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6화
76. 표절 1
“선우 곡이 표절?”
“예. 박 실장님이랑 저작권 협회에 일 때문에 같이 갔었는데 실장님이 협회 직원이랑 이야기하는 걸 엿들었어요. 먼저 등록한 곡 중 똑같은 곡이 있다고 하더라고요.”
“란희야. 그 소식 언제 들었어?”
“이틀 전이요.”
저작권 협회에 선우의 곡을 등록했는데도 왜 최종 확인서가 오지 않았는지 이제야 알 수 있었다.
‘박한철 실장. 우리 가수 2실을 엿 먹이겠다 이거지?’
도란희는 말해놓고도 약간 걱정되는지 비밀을 지켜달라 말했다.
“걱정하지 마. 우리가 직접 알아본 거로 할 테니까.”
안도하는 도란희에게 먼저 가게 안으로 들어가 있으라고 했다.
“난 전화 좀 하고 들어갈게. 아 그리고······”
“그리고요?”
“좋은 정보였어. 그러니 너한테는 특별히 압구정에 있는 한우명가에서 크게 한번 쏠게.”
도란희의 눈이 왕방울만 하게 커졌다.
“거 거기 1인분에 5만5천이잖아요! 참숯불에 명이나물이 그렇게 대박이라는!”
“그래. 그럼 이제 나 전화 좀 해도 될까?”
“네에. 빨리 전화하고 오세요. 우리 또 2차 가야죠! 하누! 하누! 맛좋은 하누!”
도란희가 기쁨의 포효를 하며 헤드뱅잉을 한다.
취했네.
취했어.
난 곧장 이동민 실장에게 전화로 보고를 마쳤다.
이동민 실장이 당장 알아보겠다고 했기에 난 안심하고 가게 안으로 향했다.
그 잠깐 사이 시켜놓은 치킨은 이미 뼈다귀만 남아 있다.
“그 그러면 2차는 어디로 갈까?”
내 질문에 동기인 영진이가 답했다.
“한우명가.”
도란희가 깜짝 놀라 자신이 말한 게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면 영진이가 헛소리를 지껄이는 거군.
난 웃으며 500cc 맥주잔에 남은 술을 비웠다.
탕.
테이블에 맥주잔이 부딪히는 소리가 꽤 크게 울린다.
“내 사랑~하는 동기 영진아. 내가 잘못 들은 거 맞지?”
순간 영진이가 주춤거렸다.
“그 그럼······ 요 앞에 있는 포장마차나 갈까?”
옆에서 다른 동기들이 항의했지만 난 고개를 끄덕이며 영진이를 따뜻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마무리로 딱 좋네. 콜~.”
영진이의 빠른 후퇴 덕에 난 2차를 3만 원으로 해결할 수 있었다.
* * *
아침부터 이어진 <파란 하늘>의 촬영은 오후 6시가 되어 끝이 났다.
녹초가 된 유진이를 집에다 데려다주고선 곧장 회사로 향했다.
“혹시 이 실장님 못 보셨습니까?”
어제 표절 사건에 대해 보고했더니 오늘 회사에 들어오는 대로 대책회의를 하자고 했었다.
그런데 이동민 실장은 전화를 받지 않고 있다.
정신없이 바쁘게 움직이던 가수 2실의 최강우 팀장이 답했다.
“2층에 있는 제1 연습실에 가 봐.”
제1 연습실은 우리 회사에 있는 것 중 가장 큰 연습실로 주로 골든로드와 체리블라썸이 사용하는 곳이다.
알겠다고 인사하고 곧장 2층으로 향했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자마자 바로 앞에 있는 제1 연습실의 유리문을 살짝 열었다.
그런데 있어야 하는 체리블라썸 대신 골든로드가 연습 중이었다.
짝짝!
요란한 박수소리와 함께 골든 로드 멤버들이 일제히 터닝을 했다.
“그래! 거기서~ 턴! 하나. 둘. 은영이 좋아. 수진이 오른손 내려갔어. 명은이 집중 안 하지!”
