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13화
713. 달라진 위상 1
안채형 PD를 스타 연출자로 만든 방송은 <토크쇼! 연예 세상>이다.
수요일 밤에 방송되는 <토크쇼! 연예 세상>은 평균 시청률 15%에 달하는 인기 프로그램인데 한 주 동안의 연예계 소식을 전하며 그 주의 가장 핫한 배우와 가수를 출연시켰다.
해당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것만으로도 인기 연예인이란 평가가 붙었기에 기획사들은 안채형 PD에 각종 로비를 했다.
안채형 PD는 그 접대를 받으면서도 흔적을 거의 남기지 않았기에 이제껏 이런 생활을 즐길 수가 있었던 거다.
그러나 난 안채형 PD가 남긴 흔적들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테이블 위에 올려진 안채형 PD의 폰에다 대고 말을 꺼냈다.
“한 국장님. 저 정윤호입니다. 저도 여기 있습니다.”
-뭐야? 정 실장도 같이 있었어? 언제부터?
“처음부터요.”
-야! 안 PD! 정 실장도 같이 있는 자리에서 대놓고 퇴출시키라고 한 거야? 너 인마. 실력은 좋은 놈이 인성은 도대체 왜 그 모양이냐?
그러자 안채형 PD는 뭐가 어떻냐며 툴툴거린다.
“우리 국장님 나이 들더니 많이 약해지셨네. 언제부터 회사가 일개 매니저 눈치를 봤다고 그럽니까 예?”
한석영 국장이 한숨을 내쉬고 날 달래려고 한다.
-정 실장. 안 PD 쟤 말은 좀 험해도 마음은······.
한석영 국장은 이곳에서 일어난 일을 모르니 설명이 우선이다.
“한 국장님. 지금 안 PD님이 왜 이러는지는 아십니까?”
-응? 아 그래. 왜 그러는지나 좀 알자. 안 PD가 갑자기 왜 저렇게 막 나가는지 난 아직도 이해가 안 가네.
“방금 TK 엔터 오성연을 불러서 술 시중을 시키려고 하는 걸 제가 막았습니다.”
난 일부러 TK 엔터 천이상 이사와 함께 있는 MBS 최석환 PD는 언급하지 않았다.
싸움에서 가장 중요한 건 적의 수를 최대한 줄이는 것이니까.
그러니 난 지금부터 한 놈만 팬다.
-뭐 뭐라고? 술 시중?
그때 안채형 PD가 발끈한다.
“이 새X가 어디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어!”
뻔뻔스럽게 화를 내지른 그는 이어서 한석영 국장에게도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그런 일은 없었으니까 믿지 마십쇼! 제가 술 시중은 무슨 술 시중을 시켰다고 그럽니까!”
난 안채형 PD의 말을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안 PD님한테 술 시중을 든 여자 연예인들 리스트를 뽑아서 보내 드리면 믿으시겠습니까?”
한석영 국장의 목소리가 착 가라앉는다.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 이 말이지?
“예.”
잠시 고민하던 그가 말한다.
-정 실장. 옛날 일 말고······ 혹시 오늘 일을 증언해줄 사람은 없냐?
순간 난 고개를 돌려 옆을 바라봤다.
득의양양한 안채형 PD를 빼더라도 네 편을 들어줄 사람이 있겠냐는 듯 바라보는 최석환 PD 그리고 혼자 죽으라는 듯 바라보는 천이상 이사 어디서 한번 X돼 보라는 듯 팅팅 부어오른 양손을 부여잡고 바라보는 강희동 본부장까지.
내 편은 없다.
그렇다면 H2 호텔 로비로 돌아가서 이상무 부지배인을 닦달해서 증거를 모으는 수밖에.
아마도 호텔 로비에 있는 CCTV는 강제로 오성연을 끌고 가는 장면이 찍혔을 거고 이 클럽으로 두 사람이 들어오는 것도 찍혀 있을 거다.
또한 내가 내려오면서 스마트워치로 녹음한 내용도 있다.
세 가지를 더하면 내 말을 증명하는 건 충분할 게 분명했다.
“증언은 힘들지만 증거는······.”
그런데 그때였다.
구석에 있던 TK 엔터 1년 차 매니저 최대기가 입을 연다.
“한 국장님. 오늘 일은 제가 증언하겠습니다.”
순간 룸에 있는 모두가 놀랐다.
고작 1년 차 매니저가 자기 모든 것을 걸고 스타 PD에게 맞선 셈이기 때문이다.
