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66화
766. 할리우드로? 2
신종기 대표가 투자를 그만두겠다는 뜻을 밝히자 전수도 감독과 전수정 남매 감독의 동공에 지진이 일어났다.
이제껏 자신들을 전폭적으로 지지한 이가 감독이 아닌 매니저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신 대표님.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투자 철회요?”
“지금 하신 말 진심이세요?”
“그래. 회사에서 정유진한테 확실하게 조건을 걸어 놓았다잖아? 굳이 찾아가서 어쩌려고? 싫다는 사람을 강제로 끌고 와서 연기 시킬 방법이라도 있나? 게다가 여기 정 실장이 아니라고 하면 정유진은 하던 영화도 접을 배우야.”
전수도 감독이 화를 꾹 참으며 묻는다.
“지금 그러니까 매니저 말을 듣고서 감독인 우릴 깐다 이 말입니까?”
신종기 대표는 굳이 말해야 알겠냐는 듯한 표정을 짓는다.
전수정 감독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되묻는다.
“대표님. 제가 잠깐 이해가 안 가서 그러는데 지금 여기 매니저랑 배우 나부랭이 하나 때문에 투자를 취소한단 말씀이세요? 예?”
“일단 말에 어폐가 조금 있군. 정유진은 그저 그런 배우 나부랭이가 아니야. 한국 최고의 배우지. 그리고 당연히 여기 정 실장도 그저 그런 매니저가 아니라 시나리오 잘 보기로는 한국 최고고. 그런데 그 두 사람이 자기들의 시나리오를 선택하지 않으면 나도 이 프로젝트에는 투자 못 해.”
전수도 감독이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이고 묻는다.
“그러면 지금까지 시나리오가 좋다고 말씀하신 건 뭡니까? 예? 우리 기분 맞춰 주려고 한 공치사였습니까? 예?”
“아니. 그랬으면 오지도 않았겠지. 근데 시나리오가 좋다는 게 흥행성만을 말하는 건 아니잖아?”
“그렇게 돈에 집착하시는 분이 그동안은 왜 우리를 후원했습니까? 이제껏 칸에 보낸 두 작품 모두 빵빵하게 지원했잖습니까!”
신종기 대표가 몰라서 묻냐며 말한다.
“칸이니까.”
“예? 그게 무슨······.”
“말 그대로 칸이니까 후원한 거야. 솔직히 이번 도 칸에 제출했다면 군소리하지 않았을 거야. 배우도 자네들이 선택한 이로 태클을 걸지 않았을 거고. 하지만 할리우드잖아? 그러니 기준도 바뀌어야지. 예술성이 아닌 대중성으로.”
팔리지 않을 영화라는 이야기를 들은 순간 전수도 감독의 얼굴이 더욱 일그러진다.
순간 전수정 감독이 최후통첩을 날린다.
“대표님 시나리오는 수정할 수 있어요. 하지만 주연 배우 변경 때문에 투자 취소를 하실 거라면 앞으로 우리 관계도 진짜 끝이에요. 감독이 배우 때문에 뜻을 꺾는다면 그것만큼 자존심 상하는 일이 없으니까요!”
그때였다.
신종기 대표가 단 1초도 고민 없이 답한다.
“쯧. 칸에서 상까지 받게는 해주고 싶었는데 어쩔 수 없지. 다른 데 가서도 건승해.”
당황한 두 감독이 서로 시선을 나눈다.
그 순간 전수도 감독이 악에 받쳐 말한다.
“LT 엔터가 이렇게 천박하게 돈만 밝히는 곳인 줄 몰랐습니다!”
전수정 감독이 맞장구를 친다.
“오빠. 그냥 가. 돈만 밝히는 사람이랑 뭘 더 이야기해요? CK 엔터 손 대표가 요즘 우리 보자고 계속 연락도 해왔으니까 이참에 바로 CK 엔터랑 손잡아요. 거긴 LT 엔터랑 달리 업계 1위잖아.”
두 감독이 문 앞으로 다가오더니 내게 말한다.
“너······ 두고 보자.”
“뭐 해? 안 비키고?”
씩씩거리며 두고 보자는 두 사람의 얼굴에는 분노와 당황 그리고 짜증이 가득 어려 있었다.
