님이 깔끔하게 해결해 주셨으니 이제 없던 걸로 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복한종 총장이 침을 꿀꺽 삼키며 불안한 눈빛으로 날 쳐다보고 있다.
그때였다.
-크흠. 그래도 내가 명동 왕 회장인데 하루 만에 이렇게 말을 바꾸는 건 안 되고······ 조건이 있네.
응?
조건?
나한테도 조건이라니.
친구 아빠를 소환한 값이라고 생각하고 긴장한 채 되물었다.
“뭐 뭡니까?”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떨렸다.
그런데 조건을 말하는 최은태 회장의 목소리도 미세하게 떨리고 있다.
-정 실장이 날 친구······ 아빠라고 소개했으니까 이제 나한테는 아버님······이라고 불러 줘야겠네.
아들과 단둘이 있을 때도 회장님이란 호칭을 듣다 보니 나부터라도 호칭을 바꾸고 싶은가 보다.
괜히 긴장했다 싶어 웃음이 나온다.
“예 아버님. 앞으로는 편하게 불러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은기한테도 제가 따끔하게 한 소리를 하겠습니다.”
-크흠. 고맙다. 유 윤호야. 그리고······ 이제 총장 좀 바꿔 봐라.
“예.”
최은태 회장과 호칭 정리를 하고 복한중 총장에게 전화를 건넸다.
전화를 받은 복한중 총장이 공손하게 허리를 연신 굽힌다.
“예.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예. 회장님이랑 정 실장과의 관계는 절대 입 밖으로 내지 않겠습니다! 예! 예!”
진땀을 흘린 복한중 총장에 전화를 끊는다.
“정 실장. 아 앞으로는 서예종 쪽에 일이 생기면 제일 먼저 나한테 이야기해 주게. 내 기꺼이 두 팔 걷고 나서지.”
서예종 내에 또 하나의 빽이 생겼다.
최은태 회장의 이름을 매번 팔 순 없으니 그것 또한 괜찮겠다 싶었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말인데······ 요즘 자네가 한국 최고의 매니저라는 소문이 있던데 학교에 특강 같은 것도 좀 나와줄 수 있나? 내가 섭섭지 않게······.”
“서예종에는 아직 절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 텐데요?”
“누 누가 그래? 오해야 오해!”
서예종의 총장이 진땀을 흘리는 걸 보니 당분간 서예종의 공격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생각 한번 해 보겠습니다.”
난 그렇게 답한 뒤 여익환 감독 부부와 최은석 실장과 함께 LT 엔터로 향했다.
* * *
LT 엔터 대표이사실.
신종기 대표와 함께 있던 이은주 본부장이 미리 준비해 둔 계약서를 꺼낸다.
여익환 감독이 계약서에 모든 사인을 마치자 신종기 대표는 어이가 없단 표정을 짓는다.
연출을 아예 관뒀다고 알려진 여익환 감독을 고작 몇 시간 만에 데리고 와서였다.
“연출을 그만둔 여 감독을 어떻게 이처럼 빨리 설득했나?”
최은태 회장과의 관계를 말해 줄 순 없기에 슬쩍 말을 돌렸다.
“뭐 그렇게 됐습니다.”
신종기 대표가 혀를 내두른다.
“허~ 내가 솔직히 일 잘한다~ 일 잘한다~ 하는 인간들은 다 만나봤는데 이렇게 빠르게 일 처리를 하는 사람은 정 실장이 처음이야.”
이은주 본부장이 곁에서 한숨을 내쉰다.
“정 실장님. 적당히 일하시면 안 돼요? 사람이 기가 죽어서 살 수가 있어야죠. 우리 대표님께서 맨날 저랑 정 실장님 비교하시는 거 아시죠?”
신종기 대표가 헛기침한다.
“크흠. 내가 언제?”
“제가 오늘만 17번 이야기 들었어요. 정 실장님만큼 일하면 그 연봉 반이라도 줄 거냐고 묻기 전까지요.”
“크흠······ 그 그랬나?”
난 그 틈에 슬쩍 이은주 본부장을 향해 말했다.
“본부장님. 굴렁쇠 엔터로 오시면 지금보다 연봉이······.”
그녀에게 좋은 대우를 받게 해준다면 <그녀는 예뻤다>의 관리를 잘해 줄 것이기 때문이다.
“정 실장. 이 이거 뭐 하는 건가? 왜 우리 본부장을 빼 가려고 그래?”
그 순간 이은주 본부장이 눈치를 채고 말한다.
“아~ 진짜! 확 가버릴까 보다~”
신종기 대표가 당황해서 이은주 본부장을 말린다.
“자 잠깐만! 연봉 10%······ 아니 20% 인상해 줄게!”
이은주 본부장은 최근 <지리산>의 천만 달성을 진두지휘하며 큰 공을 세웠다.
그리고 <그녀는 예뻤다>도 그녀가 모든 것을 책임질 예정이었고.
그러다 보니 신종기 대표에게도 이은주 본부장은 꼭 필요한 사람이다.