성은수 안무 팀장이 트레이닝복에 머리를 질끈 묶은 골든로드의 연습을 봐주고 있었다.
어찌 된 영문인지 몰라 문을 닫고 나왔다.
그리고는 연습실 입구에 걸려 있는 LCD 알림판을 확인했다.
분명 오후 7시부터 9시까지는 [체리블라썸 연습]이라고 적혀 있다.
현재 시각은 오후 8시.
그런데 왜 골든로드가 있는 거지?
박선녀 에어로빅으로 레슨을 받으러 가는 건 오후 11시.
벌써 연습을 끝내고 갔을 리는 없다.
‘설마 밀려난 건가?’
그때였다.
아까 날 봤는지 성은수 안무 팀장이 문을 열고 나타났다.
마치 독이 잔뜩 오른 맹수 같은 눈빛으로.
“너도 참 오지랖도 넓다. 여기가 어디라고 왔어?”
성은수 팀장의 말에는 가시가 잔뜩 돋쳐 있었다.
“체리블라썸이 연습하고 있을 시간이라 찾아왔습니다.”
성은수가 코웃음을 치며 노려본다.
“니들은 에어로빅 아줌마한테 가서 트레이닝 받는다며? 그래서 우리 골든로드 애들이 쓰고 있는 건데. 왜? 무슨 문제 있어?”
그녀의 한 마디 한 마디에 적의가 넘쳐흐르고 있었다.
박선녀의 에어로빅 학원에서 포인트 레슨을 받기로 한 건 사실이지만 나머지 시간에는 어떻게 하라고?
“성 팀장님이 왜 화를 내시는지는 알겠는데 그렇다고 해도 정해진 연습 시간은 지켜주셔야죠.”
“뭐?”
“저희 안무 시간을 쓰셨으니 다음 타임은 저희 애들이 쓰겠습니다.”
또박또박 대꾸하자 성은수 안무 팀장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웃기고 있네. 난 우리 애들 데리고 오늘 새벽까지 연습할 거니까 꿈도 꾸지 마!”
새벽까지?
유리문 너머로 하얗게 질려버린 골든로드의 얼굴이 보였다.
미안 애들아.
너희 안무 선생이 미쳤나 보다.
날 쳐다보는 골든로드의 표정이 일그러지고 있었지만 내 잘못이 아니야.
연습실로 들어간 성은수 안무 팀장이 골든로드 멤버들에게 소리를 빽 하고 질렀다.
“뭘 봐! 연습 안 하고!”
뭐 큰 상관은 없다.
골든로드의 스케줄이 빌 때 연습하면 되니까.
하지만 지금의 이 짓은 반드시 갚아줄 생각이다.
더 높은 인기를 가지게 되면 연습실 사용우선권은 언제든지 바뀔 수 있으니까.
이번에는 한명호 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윤호야?
“팀장님. 어디 계십니까? 대 연습실에 왔는데 성 팀장님이······.”
-지하 소극장으로 와라. 성은수 팀장이랑 좀 껄끄러워서 여기로 내려왔다.
벌써 한바탕했다는 거군.
“바로 내려가겠습니다.”
난 한명호 팀장의 전화를 받고선 지하 2층 소극장으로 내려갔다.
녹음실을 끝에 있는 지하 2층의 소극장은 150석의 관중석과 무대가 있다.
방송국 공개홀의 무대보단 약간 작았지만 실전 연습을 하기에는 안성맞춤이다.
비록 원해서 하게 된 바는 아니지만.
나는 연습에 방해될까 봐 조심스레 뒷문을 열고 들어갔다.
둥! 둥! 두두둥!
문을 열자 강렬한 퍼커션 사운드가 울려 퍼졌다.
무대 위에선 체리블라썸이 곰돌이 맨투맨 티셔츠에 트레이닝 바지를 입고 춤을 추고 있었다.
‘안무가 바뀌었나 보네. 이게 파이널 버전인가?’
