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09화
709. 1년 차 매니저 1
[에브리데이 V13]
[날짜 : 2021년 3월 5일]
-PM 11:00 [NEW 최덕배]
(연예올타임즈) 신인 배우 C 씨. 드라마 촬영 현장에서 방송국 PD인 C 씨와 A 씨를 폭행.
MBS <전지적 관찰 시점> 이번 주 휴방 결정 통보.
(기타 : 최덕배는 오성연을 구하기 위해서 그랬다고 함. 현재 제주도 경찰서에 구금 중. 신속히 사태 파악하고 담당 형사를 만날 것.)
오늘 밤 11시에 덕배가 방송국 PD들을 폭행한다는 기사가 뜬다고 한다.
그 어떤 때보다 잘나가고 있었기에 속 깊은 덕배가 이런 사고를 친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그러나 맨 아랫부분에 오성연을 구하기 위해 그랬다는 내용이 보인다.
자신의 커리어가 걸려 있고 한울이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는 덕배가 사고를 칠 정도라면 PD들이 그만큼 심각한 짓을 저질렀단 소리였다.
순간 내가 어떤 대처를 해야 할지 답이 나왔다.
덕배가 나서기 전 내가 먼저 나서서 오성연을 구하는 것이다.
이제까지의 경험상 이런 일정은 원인을 없애지 않으면 다시금 같은 일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왜? 무슨 일이라도 있어?”
내가 폰을 보고 심각한 표정을 지었는지 <전지적 관찰 시점>의 박은찬 PD가 고개를 갸웃한다.
난 폰을 안주머니에 넣은 뒤 고개를 저었다.
“아뇨. 아무것도 아닙니다. 일단 오성연 씨 분량 촬영부터 하고 계시면 제가 덕배를 데려오겠습니다.”
“오케바뤼~”
박은찬 PD는 콧노래를 부르며 오성연을 불렀다.
“그러면 성연 씨. 우선 덕배 오기 전에 대본 연습하는 장면부터 찍을 테니까 준비해 줘. 대기 의자에 앉아서 찍으면 될 거 같은데 의자가······.”
“잠시만요.”
오성연은 대본을 들고 대기 의자를 찾느라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조금 전까지 백사장에 앉아 있다 보니 대기 의자가 있을 리 만무하다.
게다가 그녀의 매니저인 최대기도 1년 차 매니저다 보니 이 상황에서 어찌할 바를 몰라 하고 있었다.
나도 예전에는 저랬었지.
막 로드 매니저를 벗어난 1년 차 시절에는 무슨 상황만 벌어져도 머릿속이 하얘지기 마련이었으니까.
난 즉시 10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비품 테이블 아래를 가리켰다.
“저 밑에 예비용 대기 의자가 접혀 있습니다. 가져다 써도 됩니다.”
최대기가 살았다는 표정으로 답한다.
“가 감사합니다. 제가 얼른 가져오겠습니다.”
최대기가 있는 힘을 다해 뛰어가더니 대기 의자를 챙겨 가지고 온다.
아직 모든 것이 서툴지만 열심히 하는 그를 보니 회귀 전의 기억이 또다시 떠오른다.
그는 진심으로 담당 연예인을 위하는 매니저였었다.
하지만 바로 그런 이유로 탑 엔터테인먼트 시절에선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했었다.
그는 자기 연예인들을 24시간 굴리지 않았기에 다른 매니저들이 관리하는 연예인들보다 매출이 낮게 나왔었다.
그래서 탑 엔터테인먼트 시절에는 늘 인사고과 최하급을 받았다.
그런 최대기를 제대로 챙기지 못했던 게 지금도 괜스레 마음에 걸렸다.
‘이번에는 내가 도와줄게. 그땐 미안했다. 대기야.’
지금부터 난 에브리데이 일정을 지우면서 최대기와 오성연 그리고 덕배 모두를 도울 생각이다.
그사이 최대기는 햇빛 좋은 자리에 의자를 세팅하고 시트 부분에 묻어 있는 흙을 손으로 툭툭 턴다.
“성연아 앉아.”
“고마워요 오빠.”
최대기에게 감사를 표한 오성연이 대본 책을 잡고 자리에 앉았다.
그녀는 자세를 잡은 뒤 내게도 감사 인사를 잊지 않았다.
“제 촬영분에 덕배 씨 찬조 출연 결정해 주셔서 진짜 감사해요.”
오성연 역시 신인 스타라고 불리곤 있지만 그녀에 비하면 덕배의 인기는 비교할 정도가 못 된다.
그러니 그녀의 촬영분에 덕배가 찬조 출연을 하게 되면 큰 도움이 되는 게 사실이다.
