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5화
75. 곡이 완성되다
유진이를 현장에서 출퇴근시키는 일이 끝나면 매일 밤 박선녀의 에어로빅 교실로 출근 도장을 찍었다.
그러기를 일주일.
드디어 박선녀가 날 원장실로 불러들였다.
“정윤호 씨.”
“예?”
“잠깐 저 좀 볼까요?”
유진이 덕에 내 얼굴이 연예 기사면에 종종 나왔기에 그녀도 날 알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오늘도 부르지 않는다면 내가 먼저 찾아가려 했는데 다행이다.
원장실로 가자 박선녀가 날 살짝 째려본다.
“······기획사 분이시죠? 신문 기사에서 봤으니까 거짓말할 생각은 하지 마시고요.”
역시나 아는군.
“예. 원장님.”
박선녀가 한숨을 내쉰다.
“그만 나가주시겠어요?”
응?
이렇게 갑자기?
조건이라도 말해보려 했지만 박선녀가 고개를 젓는다.
“에어로빅을 배우려는 마음도 없으신데 괜한 노력하지 마세요. 환불은 바로 해 드릴게요.”
잠깐.
배우려는 마음이 없다니?
“원장님. 안무 의뢰를 맡기고 싶어 온 건 사실이지만 제가 에어로빅을 배우려는 마음이 없다뇨? 억울합니다!”
매일 밤 내 햄스트링이 제대로 붙어 있는지 확인하기를 벌써 일주일.
내 온몸에는 파스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덕분에 유진이에게 화생방 훈련하는 것 같다는 소리도 들었는데?
억울하다.
억울해서 견딜 수가 없다.
춤을 못 췄다고 배울 마음이 없다는 소리를 들어야 한다니!
“일주일이나 되었는데 기본 동작도 못 하시는 것 치고는 좀 뻔뻔하신 거 아녜요?”
내 딴에는 잘하는 줄 알았는데.
눈물이 앞을 가렸다.
“그러니까 지금 제가 춤을 못 춰서 그런다고 생각······ 하아. 절대 아닙니다!”
나의 혼을 담은 강변에 박선녀가 주춤거렸다.
난 잠시 계약을 잊고 매일 밤 얼마큼 열심히 연습했는지를 ‘시연’했다.
순간 박선녀가 움찔댄다.
“모 몸치셨구나. 난 그것도 모르고. 큼.”
그녀의 팩폭에 심장이 멎을 뻔했다.
“그걸 굳이 또 입으로 말씀하실 것까지야······.”
내가 박자 감각이 부족하다는 걸 확인하고서야 박선녀가 사과했다.
“그 그건 사과하죠. 하지만 저랑 계약하러 오신 건 맞으시잖아요!”
“예. 맞습니다.”
“TK나 빅스타에서 제가 안무 짜줬다는 걸 들으셨는가 본데 저 더는 아이돌 안무 안 짜줘요.”
한국 기획사의 대우에 실망한 그녀는 역시나 내게 선을 그었다.
하지만 난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조건만이라도 들어봐 주십시오.”
박선녀가 손짓을 한다.
“아뇨. 기대했다가 실망한 게 한두 번이 아니······.”
난 그녀의 말을 끊었다.
“계약금으로 2천만 원!”
“예?”
“그리고 TOP 3에 들어가면 인센티브 천만 원! 1위가 되면 인센티브 2천만 원! 어떠십니까?”
“그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박선녀가 입을 쩍 벌린다.
그녀가 이런 제안을 받는 건 앞으로 1년 뒤.
미국 프로듀서에게서나 받는 제안이다.
그러니 지금 이 순간 내가 꺼낸 말은 훨씬 더 값어치가 있을 제안이다.
대신 난 그 차이 나는 값어치만큼 한 가지 부탁을 더 했다.
“대신 저희 애들 레슨을 좀 도와주십시오. 저희 체리블라썸 애들. 진짜 가능성이 있는데 꽃을 못 피우고 있습니다. 선생님!”
고개를 팍하고 숙였다.
그리고 체리블라썸이 회사 내에서 받는 레슨 영상을 틀었다.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
박선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안무가······ 애들 실력을 못 따라가네요. 아 그러니까 체리블라썸 애들의 포텐이 발휘가 안 된다는 뜻이에요.”
