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2화
72. 몰카범
덥석!
5m도 가지 못하고 이범준은 내게 덜미를 잡히고야 말았다.
이범준이 빠르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번개’란 별명을 가진 내게서 벗어날 순 없었다.
난 넘어진 이범준의 어깨 뒤쪽을 꾹 누르며 말했다.
“다치기 싫으면 가만히 있으세요. 어깨 나갑니다.”
“아악! 내 내 팔! 당신 뭐야? 이거 안 놔? 고소할 거야!! 끄아아악!”
팔을 조금 더 비틀어 돌리는 순간 이범준이 발버둥을 멈췄다.
“끄으윽. 그 그만! 살려줘······”
하지만 이범준의 비명에 스태프와 기자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정 매니저. 촬영장에서 싸움이라니! 당신 미쳤어요?”
몰려든 스태프가 날 떼어내려 다가왔다.
“양 AD님. 경찰이나 좀 불러 주세요. 이 사람이 몰카범입니다.”
내 말에 다가오던 스태프가 멈춰 섰다.
“뭐? 몰카?”
“지 진짜야?”
“예.”
스태프들이 소란을 피우기 시작했다.
“야! 일단 경찰부터 불러! 경찰!”
이내 현장에 촬영을 왔던 기자들의 플래시가 연신 번쩍이기 시작했다.
그 순간 내 밑에 깔린 이범준이 외쳤다.
“야! 증거 있어? 증거! 내가 몰카 찍었다는 증거 있냐고오!”
이범준이 발악하며 외친 소리에 난 씨익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잠시 후.
삐용삐용!
언제 들어도 익숙하지 않은 촌스러운 경광음과 함께 경찰차가 도착했다.
경찰들은 빠르게 뛰어왔다.
“헉헉. 이제 놓으셔도 됩니다.”
내가 꺾었던 팔을 놓자 벌떡 일어난 이범준이 씩씩대며 손가락질을 해댔다.
“너 너 이 자식아! 넌 무조건 콩밥 먹을 줄 알아! 어디서 억울한 사람을 잡고 그래? 경찰 양반! 이놈이 글쎄······”
이야기를 듣던 경찰이 인상을 찌푸렸다.
“이 사람 말이 사실입니까? 증거가 하나 없다는 거?”
“잠시만요.”
난 이범준이 폰을 던진 컨테이너로 향했다.
“야. 너 너······”
뒤편에서 이범준의 목소리가 들린다.
하지만 뒤도 돌아보지 않고 컨테이너 아래의 틈으로 몸을 숙였다.
컨테이너 끝자락에 이범준이 던진 폰이 보였다.
도랑 옆 10cm 정도 떨어진 곳에 아슬아슬하게 걸려서.
휘청!
태연하게 멋있는 척 증거를 내밀려고 했지만 도저히 손이 떨려서 못 하겠다.
‘······하마터면 도랑에 빠질 뻔했네. 와······.’
난 옷을 툭툭 털고 일어나 경찰에게 말했다.
“이 밑에 이분이 도촬 할 때 사용한 폰이 있습니다. 그런데 턱에 아슬아슬하게 걸려서 도랑에 빠질 수도 있으니까 조심해 주십시오.”
“그 그거 내 거 아냐!”
웃기고 있네.
“폰에 지문 남아 있을 거니 확인 한번 해 보세요.”
이범준의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장갑을 끼고 범죄를 저지르고서나 거짓말을 하던가.
경찰이 알겠다며 경찰차 뒤 트렁크에서 집게 같은 도구를 꺼냈다.
‘오. 역시 선진 경찰.’
컨테이너 아래로 넣어 손잡이를 쥐어 꺼낸다.
폰이 나오자 비닐장갑을 낀 경찰이 투명한 봉투에 넣기 전 이리저리 돌려본다.
경찰의 얼굴에 웃음이 맺혔다.
“지문이 선명히 남아 있네. 일단 김 순경. 현행범으로 연행해.”
“이 이거 놔! 아아악! 팔팔팔!”
폰이 유광의 검은 백 패널이다 보니 지문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그리고 난 경찰을 따라 함께 경찰서로 향했다.
이범준이 범행을 하는 걸 본 증인이라고는 나밖에 없었으니까.
