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1화
71. 현장에서 3
HK 의류의 전무실.
네모반듯하게 깎은 짧은 머리와 굵고 짧은 근육질의 몸.
누가 보면 폭력을 업으로 사는 사람이라고 착각할 만큼 험악한 인상의 한 남자가 값비싼 오크 원목 테이블에 다리를 걸치고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재계 12위의 대기업 HK 그룹의 4남 홍성범은 담배를 끄곤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굴렁쇠에서 2억을 거절했다고?”
바싹 얼은 비서실장 김승문이 고개를 조심스레 숙였다.
원래 구왕수 대표의 비서실장인 그는 몇 개월 전 낙하산으로 내려온 HK 그룹의 4남인 홍성범 전무로 라인을 갈아탄 상태였다.
“예. 전무님.”
“반반하게 생겨서 그런지 콧대가 높네. 이번엔 3억 불러 봐.”
홍성범의 지시에 김승문의 표정이 굳었다.
“저 저기 전무님. 그게 그러니까······.”
“왜?”
“굴렁쇠 측에서 충분히 검토하고서 연락한다고 합니다. 괜히 이쪽에서 조급한 태도를 보이면 몸값만 더 올라갈 겁니다.”
김승문의 지적은 타당했지만 홍성범은 코웃음을 칠 뿐이었다.
“야. 김 실장. 내가 너한테 비싼 월급을 왜 주는 줄 알아?”
올해 30살인 재벌 4세 홍성범은 멋대로 살아온 탓에 거절에 익숙하지 않았다.
거기다 자신보다 15살이나 많은 김승문을 향해 반말을 찍찍 뱉는 태도는 또 어떤가.
“죄 죄송합니다. 전무님.”
“죄송하면 지금 당장 굴렁쇠에 연락해. 무슨 수를 쓰든지 간에 정유진이 데리고 오라고! 아니면 구왕수가 은퇴할 때 당신도 같이 모가지야. 알겠어?”
홍성범이 거침없이 구왕수 대표의 이름을 불러댔다.
그때였다.
김승문의 품에 있는 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발신자 : 굴렁쇠 이기철 이사]
“감히 내 집무실에 들어오면서 폰을 켜놓고 들어와?”
홍성범이 짜증이 가득한 표정으로 결재 철을 손에 들었다.
김승문은 두 팔을 휘저으며 다급히 외쳤다.
“진정하십시오. 전무님. 굴렁쇠입니다. 굴렁쇠.”
“그래?”
홍승범이 결재 철을 테이블에 놓았다.
“스피커 폰으로 틀어봐. 뭐라 하는지나 들어보자고.”
“예. 예.”
안도의 한숨을 쉰 김승문이 이기철 이사의 전화를 받았다.
-허허. 격조했습니다. 김 비서님.
“예. 이 이사님.”
잠깐의 인사 뒤 김승문이 말했다.
“정유진 씨 광고 모델료가 부족하다면 금액을 올릴 의향이 있습니다. 다시 한번 고려해 주십시오.”
전화를 듣던 홍성범이 손을 위로 까닥였다.
금액을 올려 부르라는 재촉이었다.
“2억이 아니라 3억까지는 가능한데 어떠십니까?”
이기철은 곤란한 듯 말을 이었다.
-하하하. 관심은 대단히 감사드립니다만 정유진 쪽은 도통 마음에 내키지 않는 듯합니다. 것보다 주영인은 어떠십니까? 파란 하늘의 주연에다가 HK 의류의 고급스러운 이미지와 딱 어울리는 게······
이기철 이사가 말을 주절대자 듣고 있던 홍성범이 화를 참지 못하고 쌍욕을 퍼부었다.
“야! 내가 정유진 데리고 오랬지 언제 그딴 X 필요하댔어!”
김승문이 화들짝 놀라 폰을 집어 들었다.
아무리 재벌 4세라도 다른 회사의 임원에게 막말을 할 줄은 몰랐으니까.
스피커폰을 끄려 했지만 이기철 이사의 말이 더 빨랐다.