난 이때다 싶어 이동민 실장이 만들어 준 계약서를 내밀었다.
회사에서는 안무에 관해 어떤 터치도 하지 않겠다는 내용이 적힌 계약서를 말이다.
계약서를 읽어본 박선녀가 호쾌하게 말했다.
“알겠어요. 상도의가 있지 이 정도까지 부탁하는데 거절하면 예의가 아니죠.”
박선녀가 사인을 마치고 내 손을 잡는다.
그녀가 원하는 건 돈도 돈이지만 안무가로서 자존심을 세울 수 있는 대우였으니까.
일주일간 버텨준 내 햄스트링의 승리다.
그런데 사인을 마친 박선녀가 말한다.
“아 참. 제가 오해했으니. 우리 회원님? 오늘부터 제가 특별히 그 몸에다 박.자.감.각을 새겨드리겠어요. 자~. 레츠~ 호우~!”
난 그녀의 손에 끌려가며 답했다.
“메시~.”
그녀가 날 쳐다보며 찌릿한 눈빛을 보낸다.
‘역시 호날두 팬이구나.’
그리고 그날 깨달을 수 있었다.
그녀는 타고난 선생님이었다.
박치였던 내게 강제로 박자 감각을 심어줄 수 있을 정도였으니까.
* * *
박선녀와 계약을 마친 뒤 곧장 작사가 섭외에 나섰다.
내가 작사가로 생각하는 사람은 까까오 페이지에서 연예계를 다룬 소설을 쓰는 웹소설 작가인 장예빈.
그녀에게 작사 의뢰에 관해 이메일을 보냈다.
메일 주소가 쉬워 기억을 떠올리는 건 어렵지 않았다.
메일을 받은 장예빈이 직접 회사 근처 카페로 찾아왔다.
질끈 묶은 머리에 다크서클이 턱까지 내려온 초췌한 모습이다.
어제 새벽까지 집필하다 메일을 받은 탓에 한숨도 못 잤다나.
장예빈은 그린티에 휘핑크림을 잔뜩 올린 음료를 호로록 들이켰다.
“저 작사비는 얼마나 받을 수 있나요?”
그녀는 현재 한 달에 백만 원을 겨우 버는 인기 없는 웹소설 작가.
하지만 1년 뒤.
자신이 쓴 소설 속 주인공 ‘희연’이 부르는 노래의 가사를 TK 엔터의 쁘띠모에게 넘기며 대박을 터트린다.
그 뒤론 아예 작사가로 전업하게 되고.
그 사정을 알기에 난 최대한 후하게 대했다.
그녀는 연간 작사하는 곡만 50개나 되는 작사 머신이나 다름없었으니까.
“곡당 2백만 원으로 측정했습니다. 이 정도면 A급 대우입니다. 작가님.”
장예빈의 표정이 환해졌다.
“고 곡당요? 진짜요?”
“예.”
“그러면 몇 곡이나 작사를 맡기실 생각이세요?”
충혈되어 붉게 물든 눈빛을 받아내며 한 가지를 더 말했다.
“그보다 작가님. 전속 계약 생각은 없으십니까? 그러면 곡당 작사비를 3백만 원까지 드릴 수 있습니다. 당연히 저작권료는 작가님 몫이고요.”
내 제안에 장예빈이 고민에 휩싸인다.
“혹시 매일 출근해야 하나요? 저 회사 생활은 진짜 안 맞는데······.”
난 웃으며 말했다.
“재택근무입니다. 작업 환경이 마땅치 않으면 회사에 작업실을 마련해 드리고요.”
순간 장예빈의 얼굴이 환해졌다.
“언제부터 일하면 될까요?”
“바로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저희 급하거든요.”
“혹시 지금 곡이 있나요?”
“예.”
“그럼 계약서부터 쓰죠. 바로 작사해 드릴게요.”
“네?”
혹시나 하고 내민 계약서에 사인을 마친 장예빈은 이어폰을 귀에 꽂고 방선우가 만든 곡을 듣기 시작했다.
장예빈은 흥겨운 듯 몸을 흔들더니 그 자리에서 손바닥만 한 노트를 꺼내 들고 빠른 속도로 필기를 하기 시작했다.
