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4화
74. 안무가를 찾아서 2
이동민 실장은 나의 집요한 설득에 결국 오케이 사인을 내렸다.
단 최종 결정 전에 반드시 ‘박선녀의 아이돌 안무 영상’을 보여달라 요청했다.
그래야지 내가 말한 파격적인 조건을 윗선에 설득할 수 있다고.
그 탓에 난 현재 박선녀의 에어로빅 학원 앞에 와 있었다.
에어로빅 회원으로 등록해야 전용 카페에 있는 영상을 내려받을 수가 있으니까.
“하나 둘 셋! 호우! 둘 둘 셋! 호우! 좋아요! 포인트! 포인트! 그렇지! 다 같이! 호우~!”
경쾌한 음악 소리와 함께 박선녀의 목소리가 학원 밖 복도까지 들린다.
그런데 막상 이곳에 오자 정작 내 고민은 계약이 아닌 다른 곳에 있었다.
“이걸······ 입어야 해?”
준비해 온 에어로빅 복장은 형형색색의 쫄바지였다.
“하아. 왜 에어로빅 복장은 다 이런 것밖에 없지?”
한숨을 폭폭 내쉬던 중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오늘은 가입만 하러 왔다고 하고 등록만 하자. 카페에 올려진 영상만 받으면 되잖아?’
위기 상황에서 떠오른 아이디어에 스스로 만족했다.
그때 드디어 수업이 끝났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 호우~!”
“호우~!”
경쾌한 박선녀의 외침이 끝나자 회원들이 우르르 나오며 날 신기한 듯 쳐다본다.
“어머! 이 총각은 뭐야?”
“호호호! 우리 춤추는 거 구경 왔나 보지.”
다들 남자 회원은 오래간만이라며 즐거워한다.
순간 문이 열리며 한 사람이 걸어 나왔다.
“우리 회원님들! 어서 비켜 주셔야 다음 타임 언니들이 들어오지? 안 그래요? 자자. 어서 탈의실로 레츠~ 호우~!”
은빛 빽바지에 형광 티셔츠 그리고 카리스마의 핵심인 분홍색 발광 헤어 밴드.
올해 32살의 박선녀가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외치고 있었다.
“신입이세요?”
“예.”
대답과 동시에 박선녀 원장이 내 팔을 덥석 잡아 이끌었다.
“등록하실 거죠?”
“아. 그 그렇긴 한데.”
“자자. 여기까지 오셨으면 망설이지 말고! 레츠~ 호우~!”
어찌나 힘이 센지 나도 모르게 끌려가고 있었다.
원장실에 들어간 난 입부 신청서를 앞에다 놓고 설명을 들었다.
“한 달하면 5만 원. 석 달하면 오 삼에 30% 디스 카운트 때려서 10만 원. 어때요? 석 달하는 게 돈 버는 건데. 콜?”
박선녀는 입부 신청서에 어서 사인하라며 나를 채근했다.
석 달짜리로.
“저기······ 선생님. 근데요.”
“왜요? 비싸요? 잘 모르시나 본데. 구로에서 이 정도로 싸게 하는 데 없다니까요? 그리고 석 달 선 결제해도 돈 안 떼먹어요. 나 너튜브 하는 거 몰라요? 학원은 취미로 하는 거라니까?”
박선녀가 원장실 벽에 걸어둔 10만 구독자 기념 실버 버튼을 가리켰다.
“저거 보이죠?”
고개를 끄덕이자 박선녀가 다시 입부 신청서를 가리켰다.
“어때요. 이제 믿을 만해요?”
“예. 근데 여기 사인하면 네이브 카페도 가입할 수 있는 거죠? 거기 오프 회원들만 볼 수 있는 영상이 있다던데요?”
잠시 내 얼굴을 살피던 박선녀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아항~. 그게 목적이구나? 하긴 젊은 사람들은 에어로빅보단 아이돌 커버 댄스를 하고 싶어 하죠. 근데 이걸 어쩌나? 그건 석. 달. 회원권을 끊어야 가입시켜 드리는데요? 아 덤으로 커버 댄스 강의는 일주일에 일 회 공짜!”
그렇다면 어쩔 수 없다.
석 달짜리로 긁는 수밖에.
“그 그러면 석 달로 끊을게요. 어디에 사인해요?”