체리블라썸 멤버들이 일제히 두 손을 위로한 채 허리를 돌렸다.
허리를 위로 튕길 때마다 살짝살짝 라인이 드러난다.
어린아이도 따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쉬운 동작에 포인트가 살아 있어 어필하기도 딱 좋다.
‘캬. 대박이네.’
아이돌 안무는 어린아이가 따라 출 수 있을 정도로 쉬운 춤에 ‘포인트’를 가질수록 크게 성공할 확률이 높다.
물론 디테일하게 파고들면 쉽게 따라 하기 힘든 난이도를 가지고 있어야 하고.
박선녀 안무가가 짜준 안무는 그 두 가지 흥행 요소를 모두 가지고 있었다.
곡 제목처럼 허리를 쓰는 동작이 많다 보니 그냥 ‘허리 업’ 안무라고 불러도 될 것 같다.
체리블라썸의 포메이션도 처음과는 완전히 달라진 상태였다.
초기 버전 안무는 세리가 다이아몬드 포메이션의 뒷부분이었는데 지금은 맨 앞이다.
왼쪽에 양은비 오른쪽은 은아가 있고 우연희는 맨 뒤에서 댄스를 추고.
그동안은 세리가 춤을 못 춘다고 생각해서 자연스레 뒤로 보냈었다.
하지만 세리에게 쉬운 안무를 주고 앞 열에 세운 것만으로 상큼함이 극대화되고 있었다.
단지 안무와 배치를 바꾸었을 뿐인데 이런 느낌이 들게 하다니.
역시 박선녀를 잡은 건 신의 한 수였다.
“하나~ 둘~ 셋~ 호우~!”
녹음된 박선녀의 목소리가 소극장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왔다.
무대 아래의 좌석에서는 한명호 팀장이 폰으로 촬영하고 있었다.
모니터링을 위해 녹화하는 거군.
“오케이~. 일단 여기까지. 얘들아 잠깐 쉬고 하자.”
한명호 팀장이 커트를 외치며 음악을 끈 순간 체리블라썸 멤버들이 무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때 우연희가 어둠 속에 있는 날 어떻게 발견했는지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오빠!”
쟤는 눈에 적외선 카메라라도 달렸나.
“어. 수고 많다.”
손을 흔들며 계단으로 내려가자 연이어 인사가 쏟아졌다.
“정 대리님. 헤이요~. 와썹!”
양은비의 인사가 바뀌었다.
“정 대리님. 안녕하세요.”
은아는 날 발견하고 일어나서 공손하게 허리를 굽혔다.
“헐~. 은아야. 네가 그렇게 인사하면 난 뭐가 돼?”
양은비가 장난스레 투덜대자 은아의 얼굴이 발개졌다.
“미안해 언니.”
무슨 소리라도 들었는지 이젠 다들 정 대리라는 말이 달라붙었다.
그냥 오빠라고 하면 더 좋은데 말이다.
하지만 세리만큼은 그딴 건 신경 쓰지 않고 손을 위로 들어 올리며 외쳐댔다.
“세하~!”
‘세하’는 세리 하이의 줄임말.
“어. 세하~.”
원거리 하이파이브를 받아주자 세리가 만족한 듯 생글대며 웃음을 지었다.
한 명씩 인사를 받아주고 한명호 팀장에게 음료수를 담은 봉지를 넘겼다.
“얘들아. 다들 내려와서 이거 먹고 해.”
체리블라썸이 무대 옆 계단으로 줄줄이 내려왔다.
음료수로 목을 축인 우연희가 물었다.
“우리가 여기로 내려온 건 어떻게 아셨어요?”
양은비가 음료수를 홀짝이며 대신 답했다.
“한 팀장님한테 전화해 봤겠지.”
역시 양은비가 있으면 구체적인 설명할 필요가 없어 편하다.
다들 땀을 잔뜩 흘려 옷 입고 샤워한 것처럼 흠뻑 젖은 상태다.
녹초가 된 얼굴에 땀이 잔뜩 흘러내렸는데도 다들 참 예쁘고 상큼하다 싶다.