그때 한석영 국장이 질문을 던졌다.
-자넨 누군가?
“오성연 씨의 매니저 최대기라고 합니다.”
-오성연의 매니저라고?
“예. 오늘 PD님들이 지하 룸으로 성연이를 부르셨습니다. 만약 오늘 일을 경찰에 신고해야 한다면 제가 아는 모든 걸 털어놓도록 하겠습니다.”
안채형 PD뿐 아니라 TK 엔터의 천이상 이사 역시도 얼굴이 굳는다.
오늘 접대를 하려고 한 사람이 바로 본인이기 때문이다.
그나마 아직 회사 이름은 나오지 않아서 그런지 대화에 끼어들진 않았다.
그렇다고 해도 양 관자놀이에 굵은 혈관이 불룩 튀어나온 채 터지기 일보 직전이다.
그러자 한석영 국장이 다급히 말했다.
-잠깐만. 하~ 스피커폰 끄고 일단 정 실장. 그쪽으로 내가 다시 전화할게.
달칵.
전화가 꺼진다.
순간 흥분한 안채형 PD가 발끈해서 최대기를 보고 낮게 겁박하듯 말한다.
“이 새X가. 너 인마 앞으로 방송가에서 밥 벌어먹기 싫지?”
최대기가 발끈해서 말한다.
“이제 막 성인이 된 여자를 설득해 술을 따르게 해야 버틸 수 있는 곳이라면 저도 일할 생각 없습니다.”
“이 새끼가 진짜! 확 그냥!”
안채형 PD가 흥분해서 맥주병을 든다.
순간 난 으르렁거리는 목소리로 경고했다.
“그 병 휘두르면 PD고 나발이고 확 받아버릴 거니까 얌전히 손 떼십쇼. 예?”
안채형 PD는 술에 취하면 맥주병을 휘두르는 버릇이 있다.
이제껏 그게 큰 문제가 되지 않은 건 팔이나 몸통을 때리거나 미는 선에서 끝났고 상대가 PD랍시고 봐줘서다.
하지만 난 그 꼴을 두고 볼 생각은 없었다.
회귀 전에 그가 휘두른 병에 어깨를 맞았을 때 한동안 큰 자괴감에 빠져 일을 그만둘까 고민했었기 때문이다.
병이 1mm라도 바닥에서 뜨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듯 노려보자 안채형 PD는 결국 맥주병을 들어 올리지 못하고 부들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그때였다.
지잉~
전화가 걸려온다.
[발신자 : 한석영 국장]
난 곧장 한석영 국장의 전화를 받았다.
한석영 국장이 작은 목소리로 말을 한다.
-스피커 폰 아니지?
“예.”
-정 실장. 내 입으로 이런 말 하기는 좀 그렇지만 경찰에 알리는 건 좀 참아주면 안 되냐? 내가 보상은 톡톡히 할게.
혹시나 했지만 역시 팔은 안으로 굽는다.
안채형 PD가 MBS의 간판 예능 PD다 보니 어떻게든 무마하려는 거다.
‘역시나 이렇게 나오는군.’
그러나 현재 한석영 국장이 <토크쇼! 연예 세상>의 제작에 대해서 모르고 있는 한 가지 비밀이 있다.
그건 바로 안채형 PD의 부사수 정민주 AD가 6개월 전부터 실질적인 연출을 맡고 있다는 점이다.
단 기획사에 접대를 받기 위해서라도 캐스팅만큼은 안채형 PD가 직접 하고 있기에. 아직 외부 사람들은 이 사실을 모른다.
정민주 AD의 착해 빠진 성격 탓에 선배가 자신의 공을 가로채도 별다른 항의를 하지 않는 것이 그 이유 중 하나고.
그러니 안채형 PD가 빠져도 시청률은 문제가 없다.
캐스팅 문제?
그건 내가 도와줄 수 있다.
난 더 이상 1년 차 시절의 무지하고 힘없는 매니저가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한 국장님. 고민거리를 단번에 날려드리죠.’
난 그리 생각한 뒤 전화기에 대고 말했다.
“국장님. 혹시 <토크쇼! 연예 세상> 시청률 때문에 그러십니까?”
-그래. 안 PD가 나가면 우리 예능 프로그램 거의 멸망이야. 내가 어떻게든 이번 주 덕배가 <전지적 관찰 시점>에 나가는 건 지켜줄 테니까 사정 좀 봐줘. 내가 안 PD 그 새X는 대안이 생길 때까지만 좀 보류하자. 내가 어떻게든 정리할 테니까······.