난 덤덤히 패배자들의 짜증을 무시하고 슬쩍 문 옆으로 비켜났다.
그러자 두 사람은 씩씩거리며 사라져 버렸다.
쾅!
두 사람이 회의실 문을 부서져라 닫고 나갔다.
“저 인간들은 할리우드랑 칸이랑 같은 줄 아나······ 쯧쯧.”
신종기 대표는 혀를 차며 두 사람이 나간 문을 잠시 바라보다 내게 시선을 돌렸다.
“정 실장. 그 시나리오로는 성공 못 하는 거 확실하지?”
“예?”
“뭘 모른 척을 하고 그래? 정 실장이 봤으니까 성공 못 할 거 같아서 핑계 댄 거잖아. 그거 알고서 투자 취소하고 손절했으니까 이젠 안 숨겨도 돼.”
아니.
그러니까 지금.
시나리오 성공 여부를 나한테 물어보려고 두 감독을 데려온 거였어?
어이가 없어 멍하니 쳐다보자 신종기 대표가 씨익 웃는다.
“정 실장만큼 시나리오 잘 보는 사람이 없어서 그래. 그 점은 내 사과하지.”
신종기 대표는 두 감독이 칸이 아닌 할리우드로 간다는 걸 처음에는 반대했다고 한다.
절치부심해 시나리오를 썼으니 충분히 칸에 도전할 만하다고.
모든 걸 지원할 테니까 칸에 다시 도전해 보자고 말이다.
그런데 두 사람이 LT 엔터가 LT 글로벌 픽처스를 만든다는 소식을 듣고선 욕심을 내더란다.
대규모 투자를 해주면 정유진을 주연으로 삼아서 할리우드 진출을 해보겠다고.
반신반의했지만 두 감독이 적극적으로 시나리오를 바꿔 왔길래 내게 한번 평가를 받아 보려 했단다.
이제껏 내가 검토한 모든 영화가 성공했기 때문에.
특히나 이번 <지리산> 같은 경우는 500만 명만 넘겨도 대박이라고 생각했는데 현재 990만 명이 넘은 상태다.
곧 1천만 영화가 다시 나올 판이다 보니 나에 대한 신종기 대표의 믿음은 내 생각 이상이었다.
“예. 솔직히 좀 별로였습니다.”
“하하하. 그럴 줄 알았어. 뭐 하여간 이렇게 됐으니까 내 사과도 할 겸 이렇게 하지. 우리 LT 글로벌 픽처스로 외국계 감독들이 작품 제안을 많이 해오고 있으니까 그 작품 중 하나를 골라 유진이의 할리우드 진출을······.”
“아뇨. 나중에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지금 유진이는 할리우드로 나갈 마음이 전혀 없습니다.”
“응? 그거 으레 하는 말 아니었어?”
유진이가 시나리오를 구한다는 공지를 돌릴 때 해외 로케를 하는 할리우드 영화는 사양한다고 말해 놓았다.
하지만 모든 배우들의 꿈은 할리우드로 진출해서 글로벌 배우가 되는 것.
신종기 대표는 내가 말한 그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겸양의 뜻으로 받아들인 것이었다.
“지방 촬영만 가도 미소랑 헤어져서 힘들어하는데 해외라니요? 당치도 않습니다.”
어차피 유진이가 글로벌 스타가 되는 건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일이다.
현재 OTT 서비스를 제공하는 N.FLIX를 통해 한국 영화와 드라마의 세계 진출이 가속화되기 때문이다.
즉 억지로 할리우드로 나가는 게 아니라 한국에서 드라마를 만들면 할리우드에서 사 가는 시대가 본격적으로 오게 되는 것이다.
메이저 6대 영화사는 물론이거니와 각종 OTT 서비스 업체가 한국에 전진 기지를 세우게 되고.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이 되는 미래가 곧 온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미국인 제작자들에게 굽신거리면서까지 할리우드 진출을 할 마음 따윈 없었다.
또한 유진이가 연예인이 된 이유는 미소를 안정적으로 키우고 행복하게 살기 위한 것.
그래서 난 배우 정유진이 아니라 엄마 정유진의 꿈을 이뤄 주기 위해 유진이를 한국 밖으로 내보낼 생각은 없었다.