-뭐 뭐라고? 당신 누구요?
“나? 홍성범 전무다! 이 XX야! 내가 주영인 데리고 오려고 전화 받은 줄 알아? 당장 정유진 보내!”
-호 홍성범 전무님?
김승문은 안 되겠다 싶어 스피커 폰을 꺼버렸다.
“저 전무님. 제가 다시 잘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씩씩대는 홍성범이 의자에 앉으며 외쳤다.
“너 저 인간한테 딴소리 듣고 올 거면 아예 내 얼굴 볼 필요도 없어. 그냥 꺼져. 네 자리 탐낼 놈들은 한 트럭이니까.”
김승문은 굽신대며 전무실을 나선 뒤 이기철 이사에게 전화를 걸어 한참을 달래야 했다.
오랜 전화 통화 끝에 김승문은 이기철에게 한 가지 약속을 받았다.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정유진을 HK 의류의 광고 모델이 되게 손을 써 보겠다고.
대신 김승문은 ‘리베이트’를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전화를 끊은 김승문은 자괴감에 한숨을 내쉬었다.
한국 최고 명문대인 한국대학교 경영학과를 나온 자신이 이젠 여자를 구해다 바치는 채홍사 신세가 되었으니까.
“빌어먹을 다이아몬드 수저 새X가······”
김승문이 할 수 있는 거라곤 옥상에 올라 담배를 피우며 세상을 욕하는 수밖엔 없었다.
“참아야지. 우리 딸들 시집 보낼 때까지만.”
집에서 자신만 바라보는 가족들을 위해 다시금 사무실로 내려갈 수밖에 없었다.
* * *
[<밤하늘의 달빛내림>의 김성운 PD. “원작 팬들을 실망시키지 않을 것!”]
[<밤하늘의 달빛내림>의 각색은 원작자 최성은 작가의 몫.]
[시나리오로 영역을 넓히는 천재작가 최성은 전격 발언. ‘소설? 시나리오? 스토리텔링의 기본은 같다. 재미로 승부를 볼 것.’]
[MBS 김명학 CP. <밤하늘의 달빛내림>으로 드라마 제국 MBS의 부활을 천명!]
[<밤하늘의 달빛내림>. 올해의 기대작!]
<밤하늘의 달빛내림>은 무려 102만이 열광했었던 탄탄한 까메오 페이지 원작을 드라마로 만든 작품이다.
남자 주인공으로는 10대들 사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끈 얼짱 한수호를 주인공으로 캐스팅했고.
더군다나 소설을 집필한 최성은 작가가 직접 드라마 대본을 집필해 원작 파괴 같은 소리를 원천 차단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작품에는 결정적인 결함이 있다.
최성은 작가는 훌륭한 소설가지만 시나리오 작가로는 엉망이었으니까.
특히 배우들의 연기가 자신의 작품을 죽인다며 폄훼하기가 일 수라 큰 파장을 일으키기도 했었고.
그 결과로 마지막 화의 시청률은 8%대까지 급락해버렸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편성 일정이 바뀌다 보니 원래 작품을 감독했던 박응찬 PD가 아닌 훗날의 명 연출가 김성운 PD가 내정되었으니까.
“역사가 바뀌어도 하필이면 김성운 PD냐······”
그때였다.
위이잉!
현장에서 붉은 확성기를 잡은 강수훈 PD가 의자를 밟고 일어났다.
“아아아. 마이크 테스트. 마이크 테스트.”
강수훈 PD가 현장의 스태프를 둘러보며 외친다.
“오늘 기사들 보셨습니까?”
강수훈 PD의 말에 스태프들이 웃음을 지었다.
“MBS가 우리한테 쫄아서 그런지 기사를 엄청 써냈던데요?”
“아무리 원작이 백만이라도 드라마 판은 다른데 너무 우습게 보는 거 아닙니까?”
“김성운 PD는 얼마 전까지 조연출을 하다가 이제 막 PD 딱지 뗀 양반 아닙니까?”
“초짜 작가와 초짜 연출가네요. 그런 상대와 붙어서 지면 진짜 쪽팔리죠.”