“국장님. 정민주 AD가 <토크쇼! 연예 세상>의 연출 맡은 지 한참 됐는데 아직 모르십니까?”
-뭐?
“6개월 정도 됐습니다. 그리고 여기 안 PD님은 캐스팅만 담당하는데 그 캐스팅은 저희 배우들로 대체해 드릴 수 있습니다. 앞으로 2달 아니 3달까지도 커버 가능한데 그 정도면 되지 않겠습니까?”
한석영 국장의 목소리가 밝아진다.
-그으~래?
“예.”
-그렇다 이거지. 알았어. 내가 확인해보고 내일 아침에 제주도로 갈 테니까 얼굴 보고 이야기 좀 해보자고. 경찰에 보내봤자 정 실장이 말한 피해자들도 이 업계에서 일하는 사람들이니 알려져서 좋을 게 없잖아. 일단 우리끼리 상황을 해결해 보자.
한석영 국장이 해결할 의지가 있으니 한발 물러나 줘야겠다.
피해 사례나 증거들은 모을 수 있지만 자칫 경찰에 신고했다가는 최대기까지 연루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알겠습니다. 일단 국장님 오실 때까지는 참겠습니다.”
-고마워 정 실장. 그럼 난 안 PD랑 이야기 좀 할게.
“예.”
한석영 국장이 내게 전화를 끊고 안채형 PD에게 전화를 건다.
안채형 PD는 대뜸 큰소리를 쳐댄다.
“XX. 내가 아니라고 했잖아요! 나보다 정 실장 말을 더 믿는다 이겁니까? 저 진짜 TVM 갑니다? 젠장! 알았습니다. 이 기회에 넘어가서 저격 프로그램부터 만들어야겠네! 아 됐고. 그렇게 아십쇼!”
통화를 하는 안채형 PD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지더니 전화를 일방적으로 끊어버린다.
이후 안채형 PD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날 쳐다본다.
“니들······ 두고 보자.”
안채형 PD가 문을 벌컥 열고 룸 밖으로 나간다.
그러자 최석환 PD도 부리나케 그 뒤를 따라나서 버렸다.
쿠웅.
문이 닫힌 순간 난 룸 안에 있는 천이상 이사에게 고개를 돌렸다.
안채형 PD의 문제는 일단락되었으니 이젠 다음 문제를 해결할 차례였기 때문이다.
“천 이사님. 잠깐 이야기 좀 하시죠.”
천이상 이사가 도끼눈을 하고 묻는다.
“무슨 이야기? 왜? 우리까지 같이 엮으려고?”
“그럴 생각 없습니다.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내가 왜 안채형 PD만 물고 넘어졌는데.
그건 바로 지금 같은 상황에서 협상을 하기 위해서였다.
순간 천이상 이사가 불길함을 감지하고 묻는다.
“무슨 조건?”
“최대기 매니저와 오성연 씨를 저한테 주십시오.”
오늘 일에 TK 엔터를 연루시키지 않고 경찰에 알리지 않는 조건으로 두 사람을 요구했다.
천이상 이사는 기가 막혔는지 어이없다는 웃음을 짓는다.
“그래서 처음부터 내가 이 일에 얽혔다는 걸 말 안 한 거냐?”
“당연하죠. 그게 아니면 제가 왜 괜히 안 PD만 걸고넘어진 거겠습니까?”
천이상 이사가 날 노려본다.
“저 PD들이 내 이름을 팔면 그건 어쩌려고? 그러면 네가 내 이름을 말 안 해도 아무 소용 없잖아.”
“그거야 천 이사님이 알아서 해결하실 문제죠. 설마 그것까지 해드릴까요? 뭐 그러면 두 사람 말고도 한 사람을 더······.”
“됐어 인마! 내가 알아서 하면 돼!”
천이상 이사는 씩씩대며 날 죽일 듯이 쳐다본다.
“하여간 치밀한 새X.”
난 덤덤히 그의 욕을 받았다.
“칭찬 감사합니다.”
천이상 이사는 짜증이 확 치밀어 올랐는지 고개를 돌린다.
“야 최대기.”
최대기가 침을 꼴딱 삼킨다.
“예.”
“너 정 실장 따라갈 거야?”
최대기가 덤덤히 고개를 끄덕인다.
“받아만 주신다면 그럴 생각입니다.”
“하~ 그래. 가라 가. 그리고 너희 둘 언제까지 가는지 똑똑히 지켜본다 내가!”