그 순간 신종기 대표의 표정이 뒤늦게 딱딱하게 변한다.
“그 그러면······ 시나리오가 좋아도 할리우드에 진출하는 작품은 무조건 안 할 거였어?”
“예.”
“정말로?”
“예. 시나리오 상관없이 정중히 사과했을 겁니다.”
신종기 대표가 멍하니 날 쳐다본다.
그러다 갑자기 테이블 위에 놓인 음료수를 벌컥벌컥 마신다.
“와~ 식은땀이 나네. 그러면 전씨 남매 작품이 좋았어도 거절했을 거라는 거잖아!”
“예.”
신종기 대표가 가슴을 쓸어내린다.
“하아~ 아찔했네.”
“그러길래 미리 언질을 좀 주시죠.”
“정 실장이 연락이 잘 안 되어서 그렇지!”
“그건······ 죄송합니다.”
“크흠. 그렇다고 죄송할 것까지야. 하여간 앞으로는 꼭 미리 연락하고 오도록 할게. 그리고 시나리오가 정 아니다 싶으면 신호를 좀 더 명확히 줘!”
“알겠습니다. 그런데 괜찮으십니까? 저 둘. 할리우드 진출이 물거품이 됐으니까 다시 칸으로 방향을 틀어서 상이라도 덜컥 받아 오면 어떻게 하시려고요?”
“아니? 저 둘 성격이라면 오늘 당장이라도 CK 엔터로 가서 자기들이 쓴 시나리오로 미국 진출을 해보자고 제의할걸? CK 엔터는 천재 감독들이 왔다며 넙죽 받아들일 거고.”
난 그 틈에 슬쩍 에브리데이를 확인해 봤다.
[에브리데이 V13]
[날짜 : 2022년 5월 20일]
-PM 10:00 <일정 삭제>
(삭제된 일정 : <연예계 방방곡곡> 전수도 전수정 남매 감독. “칸 영화제 각본상 수상 쾌거!!”)
‘신 대표님 말이 맞군.’
때론 이렇게 한 번의 선택으로 인간의 운명이 바뀌는 걸 볼 수도 있었다.
그게 어젯밤부터 바쁘게 뛰어다닌 이유였고.
“정 실장. 저기 그러면 유진이는 계속 한국 영화만 한다는 거지?”
“예.”
“알았어. 그러면 뭐가 됐든 나한테 말해. 제작 홍보 배급 뭐든 CK 엔터 놈들보다 더 확실하게 팍팍 밀어주지.”
“아직 시나리오도 못 골랐는데요?”
“아니 왜? 천하의 정유진이 주연인데 왜 아직도 시나리오를 못 골라?”
그때 곁에 있던 강지영 이사가 답했다.
“아무래도 여주인공 단독 작품은 별로 없다 보니 마땅히 눈에 차는 작품이 없더라고요. 남주랑 같이 하는 건 20개 정도 들어왔는데 저희가 고사했고요.”
드라마와 달리 여자 단독 주연의 영화로 흥행한 작품은 거의 없다.
그러다 보니 대부분의 영화 시나리오에선 남녀 공동 주연인 경우가 많다.
난 유진이를 단독 주연으로 내세우고 싶었고.
“흠~ 그래도 그 정도면 영화 한 번도 안 해본 배우치고는 많이 들어왔네. 근데 그중에서 마음에 드는 게 하나도 없다고?”
강지영 이사는 날 쳐다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예. 아직은요.”
신종기 대표가 잠시 고민을 하다 한 가지를 제안한다.
“그럼 이렇게 하지. 유진이랑 언제 우리 회사로 한번 들어와. 한국에 있는 시나리오는 싹 다 우리 제작사로 모이니까 직접 찾아보라고. 혹시 아나? 진흙 속의 진주라도 찾을지.”
LT 엔터의 시나리오실이라면 CK 엔터와 더불어 모든 시나리오가 모인다.
사실 이맘때쯤 나오는 시나리오에서 여성이 단독 주연을 맡은 작품 중 마음에 드는 작품은 2개가 있다.