“여기요. 그렇죠. 입금되는 대로 바로 카페 가입할 수 있게 열어드릴게요.”
“지금 바로 입금할게요.”
사인을 마치자 박선녀 안무가 아니 박선녀 원장님이 환하게 웃었다.
“오케이. 우리 회원님! 우리 함께 혼을 불태워 봅쉬다! 레츠~ 호우~!”
내 손을 잡은 박선녀가 흥겹게 외쳤다.
그리고 그날.
내 인생의 첫 에어로빅을 경험했다.
몸이 아프단 핑계를 대었지만 옷이 안 맞는 것 같다는 핑계를 대었지만 도저히 도망칠 수가 없었다.
박선녀가 모든 건 근성으로 헤쳐나갈 수 있다면서 날 이끌었으니까.
플로어에 음악이 펼쳐지는 순간 9시 반의 여자 회원들 30명과 함께 목청이 터져라 외쳐야 했다.
“호우~~!!”
* * *
“삼촌?”
“응······”
“왜 바닥에 누워 있어요?”
“힘들어서.”
“왜 힘들어요?”
“에어로빅이 그렇게 힘든지 몰랐거든.”
대본을 봐주기 위해 유진이네 집에 왔다.
하지만 막상 도착하자 몰려든 근육통 때문에 바닥에 뻗어버린 상태다.
“그러면 내가 안마해 줄게요. 으차!”
미소가 내 곁에서 두 손으로 토닥토닥 내 등을 두드렸다.
통통.
근육통 때문에 아프긴 했지만 미소의 정성을 봐선 입을 꾹 다물고 참았다.
그래도 조금은 시원해지기 시작했다.
“근데 왜 갑자기 웬 에어로빅이에요?”
대본을 들고 있는 유진이가 내 앞으로 음료수를 내밀었다.
차가운 수정과에 동동 뜬 잣 향이 고소하게 풍겨왔다.
꼴깍꼴깍.
차가운 기운이 목구멍을 타고 넘자 조금 살 것 같은 기분이다.
“후우. 생큐. 체리블라썸의 안무가로 모시고 올 분이 에어로빅 선생님이거든.”
“에어로빅 선생님이요?”
“어. 박선녀의 에어로빅이라고 너튜브에 쳐봐.”
유진이가 노트북으로 영상을 틀자 미소가 재밌다며 따라 하기 시작했다.
“호우~!”
그놈의 호우.
나중에 왜 그 구호를 부르는 건지 꼭 물어봐야겠다.
“엄마! 나 봐라? 얍얍! 호우~!”
“우리 미소. 춤 잘 추네?”
그런데 의외다.
처음엔 장난처럼 추는 줄 알았는데 미소가 박선녀를 따라 하는 모습이 제법이다.
난 아무리 해도 팔다리가 꼬이던데 미소는 단 한 번만 보고서도 잘도 따라 한다.
쭉쭉 뻗는 짧은 팔다리가 어찌나 귀여운지 넋을 놓고 보고 말았다.
이대로 크면 아이돌 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1분 동안 춤을 추자 미소의 체력이 떨어졌다.
날 따라 바닥에 누운 미소가 쌕쌕대며 웃기 시작했다.
“헥헥헥. 힘들다. 엄마. 나 어땠어?”
“최고!!”
유진이의 칭찬에 미소가 내 옆에서 누워서 엄지를 들며 외쳤다.
“호~우!”
나 역시 쌍 엄지를 들며 대꾸했다.
“메~시!”
그때였다.
띠링!
네이브 카페 등업이 되었다는 쪽지가 도착했다.
난 힘겹게 몸을 일으켜 정식 가입 인사를 다시금 작성했다.
[닉네임 : 유체이탈로빅]
오늘 가입한 신입회원 정윤호입니다.
에어로빅을 우습게 본 걸 사과드리며 선배님들의 경이로운 체력에 감탄했습니다.
앞으로 많은······
정성스러운 인사말을 남기곤 아이돌 커버업 영상 코너로 들어가 영상을 내려받았다.
* * *
“······잘하네.”
회사로 와서 영상을 보이자 이동민 실장이 감탄한다.
춤 선이 예사롭지 않다며 눈을 떼지 않은 채.
“이 정도 춤꾼이라면 기대가 되네. 그래. 직접 짠 안무는 없고?”