* * *
굴렁쇠 엔터테인먼트.
배우 3실을 이끄는 김동수 실장은 새로 영입한 탑스타 차태훈과의 미팅 중에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차 배우. 잠깐만. 전화 좀 받겠습니다.”
“쯧! 어지간하면 다음에 받지.”
“그게 미룰 수 없는 통화라서 그렇습니다. 하하.”
고작 한 살 차이지만 오만한 차태훈은 김동수 실장을 마치 손아랫사람으로 여겼다.
김동수는 탑스타의 비위를 맞추느라 굽신대며 회의실 밖으로 나왔다.
김동수는 소리를 죽여 전화를 받았다.
“이범준. 왜 전화했어? 새로운 거라도 건졌냐?”
김동수와 이범준은 오랫동안 거래하던 사이다.
이범준이 몰래 찍은 사진으로 연예인을 협박하면 김동수가 나서서 원본을 지우게 했다면서 뒤처리해줬다.
하지만 실상 김동수는 어떤 사진도 지우지 않고 보관 중이었다.
언젠가 연예인들의 약점으로 써먹을 생각으로.
이번에는 또 어떤 연예인의 사진을 찍었냐고 물었지만 들려오는 말은 전혀 딴소리다.
-저기 김 실장.
“빨리 말해. 나 지금 바빠.”
-나 잡혔어.
“뭐?”
-여기 남양주 경찰서거든. 혹시 아는 변호사 있으면 좀 보내 줘.
“이 새X야. 너 미쳤어?”
김동수는 자기도 모르게 쌍욕을 내뱉었다.
자신을 빼내 주지 않는다면 어찌 될지 모른다는 협박이란 걸 알아챈 탓이다.
“거기서 나한테 전화를 하면 어떻게 하냐고!”
-그건 미안한데. 곰곰이 생각을 해 보니 날 빼 줄 만한 사람은 당신뿐이더라고.
김동수는 이를 아드득 깨물며 대꾸했다.
“사람······ 보낼 테니까 그때까지 입 꾹 다물고 있어.”
-크크크. 고마워. 변호사 오기 전까지 입 꾹 다물고 있을게.
“너 내 이름 분 거 아니지?”
-그럴 리가 있나. 내 목숨 줄인데.
이범준의 너스레에 김동수가 심호흡하며 화를 억눌렀다.
아직 이 ‘날새’라는 놈은 여러모로 써먹을 수 있는 카드다.
“하여간 넌 나한테 제대로 빚진 거야.”
-꺼내만 주면······ 뭐든 하지.
“앞으로 넌 내 개다.”
-왈왈. 이러면 되냐?
“개소리하지 말고 끊어.”
-흐흐. 충성을 다 하지. 아니 다 하겠습니다.
김동수는 전화를 끊은 뒤 속으로 쌍욕을 퍼부었다.
길게 심호흡을 한 김동수는 곧바로 이 일을 해결할 사람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런 더러운 일에도 나설 사람이 하나 있었으니까.
달칵.
-웬일이에요? 몇 개월 동안 도통 전화도 없더니?
전화기 너머로 젊은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까칠하기는. 부탁이 있어서.”
-우와. 우리 김 실장이 나한테 부탁할 때가 있네?
“비꼬지 말고 진소미. 너 아직 일하는 거 맞지?”
-왜 물어요?
“경찰서에서 도촬범 하나 빼내야 할 거 같아서. 현장에서 잡혔어. 가능해?”
-내가 그 생활 손 털라고 했는데 우리 김 실장님 때문에 손을 못 털겠네.
“웃기지 마. 개가 X을 끊지.”
-어머. 말하는 것 좀 봐. 어찌나 고상하신지. 좋아요. 해요. 해. 근데 금액은 알죠?
“중간 거 한 장?”
-아이~. 최저임금이 얼마나 올랐는데. 그건 2년 전이고. 이젠 두 장이에요.
김동수가 인상을 찌푸렸다.
유명한 법조브로커이자 독거미로 불리는 진소미 말고는 이런 더러운 사건을 맡아줄 실력 있는 변호사를 연결해 줄 사람이 없다.
검사 판사 그리고 경찰까지.
진소미가 법조계에 깔아둔 인맥은 깊고도 광범위했다.