“고맙긴. 예전에 네가 해준 게 더 고마웠지.”
오성연은 예전에 스타그램에 글을 올려 유진이를 실검 1위로 만들어 줬다.
그때의 보답을 할 때가 온 것이다.
그러자 오성연이 혀를 빼꼼히 내밀며 눈웃음을 짓는다.
“보답받으려고 한 건 아니었는데······.”
“알아. 아니까 나도 챙겨 주고 싶어서 그래.”
그런데 그때 오성연을 도울 방법이 또 하나 떠올랐다.
“박 PD님. 이따가 유진이도 찬조 출연할 수 있을 거 같은데요?”
카메라와 조명 세팅을 보던 박은찬 PD의 눈이 큼지막해진다.
“유진 씨가 출연해 준다고? 진짜야?”
“예. 여기 성연 씨랑 저희 유진이가 친하거든요.”
“아이고~ 이 사람아. 그런 건 진작에 이야기하지! 그러면 기획을 다시 잡아야 하잖아!”
“설마 한 번에 여기서 찍으실 줄은 몰랐죠. 혹시 싫으시다면······.”
“누가 싫대? 좋아서 그래~ 좋아서. 아무튼 고마워 정 실장. 흐흐흐.”
박은찬 PD가 능글맞게 웃으며 옆쪽에 있던 오세라 작가에게 말한다.
“오 작가 얼른 대본 수정 좀 하자. 알았지?”
“벌써 질문 생각나서 적고 있으니까 말 걸지 마세요.”
오세라 작가도 유진이가 출연한다는 게 신이 났는지 이미 백사장에 쪼그리고 앉아 노트북을 두드리고 있었다.
“오케이. 우리 이번에 10%를 뚫어 보자고.”
“예! PD님!”
지난주에 <전지적 관찰 시점>은 나와 덕배의 예고편 출연으로 시청률 8%를 찍은 상황이다.
본방송에서는 그보다 더 높여야 한다며 박은찬 PD는 잔뜩 흥분해 있었다.
하지만 난 웃고 있는 얼굴과 달리 속으로는 고민에 휩싸여 있었다.
오늘 에브리데이의 일정을 지우지 않는다면 이번 주 <전지적 관찰 시점>은 시청률 10%가 아닌 0%가 될 테니까.
그래서 난 촬영 준비가 되는 동안 최대기에게 제안했다.
“잠시 커피 한잔하실래요?”
“아. 예.”
우리 두 사람은 촬영이 이뤄지는 장소에서 멀지 않은 곳에 놓인 비품 테이블로 향했다.
따뜻한 ‘THE 베스트’ 커피를 마시며 최선의 해결책을 찾기 위해서.
* * *
최대기와 함께 비품 테이블이 있는 곳으로 향하며 회귀 전의 그에 대한 기억을 떠올렸다.
성실하고 착했던 최대기는 돈을 최고로 여기는 탑 엔터테인먼트에서 욕을 먹으면서도 올바른 길만 걸었다.
게다가 연예인들에게 무리한 일정은 잡지 않았고 부정한 일도 시키지 않았었다.
돈을 벌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하던 탑 엔터테인먼트에서는 그를 고문관처럼 대했지만 그래도 그는 자신의 스타일을 바꾸지 않았다.
그러니 최대기가 오성연을 관리하는 이상은 절대로 먼저 PD들과의 접대 자리를 갖거나 할 리가 없다.
다만 1년 차니까 지금은 의도치 않은 실수를 할 수는 있었다.
그래서 지금 난 그 실수를 하지 않도록 도울 생각이다.
난 비품 테이블에 놓여 있던 ‘THE 베스트’ 커피를 마시며 슬쩍 오성연의 스케줄을 떠봤다.
“최대기 매니저님. 어차피 앞으로도 우리 유진이랑 오성연 씨랑 같이 촬영해야 하니까 오늘 밤에 촬영 마치고 간단히 야식이나 할까 하는데······ 시간 괜찮으십니까?”
오성연이 덕배와 촬영이 바뀌었으니 8시 이후로 촬영이 될 거다.
그리고 우리 숙소는 차를 타고 2분 거리에 있는 H2 호텔이니까 거기에 가서 가볍게 맛있는 걸 먹으면서 이야기를 하자고 말했다.
그런데 최대기가 미안해한다.
“저도 꼭 그러고 싶은데 이따가 팀장님이 오신다고 해서······ 확답을 못 드리겠습니다. 죄송합니다.”
팀장님이 온다고?
오늘 뜬 일정에 단서가 될 만한 게 나온 것 같다.