천재는 악필이라는 듯.
그녀가 써대는 글자는 분명 한글인 거 같긴 한데 도통 알아볼 수가 없었다.
셀프 암호화다.
잠시 후.
후련해진 표정의 장예빈이 노트 맨 윗부분에 타이틀을 적었다.
체리블라썸의 다음 노래가 카페 한구석에서 순식간에 탄생했다.
“어때요? 제 생각에는 엄청 잘 나온 거 같은데······.”
“어 어떻게 이렇게 빨리?”
“노래 들으면서 즉석에서 다른 가사를 붙여 부르는 게 취미거든요.”
그래서 일 년에 수십 곡씩 쏟아냈구나.
“저 그런데 글씨를 알아볼 수가 없어서요. 죄송하지만 가사를 까톡으로 보내 주시면 안 될까요?”
장예빈이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죄송해요······”
장예빈은 무안한 표정을 짓더니 까톡 메시지로 가사를 적어 보내 줬다.
순간 난 속으로 환호를 질렀다.
그녀의 히트곡 중 최고 히트곡인 와 거의 흡사한 가사였으니까.
난 기쁨을 감추고 까톡을 이동민 실장에게 보냈다.
1분이 지난 후.
전화가 걸려왔다.
-대박! 윤호야! 계약했어? 했다고 말해!
“흐흐흐. 했습니다.”
-잘했어! 선우도 마음에 쏙 든단다! 그런데 어떻게 가사를 이렇게 빨리 받았데? 미리 작업해 둔 것도 아니고.
“즉석에서 하더라고요. 천재라고 했잖아요.”
-미친······.
전화를 바꿔 받은 방선우도 자기 마음속의 흐릿했던 이미지를 제대로 캐치해 낸 가사라며 기뻐했다.
작곡가와 프로듀서가 오케이를 내렸으니 난 부담 없이 말할 수 있었다.
“여기 계좌번호로 입금해 드리면 될까요? 작사가님?”
작사가로 불린 장예빈이 씨익 웃음을 짓는다.
“잘 부탁드려요. 정윤호 대리님.”
드디어 체리블라썸의 신곡이 완성되었다.
* * *
“여기야~. 윤호야!”
대리 승진 턱을 쏘기 위해 나와 함께 입사한 동기들과 회사 앞 ‘알봉이 통닭’집에서 약속을 잡았다.
함께 들어온 20명의 매니저 중에서 남아있는 건 날 포함해도 고작 다섯.
배우 2실에 남은 영진이를 빼면 배우 1실에 한진태 그리고 배우 3실에 최명석 마지막으로 가수 1실 소속의 도란희였다.
“왔어?”
“어.”
대리 승진 턱이지만 도란희를 빼고는 모두가 나이가 같아 회사 밖에선 친구처럼 지내고 있었다.
술이 한 잔 두 잔 돌기 시작하자 다들 알딸딸하게 취해 내게 속내를 털어놓았다.
“에휴. 윤호 넌 벌써 대린데 난 뭐냐?”
술이 제일 약한 한진태가 고개를 푹 떨구며 한숨을 내쉰다.
“야! 윤호가 이상한 거지 우린 제대로 하고 있잖아.”
영진이가 항변하자 한진태가 웃는다.
“야 말도 마라. 나 하루도 안 깨지는 날이 없다. 위로는 선배에 방송국에 가면 PD부터 AD까지 날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라니까?”
“야. 너만 그래? 나도 그런다. 그래도 넌 담당하는 배우가 진상이라도 안 피지. 내 배우는 어떤 줄 알아······. 나 솔직히 매일 숨어서 울어.”
서로가 얼마나 힘든지 경쟁하듯 말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시기하는 사람은 있었다.
“지금 당장은 몰라도 끝까지 가는 건 가봐야 아는 거지 안 그래? 윤호 너 요즘 너무 나댄다고 말 많은 거 알고 있냐?”
배우 3실의 최명석이 툭 던진다.
갑자기 분위기가 싸해졌다.
“야. 무슨 말을 그렇게 해?”
영진이가 팔을 붙잡고 말렸지만 최명석이 손을 휘저었다.