그중 하나는 곽한선 감독의 <사랑하기 때문에>인데 루게릭병을 가진 아이가 죽어 가는 모습을 지키는 엄마의 이야기를 다룬 휴먼 드라마다.
소이영이 주연한 작품으로 관객 수 500만 명을 달성했는데 전 국민을 눈물바다에 빠트린 작품이었다.
그리고 고기동 감독의 <그녀는 예뻤다>는 교통사고로 얼굴이 망가지고 좌절의 나락에 떨어진 아이돌이 얼굴 재건 성형을 받고 한국 최고의 여자 가수가 되는 로맨틱 코미디 영화다.
관객 수 350만 명으로 <사랑하기 때문에>보다는 관객 수가 적었지만 연기력이 바닥인 ‘쁘띠모’의 박은빈을 주연으로 내세웠는데도 큰 성공을 했을 만큼 시나리오가 잘 나온 작품이었고.
난 그중 유진이가 끌리는 작품으로 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내일 오후에 찾아뵈어도 되겠습니까?”
“그래. 혹시 뭐 원하는 장르 같은 거라도 있나? 이은주 본부장한테 적당히 골라 놓으라고 할게.”
“여성 단독 주연으로 한 휴먼 드라마나 로맨틱 코미디가 어떨까 합니다.”
“알겠네. 그럼 그리 전하지. 그럼 내일 보도록 하지.”
신종기 대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이제껏 기다리던 김관우 부대표가 벌떡 일어나더니 신종기 대표를 안내한다.
이왕 온 김에 관우 엔터 쪽 연예인들도 봐달라면서.
“하긴 합병 이후에 우리가 좀 뜸했지. 그래 그렇게 해.”
“감사합니다 대표님. 이쪽으로 오시죠.”
신종기 대표와 김관우 부대표가 사라졌다.
쿵.
회의실의 문이 닫힌 순간 강감찬 대표가 피식 웃더니 날 쳐다본다.
“이야~ 우리 정 실장 끗발이 장난 아닌데? 신 대표가 정 실장한테 시나리오 성공 여부를 따지러 오고?”
강지영 이사도 키득거리며 웃는다.
“이쯤 되면 우리 정 실장님도 이사로 승진시켜 드려야 하는 거 아닐까요?”
“그럴까?”
난 당황해서 손을 저었다.
“당치도 않습니다.”
강감찬 대표가 빙그레 웃는다.
“지영이랑 회장님 병문안 갔다가 지분 넘겨준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렇게 거절할 필요 없어.”
최은태 회장이 지분을 넘겨주면 나도 15%를 갖게 되는 주요 주주가 된다.
그래서 승진을 미리 말했지만 난 그 제안을 거절했다.
“전 이대로가 좋습니다.”
두 사람이 눈을 동그랗게 뜬다.
강감찬 대표가 내게 되묻는다.
“응? 왜?”
“마음은 감사하지만 전 아직까지 필드에서 연예인들과 함께 뛰고 싶습니다.”
경영진이 되는 순간 일반 매니저의 업무는 하기 어려워진다.
1인 기획사면 또 모를까 상장 후 대형 엔터테인먼트가 되면 경영진들은 일선에서 움직일 여유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내 연예인들의 성공을 담보하기가 어려워진다.
강감찬 대표가 껄껄대며 웃는다.
“으하하하. 이거 요즘 젊은 친구들이 말하는 힘숨찐? 뭐 그런 건가?”
강지영 이사가 고개를 젓는다.
“우리 정 실장님 정도 되면 찐은 아니고 ‘절대자가 힘을 숨겨요’ 같은 장르에요.”
강지영 이사가 요즘 웹소설을 많이 보는 모양이다.
강감찬 대표가 고개를 끄덕인다.
“뭐 그러면 그건 회장님께 회복하고 나면 차차 이야기하자. 일단 유진이 차기작부터 신중하게 골라서 진행해 봐. 유진이가 어떤 영화를 선택하는가에 따라 다음 주 초에 공모 예측할 때 공모가가 20%는 뛸 테니까.”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최영호 은행장은 곧 풀려나서 우리 상장을 도울 거라니까 안심해.”
검찰에 잡혀간 최영호 은행장도 걱정이었는데 천만다행이다.