천이상 이사는 씩씩거리더니 룸의 문을 나서기 전 내게 말한다.
“내일 아침에 계약서 보내주지.”
“예.”
천이상 이사는 여전히 양손이 부어 있는 강희동 본부장을 데리고 룸 밖으로 나갔다.
쿠웅.
문이 닫힌다.
안채형 PD도 날리면서 오성연과 최대기를 TK 엔터에서 탈출시키는 데까지 성공한 터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순간 맞은편에 서 있는 최대기가 눈에 들어온다.
나보다 체구도 작고 운동을 한 것도 아닌 최대기지만 그는 오로지 용기 하나로 자기 배우를 지켜냈다.
회귀 전 1년 차 시절.
내게도 저런 용기가 있었더라면 많은 것이 바뀌었을 거란 생각이 든다.
‘최대기. 너 오늘 좀 멋있었다.’
회귀 전에는 부하 직원이고 불편한 친구였지만 지금은 친구가 되고 싶었다.
“대기 씨. 아니 대기야.”
최대기가 바짝 긴장해서 답한다.
“아 예. 실장님.”
“우리 친구 하자.”
최대기가 잠깐 뜸을 들이다 바짝 긴장해서 답한다.
“실장님의 마음은 감사합니다만 아직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래도 마음속으로는 친구라고 생각하겠습니다.”
이 정도면 융통성 없는 최대기로선 최대한 용기를 낸 대답이다.
그래 그렇게 시작하자.
최대기.
이렇게 해서 내게 또 한 명의 친구이자 동료가 생겼다.
* * *
제주도 <화란전> 해상전 세트장 근처의 허름한 펜션.
안채형 PD와 최석환 PD는 자신들이 잡아둔 방으로 돌아왔다.
방은 보일러가 고장 나서 냉골이었다.
두 사람은 펜션 주인에게 한바탕 화를 쏟아낸 뒤 방으로 돌아왔다.
안채형은 이를 딱딱 떨며 분노를 담아 말했다.
“내가 정윤호 그 자식은 무조건 조진다.”
반면 정윤호가 지적하지 않은 <무한 취업 시대>의 최석환 PD는 소극적인 태도로 물었다.
“야. 어쩌려고?”
“어쩌기는? 내가 아는 기자들 동원해서 묻어야지. 그리고 TK 엔터 쪽한테도 같이 죽기 싫으면 날 도우라고 할 거고.”
오늘의 접대는 TK 엔터 쪽에서 준비한 것이다.
안채형은 절대로 혼자 죽을 생각은 없었다.
반면 최석환은 그런 안채형을 손절하고 싶었다.
예능 PD인 안채형과는 달리 드라마 PD인 자신은 이 업계에서 정윤호가 어떤 평가를 받고 있는지 자세히 알기 때문이다.
“야 아까 정 실장이 증거 가지고 있다고 했잖아. 걔랑 잘못 얽혀서 망한 인간들이 수두룩하니까 그만두자.”
“야 쫄았냐?”
“그래 인마. 내가 아까는 쪽팔려서 말 안 했는데 정윤호 그 자식 요즘 국장급이랑 친구처럼 지낸다는 소문이 있어. 그리고 박찬식 KBC 대표도 그 자식이 날렸다는 소문도 있고.”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고작 일개 매니저가 어떻게 그딴 짓을 해?”
“진짜라도? 그러니까 그냥 눈 딱 감고 합의를······.”
순간 안채형 PD가 눈을 부릅뜨며 말한다.
“최석환. 지금에 와서 너 혼자만 빠지려고? 웃기는 자식. 내가 가자고 할 땐 다 따라와 놓고는 무슨 개소리야. 왜? 정윤호가 넌 봐준대?”
“그런 말이 아니잖아!”
“아니긴 뭐가 아냐? XX. 내가 혼자 죽을 줄 알아? 내가 죽으면 너도······.”
그때였다.
퍽.
최석환이 날린 주먹에 안채형이 얼굴을 부여잡고 차가운 바닥에 쓰러진다.
안채형에게 통증과 수치심이 동시에 폭풍처럼 몰아닥친다.
“쳐 쳤어?”
“그래 씨X! 쳤다! 막말로 대부분의 일은 네가 가자고 해서 따라간 거잖아. 안 간다고 하는 거 접대받기 싫다는 걸 몰래몰래 꼬신 게 너잖아 이 새X야!”