“뭐 언 발에 오줌 누기지만 잠깐이라도 언 발이 녹으면 그것도 나쁘지 않죠. 예. 20% 인상 콜!”
잠깐만.
언 발에 오줌 누기라면 다시금 연봉 인상을 요구할 거라는 소린데?
놀란 눈을 했더니 이은주 본부장이 날 보고 살짝 윙크한다.
모른 척해야겠다.
그렇게 연봉 인상을 공언한 신종기 대표는 한숨을 내쉰 뒤 다시금 날 쳐다본다.
날 살짝 흘겨본 그는 웃음기를 지우더니 여익환 감독을 향해 말한다.
“여 감독. 나 돌려 말하지 않고 솔직히 말하지. 나······ 자네보다는 정 실장의 안목을 믿고 투자하는 거야.”
“예.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연달아 세 작품을 망한 것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자넬 신뢰하지 않는 일도 종종 생길 거야.”
“각오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내가 당부하고 싶은 건 딱 하나야.”
“말씀하십시오.”
대체 뭘 당부하려나 귀를 기울였다.
하지만 의외의 말이 나온다.
“일이 꼬일 때마다 괜한 사람 말 듣지 말고 정 실장에게 의지해. 시기도 하지 말고 질투도 하지 말고 괜한 기 싸움할 것 없이 정 실장한테 의지하면 돼. 그러면 정 실장이 알아서 해결해 줄 거야.”
감독의 자존심을 건드는 것 같아서 손사래를 치려 했다.
하지만 그보다 여익환 감독의 대답이 빨랐다.
“대표님은 서예종 교수들이 왜 그리 정 실장님을 싫어했는지 이유를 아십니까?”
“뭔데?”
“정 실장님이 실패하지 않아서입니다. 공학범 감독님의 비리를 고발해서 미워 죽겠는데 계속 성공까지 하니까 더더욱 밉게 본 거죠.”
“그런 사정이 있었나?”
“예 아무튼 전 연출을 제외한 일들은 전부 정 실장님한테 부탁할 생각입니다. 연달아 실패한 저라도 뻔히 보이는 정답지를 놓고 고집부릴 정도로 바보는 아닙니다.”
“으하하. 우리 정 실장이 감독을 제대로 골라 왔군.”
신종기 대표가 웃자 대표이사실에 웃음이 퍼진다.
신종기 대표가 이렇게까지 날 믿어 주니 나 역시 보답해야 할 것 같다.
난 웃음이 멈추길 기다렸다가 신종기 대표에게 말했다.
“대표님. 여기 성여진 씨가 그림을 잘 그리십니다.”
“그림?”
“예. 원래 미술을 하시던 분인데 몇 점 사두시는 게 어떻습니까?”
서예종의 미술학과를 나온 그녀는 차후 남편의 성공과 동시에 그림으로 이름을 알리게 된다.
작품 하나의 가격만 1억에서 5억 사이까지도 하고.
순간 신종기 대표의 눈이 반짝이기 시작한다.
“정윤호의 픽이라 이거지?”
난 멍하니 있는 성여진을 향해 빙긋이 미소를 지었다.
“그림 요즘도 그리고 계시죠?”
“아직 돈 받고 팔 건 아니에요.”
“그러면 지금부터라도 제대로 해 보세요. 여기 작품을 사주실 분도 계시니까요.”
성여진이 멍한 표정을 짓다가 고개를 끄덕거린다.
“예. 그래 볼게요.”
때론 내 주변 사람을 위해 이런 소소한 미래 정도는 흘려줘도 될 것 같다.
* * *
당분간은 숙소 이사와 제작사 설립의 사전 준비를 해야 했기에 여익환 감독과 유진이와의 미팅은 다음 주에나 하기로 했다.
난 이은주 본부장에게 두 부부를 맡긴 뒤 회사로 돌아왔다.
회사에다 감독이 정해졌단 보고를 마치고선 내일 업무를 체크하고 퇴근을 서둘렀다.
내일은 <프로젝트 I.O.A> 방송 때문에 새벽같이 회사에 들렀다가 일산으로 출근해야 하니까.
집에 도착하니 오후 9시가 되었다.
“일찍 퇴근해도 9시네······.”
피식 웃으며 차를 주차장에 댔는데 집 앞에 차들이 가득 세워져 있다.
그런데 그중 체리블라썸의 차량이 눈에 띄었다.
“얘들은 이 시간에 왜 있지?”
체리블라썸의 멤버들은 내일 <프로젝트 I.O.A>의 심사위원 겸 MC로 오전부터 녹화 및 생방송에 참여해야 했다.
그런데 다들 이 시간에 우리 집에 와 있는 건지 모르겠다.
그때 1층에서 왁자지껄 소리가 난다.
-아~ 진짜 내가 오늘 무대에 섰어야 했는데. 그랬으면 박은빈이 1등 하는 거 안 봐도 됐을 텐데!
박은빈에게 우연희가 당한 걸 아직도 잊고 있지 않은 세리의 목소리다.