“왜 없겠습니까? 당연히 있죠.”
난 온몸이 부서지는 근육통으로 손을 부들대며 박선녀가 직접 짠 안무 영상을 플레이했다.
이동민 실장의 입에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와 진짜 실력자 맞네. 라인이 다르다. 라인이.”
그녀는 복잡한 댄스를 너무도 쉽게 표현하고 있었다.
춤에 대해 모르는 나 역시 따라 출 수 있다는 생각이 들 만큼.
이동민 실장이 오케이를 했다.
“대박이네. 무조건 잡자!”
“예. 실장님.”
다만 이동민 실장이 다시금 물었다.
“근데······ 윤호야. 진짜로 계약금으로 2천만 원이나 줘야 하는 거지?”
“예. 거기다 덤으로 안무에는 절대 간섭하지 않을 것까지요.”
이동민 실장이 한숨을 내쉰다.
“그렇게 보장해주면 잡을 수 있겠냐?”
“두 가지만 지켜주십시오. 그러면 제가 어떻게든 잡아보겠습니다.”
이동민 실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 조건인데 못 잡으면 안 되지. 그치? 회사에 난리가 날 텐데 말이야.”
이동민 실장의 말이 맞다.
현재 한국 기획사 중에서 박선녀의 제안을 받을 곳은 어디도 없으니까.
그러나 안무를 맡긴다면 체리블라썸이 성공할 거라는 걸 확신할 수 있었다.
미국에서 성공한 박선녀는 한국으로 돌아와 보란 듯 메이저 기획사에서 맡은 안무를 모두 띄우는 데 성공했으니까.
그리고는 그땐 최소 계약금이 2억부터 시작한다.
하지만 이동민 실장은 계약금을 2천만 원을 준다는 게 여전히 꺼림칙한 모양이다.
“실장님. 아이돌한테 포인트 댄스가 얼마나 중요하신지 실장님도 아시잖습니까? 그런데 그 정도 돈도 못 쓰십니까?”
발끈하고 외치자 중얼대던 이동민 실장이 주춤거렸다.
“알지. 아는데······. 그걸 너나 나 말고 다른 사람이 이해하냐는 게 중요하지. 안 그래?”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건 윗사람이 알아서 해야지.
“그거야. 이 실장님이 윗분들을 잘~ 설득하셔야죠.”
순간 이동민 실장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뭐?”
“전 우리 전지전능하신 이동민 실장님이 꼭 윗분들을 설득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나 같은 대리는 절대 꿈도 못 꿀 일이라고 하자 이동민 실장이 장난스레 주먹을 주억였다.
“아우~ 진짜. 말이나 못 하면. 근데 너 진짜. 이번에 체리블라썸 못 뜨면 나랑 같이 사표 쓰자. 알겠냐?”
이동민 실장의 말에 난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렇게 되면 전 가수 2실을 그만두겠습니다.”
“진짜?”
“예. 그리고 배우 2실로 돌아가야죠.”
“헐~. 그럼 나는?”
난 웃으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전 제 앞가림도 바빠서.”
그날 날 이동민 실장에게 잡혀 새우 꺾기를 당해야 했다.
“으아아아악. 시 실장님. 제 허리. 허리!”
그다지 아프진 않았지만 혼을 다한 리액션에 이동민 실장이 기뻐하고 있었다.
자긴 아직 안 죽었다며.
“내가 어떻게든 방법을 생각해 볼게. 그리고 대신에 반드시 설득해서 성사시켜!”
“예! 실장님.”
* * *
굴렁쇠 엔터의 6층 회의실.
강지영 본부장이 주최하는 실장급 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외부 안무가한테 계약금만 2천만 원이요? 이 실장님! 지금 제정신입니까?”
“제정신? 너 지금 말 다 했냐?”
가수 1실장 박한철 실장과 가수 2실의 이동민 실장이 충돌하고 있었다.
가수 2실은 박선녀 에어로빅 측에게 안무비로 2천만 원을 지급하고 전적으로 안무를 맡기기로 했다며 선언했다.
박한철 실장이 씩씩거렸다.
“그 일 때문에 지금 내부 프로덕션 분위기가 엉망입니다. 작곡가도 외부 영입! 안무가도 외부 영입이라뇨! ”
“잘하는 사람을 찾다 보니 그런 거 아냐!”