미래를 알고 있는 나와는 달리 <파란 하늘>의 제작 스태프들은 자신만만했다.
김솔잎 작가가 혼신의 힘을 다해 쓴 대본에 현장의 배우들도 열연을 펼치니까.
그 탓에 이 현장에서 앞으로의 사태를 걱정하는 건 나 혼자뿐이다.
강수훈 PD가 환한 얼굴을 지었다.
“다들 제 생각과 같군요.”
아니요.
전 아닌데요?
하지만 여기서 분위기를 흐릴 순 없었다.
강수훈 PD가 고개를 연신 끄덕인다.
“좋습니다. 이 분위기. 그런 의미로 오늘 촬영 끝나면 하늘 돼지갈비에서 회식 있습니다. 출연진과 스태프 단 한 명도 빠짐없이 참석 바랍니다.”
강수훈 PD의 말에 왁자지껄한 소란이 일어났다.
우린 회식해도 왜 촬영장에서 하는 거냐고.
이러려고 세트장을 여기로 꾸민 거냐고 말이다.
“돈 아껴야 합니다.”
확성기를 타고 나오는 강수훈 PD의 농담에 사람들은 자린고비라 연신 놀려댔다.
그리고 이내 촬영이 시작되었다.
바쁘게 움직이는 배우들 틈에서 난 정신 없이 유진이를 챙기는 데 시간을 보내야 했다.
이사랑 선생님은 오늘도 여전히 유진이와 맞상대를 할 땐 과감히 애드립을 시도했다.
유진이는 잘도 받아치고 있고.
‘잘하고 있네.’
난 유진이의 복장을 챙기기 위해 주차장으로 향했다.
보조 출연자들이 주차장 한편에 옹기종기 모여 커피를 마시며 출연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더벅머리에 초라한 복장을 한 남자 한 명이 주변을 힐끔거리고 있었다.
남자의 얼굴이 아무래도 낯이 익어 보였다.
‘누구더라······ 어디서 본 거 같은데? 아 맞다! 이범준.’
머릿속을 번개처럼 스쳐 지나가는 한 남자의 이름은 이범준.
4년 뒤 연예계 여배우들 수백 명의 몰카 사건을 크게 일으키는 인간이다.
녀석이 잡히고 난 다음 수많은 기획사들이 몰카 사진들이 공개되지 않게 백방으로 애를 써야 했을 정도로.
그놈이 지금 현재 이곳.
<파란 하늘>의 촬영 현장에 와 있었다.
순간 난 고개를 돌리고 태연히 걸음을 옮겼다. 혹여 내가 그를 쳐다보는 걸 들키면 안 되니까.
차에서 옷을 꺼내서 대기 의자에 가져다주고 유진이에게 낮게 속닥였다.
“유진아.”
“네?”
“너 오늘은 탈의실에서 옷 갈아입지 마.”
“네? 왜요?”
촬영장 한편에 마련해 놓은 임시 컨테이너가 배우들의 탈의실이다.
“요즘 드라마 촬영 현장에서 몰카범이 돌아다닌다고 하더라고.”
유진이가 화들짝 놀라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그 그러면 다른 배우한테도 말해 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유진이가 습관적으로 다른 이를 생각한다.
“일단은 소문이니까 우리끼리만 조심 좀 하자. 대신 내가 다른 여배우들 몰카 당하는지 잘 감시할게.”
“알았어요.”
난 그때부터 촬영 현장보다 이범준이 움직이는 걸 관찰하기 시작했다.
반드시 놈을 잡아야 했다.
이번이 아니더라도 유진이가 저 녀석의 피해자가 될 수도 있으니까.
* * *
지나가는 행인역을 맡은 보조 출연자 한 명이 식사 도중 아랫배를 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범준 씨. 어딜 가?”
“아 배가 좀 아파서 화장실 좀 가려고.”
“곧 촬영이라던데 촬영 때 늦으면 일당 없는 거 알지?”
“금방 올 거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쇼.”