“왜? 난 말도 못 해?”
난 영진이를 말렸다.
“영진아. 괜찮아. 그리고 명석아. 미안하다. 나도 살아보려고 아등바등하다 보니까 그렇게 된 거야. 얀마. 화 풀어. 난 뭐 나대고 싶어서 나대냐?”
회귀 전이었다면 이 정도 말로도 멱살잡이라도 했을 거다.
하지만 회귀하고 보니 10년이나 어린 녀석의 질투 정도는 재롱잔치를 보는 것 같다.
어차피 내 목표는 정실모를 띄워주는 것과 김동수를 무너뜨리는 것.
이 동기들은 오히려 내 편으로 끌어들여야 했다.
거기다 최명석은 원래 성격이 나쁜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김동수 밑에 있다 보니 자기도 모르게 옮은 모양이다.
나는 녀석의 비어있는 술잔에 술을 따랐다.
“명석아. 윗선에서 싸운다고 우리끼리 그러진 말자. 막말로 팀장 승진은 네가 먼저 할 수도 있잖아. 네가 맡은 배우가 우리 중에 제일 잘 나가잖아? 안 그래?”
현재 최명석은 배우 3실의 탑배우 이병준의 로드매니저 역할을 하고 있다.
실제로 일은 그 위의 나규철 팀장이 다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지.
“그 그렇기야 하지······.”
“난 운이 좋아서 그런 거야. 그리고 넌 일 잘한다고 김동수 실장님이 직.접. 스카우트했잖아. 안 그래?”
동기 중 가장 일을 잘하던 최명석은 내가 띄워주자 슬그머니 어깨를 펴기 시작했다.
내게 승진에서 뒤처지니 괜히 배앓이 꼴렸지만 손뼉도 마주쳐야 불이 붙지.
“하~ 진짜. 쪽팔리게 시리······. 알았다 알았어! 그래! 내가 너보다 먼저 팀장 달면 되지.”
최명석의 얼굴이 풀리자 다시금 분위기가 좋아졌다.
말없이 홀로 치킨을 먹던 가수 1실의 도란희가 내 곁으로 다가왔다.
그런데 이상한 소리를 한다.
“오빠. 그런데 이번에 오빠가 데리고 온 작곡가 표절했다는 소문이 도는 건 아세요?”
순간 흐릿해지던 정신이 맑아졌다.
이건 또 무슨 소리지?
방선우가 표절 작곡가?
순간 혹시나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절대 음감.’
방선우의 귀는 보통 사람과 달라 세상에 떠다니는 모든 음을 캐치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자신도 모르게 남의 곡이나 멜로디를 따올 수 있겠다는 생각이 언뜻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고개를 털었다.
‘아냐. 선우는 들었던 음을 모두 기억하잖아?’
그렇다면 절대로 겹칠 일이 없었다.
이제야 선우가 죽는다는 일정에 관한 단서가 잡힌 것 같다.
나는 도란희를 데리고 가게 밖으로 나섰다.
거리의 왁자지껄한 사람들의 소리가 자연스레 우리 대화를 가려줬다.
“자세히 좀 말해 봐. 선우가 표절 작곡가라니?”
“이건 S급 정본데. 치킨 가지고는 부족한 거 아시죠?”
승부를 볼 타이밍을 아는구나.
도란희 무서운 여자 같으니라고.
“좋아. 우리 란희 먹고 싶은 거 다 먹어!”
“한우 콜?”
닭 다리를 4개나 먹어 놓고 한우라니.
역시나 도란희다.
“당연하지. 대신 저 하이에나들 없는 날로 잡자.”
도란희가 가게 안을 슬쩍 쳐다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죠. 저 하이에나들이랑 있으면 저 고기 한 점도 못 먹을걸요?”
“이제 이야기 좀 해 봐. 선우가 표절이라는 소리는 어디서 들었어?”
도란희는 자신이 들은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자신에게 들었다고 말하지 말라면서 말이다.
“걱정하지 마. 오빠 입 무겁잖아. 입이 찢어져도 비밀은 지킨다.”
“좋아요. 그게 어떻게 된 거냐면요······.”
방선우의 죽음에 관한 실마리가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