이동민 실장의 대꾸에 박한철 실장이 되물었다.
“그러면 작사까지 외부에 넘길 겁니까?”
“그래! 솔직히 내부 프로덕션 일하는 거 영 마음에 안 드니까 그렇지.”
이동민 실장은 체리블라썸의 2집 수록곡인 <프리티 프리티>의 후크 파트 가사를 따라 하며 인상을 찌푸렸다.
박한철 실장은 그게 어때서 그러냐고 따졌다.
“어떻긴! 망했잖아!”
“그거야 체리블라썸이 제대로 소화를 못 해서 그렇죠. 우리 골든로드 애들이 그 곡 받았으면 바로 1위 찍었습니다. ”
“야? 장난해? 그 곡으로 1위를? 인마! 해도 되는 말이 있고 안 되는 말이 있어!”
박한철 실장은 도저히 말이 안 통한다며 강지영 본부장을 향해 몸을 틀었다.
“본부장님. 아무리 실별로 일을 진행하라고 하셨다지만 이건 아닙니다! 내부 프로덕션 직원들 사기가 얼마나 떨어졌는지 아십니까?”
강지영 본부장은 무표정하게 입을 열었다.
“계속······ 말씀해 보세요.”
“안무가인 성은수가 자존심 상해서 회사 못 다니겠다고 독립하겠다며 난립니다.”
성은수는 골든로드의 성공 이후 주가가 올라간 탓에 여러 회사에서도 탐을 내는 인재였다.
그런 성은수가 나간다고 하자 실장들이 술렁대기 시작했다.
성은수냐 정윤호냐.
다들 본부장이 누구의 편을 들어줄지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박한철 실장은 웅성거리는 소란에 더욱 자신만만하게 외쳤다.
“일단 외부에 안무를 넘기는 것부터 취소시켜 주십시오. 은수가 나가겠다는 걸 말리려면 그 정도는 해야······.”
그때였다.
가만히 듣고만 있던 강지영 본부장이 손을 들어 박한철 실장의 말을 끊었다.
동시에 강지영 본부장의 단호한 말이 터져 나왔다.
“나가라고 하세요.”
“예?”
회의실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회사 생활하기 싫으면 나가라고 하시라고요.”
강지영이 당장 사표를 받으라고 외치자 박한철이 한발 물러섰다.
“아 아니 그러니까 진짜 나간다는 건 아니고······”
강지영 본부장이 인상을 쓰기 시작했다.
“뭐예요? 지금. 회사 생활이 장난이에요? 애처럼 떼쓰면 제가 다 들어줘야 하나요?”
“아 아니 그런 말이 아니라······.”
박한철 실장의 기세가 꺾이자 강지영 본부장이 더욱 매섭게 몰아붙였다.
“은수 씨가 골든로드만 신경 쓰는 거 모르는 사람이 있어요? 그런 식으로 일을 하니까 가수 2실이 딴 사람을 찾는 거 아녜요?”
“아 아니 누가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그래요? 오늘도 체리블라썸 레슨 시간에 골든로드와 함께 찍은 사진이 스타그램에 실시간으로 올라오고 있는 거 모르셨어요?”
강지영 본부장이 성은수의 스타그램을 회의실 스크린에 띄웠다.
1시간 전.
체리블라썸의 레슨 시간에 성은수와 골든로드 멤버 장은영이 회사 앞에서 커피를 마시는 사진이 올라와 있었다.
강지영 본부장이 마지막 경고를 날렸다.
그러자 다들 꿀먹은 벙어리가 되어버렸다.
강지영 본부장은 안색을 굳힌 채 이동민 실장에게 연이어 지시를 내렸다.
“이 실장님!”
“예.”
“계약 진행하세요!”
이동민 실장이 고개를 끄덕인다.
테이블 밑으로 승리의 주먹을 불끈 쥐며.
마지막으로 강지영 본부장이 외쳤다.
“그리고 정 대리한테 불만 있으면 더 나은 실적을 가지고 와서 이야기해요! 괜히 일 잘하는 사람 태클 걸지 마시고요. 알겠어요?”
강지영 본부장의 말에 모두가 할 말을 잃어버렸다.
지금 당장 굴렁쇠 엔터의 직원 중 가장 두각을 드러내는 건 정윤호 대리였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