그러자 우연희가 대답한다.
-세리야 우리도 차기 앨범 준비해야 해서 쉬어야 했잖아.
-쳇쳇쳇. 연우 오빠라도 무대에 섰으면 좋았을걸! 그러면 박은빈이 1등 절대 못 했을 텐데!
서연우가 대답한다.
-에이~ 나도 내일 <프로젝트 I.O.A>에서 애들 레슨 준비해야 해서 무대에는 못 서는 거 알잖아.
박은빈은 <그녀는 예뻤다>의 주인공이 되지 못했지만 세리와 서연우가 빠진 틈을 타 음악방송에서 1위를 차지했다.
그 덕에 저녁때부터 기사가 올라오는 중이다.
[MBS 쇼! 음악센터 화제의 1위 박은빈!]
[박은빈 컴백 후 첫 1위 감격 소감 발표! “모든 게 팬분들의 응원 덕분. 더 자랑스러운 은빈이가 될게요.”]
······.
TK 엔터에서 막대한 돈을 써서 끊임없는 박은빈의 기사들이 올라온다.
하지만 나머지 절반은 내일 첫 경연 결과에 따라 팀 재선정이 있는 <프로젝트 I.O.A>에 관한 것들이다.
[<프로젝트 I.O.A> 1팀. “최고의 실력자들이 모였지만 팀워크는 엉망? 팀 리더 한소원 고군분투. 고은서는 제멋대로?”]
[<프로젝트 I.O.A> 2팀 얼짱 성나라. “보석처럼 빛나는 존재감.”]
[<프로젝트 I.O.A> 2주 차 팀 재선정 투표.]
[<프로젝트 I.O.A> 2주 차 경연 결과에 따라 팀 재선정.]
[<프로젝트 I.O.A> 양빙빙 개인 팬카페. 1만 명이 회원으로 등록.]
<프로젝트 I.O.A>의 1화 방송이 히트하다 보니 굳이 언론 플레이를 하지 않아도 기사들이 넘쳐나고 있었다.
난 폰을 주머니에 넣고선 세리를 달래기 위해 웃으며 1층 거실로 향했다.
덜컹.
그런데 문을 연 순간 어이없는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오빠. 왔어요?”
유진이가 얼굴 전체를 오이로 덮고선 바닥에 누운 채로 손을 들어 올린다.
“어. 그리고 감독님은 섭외했어.”
“당연히 그럴 줄 알았어요.”
당연하다는 그 말이 꽤 듣기 좋았다.
그런데 세리는 하도 떠들어서 누가 오이를 입에 물렸는지 오이를 씹어 먹으면서 손을 든다.
“으물으물~ 유노 오빠. 하이~”
그리고 두 사람의 곁으로는 체리블라썸 서연우 도란희와 은지유 거기다가 하루까지 누워있다.
심지어 인절미와 백설기까지.
왕왕~ 쩝쩝.
냐옹~ 캬하악.
백설기는 오이를 먹고 있고 인절미는 오이를 보고선 털을 곤두세우고 있다.
“다들 뭐 해요 지금?”
오이를 얇게 저미는 정인지 아주머니와 유일하게 앉아 있는 미소가 양손에 저민 오이를 위로 치켜들고 말한다.
“언니 오빠들 내일 TV 나오잖아요. 예뻐지라고 해주는 거예요!”
미소가 주도한 단체 오이 마사지였군.
그때였다.
미소는 내가 오자 벌떡 일어나더니 신이 나서 내 손을 이끈다.
“유노 삼촌도 어서 누워요.”
“나? 난 괜찮은데?”
그때 누워 있는 서연우와 하루가 동시에 말한다.
“형도 오세요······.”
두 사람은 미소의 성화에 자기들도 잡혔다며 손짓을 한다.
결국 나도 어쩔 수 없이 바닥에 누웠다.
그 순간 미소가 얼굴에 오이를 얹어 준다.
착착착.
얇게 저민 오이가 얼굴 전체에 닿자 시원함이 몰려온다.
그러더니 노곤해지기 시작한다.
‘일어나야 하는데······.’
내일 <프로젝트 I.O.A> 방송에서 해야 할 일들이 떠올랐지만 일어나기가 싫어지고 있었다.
그때 미소가 작은 손으로 팔과 다리에 안마까지 해준다.
꾹꾹.
“유노 삼촌. 이짜나요. 나 오늘 학교에서요······.”
미소는 동진이란 아이가 자기 책상에 천사 모양으로 낙서했고 영수란 아이가 자기한테 예쁘다고 고백했고
한울이가 받아쓰기 100점 받았고
은별이가 그림 대회 반 대표가 되었고 말했다.
그리고 자기는 3월인데도 반 친구들을 위해 자진해서 선생님이랑 같이 우유를 날랐단다.
그런데 미소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졸음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그게 1교까지 있었던 일이고요. 2교시 시작하기 전 쉬는 시간에는요······.”
“응······ 그 그래······ 응······ 아~ 그래······.”
4교시까지 이야기를 들어주려 했지만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