아침부터 대기하며 이야기를 나눈 터라 서로 안면을 튼 보조 연기자들이다.
그런데 화장실이 급하다던 이범준은 느긋하게 걸어가며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리곤 슬그머니 방향을 돌려 어딘가로 향했다.
이범준은 팬티 속 보조 주머니에 숨겨둔 폰을 꺼내 들었다.
보조 출연자들은 촬영하기 전 모조리 핸드폰을 반납해야 했다.
하지만 이범준은 애당초 두 개의 핸드폰을 가지고 와 하나만 제출했기에 남는 폰이 있었다.
주변을 살핀 이범준은 ‘날새’란 별명답게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컨테이너 뒤쪽으로 빠르게 움직였다.
몸을 낮춰 눈여겨봤던 이동로로 움직인 이범준은 목표한 장소에 도착했다.
예상했던 대로 컨테이너 안에선 여배우들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아 진짜. 꼭 이런 곳에서 옷 갈아입어야 해요?”
“그럼. 아직도 소품팀이 작업하는 건물 안에서 갈아입을 거야? 싫으면 좁은 차 안에서 갈아입던지.”
“그래도요. 페인트 냄새도 나고 진짜 짜증 나!”
“그럼 갈아입든지 말든지!”
“야! 거울은 너 혼자 써?”
숨을 꼴딱 삼킨 이범준은 조용히 동영상 기능을 켰다.
사진 기능은 셔터음 때문에 들킬 수가 있으니까.
‘20초. 딱 20초만 찍으면 돼.’
여배우들이 옷을 벗을 시간을 기다린 이범준은 호흡을 멈추고 컨테이너의 조그마한 창문으로 천천히 폰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20초가량의 촬영이 끝난 순간 이범준이 폰을 내렸다.
그때였다.
“어! 방금 밖에 사람 있지 않았어요?”
“카메라 같던데?”
“꺄아악!”
뾰족한 여배우들의 비명이 들린 순간 이범준은 재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미리 생각해둔 도주 경로를 따라 움직이던 이범준은 가지고 있던 폰을 옆쪽 컨테이너 아래로 집어 던졌다.
‘오케이.’
폰이 컨테이너 아래로 깔끔하게 들어갔다.
이젠 몸수색을 당해도 안심이다.
폰은 나중에 수거하면 되는 거고.
이범준은 20m 정도를 빠르게 도망친 다음 태연하게 안색을 바꾸고 느릿느릿하게 움직였다.
동시에 거친 호흡을 억누르느라 호흡을 길게 가져가기 시작했다.
헉헉대는 호흡은 의심 사기 딱 좋은 행동이니까.
배우들이 비명을 지르자 매니저들이 급히 달려와 탈의실 밖에서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영인아! 무슨 일인데?”
“진희야! 왜? 왜 그래?”
“정미 누나! 왜 그러세요!”
현장에 있던 기자들까지 들이닥치는 소리가 났다.
덕분에 여자 연예인들은 탈의실로 쓰이는 컨테이너의 문을 열고 나오지 못했다.
어떤 일이 있는지 함부로 말했다간 연예 기자들이 온갖 상상력을 발휘해 자극적인 타이틀을 달 테니까.
그 광경을 본 이범준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이렇게 촬영 현장의 파악과 여배우들의 심리 그리고 자신의 빠른 몸놀림으로 30번이 넘는 도촬을 했어도 잡힌 적은 없었다.
‘하여간 다들 병X들이라니까.’
이범준은 고작 체면 때문에 아무것도 못 하는 연예인들과 매니저를 한껏 비웃었다.
그리고 가빠오는 숨을 조금 더 크게 내쉬었다.
그때였다.
한 남자가 자기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뭐 뭐야? 당신?”
호흡이 달려 말이 절로 떨렸다.
그 순간 앞에 있는 정장 남자가 웃으며 입을 열었다.
“참 고생하시네요? 몰카범 씨?”
오싹!
순간 이범준은 본능적으로 위기를 느끼며 몸을 돌렸다.
그리고 ‘날새’라는 별명답게 빠르게 도망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