“아 그리고 이번 주 <프로젝트 I.O.A>는······.”
그때였다.
강감찬 대표가 근엄한 표정으로 외친다.
“<프로젝트 I.O.A>든 최 회장님 쪽 일이든 회사 상장 일이든 나랑 지영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넌 지금 당장 퇴근해! 어제 그 난리를 피우고서 무슨 회사야! 누가 전화하든지 간에 끝까지 전화를 안 받았어야지!”
강지영 이사도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친다.
“그래요. 어제도 그렇고 오늘도 장소연 씨 때문에 난리도 아니었다면서요? 정 실장님은 몸이 열 개라도 돼요? 그러다 쓰러지면 굴렁쇠 엔터 공모가 폭락하는 거 알죠? 우리 회사에 투자하려는 투자자들이 정 실장이 회사에 계속 머무르는지 건강한지 물어본 말이에욧!”
두 사람의 애정 어린 잔소리를 듣는 순간 벌떡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예. 바로 들어가겠습니다!”
난 잽싸게 몸을 돌려 이틀 만에 집으로 향했다.
* * *
다음 날 오후.
<화란전> 촬영 스케줄을 마치고 돌아온 유진이와 함께 LT 엔터로 향했다.
LT 엔터 로비에서 이은주 본부장을 만나 함께 시나리오실로 이동했다.
흰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고 검은 모자를 쓴 유진이는 시나리오실로 가는 동안 날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다.
-유진아 왜 그래?
작게 속삭이자 유진이가 낮은 목소리로 답한다.
-이러다가 오빠가 또 사라질까 봐 감시 중이에요.
유진이가 안 그래도 큰 눈을 부릅뜨자 갑자기 오한이 든다.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함께 움직여야겠다.
-안 갈게.
-약속한 거죠?
-어 약속.
단단히 약속하고 나자 이젠 뚫어지게 쳐다보는 시선이 곁눈질로 바뀐다.
그래 조금은 낫네.
그러는 사이 7층에 도착했다.
달칵.
LT 엔터 7층에 있는 시나리오실 문을 열며 이은주 본부장이 말한다.
“정 실장님이 말하는 조건이 꽤 까다로워서 10개 정도만 추렸어요. 자 이쪽으로 오세요.”
시나리오실 안은 도서관처럼 빽빽하게 시나리오들이 책장에 꽂혀 있다.
영화계도 대부분 디지털화가 되었지만 아직도 종이 시나리오를 원하는 감독과 작가가 많아서다.
연필로 줄을 치고 형광펜으로 표식을 남기는 등 옛날 방식에 익숙한 노장들은 손으로 직접 종이를 만지며 시나리오를 완성해 나가는 걸 사랑하니까.
“저기 앉아서 보시면 돼요.”
이은주 본부장이 시나리오실 한가운데 있는 데스크를 가리킨다.
넓은 데스크에는 우리가 볼 작품 시나리오가 이미 10개가 놓여 있었다.
“유진 씨랑 같이 찬찬히 검토하고 다 보시면 말씀 주세요. 대표님이랑 같이 내려와서 이야기해요.”
난 그 틈에 힐끗 시나리오들의 제목을 확인했다.
‘<천추> <박마리아 이야기> <시한부 패밀리> ······.’
10개 모두 괜찮은 성적을 내는 작품들이지만 내가 찾는 작품은 없었다.
“이 작품이 다입니까?”
LT 엔터 시나리오실에는 한국에 있는 모든 종이 시나리오가 다 있다.
여기에 없다면 <사랑하기 때문에>와 <그녀는 예뻤다>를 연출한 감독들을 찾아가는 수밖에 없지만 그렇게 되면 아쉬운 티를 낼 수밖에 없다.
‘더 기다려야 하나······.’
그런데 그때였다.
이은주 본부장이 고민하다가 옆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시나리오들을 더 가지고 온다.
“실은 여기 더 있긴 한데······ 문제가 있어요.”
대략 20개의 시나리오를 힐끗 쳐다보니 맨 위에 <사랑하기 때문에>가 보인다.
‘하나는 건졌네.’
난 기쁜 마음을 억누르며 물었다.
“문제라뇨?”
그 순간 이은주 본부장이 말꼬리를 늘이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그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