“아 괜찮습니다. 근데 팀장님이라면······ 어떤 팀장님이 오시는 겁니까?”
“박복한 팀장님이 오실 겁니다.”
오늘의 범인이 나타났다.
마동팔 본부장의 직속 부하 직원이었던 박복한 팀장은 경력 6년 차의 매니저로서 각종 로비와 접대로 유명한 인간이다.
그런데 마동팔 본부장보다 더 질이 많이 안 좋은 편이다.
마동팔 본부장이 연예인과 합을 맞춰서 자리를 셋업한다면 박복한 팀장은 멋대로 세팅한 자리에 신인 연예인을 내보낸다.
만약 싫다고 거절하면 앞으로 연예계에서 활동하기 싫냐며 협박하고 윽박지르고.
그러니 박복한 팀장이 온다면 오성연의 의사와 상관없이 PD들과의 자리를 만들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면 우선 그 일부터 막아야 했다.
“저기······ 최대기 매니저님.”
“예?”
“저도 똑같이 1년 차를 겪었는데 참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실례가 되지 않으면 한 가지 조언을 좀 해드리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최대기는 남의 회사 1년 차였다.
과거 최대기와의 기억은 나만이 가지고 있는 거라 난 조심스레 제안을 건넸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최대기가 흔쾌히 답한다.
“딴 사람도 아니고 정 실장님 조언이라면 오히려 제가 부탁하고 싶네요.”
매니저 업계에서 내 이름이 소문나다 보니 이런 데서는 참 편하다.
“최근에 성연 씨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으니까 아마도 이곳저곳에서 작품을 꽂아 준다고 하면서 PD들이 술 한잔하자고 할 겁니다. 하지만 지금 이때를 조심해야 합니다. PD들이 신인 여배우들한테 가장 많이 찝쩍대는 시기니까요.”
최대기의 표정이 어두워진다.
회사 내에서도 비슷한 사례를 몇 번은 듣거나 봤을 테니까.
최대기가 ‘THE 베스트’ 병을 손에 꽉 쥐며 말한다.
“명심하겠습니다. 그리고 저······ 믿으실지 모르겠지만 매니저 일 시작하면서 그런 일은 절대 안 하겠다고 다짐한 사람입니다.”
그래. 그렇겠지.
당신 혼자라면.
“그런데 박복한 팀장님이 접대를 밀어붙이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
최대기의 입이 단번에 막힌다.
아무리 자기 의사가 확고해도 직장 생활이라는 건 자기 뜻대로 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난 해결 방법을 알고 있다.
“연예인을 최우선으로 두고 생각하면 언제나 그곳에 답이 있을 겁니다.”
“그 말은······ 팀장님 지시라도 거부하라는 건가요?”
“필요하다면요.”
실제로도 최대기는 회귀 전 부당한 지시는 대부분 거절했었다.
그러나 그건 1년 차의 실수 이후 2년 차부터다.
지금은 아직 모든 게 낯설고 판단이 서지 않을 때니 도와줘야 했다.
어쨌건 최대기가 고심을 하기 시작한다.
순간 난 명함을 내밀며 말했다.
“혼자서 도저히 해결을 못 하겠다 싶으면 바로 연락해 주십시오. 같은 회사는 아니지만 동종 업계 동료로서 언제든 돕겠습니다.”
최대기도 자기 명함을 꺼내서 명함 교환을 마쳤다.
“정 실장님이 연예인들을 얼마나 아끼시는지 익히 들었습니다. 제 롤모델이시니 많은 해결책을 갖고 있으시겠죠. 말씀대로 필요하게 되면 괜한 자존심 세우지 않고 바로 도움을 청하도록 하겠습니다.”
“예.”
폰을 안주머니에 넣으며 슬쩍 확인했지만 아직 일정은 사라지지 않았다.
조금은 아쉬웠지만 그래도 일단 그와의 연결 고리는 만들어 둔 게 다행이다 싶었다.
“아 그리고 우리 나이가 동갑인데······ 앞으로 서로 말 편하게 할까요?”
최대기가 머리를 긁적인다.
“아직 제가 그러기엔 급 차이가 너무 나는 거 같습니다. 하하하.”
난 괜찮은데 최대기가 당황해하고 있었다.
그래 그건 천천히 하자.
일단은 오늘 이 일부터 막고.
그러는 사이 오성연의 오늘 촬영이 시작되고 있었다.
* * *
오성연의 <전지적 관찰 시점>에 덕배와 유진이까지 불러서 찬조 출연을 한 덕에 촬영은 너무도 순조롭게 이어졌다.
이후 덕배 역시 이번 주 <전지적 관찰 시점>의 추가 촬영을 마쳤다.