-싫으면 말던가~.
“하아. 알았어. 두 장. 콜”
-나 수표 안 받는 거 알죠?
“알아. 일단 변호사 보내고 오늘 밤에 거기서 만나.”
약속 장소를 잡자 진소미가 알겠다고 답했다.
그때였다.
전화를 끊으려던 김동수는 갑자기 궁금한 게 생겼다.
“그런데 너 왜 한동안 일 안 하고 잠적했어?”
폰 너머에서 한숨이 들려왔다.
-딸 때문에. 정.직.하게 벌어서 살아보려고 했죠. 근데 킥. 안 돼. 도저히 안 돼. 세상이 날 안 도와줘서 그렇게 안 살려고. 없는 것들과 섞여 살아보려니 구차하기도 해서.
“웃기고 있네. 네가 돈 없이 살아갈 수 있을 거 같아? 천하의 진소미가?”
-그러게요. 강남 떠나니까 여엉 동네가 별로야~. 사람들이 천박해 아주. 그래서 이제 원래 놀던 물로 돌아가려고. 돌아가서 크게 놀아야지.
김동수는 듣던 중 반가운 소리라며 웃음을 지었다.
“그럼 앞으로 자주 좀 부탁하자.”
-호호호. 왜요? 뭐 재미난 일 있어요?
김동수가 얼굴 한가득 미소를 머금으며 답했다.
“한동안 좀 바쁘게 움직여야 할 거 같거든. 이놈이고 저놈이고 손 써야 할 곳도 많고.”
-VIP로 모실게요. 김 실장님.
김동수는 그녀를 처음 만났던 과거를 떠올리며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진소미의 VIP 대접은 수년이 지난 지금도 잊지 못할 만큼 각별했으니까.
* * *
법무팀장 곽무혁의 도움을 받아 진술서에 사인을 마치고 나왔다.
이범준이 나를 폭행으로 엮어 넣으려 어거지를 부렸지만 증거가 너무 확실했다.
폰 케이스에 잔뜩 묻은 건 이범준의 지문에다 폰에는 배우들의 탈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으니까.
“우리 정 대리는 참 바빠?”
법무팀장 곽무혁의 핀잔에 얼른 허리를 굽혔다.
“바쁘실 텐데 괜한 수고를 끼쳐드려 면목이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죄송은. 내가 하는 일이 이런 건데. 농담한 거니까 신경 쓰지 마라.”
표정이 어찌나 무뚝뚝한지 농담인지 진담인지 구분이 안 간다.
내 어깨를 툭툭 두드린 곽무혁 팀장이 넌지시 말을 꺼냈다.
“정 대리 아니었으면 주영인이도 곤란했을 거다. 잘했어.”
하필이면 주영인이 그 탈의실 안에 있었을 줄이야.
그 탓에 엉뚱하게도 곽무혁 팀장에게 호감을 산 듯했다.
“아무리 배우 2실과 배우 3실이 사이가 별로라도 이런 일은 도와야지. 어쨌건 뒤는 나한테 맡기고 오늘 회식이나 잘해.”
“수고 많으셨습니다.”
“어이~.”
곽무혁 팀장과의 인사를 마친 뒤 난 유진이를 데리고 다시금 촬영 현장으로 향했다.
짝짝짝짝!
현장에 도착하자 요란한 박수가 울려 퍼졌다.
“정 대리. 아까 멋지던데?”
“이열~. 정대리~.”
“오늘 진짜 수고했어.”
마치 개선장군이라도 된 듯한 열렬한 축하를 받았다.
특히 몰카범을 잡아줘서 고맙다며 여배우들과 여배우를 담당하는 매니저들은 별개로 인사를 해 왔다.
그리고 난 스태프들과 함께 회식 장소를 세팅하는 걸 돕기 시작했다.
세트장인 하늘 돼지갈비가 고깃집 그대로 꾸며져 있기에 촬영 현장이 곧 회식 현장이다.
테이블 세팅은 미술팀이.
불판과 숯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소품팀이 준비했다.
필요한 고기들과 술은 제작사에서 넉넉히 공수해 왔고.