눈이 돌아간 안채형은 방에 있던 소주병을 들고 휘두르기 시작했다.
“그때마다 좋다고 따라온 건 너잖아 이 새X야!”
오늘 하루 낚시로 물고기 한 마리 잡지 못하고 접대받을 계획도 물거품이 되었다.
게다가 정윤호에게 당한 분노가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그 탓에 평소보다 병을 잡은 손에 힘이 더 들어갔다.
그런데······.
퍼억.
안채형의 손에 둔탁한 충격이 느껴지더니 그대로 최석환이 바닥에 쓰러졌다.
안채형이 깜짝 놀라 들고 있는 소주병은 놓쳐 버렸다.
쨍그랑.
소주병이 깨지면서 파편이 안채형의 오른 다리에 박혔다.
“크흑······.”
흐릿했던 정신이 빠르게 돌아온다.
“내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축 늘어진 최석환이 움직이지 않는다.
안채형은 오른쪽 다리에 피를 흘리며 최석환에게 다가갔다.
손을 코에 대어보니 다행히 숨은 쉬고 있었다.
그때였다.
끼익.
“보일러는 빵빵하게 틀었으니까 금방 불 들어올 겁니다. 그리고 따뜻한 차라도 좀 드시······ 뭐 뭐야?”
펜션 주인이 쟁반에 유자차를 담아 오다 그대로 발걸음 멈춘다.
방 안에 벌어진 광경을 목격한 펜션 주인은 떨리는 손으로 전화를 건다.
“여 여보세요? 거기 경찰서죠?”
안채형은 자신의 모든 것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걸 느낄 수가 있었다.
정윤호에게 얽혀서 망한 이들이 많다는 최석환의 말이 이제야 뼈저리게 다가오고 있었다.
* * *
짹짹짹.
H2 호텔 최상층 스위트룸의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좋은 침대와 지저귀는 새 울음소리에 머리끝까지 개운하다.
어젯밤 H2 호텔 박태석 대표에게 부지배인의 일을 알렸더니 그는 지배인을 보내 우리 일행들 모두에게 최상층 스위트룸 업그레이드 서비스를 제공했다.
그리고 별도로 사람을 풀어서 부지배인도 잡았고 내사를 끝낸 뒤 고소하겠다는 약속을 받았다.
제주도 촬영이 끝나는 동안 H2 호텔의 최고급 시설을 무료로 이용하게 된 터라 기분 좋은 콧노래를 부르며 이불에서 빠져나왔다.
그때 갑작스레 전화가 걸려 온다.
[발신자 : 한석영 국장]
오늘 아침 제주도로 내려오기로 한 한석영 국장이다.
전화를 받았더니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정 실장. 오늘 약속한 미팅. 오후로 좀 미루자.
“왜 그러십니까?”
-안채형 PD랑 최석환 PD 둘 다 체포당했어. 그리고 최석환은 어젯밤에 뇌진탕으로 입원해 있고. 쌍방 폭행인데 합의가 불가능할 거 같아. 그 새X들 아주 막장이다.
안채형 PD와 최석환 PD는 친구처럼 보였지만 원래 사이좋던 관계가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서로 끝장을 볼 기세란다.
-아 그리고 두 사람이 접대받으러 돌아다닌 거 맞더라. 회사 차원에서는 두 PD 모두 파면하고 형사랑 민사 걸어버릴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줘.
MBS 차원에서는 두 사람을 탈탈 털겠다고 약속하고 있었다.
이 정도면 충분히 만족스러운 결과였다.
인과응보(因果應報)란 사자성어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예 국장님.”
-그럼 이따가 보자고.
달칵.
“사람이 말이야. 착하게 살아야지~ 그니까~”
모든 일이 끝난 터라 난 콧노래를 부르며 빠르게 샤워를 마쳤다.
그리고 오늘 촬영에 갈 준비를 마친 순간 갑자기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똑똑.
누구지 하고 나가 보자 문 앞에 호텔 총괄 지배인이 서 있다.
“아 지배인님. 안녕하세요.”
총괄 지배인이 씨익 웃으며 내게 말한다.
“저희 대표님과 사모님께서 정 실장님을 뵙기 위해 직접 제주도까지 내려오셨습니다. 꼭 좀 가주셨으면 합니다.”
어젯밤의 일은 통화로 잘 이야기를 마무리 지었는데 H2 호텔 대표 부부가 이른 아침에 제주도까지 직접 찾아왔단다.
그런데 두 사람이 예상치 못한 선물도 함께 가지고 내려와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