박은찬 PD는 10%는 따 놓았다면서 편집을 위해 먼저 공항으로 향했다.
그리고 이후 오성연은 8시부터 예정된 <화란전>의 촬영을 시작했다.
그러다 8시 30분이 되었을 때 잠깐 세트장에서 내려온 최대기가 내게 말한다.
“정 실장님 저희 박 팀장님이 지금 이곳으로 오신답니다.”
“그렇습니까?”
그래 박복한 팀장이 오면 막으면 되지.
그때였다.
최대기가 말을 다 하기도 전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야이~ 새X! 누가 다른 회사 사람이랑 이야기하래?”
박복한 팀장이 나타나서 큰소리를 친다.
그는 마동팔 본부장의 직속 부하였기에 유독 날 싫어했다.
그래서인지 나와 어울리는 것만으로도 최대기를 몰아세우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박복한 팀장의 뒤로 낚싯대를 둘러멘 PD 2명이 다가오고 있었다.
또 다른 범인들이 나타났다.
‘오성연을 건드리려는 게 당신들이었어?’
한 명은 MBS 드라마국 최석환 PD.
다른 한 명은 MBS 예능국 안채형 PD였다.
두 사람 모두 낚시꾼처럼 모자를 쓰고 어깨에 낚싯대를 메고 있었는데 이들이 바로 에브리데이의 일정에서 경고한 PD들이었다.
유부남인 두 사람은 낚시광으로 알려져 있지만 낚시는 사실 핑계였다.
두 사람은 낚시를 간다며 지방 촬영 장소로 간 다음 기획사의 접대를 받는 쓰레기들이었다.
MBS 드라마나 예능 촬영지는 전국 어디에나 있고 그곳에는 PD에게 로비하려는 기획사 사람들로 넘쳐났으니까.
그런데 단순히 쓰레기들이라면 정리하기 쉬울 테지만 문제는 이 두 사람이 제법 인기가 있는 PD라는 점이다.
최석환 PD는 현재 인기리에 방송 중인 월화 드라마 MBS <무한 취업 시대>의 PD였고 안채형 PD는 수요일 밤에 하는 인기 예능 프로그램 <토크쇼! 연예 세상>의 PD였다.
현재 종편 채널에서는 두 사람 모두 연봉을 지금의 3배로 준다며 스카우트하려 할 정도의 에이스들이었기에 방송국 국장이나 이사들도 함부로 못 대하는 PD들이었다.
그러다 보니 이들을 건드는 건 MBS 간판을 떼려고 덤벼드는 거나 다름없었다.
‘어떻게 처리하지?’
여파를 최소 한도로 하며 처리할 방법을 생각하던 순간 어느새 내 옆으로 다가온 박복한 팀장이 성질을 긁어 왔다.
“그리고 정 실장. 너 인마 자꾸 우리 애들하고 말 섞지 마! 알겠어?”
난 우선 PD들을 방심시키기 위해 인사를 한 뒤 박복한 팀장의 말에 답했다.
“현장에서 협조할 일도 있을 때는요?”
“이 새X가 왜 이렇게 말귀를 못 알아들어? 너한테는 협조받을 일 없으니까 우리 쪽 일에 신경 끄라고.”
박복한 팀장은 내가 고소한 마동팔 본부장의 직속 부하다 보니 별것 아닌데도 격렬하게 반응한다.
그런데 그때 최대기가 눈을 질끈 감고 나섰다.
“팀장님. 조금 전 정 실장님이 도와주셨습니다. 저희 성연이 <전지적 관찰 시점>의 촬영분에 덕배 씨랑 유진 씨도 찬조 출연하도록 손 써 주셨고요. 성연이한테 도움을 주시고 계시는데 그렇게까지······.”
그 순간 박복한 팀장이 고개를 홱 하고 돌리더니 어이없는 짓을 해버린다.
빡!
박복한 팀장이 최대기의 정강이를 걷어차 버렸다.
“윽!”
최대기가 정강이를 부여잡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린다.
“어디 1년 차 새X가 선배가 말하는 데 껴들어! 너 돌았냐? 어?”
그놈의 1년 차.
제대로 된 매니저로 크기 위해 회사에서 가장 중요하게 알려 줘야 할 시기인데도 선배라는 인간이 윽박만 질러대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도 두 PD는 강 건너 불구경만 하고 있다.
하긴 똑같은 놈들이지.
덕분에 난 아무 거리낌 없이 이들을 정리할 마음을 먹을 수가 있었다.
그렇다면 일단 이 박복한 팀장부터 서울로 반송해야겠다.
덕배를 지켜내고 오성연과 최대기를 지키기 위해서.