발갛게 달군 숯불에 모락모락 연기가 피어나는 사이 옆 건물의 파란 횟집에서 공수해온 윤기 자르르 흐르는 생선회가 서빙되고 있었다.
순간 강수훈 PD가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그의 목소리가 덜덜 떨리고 있었다.
“수 수민아. 설마 그 회······ 수족관에 있는 거 잡아 온 거 아니지? 수족관에 있는 활어들 진짜 비싼 건데! 아니라고 말해! 어서!”
장수민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답했다.
“인근에서 젤 싼 광어로 사 왔어요. 감.독.님!”
강수훈 PD가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난 또. 활어로 회를 쳐 왔나 했네.”
순간 스태프들이 항의하기 시작했다.
“이야 그걸 또 아끼려고 한다. 와~.”
“그러게? 우린 맨날 광어에 돼지갈비냐. 우리도 도미나······ 거 뭐냐 다금바리. 이런 거 좀 먹읍시다.”
“옳소!”
“수민 씨. 거기 횟감 넣어둔 물탱크에서 돌돔 두 마리만 가지고 와요! 내가 회 하나는 기가 막히게 뜨거든.”
“그럴까요?”
장수민 AD가 몸을 돌린 순간.
강수훈 PD가 장수민 AD의 팔을 붙잡으며 외쳤다.
“야! 수민아. 넌 또 어딜 가? 그리고 내가 이렇게 된 게 전부 다 우리 차 실장님 때문이라니까? 맨날 돈 돈 하시니까 그런 거야!”
“이게 죽을려고.”
차수연 제작 PD가 소주병을 들고 일어났다.
“아 차 실장님. 소주병은 놓고 이야기하시죠. 예? 그 그러니까 말이 그렇단 이야기죠!”
현장 스태프들이 킬킬대고 웃기 시작했다.
잔이 세팅되고 난 후.
강수훈 PD가 자리에서 일어나 소주병에 숟가락을 끼워 만든 마이크를 잡았다.
“자자. 소란이 좀 있었지만 원래 대박 날 드라마는 찍다 보면 이런 일 한 번쯤은 겪는 거 아니겠습니까?”
스태프들이 동의했다.
“옳소!”
“야. 나 땐 더한 일도 많았어! 그런데 이런 해프닝을 겪은 드라마는 꼭 대박 나더라고! 이게 다 히스토리라는 거 아니냐고.”
“범인도 잡혔으니까 잘 된 거지. 이렇게 액운을 털고 가니 얼마나 좋냐?”
스태프들은 드라마 대박의 징조를 웃고 있었다.
강수훈 PD도 연신 고개를 끄덕이더니 갑작스레 날 가리켰다.
“그러면 오늘의 주인공이신 굴렁쇠 엔터의 정윤호 매니저를 모시고 한 말씀 듣겠습니다.”
순간 백 명가량이 되는 스태프와 배우 그리고 매니저들이 일제히 날 쳐다본다.
난 머리를 긁적이며 손사래를 쳤지만 스태프에 의해 밀려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방금 PD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액땜 제대로 했으니 이제 남은 건 시청률 20% 아니 25% 달성하는 일뿐이네요. 대박 났으면 합니다. 파이팅들 하십쇼!”
휘이이익.
조명 팀장의 휘파람 소리와 함께 스태프들의 감사 손뼉 소리가 한데 어울려 퍼졌다.
“정윤호 멋있다~아!”
강수훈 PD가 분위기를 진정시키고 잔을 높게 들었다.
“자 그러면 제가 먼저 선창하겠습니다. <파란 하늘>의 대박을~.”
“위하여~.”
후창을 한 스태프들과 배우들은 그 뒤로 왁자지껄 웃으며 잔을 받기 시작했다.
술이 한 잔 두 잔 돌고 났을 때였다.
“정 대리님.”
고개를 돌린 순간.
볼이 살짝 달아오른 주영인이 내 곁으로 다가왔다.
몰카 사진이 찍혔다는 사건에 충격을 좀 받은 것 같았는데 지금은 괜찮아 보였다.
그런데 날 보는 주영인의 눈빛이 조금은 이상했다.
호기심?
궁금증?
아니면 관심?
순간 내 옆에 앉은 주영인이 대뜸 빈 잔을 내밀었다.
“저······ 술 한 잔 안 주실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