아차.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한 팀장님. 실장님 어디 가신지 아세요? 전화를 안 받으시던데요.”
“실장님? 아까 본부장님한테 가셨는데. 왜? 무슨 급한 일이라도 있어?”
이동민 실장은 한명호 팀장에게도 방선우의 표절 건을 말하지 않은 모양이다.
하긴 말하면 걱정거리만 늘어나지.
“아뇨. 별일 아닙니다. 그나저나 팀장님. 연습실 문제는 어떻게 하실 겁니까? 상황이 골치 아프게 된 것 같습니다만.”
한명호 팀장이 한숨을 쉰다.
“할 수 없지 뭐. 저렇게 노골적으로 유세를 부리는 걸 보니 골든로드 스케줄 빌 때나 사용해야 할 것 같다.”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윗선에 말해 봤자 골든로드의 일본 합동 콘서트 준비 핑계로 먼저 써야 한다고 말할 테니까.
그때였다.
우연희가 입술을 살짝 깨물고는 결심을 한 듯 이야기한다.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저흰 여기서 계속 연습하면 되니까.”
양은비도 고개를 끄덕이며 우연희의 말에 동조했다.
“어차피 성 팀장님은 저희 레슨 잘 안 봐주셨으니까 괜히 올라가서 마주치는 것보다 저희끼리 하는 게 좋아요. 그리고 저흰 박선녀 선생님 학원에서도 연습할 수 있고요.”
한명호 팀장이 안타까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조금만 고생하자. 이번 곡 성적 좋으면 내가 성 팀장 밀어내고 시간 보장받을게.”
“네!”
체리블라썸이 일제히 답했다.
‘어휴. 무슨 지하 아이돌도 아니고.’
그런데 세리가 날 쳐다보며 자랑을 시작했다.
“유노 오빠. 박쌤이 나 춤 잘 춘다고 센터에 세워주셨어요!”
“이야. 그랬어?”
“네. 드디어 제 춤 실력을 알아주는 선생님을 만났어요!”
세리가 손가락으로 브이를 그렸다.
은비가 그게 아니라고 뒤편에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하지만 괜히 말해서 세리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은 모양이다.
내가 볼 때도 그렇다.
세리는 노래엔 재능이 뛰어나지만 춤에 관해서는 재능보단 노력파니까.
아마 ‘생동감’ 하나만 보고 세워놓은 거겠지.
어쨌건 다들 이번 곡과 안무가 잘 나왔기 때문에 밝은 기색이다.
내게서 칭찬받은 세리는 자신의 포부를 밝혔다.
“언니들. 우리 이번에 꼭 1등 해서 연습실 뺏자!”
역시 우리 세리 포부 한번 대단하다.
조금 전까지 투덕대던 양은비가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세리 말에 동감. 이런 좋은 곡에 좋은 안무를 받고도 1위를 못 하면 창피해서 식구들 얼굴도 못 봐.”
우연희가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그럼 화이팅 한번 해요.”
“그럴까?”
나도 4인의 손 위에 손을 올렸다.
세리의 선창으로 모두가 목이 터지라고 소리를 질렀다.
“올봄에는 꼭~ 꽃피게 해주세요!”
나는 가슴속에 4인의 소녀들의 간절한 염원을 담고 본부장실로 향했다.
* * *
본부장실에선 강지영 본부장을 비롯해 곽무혁 법무팀장 그리고 이동민 실장이 서류를 잔뜩 펼쳐놓고 회의를 진행하는 중이었다.
자리에 앉자 이동민 실장이 이제까지의 상황을 말해준다.
“협회에 알아보니까 한 곡만 등록한 게 아니더라고. 다른 회사에서 선우의 구형 노트 패드에 들어있던 20곡 전부를 먼저 등록했더라. X 같은 놈들.”
“스무 곡을 전부요? 대체 거기가 어디랍니까?”
발끈하는 내 질문에 이동민 실장이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
“거기가 어디냐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